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태복음강해

(마태5:11) "복된 사람"(BLESSED PERSON)

이요나 2007. 8. 27. 14:24
 

(마태5:11,12) "복된 사람"(BLESSED PERSON)


(마 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이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복음서에서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신 천국의 아들들의 핵심사상이다. 특별히 마태는 다른 복음서에 비하여 산상수훈에 많은 비중을 할해 하였는데 산상수훈은 단 한번의 설교가 아니라 예수께서 3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신 설교의 중요핵심을 요약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말은 그 민족의 사상과 배경과 경험을 따라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히브리어가 택한 민족 유대인의 언어였으며 헬라어는 이방민족의 언어라 생각할 때 아람어는 또 다른 민족들의 기원을 생각하게 된다. 마태는 예수께서 아람어로 설교하신 것을 헬라어로 해석하여 기록하였다. 따라서 언어 구조상 번역이 불가한 단어들은 해석적 보정을 추가하기도 했다. 따라서 한글 성경도 이런 부분들을 감안하여 가르치는 자의 성경해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I. 산상수훈 특징(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1,2)


산상수훈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신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물론 1절의 말씀처럼 많은 무리들이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장차 주의 이름으로 그들을 인도할 복음의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을 가르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산상수훈은 제자 명심보감이라 하겠다.


또한 흥미롭게도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에 '앉으셨다'는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선생들은 제자들을 앉아서 가르쳤다. 오늘날에 비하여 커다란 대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특별한 내용을 반포를 할 때 일어서서 선포했다. 예수께서도 명절 끝 날에 성전에서 외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고 선포하신 일이 있다.

킹제임스 성경은 "그분께서 입을 열어 그들을 가르치셨다"(2) 기록되었다. 헬라어에서 '입을 열어 가르치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 하나는 엄숙한 권위의 말씀을 의미하며 또 하나는 마음을 열어 정성을 다 쏟아 진지하게 말할 때 사용되었다.


또한 여기서 '가르치셨다'란 단어는 미완료 시제이다. 헬라어 동사의 특성 중에는 과거시제와 미완료 시제가 있는데 과거시제는 한가지 행동이 끝난 것을 뜻하며 미완료 시제는 반복적이고 계속적으로 습관적 행동을 나타낼 때를 가리키는 시제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단 한 번의 설교문이 아니고 3년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신 핵심설교문인 것을 알 수 있다.


A. 주제 : 의

산상수훈의 주제는 한마디로 말하여 '의'다. 성경에 646번이나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의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 : 20)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제자들의 의는 서기관이나 바래새인들의 의보다 월등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다시 말하여 율법이 의를 성취하지 못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 성취하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나 제자들이 추구한 신앙의 목표는 의를 이루는 것이라는 데 있다.


B. 의와 믿음과의 관계

우리가 '의'를 말할 때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의와 믿음의 관계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믿음의 시초이며 제자도의 첫 걸음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의와 믿음이 같이 언급된 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이다. 바울은 이를 말하여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롬4:18, 창15:5,6) 증거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의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믿는 자들 가운데서 어떻게 실증되느냐에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하였으며 사도 요한도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 알리라"(요일2:29) 증거하였다.


이것은 주를 믿는 성도들의 실용적 부분으로 이를 성취하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그 시작은 있으되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를 말하여 성경은 성도의 의무와 책임에 대하여 "이로 보건데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2:24) 하였고 다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기록하였다. 이것은 의가 이루는 믿음의 목적을 말한 것이다.


C. 팔복의 특성

우리가 산상수훈의 팔복을 말하건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오스'(makarios)는 신적용어로서 여기서 '복'은 그 복 자체를 의미한 것이 아이라 '복된사람'(BLESSED PERSON)을 지칭한다. 따라서 이 복은 심령과 마음, 그리고 관계 가운데 발생하는 것으로 어떤 존재와 환경에 의존하지 않으며 정신적 상태를 포함하지 않는다. 또한 주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인간의 노력이나 세상 것으로 달성할 수 없는 것이지만 능히 삶에 실천하고 적용하라고 가르치며 복의 성취는 그 결과로 받게 되는 은혜인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팔복은 감탄문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여" 와 같이 쓰여진 것이다. 사실 그 내용들을 보면 모두 견디기 힘든 고난의 삶에 속한 것인데도 견딜 수 없는 기쁨의 감탄의 용어로 사용된은 그 복의 내용이 실제적기 때문이다.


