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태복음강해

(마태복음1:22) 예언의 성취

이요나 2007. 8. 3. 13:40
 

(마태복음1:22) 예언의 성취

(마1:22-23)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은 신약의 첫 장이다. 이 복음의 메시지는 이 땅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멈춘 지 400년 만에 다시 재개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겪어야 했던 영적 투쟁과 믿음의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인 메시야의 시대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중단 된 체,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택하신 열두 제자 중 레위라고 부르는 마태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면서 동족의 멸시와 율법의 정죄를 받는 로마정부의 세무원 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동족의 멸시와 정죄 속에서 번민하던 중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의 은혜에 곧 바로 응답하였고, 세리생활을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대열에 일원이 되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함께 공관복음이라 부른다. 그러나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공관복음의 저자는 성령이시다. 그들은 다만 주의 부르심의 은혜를 따라 주께서 전달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들을 기록하여 증거하였을 뿐이다. 특별히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정신 곧 유대인의 마음에 입각하여 기록된 복음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마태복음을 읽을 때 말씀 속에서 유대인의 마음과 믿음의 실체, 그리고 그들의 민족적 소망 가운데 나타난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들이 무엇인지 발견할 필요가 있다.

 

I. 메시야 계보(1-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1)

 

A.     두 가계

마태는 서두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기록하였다. 공관복음에서 이러한 기술은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난다. 여기서 세계란 기원을 뜻하는 헬라어 게네시스(genesis) 라는 단어로서 신약에서는 여기서 단 한 번 사용되었으며 구약에서도 최초 헬라어 번역본 70인경에서 창세기 5장의 아담의 계보에서 단 한번 사용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아브라함과 다윗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백성이라는 위대한 자존심의 바탕이다.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부르신 민족적 기원이며 온 세상의 믿음의 조상이다. 또한 다윗은 열방을 통치하시기 위해 주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통치자 곧 메시야의 모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란 이스라엘 민족에게 택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자손을 뜻하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과 다윗을 위대한 조상으로 표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그들을 통해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창22:18) 하셨고 다윗에게 다시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저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대상17:11-12)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아직도 우리 중에서 성취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성취될 것을 믿고 있다.

 

B.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사랑 속의 네 여인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특별한 여인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이 네 여인은 오늘날과 같이 여권신장의 시대에도 별로 환영 받지 못할 위치에 있는 여인들이다. 먼저 마태는 3절에서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다말이란 여인은 흥미롭게도 유다의 장남의 처 곧 큰 며느리다. 유다의 큰 아들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어 유다는 장남의 계보를 잇기 위해 며느리 다말을 둘째 아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자식을 낳아도 자기에게 유익이 없음을 알고 잠자리에서 땅에 사정을 하여 하나님께 득죄하여 죽임을 당했다.

 

이에 졸지에 두 아들을 잃은 유다는 어린 막내 아들까지 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해 다말에게 째가 장성할 때까지 친정에 가서 있으라 하였다. 사실은 장자의 승계를 포기할 심산이었다. 셋째가 나이가 차도 다말을 부르지 않자 그녀는 어떻게 서라도 남편의 대를 잇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유다가 상처한 후 그 마음의 위로를 위해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갔다.

 

어느날 시아버지 유다가 딤나에 올라 왔다는 소식을 들은 다말은 얼굴에 스카프를 쓰고 창녀의 복장을 하고 길가로 나가 유다를 맞았다. 아내를 상처하고 외로움에 쌓인 유다는 그녀가 자부인줄 모르고 염소새끼를 줄터이니 나와 함께 자리에 들자고 유혹하였다. 이 때 다말은 지금 당신의 손에 새끼염소가 없으니 무엇을 내게 담보로 맡기겠느냐 하자 유대는 도장과 끈을 그녀에게 주고 관계를 갖었다. 나중에 친구에게 염소를 보내어 인장을 찾으려 보냈으나 그곳에는 창녀가 살지 않는 곳이라는 답을 들었다.

 

그후 달이 차서 다말이 배가 불러 오자 이 말이 유다에게 들어가게 되어 유다는 음행한 며느리 다말을 끌어내어 불사르려 하였다, 그때 다말이 내가 이 도장과 끈의 임자로 말미암아 애를 갖게 되었다고 증거물을 내어 놓았다. 이에 우다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한 까닭이다(창38:26) 하였다. 이렇게 하여 유다는 쌍둥이 형제 세라와 베레스를 낳게 되었다.

