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태복음강해

(마태복음5:20) "의의 필요성"

이요나 2007. 9. 1. 18:34

(마태복음5:20) "의의 필요성"

 

(마5: 20)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I. 의의 논증 - 하나님의 계명 vs 전통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 지 못하리라" (20)       

 

   A. 8복과의 관계 (1-12)

우리는 앞에서 팔복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복에 관한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복을 얻기 위하여 선행을 하기도하고 또 각자 자신들이 믿는 종교를 통하여 기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에서 우리가 배운 팔복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에 미치는 복과 다르다. 어쩌면 팔복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축복과 정반대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팔복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신의 축복으로 그의 제자들이 그 말씀을 이룬 후에 영원히 누릴 실제적인 복이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팔복의 주제는 ‘의의 실천’이다. 이 의는 팔복의 근원이기도 하며 천국에 이르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이다. 천국은 의인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 가운데서 의란 핍박의 대상이다. 세상 그 자체가 처음부터 불의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가 처형하였고 또 그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다.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여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17:14)

 

주님은 천국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의 것이라 선언하셨고 그로하여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셨다. 참으로 핍박 가운데 즐거워 하고 기뻐한다는 것은 역설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핍박을 즐거워해야 할 당연한 이유는 하늘에서 받는 상이 크며 또 우리가 앞서 핍박을 받은 무리들 가운데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스테반은 의를 전하는 자기를 핍박하는 바라새인들을 향하여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는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나니 너희가 천사의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다 하니라”(행7:51-53) 증거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믿는 자들 속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고 모두 핍박을 받았다. 그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처럼 세상 사람들의 영접을 받지 않으며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록 기자는 “또 그가 피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19:13) 증거하였다.

 

   B. 책임과 목적 (13-20)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마태복음 5장 13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은 팔복을 받은 사람들 곧 하늘의 상금을 보장 받은 하나님의 종들의 이 땅에서 마땅히 해야할 의인의 책임과 의인의 목적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주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셨고 다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팔복을 받은 의의 제자들의 내적인 역할과 외적인 역할을 말한 것으로 먼저는 책임을 말씀하신 것이고 그 다음은 목적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소금은 의인된 제자들의 본성적 역할이고 빛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역할로서 수신제가 후 평천하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주님은 산상수훈 끝에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8) 하시며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 하셨다.

 

II. 성도의 삶과 증인의 중요성(13-16)

 

A.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대명사 "너희"에 강한 포인트가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13) 하셨다. 소금은 우리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하는데 그 첫째는 맛을 내는 역할이다.

 

이것은 세상의 악에 묻혀 인생의 참 맛을 잃은 사람들에게 삶의 아름다운 맛을 찾아 주는 역할이다. 요리사들은 채소에 소금을 뿌리는 것은 채소의 최고의 맛을 내기 위함이라 한다. 이와 같이 교회는 성도들의 본연의 맛을 낼 수 있도록 삶의 소망을 갖게 하고 그 잠재된 능력을 깨닫게 하여야 한다.

 

소금의 또 다른 역할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다. 그 당시는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때라 고기와 생선을 소금에 저려 저장하였다. 이것은 소금 속에 세균을 죽이는 성분이 있어 썩는 것을 예방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신 것은 이 땅에서의 교회의 역할을 말씀하신 것으로 교회는 세상의 부패를 예방하는 역할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인간 본연의 도덕과 삶의 윤리에 관한 것으로 교회가 그 버팀목의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담배 자판기처럼 수많은 교회들이 난립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교회는 세상의 소금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성장과 부흥에 급급한 나머지 세상의 악법에 대항하지 못하고 그 가르침에 있어 두리뭉실하게 적당히 넘어가고 있다. 

 

지난 김대중 대통령 때에 동성애자들의 성전환 수술이 합법적으로 통과 되었고 노무현 정권에 와서는 트랜스젠더들의 성전환법이 대법원에서 통과 하였다. 그런데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성전환 수술에 앞장선 부산 동아의대 학장이 크리스챤이라는 것이며 또 성전환법을 판결한 대법원장이 대형교회 장로라는 것이다. 참으로 양심 있는 보통사람들이라면 감히 그런 것에 손대기를 꺼려 할 것이거늘 이들의 이름은 지옥문 한 복판에 유구하게 남아서 불타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과 같이 세상이 부패한 것은 국가의 법이 약화되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법을 만들면 만들수록 악은 더 교묘해져 날이 갈수록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만다. 이처럼 날로 세상이 부패하고 있는 것은 세상의 부패를 예방할 교회가 그 맛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하셨다. 이를 누가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이 내어 버리느니라”(눅14:35)라 기록하였다.

