신약강해/마태복음강해

(마태복음9:13) 복음사역의 페러다임

이요나 2007. 10. 8. 10:36

(마태복음9:13) 복음사역의 페러다임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8장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세와 이적을 이끌어 내는 믿음의 실체와 대하여 살펴 보았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주 앞에 나온 사람들의 모든 질병을 고치시고 그들 속에 역사하는 귀신들을 쫓아 내셨다. 마태는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17) 증거하였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말씀은 8장의 연장선으로서 역시 예수님의 치유에 관한 사역에 관한 내용이다. 또한 이 말씀은 10장에서 이 땅의 복음의 추숫군인 제자사역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9장은 복음사역을 맡은 제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의식전환의 필요성에 관한 메시지이다.

 

I. 의식의 패러다임(1-17)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5)

 

A.         죄사함의 관점(1-8)

9장은 ‘본 동네’로부터 전개된다. 여기서 ‘본 동네’란 예수 그리스도의 제2고향이 된 가버나움을 말한다. 가버나움은 동네라고 하기보다는 도시라는 말이 걸맞다. 이곳은 갈릴리에서 가장 발달된 곳으로서 회당이 있었으며 그 근처에 베드로의 집이 있었다. 또한 백부장이 주거한 것으로 보아 군사적 요충지였고 마태가 일하던 세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도시의 규모가 상당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이곳에 살면서 많은 이적들을 일으켰고 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부터 교리적 공격을 받았다. 훗날 주님은 이 도시를 향하여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마11:23) 저주하셨다.

 

오늘 9장에서 언급된 중풍병자의 죄사함에 대하여는 마가복음 2장에서 더욱 상세히 기록되었다. 마태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 기록하였다. 주께서 ‘안심하라’(KJV-기운내라) 하신 말씀을 보아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많은 근심을 하였는가 싶다. 이 말을 들은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 말은 ‘이 사람이 신성모독을 하는구나’ 라는 뜻이다.

 

서기관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물으셨다. 이것은 매우 의아한 질문이시다. 침상 채 실려온 중풍병자나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일어나라’는 말씀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병자에게 있어 소망은 말할 것도 없이 질병의 치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중풍병자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을 물으신 것이다. 엄격히 말하여 주께서 말씀하신 ‘죄사함’이란 종교적 관점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질병의 치료는 의학적 관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주님은 중풍병의 원인을 죄로 규정하신 것이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생길 수 있는 질병으로 본 것이다. 오늘날도 질병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은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성경의 충격적인 고발은 인간의 질병과 귀신의 역사를 죄의 결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의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물론 성경은 의학이나 과학을 무시하지도 파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 안에 존재한 모든 질서와 권위의 선봉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을 증거한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교적 중심에 선 서기관들의 관점을 지적하셨다. 즉 그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현실적으로 처리하려 한 것에 비하여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요소들을 지적하셨다.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네 죄사함을 받았다” 하신 것에 대하여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기적을 일으켜 고치는 것이라면 봐주겠는데 감히 사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소망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셨다. 그는 중풍병에서 놓임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다”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그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또한 자신이 죄인이며 예수께서 모든 죄를 사하실 권세를 가진 분이심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질병과 귀신들에게 고통받는 인간은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주 앞에 자신을 내려 놓고 죄사함을 받는 일이다. 이것이 주의 은혜를 입는 첫 단추인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에 대하여 의심하는 서기관들에게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를 향하여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수천년 동안 인간을 지배해 오던 죄의 문제의 종결할 권세가 있음을 알리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하신 것이다.

 

아담이래 인간은 본인이 원하든지 원치 않던지 숙명적으로 죄 가운데 태어나 죄를 범하고 살다가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하여 인간의 죄의 문제를 판단할 권세를 가지신 것이다. 이로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죄인 됨을 인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2:38) 외친 것이다.

 

B.         인간 평등의 관점(9-11)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두번째 단락에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내용이다. 레위라고도 부르는 마태는 바로 마태복음을 저술한 장 본인이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그는 세관의 책임자였다. 주님은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고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주저함 없이 일어나 좇았다. 마태는 망설임 없는 단번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으며 영광의 복음의 사도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기업의 상속자가 된 것이다.

 

그는 그 기쁨을 감당할 수 없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식탁을 베풀었다. 또한 그는 평소 자기와 함께 하던 세리와 죄인들을 함께 초대하였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에게 너희 스승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이들과 식사를 같이 하느냐 시비를 걸었다. 유대인에게 있어 같은 식탁에 마주 앉는다는 의미는 한 몸이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하나의 빵을 같이 뜯어 먹기 때문에 결국 한 몸을 이룬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방인이나 죄인들과는 함께 식탁에 앉지 않았다. 이러한 유대인의 관습은 후일 초대교회에서도 여실히 나타나 안디옥 교회를 방문한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때마침 유대에서 내려 온 지도자들이 들이 닥치자 슬금슬금 자리를 뜨다가 바울에게 책망을 들었다(갈2:11-14).

