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태복음강해

(마태6:33) 보상받는 그리스도인의 삶

이요나 2007. 9. 17. 12:28

(마태6:33) 보상받는 그리스도인의 삶

 

(마6:33) (오직)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왕국)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오늘 마태복음 6장은 천국 복음을 맡은 자들의 실제적 삶의 지침에 관한 문제이다. 다시 말하여 천국의 복음사역자들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또한 어떻게 살 것인가? 에 해당한다. 여기서 우리에게 전재되는 말씀은 우리 사역에 대한 하늘에 속한 보상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듯이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11:6) 증거하였다.

 

I. 의로운 행동의 대가(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1)

 

6장의 첫 문단은 1절부터 시작되지 않고 2절부터 시작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1절은 2절부터 4절까지의 문단과 서로 다른 주제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서두의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1)의 말씀에서 (righteousness)로 번역된 단어가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구제(alms) 곧 자비를 베푸는 구호물품 으로 번역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제로 서로 가 맞느냐 구제가 맞느냐 하는 번역의 문제로 다툴 수 있게 되는데 A.D.1550년에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과 비잔틴의 대부분 사본은 leemosunen 라고 번역한 것으로 볼 때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이 더 신빙성을 갖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 다른 사본을 따른 NIV 성경이 acts of righteousness의로운 행동으로 번역한 기준이 헬라어에서 의를 지칭하는 dikaiosunen (마5:6, 5:20, 6:33).에 있다고 할 때 그들의 주장도 무시해 버릴 수는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1절에서 발견된 라는 단어가 의를 이루는 유대인의 종교적 행동 곧 구제(2)와    기도(6)와 금식(16)을 다룬 문장에서 계속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이러한 해석은 문장의 총체적 의도를 설명한 것이라 생각된다. 더욱이 헬라어 부사 hotan이 구제, 기도, 금식을 언급한 곳에 모두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의도는 더욱 분명해 진다

 

1절에서 주님은 잘못된 의로운 행동에 대하여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리라(1a)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이 땅에서 행하는 의인들의 의의 행동들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을 보상이 전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은 이미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여한 것을 생각하라(히10:32) 하였고 다시 그러므로 너희가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10:35 기록하였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나 어떤 종교적 행위에 동참하는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어떤 보상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느 종교에는 보상이 있고 어떤 종교는 보상이 없다 한다면 보상이 없는 종교는 바로 망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많은 이단들이 성경의 말씀들을 임의로 변개하여 자기들에게만 허락된 하늘의 보상이 있다고 선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고 있다.

 

주님은 여기서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위선된 행위를 지적하고 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고자 하는 심리가 있으며 그것은 보상심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사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사람들의 이런 심리들을 이용하여 경쟁을 갖게 하고 그 결과에 따른 계급을 교회 안에 두었다.

 

주님은 계시록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계2:6) 하셨다. 여기서 말한 니골라당의 행위란 교회 안의 계급적 신분을 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를 통해 주께서 주신 목사나 집사와 같은 직무상의 직분이 아니라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교회 안에 신분적 계급의 위상을 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연중행사로 성도들에게 직분을 주어 경쟁의식을 고취시키고 그것으로 교회에 충성하고 복종케 하고 있는가? 여기서의 가장 큰 문제는 성도와 하나님 사이에 그 누가 서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로운 상금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데 그 사이에서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다음과 같은 의의 행동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며 또 잘못된 것이며 두려운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삶 가운데 행하는 의는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그 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결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II. 그리스도인의 3대 종교행위(2-18)   보상이 따르는 의로운 행동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 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14,15)

 

유대인에게 있어 하나님을 향한 종교생활은 태어남으로부터 부여된 의무와 책임이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생명의 근본이요 민족적 존재가치를 나타내는 민족적 자존심이다. 그를 위해 이들이 가장 중요시 하는 신앙적 의의 목표가 있었는데 그것은 곧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었다. 이것은 의를 성취하고자 하는 이 땅의 모든 종교들의 행동지침이기도 하다.

 

A. 구제(1-4) 한글성경

주님은 2절에서 그러므로 (너는)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말씀하셨다. 이것은 위선적 종교행위를 지적한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너희(너)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는 말씀이다.