 

 소금이 그 맛을 상실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성도로서의 의를 상실하는 것으로 필요의 존재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다. 밖에 내어 버린다는 것은 주님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행운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9:27) 증거하였다.

 

또한 발 밑에 밟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리의 증거가 사라진 상태라고 하겠다. 다시 말하여 교회가 세상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외면과 무시를 당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는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지도 못하고 또한 세상의 좋은 것들을 개발시키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교회 세력이 시민연대와 하나가 되어 또 다른 정치세력을 이루는 종교집단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심리학과 마케팅이 들어와 진리를 왜곡 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여 교회는 날로 그 맛을 잃고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란 주님의 말씀은 교회의 각성을 향한 최후 통첩이라 하겠다.

 

주님은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게 하라”(막9:49,50) 하셨다. 이 말씀은 공평성을 요구하신 것이다. 소금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 공평성을 잃으면 짜지 말아야 할 것이 짜서 먹을 수 없게 되고 소금이 덜 들어 간 부분은 싱거워질 수 밖에 없다.  

 

B.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14-16) 

1. 성도의 삶의 페키지 프로그램

두번째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14) 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란 소금과 대치되는 역할로서 외적인 영향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빠삐욘과 같은 영화를 보면 옥에 갇힌 죄수가 말썽을 부리면 빛이 들어가지 않는 지하 감방에 감금된다. 빛이 차단된 상태에서 죄수는 시력을 잃고 결국 죽어 버리고 만다.

 

빛이란 삶의 본질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빛의 존재는 영적이며 정신적이며 또한 물질적 측면을 증거한다. 요한은 “우리가 저에게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느니라”(요일1:5) 증거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영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본체를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 : 3) 하신 말씀은 물질적인 빛을 말한 것이며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을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4,5)라 한 것은 빛의 정신적인 역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빛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삶을 위해 주신 페키지 프로그램과도 같다.

 

2.       그리스도의 본질적 상징(요8 : 12)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하셨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존재의 가치를 언급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세상에 빛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고 세상 그 자체가 존재할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정신적, 물질적 모든 면에서 빛의 본질성을 갖고 계심을 뜻하신 것이다.

 

시편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27:1) 노래 하였으며 다시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라”(시36:9) 증거하였다. 또한 그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05) 고백하였으며,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시119:130). 이 모든 것은 빛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체를 찬양한 것이다.

 

C. 숨겨질 수 없는 존재(14-15)

 

1.       산 위의 동네- 외형적 모델

주님은 빛을 가리켜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14) 하셨다. 이 말씀은 세상을 빛된 교회가 세상에서 숨길 수 없는 존재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어쩌면 주의 종들은 세상에 세우신 모델이라 하겠다. 사람들 앞에 자신의 거룩한 삶을 나타내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어떤 교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하여 교회를 크고 높게 지어 멀리서도 볼 수 있게 지어야 한다고 말하며 돈을 갈취하기에 힘을 쓰고 있다.

    

 2. 등경 위의 등불 – 제자사역

그러나 주님은 계속하여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15)하셨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등불을 등경 위에 둔다 말씀하신 것이다. 마가는 이 말씀을 천국의 비밀을 언급하며 기록하였다(막4:21). 이것은 교회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델이 되어야 하듯이 그 시작은 집안에 들어 온 사람들을 진리로 가르치는 제자사역을 언급하신 것이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하였고 다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증거하였다. 이것은 로마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 베드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벧전2:9) 증거 하였다.

