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태복음강해

(마태7:12) 크리스천 리더쉽

이요나 2007. 9. 22. 19:10

(마태7:12) 크리스천 리더쉽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우리는 두 시간에 걸쳐 산상수훈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오늘은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으로 복음사역을 수행해 나갈 복음의 리더들의 행심보감에 관한 말씀이다. 5장에서는 산상수훈의 근간이 되는 천국백성들이 누릴 팔복과 왜곡 된 진리에 대한 바른지식, 6장에서는 천국백성들의 종교적 의무에 관한 바른 이해와 올바른 삶의 자세에 대하여 그리고 7장에서는 복음적 생활의 지혜에 관한 것을 공부하게 된다.

 

주님은 산상수훈을 가르치시면서 항상 먼저 원리들을 말씀 하신 후 자세한 설명을 부연하시고 그에 따른 비유를 사용하심으로 듣는 사람들의 이해를 극대화하였다. 이것은 주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원리들을 가르치시기 위한 교육방법이다.

 

I. 누가 판단자인가? (1-5)

“비판(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판단)하지 말라”(1)

 

A. 판단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요한5:22, 4:12, 히10:30, 14:4, 10-12)

여기서 사용된 비판이란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먼저는 판단(krino) 곧 심판 행위를 뜻하고 또 다른 하나는 비판(diakrino) 곧 서로 다른 주장에 대한 평가를 의미한다. 비판과 판단은 우리 인생살이 속에서 허다하게 일어나는 일로서 모든 다툼과 시비가 이로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주님은 여기서 너희의 판단의 주체가 누구이냐를 묻고 계신 것이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5:22)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한5:27)하셨다. 또한 성경은 “범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2) 기록하였으며 다시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롬14:4)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원통한 일을 당하였어도 비판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생의 주권이 주께 있고 주께서 이미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히10:30)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2절에서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말씀하셨다. 여기서 비판과 헤아림은 남보다 내가 낫다는 비교적 구별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위선의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남을 비판한 사람은 자기도 곧 다른 사람에 의해서 비판과 헤아림을 받게 될 것이다.

 

비판과 헤아림은 원래 사단의 역사로부터 온다. 우리는 욥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의인 욥을 비판하는 사단을 보게 된다. 그의 목적은 하나님의 의인으로 망하고 죽게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이에 계시록 기자는 ‘큰 용 내어 쫓기니 옛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는 우리 형제들을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라’(계12:9,10) 증거하였다.

 

 

B. 위선자들의 잘못된 적용(3-5)

 주님은 위선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3,4)하셨다. 참으로 놀라운 비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일들을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커다란 결점은 깨닫지 못한다. 만약 자신의 결점을 깨닫고 있다면 결코 남을 결점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고 또 자기를 숨기는 위선적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손가락으로 남을 가리킬 때 사실 네 손가락은 나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은 남에게 손해를 입히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계속하여 주님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5)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뺄 것을 주장하신다. 이것은 우리로 위선적인 사람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의인으로서의 온전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미 주님은 ‘너희 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말씀하셨다.

 

여기서 외식하는 자란 위선자로서 연극무대에서 연기하는 자라는 의미와 극단적으로 남을 비판하는 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비판을 하기 위한 비판자로서 최고의 기술을 가진 자라 하겠다. 바리새인들은 늘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며 자신들의 명성과 행운을 탐냈다(마16:14,15). 또한 그들은 요한복음 8장15절에서와 같이 간음 현장에서 동일한 범죄를 목격하였어도 창녀만을 정죄하려는 편견적 판단을 일삼았으며 또한 그들은 늘 외식적인 행동을 일삼았으며 다른 사람들을 결점을 비판하며 자기들의 의로움을 자랑했다(눅18:9-14).

 

II. 진리의 대상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을까 염려하라”(6)

 

   A. 하나님의 선물

후일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했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2) 증거하였다. 베드로 사도의 이 증거는 바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그 당시 교회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교사들을 향한 경계의 메시지였다.

 

여기서 거룩한 것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온 구별된 것을 말한다. 또한 진주란 오랜 인내와 노력으로 결실한 성도들의 믿음의 열매를 의미한다. 또한 여기서 개란 먹을 것을 위해 주인을 바꾸기를 서슴지 않는 배반적 습성을 말하며 돼지란 자기 배를 살찌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짓 교사들을 말한 것이다. 이 말씀은 세상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받지 못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이것은 어느 교단에서 ‘하나님의 유기’ 곧 태어남으로부터 정죄되어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우리가 멸망의 아들 가룟 유다를 보건데, 하나님의 유기된 백성은 처음부터 작정된 것이 아니라 주의 부르신 은혜 가운데서도 그 마음이 교만하여 더러움에 이끌려 스스로 주께서 미리 말씀하신 멸망의 길로 내려 간 것이다.  

