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태복음강해

(마태5:48) "결점이 없는 삶의 방법"

이요나 2007. 9. 9. 11:26

(마태5:48) "결점이 없는 삶의 방법"

 

마태(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마태복음 5장 세번째 시간에서 주님은 실제적 현실 생활 속에서 제자 된 우리가 행하여야 할 내용들을 언급하셨다. 주님은 먼저 우리가 들어서 알고 있는 성경의 말씀에 대한 잘못 된 가르침을 지적하고 그 말씀의 바른 뜻을 해석하셨다.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외적 행실보다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삶의 실패의 원인은 부패된 인간의 마음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I.  살인의 정의(21-26)

   A. 전통적 가르침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21)

 

살인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원칙은 동서고금으로부터 전달된 불문율이다.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기고 보호하기 위한 인간 사회의 공통된 논리의 법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유대인의 율법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서 율법이 말하는 살인에 대한 또 다른 정의를 언급하여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22) 하셨다. 이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주께서 심판에 대한 정의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신 것이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심판이란 세상 질서에 범한 재판의 판결을 의미하는데 성경에서의 심판이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말한다. 따라서 세상의 심판은 그 형량에 따라 형이 집행되는데 비하여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한 생명 곧 새 생명과 관련하여 소망이 없고 단 한번의 심판으로 멸망을 받는다. 그러므로 심판의 기준에 죄의 논리에 있지 않고 범죄한 영혼의 마음에 있다.

 

성경이 살인을 가장 큰 죄악으로 정한 것은 생명이 창조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내가 반듯이 너희 피 곧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5,6) 하셨다. 이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주권자의 책임이라 하겠다.

       

   B. 그리스도의 가르침

주님은 살인에 대한 기준을 먼저 ‘형제에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라고 하셨다. 킹제임스 성경은 여기에 ‘원인 없이’ 라는 말이 덧붙여 있지만 이것은 ‘원인 있는 분노’를 허락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아닌 사사로운 인간의 모든 분노를 금하신 것이다.

 

헬라어에서 분노라는 말은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사그러지는 분을 의미하는 ‘두모스’(thumos)라는 말과쓴 뿌리를 가지고 있는 분노를 말할 때 사용하는 ‘오르게’(orge) 라는 말이 있다. 사실 이러한 분노는 법정에 서게 된다. 성경은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약1;20) 하였고 바울은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3:8) 증거 하였다.

 

계속하여 주님은 “형제를 대하여 라가(raca)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라가라는 말은 번역이 쉽지 않은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멸시할 때 ‘흥’하고 콧방귀를 뀌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시 당신이 주변의 이런 사람을 만날 때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다면 당신은 그 형제에게 ‘라가’라고 비난한 것이 된다.

 

흥미롭게도 주님은 이런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공회는 유대인의 최고 법정인 ‘산해드린’(sunnedrion)을 말한다. 그러나 이 내용은 문자적인 해석을 해서는 않된다. 이 말씀은 ‘형제를 향해 마음에 깊은 뿌리를 갖고 분노 해서는 않된다 그러나 형제를 멸시하는 것은 더 악한 죄다’ 하신 것이다. 

 

더 나아가 주님은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블어가게 되리라’ 하셨다. 여기서 지옥불은 믿지 않는 자들이 들어가는 하데스가 아니라 주의 배반자들이 들어가는 게헨나이다. 따라서 여기서 주님은 형제의 인격을 모독의 죄를 언급하신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어리석다’ 의 헬라어 ‘모로스’(moros)는 도덕성의 비난으로 우리는 가끔 역겨운 짓을 하는 사람을 보면 ‘저런 바보’, 또는 ‘퇴’하고 침을 뱉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도덕성을 비난하여 상상대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처사다.

 

얼마 전 미국에 사는 동성애자인 청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청년은 불행하게도 자기가 섬기는 교회담임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담임은 그 형제의 그러한 성향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쩌다 그 형제의 손이라도 닿기만 하면 뱀이 만진 듯이 소스럼치며 경멸의 눈초리를 보낸다고 한다. 이 교회 목사는 분명하게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 말씀하신 살인의 의미는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뛰어넘어 형제에게 분노하고 무시하고 그의 도덕성을 비난하는 그 자체가 살인이라  하신 것이다.