 

이것은 자기 목소리는 높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다시 말하여 스스로 자랑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성경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1:31) 하였고 다시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3:21) 기록하였다.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는 말씀 속에서 저희는 과연 누구를 말씀하신 것인가?  여기서 주님은 이미 너희(너)와 저희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네가 행한 위선적 행동으로 가 바로 저희 가운데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결코 저희는 처음부터 우리에게서 분리된 자는 아닌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3,4) 말씀하셨다. 여기서 구제란 물심양면에서 남을 돕는 일을 뜻한다. 이것은 결코 풍요로운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은 아니다. 주님은 두 두렙돈을 헌금통에 넣은 늙은 과부를 축복하여 저가 모든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칭송하셨다.

 

어떤 교회에서는 헌금을 예배시간에 공개하여 사람들 앞에 헌금을 부축이기도 한다. 또한 교회 예배 프로그램에도 헌금 순서는 설교 후에 둔 것이나 헌금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도 사실은 많은 헌금을 유도하려는 심리적 경향이 내포되어 있다. 이들은 이미 자기 앞에 나팔을 불어 자기 상을 이미 스스로 받아 버린 것이다. 결코 이들에게는 하늘로부터 오는 상금을 받을 일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하늘로 오는 축복에 대하여 시편기자는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시112:9) 노래하였고 또한 고난 중에도 물질을 아끼지 않는 성도들을 향해 바울은 구제의 손길을 말하여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라(고후9:6,10) 축복하였다.

 

나는 가끔 우리 중에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모금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거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금도 그 선한 손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 나는 이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의 오는 상금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B. 기도 (5-15)

주께서 제자(교회)들에게 하늘의 보상을 언급하신 두번째 의로운 행동은 기도에 관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구제가 기도보다 앞서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의 구제가 기도보다 앞서 있는가 생각해 볼 문제다. 사실 기도란 자기가 섬기는 신과의 교제하는 대화의 창구로서 종교적 행위에 속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는 절대로 종교적 행위가 아닌 하나님과의 원활한 관계(Relationship)를 여는 교제의 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5) 하셨다. 여기서도 우리의 시선을 집중케 하는 말씀은 기도에 대한 보상이다. 기도는 분명 그 보상이 있다는 말씀이다. 만약 기도에 대한 보상이 없다면 누가 시간을 허비하며 기도를 하겠는가? 야고보는 너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2,3) 증거하였다. 기도만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왜 기도하지 않는가?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에는 원칙이 있음을 주지하셨다.

 

주님은 먼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위선자들의 기도의 장소를 거론하셨다. 이것은 그들이 기도의 대상인 아버지의 존재에 대하여 자각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만약 누가 자신의 기도를 들어 줄 분이 사람이 아닌 하늘에 계신 신적 존재인 것을 안다면 회당이나 거리에 나가 소리치며 외치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인터넷 창에서 터키의 시나이 산에 올라 아랑곳하지 않고 통성으로 외쳐대는 몰지각한 목사의 일행들에 대한 기사를 읽은 일 있었다.  이것은 시나이 산 뿐이 아니라 삼각산에만 올라가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새벽녁에 교회당에서 목이 터져라 하고 외쳐대는 통성기도를 듣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회당은 오늘날 어디인가? 누가 이것은 유대인의 회당이나 우리의 교회와 관련된 것이라 말한다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상들은 주의 제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주님은 두번째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7) 하셨다. 앞에서 주님은 유대인의 잘못된 기도의 관행 그리고 여기서는 이방인들의 잘못된 기도의 관행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로서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을 얻지 못하고 신적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증거한다.

 

여기서 중언부언이란 헛된 말을 반복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술사들이 계속 같은 주문들을 중언부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 불교의 하나님 일련종 성도들은 매일 손바닥을 마주치며 남묘호랑객교를 외치면 부처가 기도를 들어 준다고 믿는다. 또한 불교 신도들은 천수경이나 반야심경의 뜻도 모르면서 그것을 따라 외우는 것이 부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중에도 자기의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도 알 수 없는 말로 중언부언하며 그것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언이라 말한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말하건데 그런 부류의 기도는 결코 방언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방언기도는 늘 똑 같은 몇 마디로서 중언부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단호하게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 하셨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에게 큰 의심을 갖게 한다.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알고 계시니까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나는 아침이면 내 마음에 있는 고통들을 쏟아 놓기 위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런데 나는 정작 내가 무엇을 기도할지를 몰라 막막한 심정으로 눈물을 토할 때가 많다. 도저히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몰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방언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일부러 방언기도를 하고 싶어도 입이 닫혀져 아무 말도 못하고 가슴을 쥐어 뜯곤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에 주님과 만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여야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받으실까?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주의 기도를 주셨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기도는 유대인들에게 속한 기도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기도는 제자들에게 주신 것으로 사도에게 국한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도들이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오늘날 우리 교회의 기둥으로 우리의 스승이며 교회의 모델이 아닌가? 그러므로 주의 기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기도의 근간이며 모형인 것이다. 여기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은

