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4:23) 메시야 사역의 출발
(마4: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니”
우리는 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아버지 되신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는 메시야 증명과 함께 성령의 강림으로 출발되었음을 살펴 보았다. 하늘의 신비 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의 출현은 은밀한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군중들이 보고 있는 중에서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사람들 속에서 성경적 사실로 증거 되었으며 이 사실은 아직도 우리 가운데서 뜨거운 열정으로 역사하고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1)
A. 성령의 임재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성령이 임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듣기 전까지 묵묵히 한 사람으로서의 생활을 30년간 해 오셨다.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열두살까지의 행적을 볼 수 있다. 그는 이미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메시아의 오심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아 이심을 아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또 성령이 친히 임하실 것을 믿고 그의 때를 기다려 왔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성령세례를 받으신 후 즉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 광야로 가셨다.
흥미롭게도 마가는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1:12) 증거하였고 누가는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눅4:1)라고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령의 이끌리심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복음사역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원대한 꿈을 가지고 중앙 아시아나 중동지방,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나는 것을 본다. 그들의 패기는 참으로 가상할만하다. 그런데 선교사로 떠난 사람들이 온전한 복음적 생활을 하지 못하고 각 지역에서 비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또 복음과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어쩌면 금번 아프카니스탄 피랍된 형제자매들도 모두 이러한 입장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사역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성령께서 인도하셨다면 피랍되어 죽음으로 이끌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십일 간의 시험기간은 특별한 의미를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40년동안 광야생활을 하였다.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동안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2)이란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광야는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물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으로 시험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주께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그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위하여 친히 시험받으실 필요가 있었다. 대제사장만이 피의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백성들의 죄를 사하게 하는 제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라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증거하였다.
원래 제사장은 율법에 레위족속에 속하였지만 그는 죄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신고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예물을 갖고 나아가 맞은 살렘 왕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제사장으로 오셨다(히7:11). 그것은 바로 미리 말씀하신 대로 이 세상을 통치하기 위해 다윗의 왕의 직분을 이어 받아야 할 유다 지파로 나시기 위함이시다.
예수께서 광야로 이끌려 가신 것은 마귀로부터 시험 곧 유혹을 받기 위함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마귀' 라는 단어 헬라어 '디아불로'는 성경에서 사단의 목적에 준하는 명칭 곧 참소자, 배도자, 멸망의 아들, 미혹하는 자, 불법한 자와 같은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린다(살후2:3). 이는 곧 사단의 영으로 장차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실체인 것이다.
B. 사십일 금식
예수께서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다"(2)는 말씀은 실로 흥미롭다. 인간은 오감 곧, 시각과 청각, 미각, 후각 그리고 촉각을 갖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감지 능력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또 다른 감각기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육감에 속한 것으로 영적 감각이다. 그런데 육감은 오감에 눌려 육신이 만족을 느낄 때 그 감각이 저하된다.
인간은 5,6일 정도 금식을 하게 되면 미각이 상실 되어 배고픔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장기 금식을 할 수 있는 것인데 35일쯤 가면 다시 미각이 살아나 음식을 먹게 되는데 이것은 육체가 양분을 얻지 못하여 죽어가는 단계에 속한다.
나는 43살 때 주의 은혜로 오랜 세월 내 육신을 지배하던 굴레를 벗게 되어 이십일일간 금식을 한 일이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21일 금식은 내 의지만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무엇인가의 이끌림을 따라 금식을 하면서 새로운 영적세계를 체험한 것이다. 나는 그때 현실 속에서 평안의 실체를 처음 발견하였다. 모든 시간들이 귀하게 나를 섬기고 있었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내 혈관으로 녹아 들어 왔다. 그 당시 내 생활은 마치 천사와 동행하는 것 같았다. 21일 금식을 마치기까지 여러 가지 기이한 일들이 나타났으며, 그 후에도 근 일년간을 음식을 절제하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그때의 신비한 기억들이 아직도 나를 붙잡고 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II. 유혹과의 대결(3-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11)
3절에는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하라" 하였다. 여기서 마귀와 '시험하는 자'가 동격으로 사용된 것은 흥미롭다. 마귀하면 영적인 존재처럼 보이는 데 '시험하는 자' 하면 마치 사람과 같이 여겨진다.