23절에서 주님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내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간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셨다.

 

이 말씀 앞에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된 것은 앞의 말씀과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서 예배를 드리는 자로서 혹시 네 마음에서 형제를 미워하고 무시하고 경멸한 잘못이 있다면 먼저 형제와 화목한 후에야 하나님께서 예물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의 목적은 형제와의 화목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말씀하신 예물은 제물에 해당되는 것으로 고범죄가 아닌 자범죄에만 해당된다. 자기도 모른 사이에 생활 속에서 형제들에게 범한 죄가 결국은 형제를 살인한 것과 같으므로 마음으로 회개하고 합당한 때를 찾아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 여기서 ‘생각나거든’ 이란 생각하라는 말로 받아 드려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양심에 충실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계속하여 주님은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25)하셨다.

 

이것은 우리 실제 생활에서 이웃과의 분노, 무시, 경멸 가운데 나타나는 송사문제로서 이러한 일이 나타나지 않도록 화해하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여 그 상태로 그대로 두면 결국은 소송의 문제에까지 얽히고 만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실제적인 충고라 하겠다. 우리가 사소하게 생각하고 있는 일들이 사실 커다란 문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주님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26) 하셨다.  여기서 언급된 옥이란 옛날에 빚진 사람들이 들어 간 감옥 말한다. 미리 지혜롭게 말로 화목하게 하여 감정을 풀 것을 그냥 두면 결국 상대에게 깊은 악감을 갖게 하여 채권자에게 고소를 당한 것처럼 그의 원한을 다 풀기 전까지는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충고의 말씀이다. 

 

II. 간음의 문제(27-30절)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7,28)

 

  A. 전통 가르침

주님의 두번째 가르침은 간음에 관한 바른 해석이다. 이 말씀은 ‘간음하지 말라’(출20:14)하신 계명을 근거로 하신 말씀이다. 유대인은 간음에 대하여 아주 엄격한 의식을 갖고 있어 간음에 관계된 남녀는 율법으로 반듯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레20:10).

 

이것은 거룩한 품성을 지키는 금지된 욕정을 절제하는 능력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욕정을 스스로 다스리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도 주님은 이미 우리가 간음에 대한 율법의 금지를 알고 있다고 하셨다. 이것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B.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러나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말씀하심으로 행위 이전의 마음의 상태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모든 행동은 마음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에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느낌의 감성에 따라 그 마음이 지배될 수 있음을 경계하신 것이다.

 

여기서 ‘보다’라는 말은 외적 장애물을 의미하는 헬라어 ‘스칸달론’이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짐승을 잡기 위한 미끼를 걸어 놓은 덫에 해당한다. 이것은 우리를 유혹하는 장애물로부터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지킬 것인가를 제공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이 목욕하는 밧세바를 봄으로서 급기야 간음을 하였고 더 나아가 살인을 하게 된 사실을 알고 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상태에 따라 보는 것 곧 감각적 유혹의 느낌은 바로 악한 행동으로 옮겨질 소지가 있다.

 

C. 삶의 적용(29-30)

계속하여 주님은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29,30) 말씀하셨다.

 

누가 이 말씀을 문자대로 받아드린다면 큰일 날 것이다. 또한 성경의 문재대로만 살아간다는 어떤 교회들은 이 말씀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참으로 궁굼하기만 하다. 아마 그들은 자신들은 모두 완전하여 그런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않는 자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멸망케 할 유혹의 장애물에 대해 관대함을 갖지 말하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여 간음의 죄는 멸망을 당하는 죄에 속하므로 어떤 경우에서라도 우리의 마음을 유혹할 덫을 사전에 제거하라는 말씀이다.