 

주님은 먼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다 이 말씀은 너희는 이렇게 연습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기도문 자체를 외우라는 뜻이 아니라 이 기도를 공부하여 깨달으라는 말씀이다. 그런데도 어떤 교회들은 주의 기도의 뜻을 알지도 못한 채, 매일 주문처럼 외우고 있다. 그야말로 주기도문으로 중언부언하는 것이다.

 

먼저 우리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의 현주소를 말한 것으로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그의 존재를 깨달아야 할 것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땅에 계신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곧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세대주의 교파에 속한 사람들은 여기서 우리유대인 공동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기도문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 속에서 사도로 부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우리 교회의 초석이다. 곧 교회 공동체를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창조주 되신 하나님으로 그 분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자각해야 한다.  바울은 너희가 양자의 영을 받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나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5b,16) 라고 증거하였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말씀은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이름의 신성되심을 언급하신 이다. 거룩에 해당되는 헬라어 하기오스는 신성된 구별을 뜻한다. 또한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인격자이심을 뜻한다. 따라서 이 세상 천지만물로부터 그의 신성이 구별되기를 기원한 것이다.

 

주님은 계속하여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하셨다. 여기서 나라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의미한다. 물론 그의 나라는 지금 우리 믿음 가운데 세워진 것이지만 믿는 우리가 장차 이 땅에서 맞이할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뜻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께 속한 세가지를 기원케 하셨는데 먼저는 그의 이름의 신성하심과 그의 왕국의 임하심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을 기원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하지 않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알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간구할 것을 말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11,-13a) 하셨다. 이 부분은 우리가 아직 세상에 속해 있는 연약한 유한적 존재임을 자각케 하는 말씀이다.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된 의의 자녀일지라도 아직 우리는 육체에 거하여 식물을 먹어야 하며 육신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우리 서로가 용서해 주며 살아야 할 존재이며 또한 하나님 앞에 짓는 죄를 사함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자각하라는 말씀이다.

 

어떤 교파에서는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죄 없다 하심을 받아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의인 된 우리는 더 이상 죄인처럼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직 그가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믿음의 구원은 죄 사함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을 얻은 것이지 우리가 범죄할 수 없다고 확정한 것이 아니다. 인간된 우리는 그의 나라가 임하기까지 육체의 범죄 속에 노출되어 있고 범죄할 수 밖에 없어 주 앞에 죄사함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말씀은 그의 나라가 임하기까지 이 세상은 악한 사단의 영역에 있으며 우리는 악한 영들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이 너희를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건히 하라(눅22:31)하셨다 그러므로 주께서 간구케 하신 것은 우리가 육체된 것과 죄성이 있는 것과 사단의 유혹 대상인 것을 깨달아 그것을 너희 스스로 해결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라 하신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15:16) 하셨다. 그런데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수 있도록(He Shall give it to you-KJM)이라는 뜻이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어 주실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끝으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라 하셨다. 여기서도 나라는 곧 이 땅에 세워질 하나님의 왕국 곧 그리스도의 왕국이며 권세는 그의 능력과 그의 영화가 영원 속에 존재할 것을 깨우친 것으로 이 부분은 경배에 속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먼저 시작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경배였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경배로 끝나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 속한 기원이 먼저가 되어야 하고 그 다음이 연약한 우리의 문제를 간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14절에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치 아니하시리라 하셨다. 여기서 과실이란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을 말한다. 주께서 이 말씀이 주의 기도 다음에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임하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기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여 서로의 과실을 덮어주며 발을 씻어 주며 섬기고 인내하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주께 형제가 잘못하면 몇번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하오리까 물었다. 이에 주님은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다. 이것은 용서가 수학적인 용서가 되어서는 않된다 하신 것이다. 형제의 용서에 있어서는 그 한계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천국에 관하여 설명하실 때 종들을 회계하던 어떤 임금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너희가 각각 중심에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마18:35)

 

나는 늘 이 부분에서 조급함을 발견한다. 내 과실을 말하건데 이 세상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인데 나와 어떤 관계성 속에서 서운한 일이나 잘못된 일을 발견하면 견디지 못하고 곧바로 공격자세를 취하게 된다. 온전한 인격 수향이 덜 된 자신의 모습 때문에 늘 괴로워한다. 이제 이 말씀을 계기로 주께서 나의 과실에 관대하신 것처럼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의 과실에 관대하는 인내의 마음을 갖기를 다짐해 본다.