우리는 계시록에서 마귀의 실체를 보게 된다. 사도 요한은 "큰 용이 쫓기니 옛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계12:9) 증거하였으며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계12:10)라 하였다. 이 일은 한참 후에 있을 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이 일을 하늘에서 보게 될 것이다.
성경에는 마귀의 시험에 대한 기록 많이 기록되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에서 겪어야 하는 실제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a) 경계하였으며 계속하여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을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5:10) 증거하였다.
A. 필요의 도전 창조의 질서의 위배
마귀의 첫번째 시험은 절대적 필요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라는 데 있다. 그런데 문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라'는데 있다. 여기서 '만일'이란 말은 '사실이라면'으로 보는 것이 좋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너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절대 필요를 해결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여 네게 준 권세를 인간의 육체적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사용하라는 말이다. 또한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는 마귀의 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라는 유혹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 돌들로 떡을 만드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가 세우신 질서를 임의로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의 세상은 무질서가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이 땅에는 우리 육체에 필요한 물질을 이 땅에 나게 하셨으며, 아담에게 '동산의 각종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으라'(창2:16) 하셨고 범죄한 후에도 필요를 얻게 하기 위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셨다(창3:23).
물론 인간이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당면한 문제는 육체에 속한 것이라 하겠다. 그것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다 둘 것이냐에 있다. 우리의 생명이 육체에 속한 것이라면 당연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못하고 생명에 필요를 충족 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속해 있다. 육체는 살아 있는 동안 생명의 그릇에 불과하다.
마귀의 시험에 주님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4) 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성경 곧 신명기8장에 기록된 말씀을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니 충분히 자기의 생각을 말해도 될 것인데 주님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육체를 위하여는 식물이 필요하듯이 인간의 생명의 본체를 위하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도 인간은 늘 눈 앞에 있는 육체의 필요에 갈급하게 된다. 이러한 우리를 향하여 주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6,27)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께서 오신 것은 인간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욕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불평에서 비롯된다.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 복음 사역자들의 공통된 문제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실패하는 것은 먹고사 는 문제에 부딪혀 그 부르심의 소명을 상실하게 된다. 나는 십이년 전 한국에 나와 교회를 개척할 때 서울에서 척 스미스 목사님과 함께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척 목사님은 내게 '첫해에는 거기서 난 것을 먹고 두번째 해에도 거기서 난 것을 먹고 삼년째에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으리니 인내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하나님 앞에 설 사역자가 될 것이다' 하셨다. 그때에는 삼년만 잘 참으면 성공할 것이구나 하고 좋아했지만 이제서야 그 말씀의 뜻이 가슴에 와 닿는 것 같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5,26) 하셨다. 또한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증거하였다
B. 의지의 도전 - 기능의 질서
마귀의 두번째 시험은 의지로의 도전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6) 하였다.
첫번째 유혹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한방 얻어 맞은 마귀는 이번에는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그가 인용한 말씀은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91:11,12) 하신 시편의 말씀이다.
어떻게 보면 마귀가 한 말은 시편의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 같지만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라 하신 말씀이 삭제 되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전달하지 않고 자기에 목적에 맞추어 전달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성경은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9) 엄히 경고하고 있다.
마귀의 두번째 유혹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바꾸라는 데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쑈를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여 주님의 사역은 이벤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많은 목사들과 교회들이 거룩한 성에 올라가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가지고 쑈를 하고 있다. 나는 가끔 테레비에서 축구경기를 보게 되는데 유명한 선수들이 인터뷰에 나와 이번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을 듣는다. 외국 선수들은 열심히 노력하겠다. 최선을 다하여 실망시키지 않겠다 말하는데 우리 선수들은 보여 주기 위해 경기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은 실망뿐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베드로의 실패를 여러 번 보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고난을 말씀하시면 이제 곧 예루살렘에 올라 가면 장로들에게 팔려 이방인에게 잡혀 죽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 때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간하였다. 이에 주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하셨다.
또한 사역에 있어 우리의 관심은 누가 나를 도울 것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러한 일로 많은 사역자들이 장애인들을 돌본다든지 선교지로 떠나면서 모금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1:14)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상적인 존재 곧 천사들을 보내신 것은 나의 이상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천국의 상속자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셨다. 여기서도 주님은 자기의 생각을 말씀하지 않으셨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답하셨다. 주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일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 일들은 베드로의 생각과 같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대적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천사들이 돕는 것처럼 왕성할지라도 그 일은 결국 마귀의 등에 럽혀 춤을 추는 것이다.