 

또한 5절에는 라합이라는 여인이 소개되고 있다. 라합은 가나안의 기생이다. 이 일은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있었던 일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전 첫 성 여리고성에 두 사람의 정탐군을 보냈다. 그러나 가나안 왕은 정탐군이 잠입한 것을 알고 병사를 플어 그들을 잡으라 명하였다.

 

두 정탐군은 병사들에게 �기어 성문 옆에 있는 라합의 집으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이 때 라합은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알고 숨기고 병사들을 따돌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후일 당신들이 이 곳에 이를 때에 나와 나의 가족을 구원해달라 하여 두 정탐군은 그녀에게 우리가 들어 올 때 창문에 붉은 끈을 매어 두면 너희 가족을 구원하리라 약조하였다. 이로서 라합과 그의 가족은 구원을 얻어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고 그녀는 정탐군 중 한 사람인 살몬과 결혼을 하여 후일 룻의 남편이 된 보아스를 낳았다.

 

세번째 소개되는 여인은 모합여인 룻이다. 이 여인은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의 며느리로서 일찍이 과부가 되어 남편의 대를 잇기 위해 남편의 가장 가까운 친척 형제인 보아스에게 토지무르기를 받아 보아스의 남편이 되어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 오벳을 낳았다. 그러므로 사실 룻이 나은 오벳은 기생 라합의 손주였지만 계보상으로는 나오미의 남편의 가계를 이은 것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암몬 사람과 모암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 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 뿐이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 오지 못하리라(신23:3) 말씀하셨다. 이것이 나오미와 룻이 살기 전 모세의 시대에 주신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율법이다. 그런데도 메시야의 족보에는 버젓이 룻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6절에는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소개되었다. 여기에는 이름이 소개되지 않았지만 우리야의 아내는 말할 것도 없이 후일 다윗의 정실이 되어 솔로몬을 낳은 밧세바다. 다윗과 밧세바의 만남은 그 남편 우리야가 전쟁에 나간 사이 그녀가 목욕을 하는 것을 보고 그녀의 미색에 이끌린 다윗이 그녀를 데러다 간음을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임신을 하게 되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숨기려 우리야를 불러 들여 후한 음식을 내리며 집에 가서 몇일 푹 쉬라고 하였다. 그러나 충성심이 강한 우리야가 왕에게 속한 모든 진중이 전쟁 중에 있는데 어찌 내가 집에 내려가 가족과 함께 하겠느냐고 거절하였다. 이에 방법이 없게 되자 다윗은 군대장관에게 편지를 써 보내어 우리야를 전쟁터 맨 앞줄에 세우라 하여 결국 우리야는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순간에 이끌린 간음이 살인을 불러 온 것이다. 그후 간음으로 나은 아들은 다윗의 금식에도 죽고 후일 밧세바는 다윗의 정실이 되어 다윗의 후계자 솔로몬을 낳았다.

 

지금까지 언급된 여인들을 보면 참으로 기가 질릴 일이다. 여러분들도 아마 이러한 아내나 며느리를 드리는 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가문을 중시하던 그 시대에서야 말 할 것도 없다. 이 여인들은 모두 율법의 시대에 살던 여인들로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왔기 때문에 이처럼 율법의 권위와 인간의 생각을 뛰어 넘어 정죄 가운데 살던 여인들을 메시야 계보에 들어 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하심과 그의 사랑의 역사라 하겠다.

 

II. 계보의 딜레마(12-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

 

A. 성경적 계시

마태복음 두번째 문단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 계시의 딜레마를 접하게 된다. 성경은 분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하나님은 다윗에게 친히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대상17:11) 하셨다. 여기서 네 씨란 곧 메시야를 지칭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이 재림 예수인 것을 증명하려면 먼저는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증명해야 하고 또 자신의 계보가 다윗 왕의 족보에 들어 있음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는 문선명, 박태선, 이만희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고집하는 것은 혹세무민의 도가 지나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메시아의 계보를 증명함에 있어 또 한가지 성경의 계시를 간과하지 못할 내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니라(램22:30 말씀하셨다. 이것은 유다의 왕 요사야의 손자이며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고냐라고 하는 고니야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위를 종결시킨 것이라 하겠다. 그 말씀대로 고나야는 즉위 3월만에 임을 당하고 왕위는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 그의 숙부인 시드기야(여호야김)에게 이양되었으나 시드가야도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를 죽였으며 느부갓네살 왕에게 대항하여 친애굽정책을 펴 결국 느부갓네살에 의해 두 눈이 뽑힌채 바벨론으로 압송되어 죽임을 당하고 유다왕국은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B. 서로 다른 메시야 계보

그러나 흥미롭게도 16절에는 다윗의 계보는 계속 이어져 16절에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고 기록되었다. 과연 성경은 하나님께서 미리하신 말씀을 그대로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세에 들지 못한다. 그러면 이떻게 성경에 기록된 상반된 두가지 게시들을 함께 성취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성경에 다윗의 족보와 관련된 3가지 계보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역대기 3장에 기록된 다윗의 계보이며 마태복음과 함께 누가복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기록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마태와 누가의 계보가 다윗의 단계로부터 다른 이름이 나온다는 것이다.