 

C. 금식(16-18)

주님은 의의 행동 가운데 주의해야 할 세번째 행위로 금식을 말씀하셨다. 금식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가장 강렬한 종교적 행위에 속한다. 오늘날도 많은 성도들이 금식을 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소망을 아뢴다. 나 역시 젊은 시절에 금식을 자주 했었다. 더욱이 갈보리채플로 부름을 받기 전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례를 입어 21일 금식을 하며 그 해는 금식을 일삼을 생활을 하였다. 내 인생에 그때처럼 순수한 믿음의 열정이 꽃피웠던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주님은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16) 하셨다. 금식은 참으로 쉽지 않은 고행이다. 하나님 앞에 죽기 살기로 생명을 내어 놓고 매달리는 믿음의 결단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적 경건성을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한 금식행위도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미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냐 (사58:4) 기록되었으며 또한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한 금식이 나를 위한 것이냐 (슥7:4-14) 기록한 바 있다.

 

주님은 나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비더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리시라917,18) 하셨다. 이 말씀은 기쁨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금식에 관하여는 너희라 하지 않고 라 지칭한 것이다. 삼인칭 복수가 아니라 이인칭 단수를 사용하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금식을 할 것이 아님을 뜻한다. 나는 일본에서 금식 중에도 심방을 갈 일이 있었다. 다른 때와 같이 정상적인 차림과 표정으로 나섰기 때문에 심방한 집에서 내게 음료를 내어 놓으면 어쩔 수 없이 금식을 풀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금식하고 있는 것을 그에게 알려 오히려 금식을 방해하는 자로 시험을 갖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성경은 우리의 바른 금식을 말하여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6,7) 기록하였다

 

나는 남은 내 인생에 한번은 하나님 앞에 금식할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 견디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금식에 대하여 내가 체험으로 아는 것은 주께서 받으실 금식은 주께서 금식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위해 금식을 할 것인지 모르지만 나의 마지막 금식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을 위해 드려지기를 소망한다.

 

주님은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종교행위에 대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 선 바리새인과 죄인의 모습을 비유하시며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18:9-14) 말씀하셨다 우리는 결코 이런 류의 종교지도자가 되서는 않될 것이다.

 

III. 그리스도인의 관심사(19-33) 믿음과 신뢰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

 

A.         재물에 대한 반응(19-24)

이제 주님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된 자녀들의 물질관에 대하여 언급하여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19) 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말씀은 완전히 중단하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여 그럴 생각을 조금도 갖지 말라는 뜻이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주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재물에 관하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재한 것이다.

 

주님은 이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20) 하셨다. 다시 말하여 우리의 재물에 관한 관심이 하늘에 속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부귀영화에 있다. 이러한 현상은 종말의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심해지는 양상이다. 교회들도 경제원리에 입각한 경영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먼저 발견해야 할 것은 주님은 주의 백성된 우리에게도 재물의 필요성을 알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재물관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고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주께서 땅에 쌓아 둔 보물은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한다 하셨다.

 

최근 청와대 정책실장과 화가 사이의 불륜 속에 오간 정계와 재계를 주름잡으며 오간 수많은 재물들의 의혹들이 메스콤을 장악하고 있다. 이들의 수치스러운 이야기는 여당의 대선 열풍을 뒤덮고 있다. 지금에 있어 수년간 그들이 쌓아 온 인생의 보물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과연 전두환 전 대통령이 쌓아 둔 그 보물들이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국가와 사회발전에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주님은 가기 곡간에 쌓아 둘 곳이 없어 걱정을 하는 미련한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12:15-21) 하셨다. 그러함에도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는 축복이라는 빌미로 사람들의 마음을 재물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 뒤에는 그들의 재물을 도적질하려는 음흉한 종교적 계획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 이 세상 재물의 유혹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주님은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21)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나야 큰 돈이 없으니 땅에 쌓아 둘 일이 없다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재물에 관한 그의 마음인 것이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복권에 매달린다던가 비양심적인 방법을 통해 돈을 모으려 하는 그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의 마음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 유혹된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선악과 나무를 바라 보았을 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할만큼 탐스러움을 감지했다.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물질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바로 유혹의 올무에 사로잡히게 된다.