 

나는 과거 담배를 끊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집안 응접실에 꽁초가 놓은 재털리를 그대로 두었으며, 동성애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면서도 음행의 비디오를 치우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눈을 빼어 버리라 손을 잘라 버리라는 명령과 같이 믿는 우리는 성결한 믿음의 생활을 위해 우리 삶 가운데서 우리를 유혹하는 장애의 덫을 과감히 처치하여야 할 것이다. 

 

‘지옥에 던지우리라’라는 말에 대해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그러나 당신이 생각해야 할 것은 지옥은 현실적이라는 사실이다. 구태어 이 말씀을 알레고리로 해석하려는 당신은 이미 지옥의 덫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 지옥 곧 게헨나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처럼 당신의 간음의 현장에 놓인 불타는 지옥임을 기억하라.

 

III. 이혼의 문제(31-32)

A.     전통적 가르침

주님은 계속하여 간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하여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감음함이니라”(31,32) 말씀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이혼의 문제를 거론하신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이혼율이 급증가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주님은 이혼을 전혀 금지하신 것은 아니다. 이혼 증서에 서명한 것으로 간단히 이혼성립이 되는 제도적인 문제에 대하여 제동을 거신 것이다.

 

   B. 그리스도의 가르침

주님은 이혼의 사유의 기준을 ‘음행’ 에 국한 하셨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음행의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그 여인을 간음하게 만드는 죄를 짓게 되고 또 그 여자에게 장가든 사람도 간음한 자가 되어 그 죄값은 아내를 버린 사람에게 돌아 온다는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여자들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러한 풍조로 인해 여인들의 인권은 무시되고 여인들에게는 남자들이 잘못을 해도 이혼을 요구할 권리조차 없었다. 또한 유대인 지도층인 랍비들은 힐렐학파와 샴마이학파로 나뉘어졌는데 힐렐파는 이혼의 사유를 여자가 시집 올 때 처녀가 아니였다는 사실에 국한해야 한다고 하였고 샴마이학파는 이혼법을 재해석하여 남편을 불공경하는 모든 행위를 이혼의 조건으로 두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마음에 드는 여인과 결혼을 하기 위해 갖은 핑계를 다해 이혼의 구실을 만들었다. 주님은 이러한 잘못된 이혼 풍조에 대한 제동을 거신 것이다.

 

IV. 맹세의 문제(33-37)

“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33,34)

 

A.     전통적 가르침

주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유대인의 생활 습관이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율법을 생명같이 중시하는 유대인들은 늘 걸림돌이 되는 율법으로부터 피해나가기 위한 방편을 갖기 위해 임의적인 성경적 해석을 꾀하였다.

 

유대인에게 있어 맹세의 문제는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7) 하신 십계명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려 맹세를 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기도 하다.

 

성경은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지라”(민30:2) 기록하였으며 다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니라”(신23:21,22) 기록하였다. 이처럼 유대인에게 있어 하나님 앞에서의 서약은 필히 지켜야 할 불문률이었다.

 

주께서 이처럼 맹세에 관한 성경의 말씀을 다시 거론한 것은 유대인들의 생활 속에서 헛맹세가 습관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던가 또한 어떤 중요한 일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려 할 때면 ‘내 생명을 걸고 맹세하건데..’, ‘내가 하나님 앞에 분명하게 맹세하건데..’라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하였다. 사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또한 이런 면에서 너무 소홀하다. 쉽게 호언장담하고 거침없이 서약이나 맹세의 말을 내어 뱉는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한 말은 그 소리가 내 귀에서 사라졌을 뿐이지 내 입으로 한 말은 모두 공중 어디엔가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의 책임은 분명히 자신이 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B. 그리스도의 가르침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느라”(36) 하셨다. 이것은 너희의 말은 추상적이 되어서는 않된다 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말의 확실성을 요구하신 것이기도 하다. 확실한 말이란 비성경적인 말이나 뭉뚱그려서 대충 하지 말하는 경계가 포함되어 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는 좋은 말을 가려서 하며 최고의 선한 말과 경건성 있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면 그들은 세속적인 말들을 내어 뱉기 시작한다. 교회에서는 예배 중에는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겠다 하고 밖에 나가서는 그 말을 잊어버린 채 세상의 방법대로 살고자 한다. 주님은 이 부분을 간과하지 않으신 것이다.