주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도다"(요16:22)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마카리오스' 라는 말 속에는 하늘에 속한 행복과 기쁨이 내재되어 있으며 그의 뜻을 다 이룬 후에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전재되어 있다.


  D. 축복의 적용

계시록에서 '복된 사람'(BLESSED PERSON)은 7번 적용된 것은 매우 흥미롭다. 1장 3절에는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드는 자들과 그 곳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기록되었으며14장에서는 대환난의 순교자들을 말하여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14:13) 기록하였다.


또한 인내로서 주의 말씀을 따라 의로운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16:15)증거하였으며 장차 그들이 받을 복에 대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계19:9) 하였고 다시 그들이 누릴 영화를 말하여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는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계20:6) 하였다.


또한 계시록 22장에는 주의 더디 오심을 염려하는 성도들을 권고하여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22:7) 하였고 다시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22:14) 기록되었다. 이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은 모든 성도들이 주의 복에 이르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II. "복있는 자"(BLESSED PERSON)(3-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11)


A. 심령이 가난한(Ptoochos) 자(3절)

예수께서는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3) 하셨다. 킹제임스 성경은 '심령'을 '영'이라 번역하였는데 '심령'은 우리의 마음에 속한 것이라 인식된다고 할 때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의식하게 되므로 영이란 말이 더 확실한 의미를 더해준다. 


헬라어에서 '가난한' 이란 단어는 '프토코스' (Ptoochos)와 페네스(penes)가 있는데 페네스가 일반 노동자들의 상태를 의미한다면 프토코스는 절대 극빈자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여 '영이 가난한 자들'이란 하나님 앞에 절대적 무능의 상태를 말한 것으로 그의 영들이 빈곤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다윗은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6)고 마음을 토하였으며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셨다" (시113:7) 고백하였다. 그가 부르짖은 것은 배고픔이 아니라 하나님의 알지 못하여 견디지 못하는 절대 곤핍함을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부르신 자의 끊임없는 영적 도전과 자기 빈곤의 저항(PRIDE)이며, 하나님과 화합을 소망하는 하나님을 찾는 자들의 애절한 영적 고백이다. 바울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롬8:19,21) 하였고 다시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증거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천국'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땅에서 펼쳐질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실제적 상황을 뜻한다. 흥미로운 것은 유대인의 관점에 볼 때 이스라엘의 왕국이란 개념 속의 천국은 성경적 계시로 볼 때에는 대환난을 지난 후에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교훈을 가르칠 때에는 천국에 들어 가는 입구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천국은 그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주의 초청을 받아드리지 못한 이스라엘은 결국 대환난에서야 천국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유대인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영이 잘못된 지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인 것이다.


후일 주님은 천국 입성을 비유하여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24)하셨다.  흥미롭게도 여기는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로 달리 표현되었는데 앞에는 현재시제이며 뒤에서는 미래시제로 기록되었다. 이와 같이 택한 자들 가운데도 현재 들어 갈 것인가 후에 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의지적 선택의 문제가 놓인 것이다. 놀랍게도 다윗은 이를 미리 보며 "빈약한 자를 권고하시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시41:1) 기록하였다.  


B. 애통하는 자(4) -> 환경의 어려움-> 위로를 받음->선물 (미래시제)

계속하여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말씀하셨다. 여기서 애통이란 말로 사용된 말은 헬라어 중에서 가장 슬픔을 나타내는 단어다. 이 말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의 죽음 앞에 토하는 슬픔과도 같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기 앞에 닫칠 이스라엘의 멸망의 슬픔을 말하여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마2:18) 하였다. 또한 야곱이 그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상실했을 때의 애통함과 같은 상태라고 하겠다.