C. 부르심으로의 도전 권위의 질서
사단의 세번째 도전은 부르심으로의 도전이며 권위의 질서를 무너뜨리는데 있다. 마귀는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을 보이며 "만일 내게 엎드리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9) 하였다.
천하만국을 보이며 내게 엎드리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는 것은 이 세상의 권세가 그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복음에는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진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4:6) 기록되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사단의 권세가 얼마가 막강한지 알 수 있다. 우리 인간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대단한 존재인 것이다.
그가 '이것은 내게 넘겨진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한 것은 아담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전15:46) 하였고 다시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 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8,49) 증거하였다.
마귀의 유혹에 주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10) 하셨다. 예수께서는 모든 마귀의 유혹을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의지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충분한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계셨을 것인데도 자기의 생각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성경의 말씀으로 대응하셨다. 이것으로 우리는 예수께서 태초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으며 오직 사단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뿐인 것을 알 수 있다.
D. 영광의 승리
우리가 살펴 본 마귀의 유혹은 크게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육체에 속한 것이며 두번째는 우리의 이상 곧 사역적 비전에 속한 것이며 세번째는 영광에 속한 것으로 지위와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하여 육과 혼과 영에 속한 유혹으로 모두 육과 세상에 속한 것이다. 이것들은 바로 부름받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사역적 시험이기도 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나니 이는 세상에 있는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이는 다 아버지께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증거하였다.
오늘날 우리를 시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때로는 먹고 사는 문제로 고통받기도 한다. 때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싶은 충동에 휘말리기도 한다. 아마 이 문제를 통과하고 나면 내 스스로 영광의 자리에 앉아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힐 것이다. 사실 우리 중에는 벌써 그러한 유혹에 사로잡힌 자들이 많다.
11절에는 "이에 마귀가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기록되었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왜 이러한 시험을 받아야 했을까 의심스러웠다. 그는 죄도 없으시며 하나님의 기름부으심과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그 무엇이든지 단번에 성취할 수 있는 권세자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시험받는 인간의 모델로 또한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하는 복음사역자의 모델로 그리고 이 땅을 통치하실 만왕의 왕으로 오실 자이시다. 이 모든 일들은 주께서 부르신 우리를 위하여 세우신 복음사역의 질서인 것이다.
III. 그리스도의 부르심(12-25) *부르심 - 마태5, 마가3, 누가 4, 요한 5.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9)
A. 그리스도의 계획 (12―16)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12) 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미 마귀의 시험을 다 마치시고 당당히 메시야로 그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활동하실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께서 무엇이 겁이 나서 물러 나서야 하셨을까? 아마 오늘날 유명한 목사들 같았으면 군중들을 이끌고 당당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하나님의 성전을 접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뒤로 한발 물러서셨다.
우리는 앞에서 마귀가 이 세상은 내게 넘겨진 것이다 말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세상의 지배자와 맞대결을 통한 천국건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따라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셔야 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천국은 인간의 힘으로 세울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은 이미 그 지배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빼앗긴 것들을 회복하는 것은 사람의 계획이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하늘에 속한 것이다.
13절에는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라고 기록되었다. 가버나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2고향으로 삼으신 사역적 발판이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북쪽 해변에 위치한 곳으로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회당이 있었으며 세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갈릴리 지역의 중심지인 것 같다. 마가복음 2장에 의하면 예수께서 사신 집은 어느 건물에 내 달아 진 집으로 아마 베드로의 집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주님은 많은 기적과 은혜 가운데도 변화하지 못하는 가버나움이 심판날에 소돔보다 견디기 힘들 것이라 저주하셨다(마11:20-24).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가서 사신 것은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에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15,16)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었다. 이 말씀은 이사야 9장1-2절 말씀으로 마태는 역사적 적용을 하고 있다.
우리가 이사야 9장의 말씀을 볼 때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적용 될 예언이다. 이스라엘의 고난의 때를 언급하여 '고통 중에 번성케 하신다' 하셨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미디안의 침략을 비유하여 장차 있을 아마겟돈 전쟁을 언급하였는데 그 후에 다윗의 왕국이 펼쳐질 것을 묘사하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일이 성취될 날에 대하여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여있고 그의 이름은 기묘라 모사라 강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는 아버지라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임이라"(사9:6) 하였고 게속하여 "그의 정권과 평화가 번창하여 끝이 없으며 그가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군림하여 그 왕국을 정리하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리라 만군의 주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사9:7)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이사야 9장은 분명 칠년 대환난 때의 일을 예언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은 곧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B. 복음의 선포(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초성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였다. 이것은 세례 요한과 동일한 선포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천국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한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나라 곧 천국의 도래를 선포한 것이다.