 

V. 정의의 문제(38-4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38,39)

 

A.      전통적인 가르침

이 말씀은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레24:19,20) 하신 율법을 근거로, 성도들의 잘못된 적용을 바로잡기 위한 주님의 바른 가르침으로 성도들의 윤리적인 문제를 언급하신 것이다.

 

내가 받은대로 동일한 대가로 지불한다는 것은 가장 공평한 대가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가장 무자비한 보복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법을 주신 것은 자기가 행한 범죄에 대해 공평하게 돌려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가를 깨달아 사람으로 이웃에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악은 이를 지나쳐 보복을 행하는 악습을 낳고 말았다.

 

B.      그리스도의 가르침

이에 대해 주님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 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39-42) 하셨다.

 

사실 주께서 하신 말씀도 실제 생활에서 실행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주님의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되 갚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범죄의 근거를 없애기 위한 것이지 보복을 전재로 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여기서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하신 것은 ‘너 역시 사악한 마음으로 저항하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뺨을 맞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공격을 당할 때나 소송을 통해서 합법적인 손해를 볼 때에나 또는 권력에 의해 불이익을 당할 때에나 누가 재정 형편을 물어 올 때에 악한 마음으로 그들을 저항하지 말라 하신 것이다.

 

잠언 기자는 “너는 그가 내게 행함과 같이 나도 행하여 그 행한대로 갚겠다 하지 말지니라”(잠24:29) 하였으며 바울은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둘어 평화하라”(롬12:17,18) 하였고 다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0,21) 하였다.

 

VI. 온전한 사랑(43-47)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위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3,44)

 

A.      전통적 가르침 - "또 너희가 들었으나"

주께서 끝으로 하신 말씀은 사랑에 관한 말씀이다. 헬라어에는 사랑에 관해 사용되는 보편적인 말이 네 가지가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나타내는 ‘스트로게’(storge)와 남녀간의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eros)이며, 사람들 간에 참된 애정을 의미하는 ‘펠레오’(phileo)란 말, 그리고 오늘 주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랑 곧 ‘아카페’(agnpe)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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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 그리스도의 가르침

오늘 주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은 그리스도인의 대 명제이며 성도의 삶의 근간이다. 주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4)는 말씀은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성도의 책임이며 의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지비한 굴욕에 대한 무한한 인내와 참음과 관용과 배려가 필요하다. 자기의 생각과 감정 같은 것은 극도로 무시하여야 하며 오로지 주의 명령에만 충실하여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이 같은 굴욕을 참으며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45) 하셨다. 다시 말하여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삶의 목적이란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46,47)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의 보편적 삶의 상태를 지적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우는 고귀한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대가는 하나님 아들이 사람들 앞에서 무자비하게 치룬 굴욕과 치욕의 값이며 고귀한 하나님의 독생자의 피의 값의 결과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그 사랑의 값을 성도들 간에 공유하려고만 하고 있다.

 

성도들 간에 문안하고 성도들 간에 사랑을 베풀며 자신의 사랑을 자랑하고 있다. 절대로 손해나는 사랑에는 관심도 없으며 의미도 부여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주님은 성도들의 보상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이것은 굴욕적인 대우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자들 곧 하나님의 아들 된 자들에게 주는 상이다. 이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상을 상실치 않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길을 걸어가야만 할 것이다. 

 

끝으로 주님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 하셨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뿌리를 완전히 근절하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완벽한 인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웃 사랑의 실천에 온전성을 요구하신 것이다.

 

누가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6:36) 고 기록하였으며 바울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2:7) 증거하였다. 이것은 사랑을 완성하는 성도의 온전함이 하나님의 자비 가운데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또한 바울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해 졌으니”(골2:9)라고 증거하였다. 여기서 충만이란 단어는 온전하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함을 요구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과 도덕과 윤리를 지킴으로 온전해지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온전해 질 수 없다. 인간에게는 욕망과 욕정이 살아 있어 스스로 공평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그 사랑의 능력으로 온전해 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