 

     3. 영향  "사람들 앞에"(16a) -> "착한 행실"

16절에서 주님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다. 헬라어의 착하다란 말은 두 가지가 있는 데 그 하나는 ‘아카토스’로서 성질이 선한 것을 말하며, 또 다른 하나는 ‘칼로스’로서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선한 성품을 말한다. 여기서 주님은 칼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따라서 이 말씀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영향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2:15)라고 증거하였다. 이러한 기운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치료의 광선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그의 광명하신 빛 가운데 거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교회는 좋지 않은 일들로 세상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목회자의 비리와 세습에 관한 일들 그리고 무지몽매한 선교사역과 이단들의 행패로 사람들에게 교회는 마치 이상한 종교집단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등경 위에 있는 등불이 그 집안 사람들을 잘 비취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D. 하나님의 뜻의 성취(16절)

16절의 "이같이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 하라"란 말씀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언급하신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온통 전도폭발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난리법석이다. 대형교회는 그 교세를 온 땅에 퍼뜨리기 위해 더욱 더 열광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들의 모습 속에서 마음이 끌릴만큼 착한 행실이 보이지 않는다.

 

과연 이번 아프카니스탄에서 피랍된 선교단들이 우리에게 준 교훈은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와 달리 미국 갈보리채플의 젊은이들은 회교국인 인도 들어가 1000개의 가정채플을 개척하였다. 이와 같은 세상의 빛의 모델이 된 것은 그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사역자들에게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 하였으며 다시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해야 할지니라”(행20:35) 하였다. 이 두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III. 하나님 뜻의 성취(17-20)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17)

 

A. 율법을 완전케 하려 함->부족한 상태

주님은 17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말씀 하셨다. 주께서 갑자기 복음의 제자들에게 율법의 시대를 언급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율법은 모세오경을 말하며 선지자는 예언서를 의미한다. 곧 오늘의 구약에 해당한다.

 

오늘날 어떤 교회들은 율법이나 선지서 곧 구약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그들은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새로운 복음 곧 신약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구약은 그 효능 면에 있어 약하다고 가르친다. 그로하여 많은 성도들이 구약을 경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 된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여기서 ‘완전케 한다’ 하신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부족함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완전하게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신령한 율법이 완전치 않다는 말은 인간의 육신이 연약하여 그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다는데 있으며 또한 아직 계시될 예언의 말씀이 더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B. 다 이루리라->완성의 상태

계속하여 주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말씀 하셨다. 이 말씀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기록된 모든 율법이 완성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지 않고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따라 진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24:44) 말씀하셨다.

 

C. 우리들의 위치(POSITION)

오늘날 우리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 오늘 우리는 미리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어 가는 중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하여 우리의 인생이 그리스도의 말씀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궤도를 떠나 살 수 없으며 또 그 궤도를 벗어날 수도 없다. 이것인 이 땅의 모든 인생들의 숙명인 것이다. 그 이유는 이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완성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모든 예언의 말씀이 모두 완성된 것이다.

 

이사야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40:8) 하였으며 사도 베드로도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이 말씀이니라” (벧전1:25)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계시록 기자는 예언의 말씀을 가감할 수 없다고 인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주의 부름을 받은 제자 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주님은 19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말씀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작은 것은 버리고 가르친 사람이나 모든 말씀을 지키며 가르치는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며 또한 천국에도 어떤 계급층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천국의 지배구조는 세상의 지배구조와 같이 혈육과 인정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오직 살아 생전에 내가 주의 가르치신 말씀을 따라 행하였느냐 아니면 소홀하였느냐로 결정된다.

 

D. 천국에 들어 가기 위한 원칙(20)

끝으로 주님은 “내가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원칙이기도 하다. 서기관이란 요즘의 신학자와 같고 바리새인은 왜곡된 율법을 따라 살며 스스로 의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여 요즘 자기 중심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며 의식을 중히 여기는 종교집단들과 같다고 하겠다.

 

주의 제자들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종교행위가 무슬림들을 따라 갈 수 없는 것과도 같다. 그러면 예수께서 요구하신 천국입성은 어떻게 이루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오직 주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의로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휴거나 칠년 대환난 그리고 천국 곧 천년왕국이 성도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 누가 천국에 가본 사람이 있느냐 반문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 사람은 결국 이 시대 뒤에 일어난 성경적 증거들을 무시하는 사람이기도 하며 그의 믿음은 의롭지 못하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으니 그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하셨으니 아브라함의 의를 따라 의인된 우리는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바 하나님의 말씀과 예정을 믿는 것이라 하겠다. 그의 말씀을 믿는 우리는 그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 넉넉히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