 

주님은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요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23) 하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 곧 그의 말씀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은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빛이 어두우면 이란 말은 사실 성립이 않되는 말이다. 빛은 결코 어두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빛이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결국 빛이 어두운 것이 된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말씀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빛의 조명을 받지 못하므로 어두움에 빠져 버리고 결국은 우리의 눈은 세상의 보물을 바라 보게 된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성장과 부흥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 속에 있는 빛이 어둡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그들 속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바라보는 것을 따르는 것이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경고하였으며 부자가 되기를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잠23:4) 기록하였다. 

 

B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 압도적 지시(24)

계속하여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의 태도에 따라서 재물이 하나님을 능가할 신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과거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 보면 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율법을 중히 여기는 삶을 살면서도 산당에서 바알신을 섬겼다. 만약 당신의 마음 속에 재물에 관한 갈들이 생긴다면 이미 당신의 마음 속에 맘몬신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로므로 바울은 재물은 우상숭배라 한 것이다.

 

C. 주님의 명령(25-34)   그러므로

주님은 25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하셨다. 오늘날 인간의 삶의 염려는 온통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집중 되고 있다. 인간은 마치 잘 먹고 잘 입기 위해 살아가는 것 같다.

 

물론 인간의 목숨은 먹고 마시고 입어야 한다. 이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느냐는 문제는 이상적이고 또한 영원한 생명에 관한 정체성의 문제가 된다. 만약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주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생명의 빛이 없음으로 먹고 마시고 입는 일에 열중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의 본체는 하늘에 있다. 우리의 본향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 하셨다. 우리의 시각은 좀더 우주적이고 자연적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마음이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염려에 매달리다 보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물들을 키우시는 원리를 노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들의 존재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지켜 나가려는 잘못된 생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반문하셨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키를 키우기 위하여 의학적인 기구를 통하여 키를 늘리려 애를 쓴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비타민이나 음식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반듯이 키를 크게 하지 못한다.

 

계속하여 주님은 또한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28,29)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인간의 삶의 완성도를 언급하신 것이다. 비록 아궁이에 던지어질 들풀일지라도 그것들은 자신의 노력없이 오직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과 섭리에 의해 잎의 시작과 줄기의 성장 그리고 하나님의 뜻인 그 열매를 맺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영광을 입은 자라 할지라도 죄로 부패한 인간은 그 영화를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묻혀 버렸다.

 

그러므로 주님은 주를 믿는 성도들의 삶의 가치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야 할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너희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시며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1,32) 하셨다.

 

문자대로 보려는 근본주의 자들은 여기서 언급하신 이방인은 유대인에 대칭된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이 말씀은믿는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이라 주장하는데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이미 하나님의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차별없다 선언하였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므로 여기서 이방인이란 믿는 않는 세상 사람들을 뜻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의 염려나 삶의 염려로 마음과 시선을 빼앗겨서는 결코 안된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고 스스로 자신의 부귀영화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 모든 천지만물은 모두 주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보다 귀한 존재들이다. 하나님의 왕국의 주역이 될 택함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 하셨다. 여기서 먼저라는 말씀은 우선권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나라 주역인 예수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생활의 최우선적 순위를 언급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설립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왕국은 하나님께서 양자 삼으신 주의 자녀들의 나라요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업으로 물려 받을 나라인 것이다.

 

또한 그의 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말한다. 이것은 그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적 관문으로 오직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그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 율법이나 또 그 어떤 종교적 파워나 인간의 의로운 행동으로도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먼저 그의 의를 구하여야만 한다.

 

끝으로 주님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34) 하셨다. 이 말씀은 세상과 대치되는 삶의 지혜를 말씀하신 것이다. 세상은 분명 너희에게 고통과 근심을 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일 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너희 앞에 내일을 준비하신 하나님께서 열어가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여러 가지 일로 염려와 근심이 많은 마르다에게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눅10:38-42) 하셨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6-7) 하셨고 다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것을 채우시리라 (빌4:19) 증거하였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위대하신 당신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내가 주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간구하옵고 또 주의 의를 사랑하오니 주여 이제 우리로 이 고통의 사슬에서 풀어 널리 다니게 하소서 내가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오니 주여 부디 내게 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