우리가 3장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는 선포는 변하지 않는 복음의 근간이다. 사도들이나 또 오늘날 우리나 모두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선포할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이다. 이 메시지가 선포된 지 2000년이 지난 오늘은 그날이 더욱 가까워진 것이다. 천국은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나라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 땅에 도래되는 날이다. 그날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교회이며 그 영광의 자리에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C. 부르심 목적(18-22)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의 제자들을 부르심과 함께 출발하였다. 마태는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신 상황을 설명하여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개 하리라"기록하였다.
갈릴리 해변에 어부가 두 형제 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안드레의 일하는 현장을 보시고 부르신 것을 보아 주님은 그들의 성실함과 보통 사람으로서의 순수한 성품을 발견하셨을 것이다. 물론 다른 복음서를 보면 안드레와 베드로를 부르신 과정이 조금씩 다르다. 먼저 안드레와 요한이 주를 따랐고, 베드로는 안드레의 권유로 주께 나왔다. 그러나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 이후에도 베드로는 고기잡이의 매력을 놓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메시야의 능력을 체험 한 후에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백을 하였다(눅5:5). 또한 이 일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후의 일이다(눅4:38).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매우 단순 명료했다.'나를 따르라"이 말은 복음서에 17번이나 소개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다'(20)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 형제를 부르신 후 더 가시다가 부친 세배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의 형제를 부르셨다. 그들도 곧 바로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나는 이것은 마음의 용단이라기 보다 결단의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목수 예수를 따라 생업을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조상대대로 자신들이 믿어 왔던 유대교의 교리를 버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을 향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그러나 그의 부르심에 따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천국의 주역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은 재물 때문에 돌아선 사람도 있었으며, 믿음이 연약하여 자기를 부르신 주를 배반한 사람도 있었다.
IV. 그리스도의 사역(23-25)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니"(23)
A. 권세(23)에 대해서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은 이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도시며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 하셨다. 여기서 가르치신다는 말은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풀어서 강해하셨다는 말씀이며 전파하였다는 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는 메시지를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주님의 가르치심은 먼저 회당에서 이루어 졌다. 후일 사도들의 사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주님과 제자들은 회당에서 늘 핍박을 받고 유대인들에게 쫓겨나야 했다. 나는 오늘날도 이러한 사역을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교회고 마음대로 들어 갈 수가 없다. 모두가 자기 교파의 세력을 갖고 있어서 갈보리채플 목사가 들어갈 틈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놀라운 일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이 권세에 대하여 깊게 생각해 본다. 이러한 능력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는 이러한 일들은 이단들이 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다. 모두가 거룩하고 경건한 예배를 원할 뿐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통해서 보건데 성령의 능력은 사도들 속에서도 나타나 병든자를 고치고 앉은뱅이를 일으켰으며 죽은 자를 살렸다. 나는 이 능력이 지금도 일어 날 것이라 믿는다.
B. 불가사의한 존재들(24) - 모든 사람들을 공격
24절에는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기록되었다. 여기 나열된 것을 살펴 보면 '질병과 고통'은 육신적인 병이며 '귀신들림'은 영적인 병이며, '미친 자'는 정신적인 병이다. 이처럼 마귀는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을 사로잡고 사망 위에 앉아 왕노릇 하고 있다.
이 병들을 보라 아직도 우리 중에 있지 않은가? 이 시대 사람들의 관점은 웨빙이다. 교회서도 건강을 위해서 각종 프로그램들이 개발되고 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발달되고 과학문명과 의학은 끊임없이 발전되고 있지만 질병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사람들은 질병과의 전쟁이다. 이 세상이 끝나기까지 이 전쟁은 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께서는 이러한 질병들을 고치셨다. 이것은 그의 나라가 임하기까지 우리 교회에 주신 권세요 성령의 능력이다. 나는 이 능력이 다시 우리 가운데 역사하기를 기도한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의 부르심에 대한 완전한 승복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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