이 애통함은 체험적 슬픔으로 종말론적 고난과 환난이 수반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미래시제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께서 오시기 전 600여년 전에 장차 이스라엘에게 다가올 두가지 실제적 상황을 예언하여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자를 위로하되"(사61:2, 눅4:18b)라고 증거하였다. 예수께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 이미 그들에게 은혜의 해였으나 믿지 않는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고대하게 되었다(계6:10, 참조)


따라서 애통하는 자란 하나님의 미리아심 가운데 그 위로를 보장 받은 자로서 애통의 실제적 고난과 환난의 상황에 처해야 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어쩜 주님은 자신의 앞에 서서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이 겪어야 할 미래적 상황을 바라보면서 하신 것이 아닐까 싶다.


C. 온유(praus)한 자(5절)

주님은 세번째 복을 말하여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는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란 말씀이 여러 번 기록하여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37:11) 하였으며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민12:3)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모세가 이 땅에서 땅을 기업을 받은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장차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이 말씀의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온유'를 뜻하는 헬라어 '프라오스테스'(praotes)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 하나는 자신의 무지와 연약함과 궁핍함을 아는 자로 배움의 필요성을 자각하여 무지의 죄를 용서 받겠다는 겸손한 마음을 뜻하며 부름을 받은 자가 하나님 앞에서 취할 유일한 태도이다. 온유를 뜻하는 또 다른 헬라어의 의미는 짐승을 질 들이는 용어로서 본능과 충동적 욕망을 억제하고 주인의 뜻에 순종케 하는 자기 통제 훈련을 받는 겸손한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이로서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 지 알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보상은 장차 모세와 함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온유를 한마디로 표현하지만 극단 사이의 중용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여 낭비와 인색의 중간 상태이며 분노와 화해의 중간지점이다. 그러나 온유함이란 분을 내지 않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분을 내지 말아야 하며, 공의를 반하는 것에 대하여는 분노를 나타내야 한다. 온유라는 말을 표현하는데 합당한 말은 '잘 익은 기름', '단단하게 잘 박힌 못'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여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D. 의에 주림 (6절)의 (righteousness)는 성경에 646번 신약에 231번 사용

네번째로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6) 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의가 목마름과 배고픔이 함께 사용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이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야 하듯이 하나님의 의에 굶주리고 있는 자들을 뜻한다.


수년전 나는 중국의 지하교회를 돌아 본 일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고갈되어 그들의 영혼은 마치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이 헤매고 있었다.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담배 자판기처럼 널려 있는 한국과 같은 데서는 불법으로 가득 차 의의 모습을 찾아보기 극히 힘든 상태가 되고 말았다. 속히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에 이를 것이다.


다윗은 갈급한 마음을 토하여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편63:1)고백하였다. 이로서 우리는 의를 이루기 위하여는 먼저 자신의 정체성 의식하여 의의 중요성에 대한 지속적 인식을 통해 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의의 기준과 그 가치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롬4:18, 창15:5,6) 하였다 이것은 의의 출발점을 언급한 것이다.


또한 그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증거하였다. 이것은 의의 목적을 말한 것으로 의의 성취는 믿음의 진보에 있음을 뜻한다. 또한 성경은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이니라"(약2:26) 기록하였으며 사도 요한도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 알리라"(요일2:29) 증거하였다. 이로서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믿음의 삶 가운데 실행되어야 함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E. 긍휼(자비)--> 무한, 체험적 공감.(7절)

주님은 7절에서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말씀하셨다. 여기서 긍휼은 자비를 뜻하며(헬: 엘레몬/ 히:케세드) 히브리어 케세드는 상대의 완전 공감의 입장이 되는 것을 뜻한다. 혹시 여러분들은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들이나 동성애자들의 비참함을 공감한 일이 있는가? 이와 같이 공감이란 어떤 상황을 함께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대제사장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말하여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주의 긍휼하신 은혜를 입은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은 긍휼함을 베푸는 것이다. 이에 성경은 우리에게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2:13).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긍휼함은 동정이 아니다. 많은 교회들이 선한 일을 한다고 외치면서 결국은 자기들의 행한 일들을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의도가 있다. 그러나 주님은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하셨다. 우리가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상황을 공감할 때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함을 보이시며"(시18:25) 라고 하신 주의 은혜가 임할 것이다.   