 

마태는 1장 6절에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중심으로 왕의 계보를 기록하여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 이르게 하였고 누가는 누가복음 3장 31절에서 다윗의 또 다른 아들 나단의 계보를 통하여 마리아의 계보에 이르게 하였다. 또한 우리는 역대상 3장 5절에서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의 소생이요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여기서 밧수아는 바로 밧세바를 칭한 것으로 그녀는 솔로몬 외에 세 아들이나 더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요셉이 아들 예수를 낳았다 하지 않고 마리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III. 14대 미스터리(17)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17)

 

또한 우리는 마태복음 1장을 읽으며 아이러니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17) 기록된 말씀이다.

 

우리가 아무리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그 대수를 세어봐도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열네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대, 바벨론으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대란 숫자는 정확하지 못하다. 우선 열네대를 세번하면 사십이대가 되어야 하는데 다윗이 처음의 마지막과 두번째의 첫부분을 장식하고 있음으로 정확한 대수로 말하자면 41대가 된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유다왕국의 사적을 살펴보면 8절의 요람과 웃시야 왕 사이에는 세 왕, 곧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의 이름이 빠져 있다. 그들은 모두 아합왕의 자손으로 아합의 이방인 처 이세벨이 낳은 딸 아달랴의 아들들이다. 이세벨은 오무리왕의 딸로 아합의 아내가 되어 이방인의 신인 바알을 끌여들여 450명의 제사장을 양성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바알을 따르게 하였고 그후 아달랴의 아들 아하시아가 예후에게 죽자 유다의 왕자들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황태후가 되어 6년동안 유다왕국을 치리하였다. 다행히 대제사장의 아내가 아하시아의 어린 아들을 피신시켜 성전에서 키워 후일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아달랴를 죽이고 요아스로 왕위에 앉게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기자는 아달랴의 아들들을 모두 계보에서 삭제해 버린 것이다.

 

성경이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 속에서도 각 시대별로 나누어 하나님의 완전수자인 일곱의 배수인 열네 대라고 기록한 것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대로 성취된 것임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마태는 22절에서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기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서술된 십사대를 기점으로 년수를 환산하면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1000년 다윗으로부터 바벨론까지가 400년 바벨론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가 600년이 되므로 아브라함으로부터 그리스도까지가 2000년이 된다.

 

또한 지금까지 성경의 역사를 살펴 볼 때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가 2000년에 이르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가 2000년, 예수님으로부터 지금까지가 2000년이 되었으므로 성경의 역사는 어림잡아 6000년이 된다. 또한 이제 곧 주님이 오시면 이 땅에 1000년 왕국이 세워지므로 하나님께서 일곱째날에 안식에 드신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를 두고 베드로 사도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사실을 잊지 말라 한 것인지 그 역시도 매우 흥미롭기만 하다.

 

여기서 잠깐 열네 대의 삼배수 사십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성경에서 사십이라는 숫자는 계시록에서 두 번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적그리스도와 관련된 숙자로서 계시록 11장 2절에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하였고 또한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리라(계13:5) 기록되었다. 이 모두가 7년 대환난 동안의 일이다.  마흔 두 달은 성경에서 또 다른 기법으로 기록되었는데 내가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계11:3) 하였으며 또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 두 때 반 때를 양육 받으매(계12:14) 라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사실 마흔 두 달일천 이백 육십일한 때 두 때 반 때는 동일한 시기에 일어난 동일한 때로서 삼 년 반의 기간에 속한다. 다만 그 역사하는 자의 배경을 따라서 기법이 다를 뿐이다. 이로 보건 데 마흔 두 달은 사단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훼방하는 기간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이러한 수리적인 계산에 너무 마음을 빼앗겨 성경이 말씀하는 본질을 간과하는 것은 옳지 못하나 이러한 수리적인 부분을 통하여 이 땅에 역사하는 사단의 배후가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IV. 메시아 탄생 딜레마(18-25)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더라(21)

 

A. 마리아 딜레마

마태는 1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욧베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라고 소개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혼인제도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혼인에 있어 정혼(engagement)과 약혼(espousa)과 동거(betrothal)의 세 단계를 갖고 있다. 정혼이란 부모들이 자녀가 어렸을 때에 서로 혼인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중동지역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부모들은 양가의 가문과 친분관계를 가진 집안 어른이 자녀의 혼사를 미리 정하는 것이다. 