 

성경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6) 하였고 다시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10:26,27) 기록하였다.

 

 주님은 ‘저희가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하셨다. 사도행전 15장에는 예루살렘 회중 가운데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법을 대적하여 모세의 할례를 교회 안에 심으려는 무리들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나타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고 교회 안으로 몰래 스며들어 온 자들이다. 바울은 ‘가만히 들어 온 거짓 형제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다’(갈2:4) 하였고 그들에 대하여 다시“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2:19)하였다.

 

주님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주지 말며 우리의 인내로 성취한 성령의 열매를 던지지 말라 하신 것이다. 어쩌면 이 말씀은 복음의 은혜로 부름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 경계의 말씀으로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 15절 이후에서 우리 중에서 구별되어 멸망받은 자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B. 개와 돼지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 - 믿음의 실천과 적용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자들을 구별해 낼 수 있을까? 잘못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남을 판단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의 딜레마가 아닐까 싶다.주님은 에베소 교회 지도자에게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책망하였고 다시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 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계2:6) 하셨다.

 

여기서 니골라당은 누구인가? 그들은 성도들은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육체의 행위에 대하여는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말하여 성도들의 음행과 방종을 부추겼으며 그 대신 교회 안에 계급제도를 만들어 교회를 세속화 하였다. 사실 이 니골라당은 초대교회 일곱집사 중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자가 개와 같이 되고 돼지와 같이 된 것이다.

 

주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7,8) 말씀하셨다. 여기서 사용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헬라어는 모두 현재완료형으로 이 말씀은 계속 구하라, 계속 찾으라, 계속 두드리라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일회성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구하라’라는 말씀은 ‘계속 간청하다’, ‘계속 탄원하다’라는 뜻으로 누가복음 11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여행 중 밤늦게 돌아 온 친구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 옆집의 문을 두드리며 강청하듯 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것은 구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능히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며 찾으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어디엔가 숨겨져 있는 것이며 두드리라는 것은 어디 있는 것은 알지만 방해가 있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주님은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9-11)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언급하신 것이다. 이미 6장에서 주의 가르치신 기도에서 언급되었지만 우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의 자녀라는 것이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누가복음에는 이 부분을 “너희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11:12) 라고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성령을 받은 자들은 개나 돼지처럼 되지 않는다는 말씀인 것이다. 또한 오직 성령으로서 이런 자들을 구별할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주님은 12절에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말씀하셨다. 사실 이 구절이 7장 핵심으로 사람들은 이 말씀을 황금률이라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therefore) 라는 접속사이다. 황금률로 불리는 이 구절은 12절 말씀이 결코 독립적인 말씀이 아니라 서두의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필두로 시작된 마무리 말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도움 없이는 남을 비판하는 일을 멈출 수 없고 더 나아가 개나 돼지처럼 이성 없는 자가 되지 않을 수도 없고 또 남에게 받고자 하는 자기 교만과 자기 존중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계속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로서 아버지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여 우리를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처럼 온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III. 올바른 신념의 원리(13-29)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라 들어 가리라”(21)

 

A.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14)

13절에서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13,14)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진리에 입각한 온전한 믿음생활을 위한 올바른 신념에 관한 원리를 역설하셨다.

 

세상의 이치로 볼 때 넓은 문을 두고 좁은 길로 들어 간다는 것은 비정상적이며 비논리적이다. 사람들은 모두 넓고 큰 문을 선호한다. 그러나 위대한 영광은 모두 좁고 협착한 문을 통과하여야만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 ‘좁은 문’은 예수님 바로 자기 자신을 말씀하신 것이다. 15절의 거짓 선지자들이 바로 넓은 문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넓은 문으로 이끌고 가려 한다. 문을 더 넓혀 떼를 지어 고속도로로 달려 나가듯이 말이다. 어떤 목사들은 긍정적 사고만 가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말한다. 또 어떤 목사는 목적을 세우고 밀고 나가면 모두 된다 한다. 이런 것은 모두 심리학자 프로이드의 이론을 바탕으로 교회 안에 파고 들어 온 심리학을 이용한 것이다. 그를 통해서 그들은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천국문 앞에서 제지를 당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주의 성도들이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설 것을 언급하셨다. 그것은 바로 멸망의 길이냐 생명의 길이냐인 것이다. 부자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주의 부르심에도 돌아 갔고 소경 바디메오는 거지임에도 주를 따르기 위해 주를 보기를 원했다. 이제 당신은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로운 길로 들어 갈 것인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신의 공력 앞에는 반듯이 불의 시험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고전3:14,15).  