F. 청결 (카다로스)-->주님과의 관계(8절)

주님은 여섯째 복을 말하여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하셨다. 이 단어는 더러운 옷을 세탁하는 데 사용하기도 하며 또한 알곡을 고르던가 정예군대를 선발하는 군사용어로도 사용된다. 또한 불순물과 혼합되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다윗은 이러한 사람을 말하여 "여호와의 산에 오를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24:3,4) 칭송하였다. 하나님을 볼 것이란 말씀에는 마음에 숨긴 죄와도 관련이 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깨우치는 말씀이다.


G. 화평 (헬:에히레네 /히:살롬)--> "저희는 하나님과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이요"

9절에서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셨다. 여기서 화평이란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전혀 없으며 또한 전쟁이 없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하셨다. 이와 같이 화평은 전쟁을 수반하기도 한다.


히브리어의 살롬은 인간의 최고의 선을 성취하는 데 공헌하는 리더쉽에 속한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화평을 이루는 것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성취해 나가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이락 침공을 놓고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이러한 찬반 논쟁은 인류가 존재하면서부터 있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이스라엘 역사와 교회사를 놓고 사랑과 평화의 근본이신 하나님께서 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느냐 말한다.


그러나 만약 911사태에 미국이 방관하였다면 오늘날 미국은 이슬람교도들의 선교의 터전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 이슬람주의자들은 전 세계 가운데서 염병처럼 퍼져가고 있다. 얼마전 아프카니스탄을 선교한다는 명분으로 떠난 23명의 성도들이 피랍되었지만  사실 중동을 비롯한 이슬람권의 전도는 그곳에 나가 외치는 것보다 우리나라에 들어 온 이슬람권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선이라 하겠다. 또한 타종교를 믿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야 말로 화평케 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림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이요'라는 말이다. 성경에서 아들은 그 아비의 대리자로서 그 아비의 뜻을 행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자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가 하신 일을 하는 자들임을 의미한다.


H. 의에 대한 세상의 반응-박해(10)

끝으로 주님은 8번째 복을 말하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10) 하셨다. 이 말씀은 천국 곧 왕국의 실제적 상속을 언급하신 것이다. 또한 이 상속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주님은 11절에서 "나를 인하여 너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하셨다. 이 말씀 속에는 제자들이 받는 핍박은   예수께서 본이 되어야 함이 전재되어 있다. 다시 말하여 핍박을 받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야 하며, 그 이유는 거짓 것 곧 불법한 자들의 모든 악한 말들로부터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나를 인하여'라는 말씀이다. 사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수호하기 위하여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용납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또한 스테반의 순교도 유대인의 잘못된 교리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항상 내 교훈은 아버지로부터 보고 들은 것이라 하셨으며,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었사옵나이다"(요17:8) 하시며 다시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17:14) 기도하셨다. 이처럼 사단은 거짓된 악한 말들로 진리를 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제자들을 세우심에 대하여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2:21) 증거하였다.


주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12) 하셨다. 우리가 능히 핍박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늘에 속한 기쁨으로 그 영광의 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장차 그들이 누릴 기쁨을 말하여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나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쁘게 하려 함이라" (벧전4:13) 증거하였다.


또한 이에 대한 보상은 기쁨과 즐거움 뿐이 아니다. 주님은 '너희의 상이 크다' 하셨다. 이 상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바울은이 지극한 영광을 말하여 "참으로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2:12)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필히 깨달아야 할 것은 이 왕국의 영광은 실제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그리스도와 수많은 증인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핍박은 그 의미가 상실될 것이다.


예수님은 의로 말미암아 핍박 받은 성경적 증거를 말씀하시며 "너희 전에 있는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12b) 말씀하셨다. 우리는 성경에서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한 수많은 선지자들은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반하는 불의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히브리 기자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1,2a) 증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