 

이에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12) 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자신이 죄인이라 하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임을 증거한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자비)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2)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호세아서 6장6절에 기록된 말씀으로 원래 하나님 앞에서의 제사는 죄의 용서를 위한 종교적 의식이었는데 유대인의 오랜 전통의식 속에서 형식화되고 말았다. 이에 하나님은 호세야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께서는 율법적 의무를 다하는 것 보다 자비를 베푸는 것을 기뻐하신다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종교적 의식에 열정을 가진 사울왕에게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하신 말씀을 바탕으로 하신 것이기도 하다.

 

C.         종교의식의 관점(14-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되느니라(17)

 

14절에는 금식에 관한 문제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주께 나아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14)하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것도 종교행위적 이의를 거론한 것이다. 이에 주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 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15) 답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날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관심은 종교적 관점일 때가 많다. 우리 대한민국의 모든 교회가 다 새벽예배를 하는데 왜 갈보리채플은 새벽예배나 철야예배를 하지 않느냐? 왜 예배 시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으며 대표기도 또한 하지 않느냐? 여러 가지로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특별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배우라’ 하신 말씀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신 것이다. 제단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배자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떤 종교적 의식에 치우쳐 하나님의 뜻을 지나칠 때가 있다. 주님은 계시록에서 에베소 교회가 이단교리에 대해 너무 엄격한 나머지 사랑에서 떨어져 나간 것을 책망하셨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나라 교계 실정이기도 하다. 서로 자기들과 맞지 않는다고 하여 이단 정죄하여 물의를 일으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됩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17,18)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종교개혁의 무기치성을 언급하신 것이다. 교회가 시작된 이래 사람들은 내부적으로 교회의 모순점을 개혁하려 애를 써 왔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개혁을 통해서 온전함을 이룬 일은 한번도 없다. 주님은 유대교의 전통을 보완하여 그 속에서 개혁을 시도하지 않으셨다. 그는 새로운 출발을 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사를 볼 때 유대교, 로마 카톨릭, 그리고 루터교와 장로교, 감리교, 오순절교파, 침례교 등을 보라 모두가 기존 세력에서 나와 새로 출발하였다. 갈보리채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금은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하고 있는 양상이다.

 

주님은 그 당시 완전한 형태로 형성되어 있던 유대교의 종교체제들은 더 이상 개혁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신 것을 언급하신 것이며 자체 개혁을 통하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으며 또한 예수께서는 유대교를 개혁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세우시기 위한 오신 것이다.

 

II. 믿음의 패러다임(18-34)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21)

 

A.         회당장의 믿음 – 부활의 신앙

18절에는 회당장 야이로에 관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마태는 그를 직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으며 또 회당장으로서 공회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 앞에 나아와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18) 하고 간청을 하였다. 흥미롭게도 마가복음에는 ‘내 어린 딸이 곧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어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라고 기록되었다. 어쩌면 숨이 넘어 간 것인지도 아직 숨이 붙어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야이로가 믿음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외동 딸을 살리기 위해 이단 괴수로 정죄된 나사렛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다. 우리 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듯이 그에게 있어 딸의 생명보다 더 중한 것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 다만 딸을 살리려는 마지막 소망에서 나온 결단이었을 것이다.

 

B.         혈루병 여인의 믿음 - 믿음의 접촉점

그의 간청을 들어주기 위해 가는 동안 노상에서 혈루병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겉 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마음으로 겉 옷을 만졌다. 이를 아신 예수님은 그녀에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그녀가 그 시로 구원을 받았다. 흥미롭게도 여기서는 치료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고 기록되었다. 치료는 병에서 나음을 말하는 것이지만 구원은 영육간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접촉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구원을 이루는 믿음의 계기인 것이다. 이러한 계기는 대부분 절망에 빠졌을 때 발생하게 된다. 어쩌면 회당장 야이로도 그 딸이 건강하였다면 절대로 예수 앞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주님은 그가 관리하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설교를 하셨으며 또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셨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과정을 본 고로 딸의 죽음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러나 혈루병 앓는 여인은 다른 입장이다. 그당시 혈루병은 저주받은 병으로서 이 병에 걸리면 가족과 격리되어야 했으며 예배에도 참석할 수 없고, 회중들과도 어울릴 수조차 없었다. 이 여인이 앉은 자리에 누가 앉기만 해도 그 사람까지 정결의식을 치뤄야할 정도로 율법으로 엄격히 규정된 저주의 병이었다. 마가복음의 기록에 따르며 이 여인은 12년동안 혈루병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그 병을 고치려고 무던 애를 써왔었다. 이제 가지고 있던 재물도 다 허비해 소망히 끊긴 상태였던 것이다. 그녀는 마침 나사렛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죽기 살기로 달려 나와 사람들 틈을 헤치고 예수의 옷자락을 잡은 것이다. 저주받은 병을 앓는 여인으로 감히 예수 앞에 떳떳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는 이러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물질의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서 이러한 믿음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난치병을 앓고 있고 자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이러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야고보서에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5:14,15) 기록되었다. 이 말씀을 믿고 주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에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바로 구원의 접촉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혈루병 여인을 구원하신 예수님은 바로 회당장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미 그 집에는 죽은 자를 위한 헌화의 장례가 시작되고 있었다. 주님이 오시는 도중에 이미 숨을 거둔 것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소녀의 죽음을 목격하였으므로 비웃었다. 여기서 주께서 잔다고 말한 것은 인간의 생명의 주체가 그 영혼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사건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맞이해야 할 숙명적인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고 있다. 성경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 하였고 또한 부활을 말하여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증거하였다.