 

   B. 거짓 선지자들(15-20) – 특성과 행위를 인식하라.  

주님은 15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15) 하셨다. 이 부분은 특별한 영분별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누가 이리이고 누가 양인지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두가 화려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나오니 평범한 눈으로 식별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단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간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3-15) 증거하였다.

 

누가 이리인지 누가 양인지 분변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두 모습을 상상해 보라 양들은 평화롭게 묵묵히 그 목자를 따르고 이리는 상당히 맹렬하고(ferocious-NIV) 공격적이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전도자들이 있다. 그들 중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 문선명교도들을 보면 상당히 공격적이고 도전적이다. 각 교회에서 이단성 공격을 받는 교회들의 성도들의 품성을 보면 모두가 이리처럼 공격적이고 맹렬하다. 그러나 양들은 각기 자기 목자의 인도함을 따라 한가롭게 누워있다. 우리가 그들의 모습을 바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상황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C. 두 종류의 나무와 열매

계속해서 주님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16) 하셨다. 이것은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우리 속담과 같은 뜻이라 하겠다. 주님은 여기서 그들의 생산성 관계를 알아 보라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모두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고 서로 상반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부연하여 주님은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17,18) 하셨다. 이것은 자연의 원리이며 하나님의 진리인 것이다.

 

나는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내가 갈보리채플의 목사가 된 것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국의 실정을 보면 정말 비참할 정도로 비참하지만 나는 작은 우리에 있는 하나님의 양들이 평안한 모습을 꿈꾸고 있다. 아마 지금까지 우리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오늘의 그들의 모습 또한 선한 양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우리를 튀어 넘어간 다른 양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의 모습은 화려해진 것 같지만 비판하기에 익숙해져 있고 상당히 맹렬하고 돌진적으로 변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예수님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19,20) 말씀하셨다. 주님의 요구는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단 한가지인 것이다. 이 열매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계시록 20장에서 보게 될 것이다.

 

C. 사역은 직업이 아니다(21-23)

주님은 21절에서 “나더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도 역설적이다. 성경은 이미 주여 주여 하는 자는 주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마음으로 주를 믿어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여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2) 하셨다. 주께서 지적하신 이들은 모두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마술사와 같기도 하고 초능력을 일으키는 전문직업인 같은 느낌이다.

 

이 글을 볼 때 어쩌면 이들은 주님의 명령을 잘 지킨 자들 같이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하셨지 결코 표적을 행하라 하시지 않았다, 이런 표적들은 믿고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은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 믿음의 표적이지 주의 종들에게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 보낸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하셨다. 여기서 그 때란 어느 때인가? 바로 그들이 주 앞에 자신의 행위들을 높고 자랑할 때이다.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것이다. 바울은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2:9,10) 하셨고 다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1,12) 증거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의 무수한 활동들을 보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입에서 불을 토하듯는 메시지를 들으며 아멘을 연발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미 그들의 덫에 갇혀 종교적 행위에 중독된 자들이다. 나는 이들이 속히 눈을 뜨게 되기를 기도한다.

 

D. 주님의 말씀에 의존하라(24-27)  야고보 1 : 22.

끝으로 예수님은 집 짓는 자의 지혜를 말하여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도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24-27) 말씀하셨다.

 

주님은 목수로서 집을 많이 지어보셨기 때문에 어디에 집의 기초를 놓아야 튼튼한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땅에 세워질 두개의 집 곧 하나님의 집과 사단의 집을 말씀하신 것이다. 가인과 아벨이 있듯이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었고 또 에서와 야곱이 있었다. 또 사울과 다윗은 모두 같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었지만 사울은 실패의 사람으로 다윗은 성공한 모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이제도 두 개의 그룹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느 그룹에 속하였는가에 있다. 그 결과는 당신의 선택에 의해 무너지던가 반석에 서든가로 분명한 판결이 날 것이다.

 

IV. 무리들의 반응(28-29)

주께서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들 가운데서 커다란 반응이 일어났다. 무리들은 그 가르침에 놀랬다. 그들은 결코 어떤 행위나 기적을 본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님으로부터 믿음 생활의 일상적인 일들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다. 성경은 무리들이 이처럼 큰 반응이 나타난 것에 대하여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과 같지 아니함일러라”(29) 증거하였다.

 

그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주님과 같은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존경받은 계파의 스승 랍비들의 말을 빌어 어느 박사님께서 말씀하시되 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날도 많은 목사들이 유명한 학자나 목사의 설교를 인용하여 메시지를 전한다. 이것은 그들의 명성을 기인하여 자기의 입지를 한층 높이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보다 권위 있는 메시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주님은 오직 자신이 알고 계신 하나님께 속한 진리의 말씀을 갖고 전하신 것이다. 이제도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바르게 전할 때 그 말씀의 권위가 스스로 그 말씀을 전하는 자 위에 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