 

C.         소경의 믿음과 사람들의 반응 믿음의 실체의 자각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7절에는 두 소경의 구원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두 소경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를 치며 주님을 따라 왔다. 소경들이 예수를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 일도 없었고 또 소경인고로 예수께서 행한 이적들을 목격할 수도 없었다. 다만 그들은 소문을 통하여 예수님의 기이한 행적들을 들었을 뿐이다.

 

다윗의 자손이란 호칭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만이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성경을 통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윗과 그 자손과 그 집과 그 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열상2:33) 하셨고 다시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치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 소생을 네 위에 둘지라(시132:12)하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언약은 오직 주 여호와의 영광을 소망하는 이스라엘 민족 중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마가복음에서 흥미로운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 두로 지경을 지나실 때에 수로보니게 족속의 헬라여인이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며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으나 아무 말씀도 하지 아니하시다가 그 여인의 소리가 끊이지 않자 제자들이 저를 보내소서 청하니 주께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15:24, 26) 하셨다. 이 말을 들은 헬라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답하니 예수께서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막7:29, 마15:28) 하셨다. 이와 같이 다윗의 자손이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메시야 언약인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메시야 언약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 조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하신 다윗의 자손인 것을 모르는데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보지도 않고 소문만으로 예수께서 언약하신 다윗의 자손임을 알고 있다는 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 것이다. 주님은 소경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물으셨다. 이것은 너희가 내가 메시야인 것을 알고 있으며 다윗의 아들이 능히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을 믿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에 그들은 그렇습니다 답하였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D.         사역의 다양성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주님은 어떤 동일한 방법을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혈루병 여인은 스스로 다가가서 주의 겉 옷을 잡으므로 구원을 얻었고 소경들은 주께서 능히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야이로의 딸은 이미 죽어 있었고, 소녀가 살아난 것은 소녀의 믿음 때문은 아니라 아버지의 믿음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주께서 각 사람을 다루시는 방법은 각각 다르다. 이것은 사람의 형편과 상황이 서로 다름과 같이 구원의 방법 또한 다르다. 다만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구원의 믿음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이 현실을 초월한 영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III. 사역의 패러다임(32-38)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더라(35)

 

 그후 주님은 귀신들려 벙어리 된 사람을 고치셨다, 이를 사람들은 기이히 여기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 가운데 본 때가 없다 하였다. 사실 이스라엘 가운데 이런 이적들은 없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 당시 모세를 통한 이적들,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를 통한 이적들을 경험한 백성이다. 그러하여 그들은 말라기를 통하여 언약하신 엘리야가 오심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으며 또한 메시야의 왕국을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적 중심에 서 있는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달랐다. 그들은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블에 의해서 귀신을 쫓으며 병을 고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충동으로 인하여 예수의 친속들까지 동원되어 예수님의 사역을 막으려 하였다(막3:21 참조).

 

계속하여 주님은 모든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 여기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것은 안식일이나 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가르치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성경을 강해하여 가르치는 것과 같다. 또한 천국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은 구원을 위한 복음전파를 말한다. 다시 말하여 천국이 가까웠으니 복음을 믿으라 하신 설교를 말한다. 주께서 행하신 일들로 우리는 복음의 제자들이 먼저 무엇을 중히 여겨야 할 사역의 우선 순위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며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부업으로 전업으로 삼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각 지역으로 선교를 나선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를 보시며 저희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것을 보시고 연민과 고통을 느끼셨다. 이에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37,38) 하셨다. 사실 그 당시 자칭 추수군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또한 세례 요한의 제자들까지 그런 자부심을 갖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믿음의 의를 따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종교적 신념을 따른 것이었다.

 

오늘날도 해마다 수많은 신학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목사가 되어 모름지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하며 복음의 추수군으로 나선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추수하는 주인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주께서 자기를 따르겠다고 헌신한 서기관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으나 나는 내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칠천명을 남겨 두셨듯이 이제도 추수할 일군을 보내실 것이라 믿는다. 영광의 날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나는 오로지 내가 사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많으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