 

결국 자녀들은 양가 부모의 정혼을 따라 혼인을 하게 되는데 15,6세가 되면 두 사람은 일년간의 약혼관계를 통하여 혼인을 준비하게 된다. 이 때는 성인으로서 부모가 언약한 배우자에 대한 인정을 하는 단계로서 서로 깊은 관계를 갖지 않고 각자가 혼인 준비를 하게 되는데 오늘날 약혼의 관계와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약혼관계가 성립되면 양가와 당사자들이 결혼을 한 것으로 인정을 하기 때문에 만약 어느 한쪽에서 파혼을 하려한다면 정식 혼인자로서의 이혼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와 같은 약혼의 기간이 끝나면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는데 결혼식날 첫날밤에 신부의 아버지는 딸의 처녀성을 증명하는 흔적을 딸에게 받아 상자에 보관을 해 두어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처녀성 시비를 대비한다. 이만큼 그 시대에 있어 신부의 순결은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요셉과 마리아의 혼인 상태는 약혼단계로서 동거를 준비하는 기간에 속하였기 때문에 사실 임신을 하였다는 것은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율법을 생명처럼 여기는 유대인으로서는 그러한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절박한 문제였다.

 

아무리 두 사람이 결백하고 성결하다고 해도 임신은 부부관계를 통해서만 성취되는 것으로 마리아의 임신은 요셉에게 있어 카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고 일생에 가장 중대한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우리가 누가복음에 소개된 천사의 수태고지나 ‘마리아의 찬가’(눅1:46-50)를 통하여 마리아의 신심과 영적상태를 능히 알 수 있지만 현실로 나타난 수태 사실은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곤경이 아닐 수 없다.

 

B. 요셉과 마리아의 믿음

믿음의 사람 요셉 또한 정혼녀 마리아를 사랑하고 그녀의 믿음이 어떤지를 알고 있었지만 현실 속에 나타난 수태의 사실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하여 요셉은 마리아가 사람들에게 정죄를 받아 돌에 맞아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그 일을 조용히 정리하고자 마음을 먹고 그 일의 처리를 놓고 생각할 때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난 것이다.

 

사자는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0-21) 하였다.

 

여기서 ‘예수’란 히브리어로 ‘여호와’ 곧 ‘야훼’를 뜻하며 ‘구원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 속에 그의 사역적 사명이 포함된 것이다. 더욱이 유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방인에게서 구원할 자라고 하지 않고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실 분인 것이다.

 

C. 탄생의 기적

마태는 22절에서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라고 증거하였다. 이것으로 우리는 마태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달하신 하나님의 계시의 성취적 관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후 베드로는 군중들 앞에 서서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셨다’(행4:25) 증거하였고 바울도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고전11:23) 증거하였다.

 

하나님은 이미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치 아니 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위에 둘지라” (시132:11) 언약한 것이다. 요셉도 다윗의 자손이요 마리아 역시 다윗의 자손이다. 더욱이 메시야는 예레미야에게 다윗의 왕위 계승자의 혈통으로는 오지 못할 것이라 하셨으므로 다윗의 다른 아들의 혈통으로 마리아를 예비하셨으니 참으로 절묘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적 탄생에 대하여 600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말씀하신 예언을 소개하여 “보라 처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23) 기록하였다.

 

우리가 구약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살펴 보건데 300여 가지에 이른다. 한 사람의 탄생과 그의 일에 대한 예언이 성취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라.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시편14:7-10) 하신 말씀과 ‘기록된 바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슥9:9) 하신 말씀이 동시에 제자들과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성취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메시야 예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단 한번 성취되었다.

 

D. 처녀에 대한 논쟁(알마-70인역)

이러한 역사적 사실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의혹을 제기하는 일들은 아직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미국의 어느 교사가 쓴 다빈치 코드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은 정말 악의 극치를 이루었다. 그런데도 그러한 책이 전 세계 속에서 최고의 히트를 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기적이라 하겠다. 사단도 이처럼 세상에서 자기의 능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만약 그들이 성경의 권위에 순종하고 성경에 기록된 계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들이 수천년 동안 고대하며 기다려 온 메시야를 십자가에 죽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약이 기록된 이후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은 성경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 중의 주네시아라는 학자는 히브리어 ‘알마’를 젊은 여자(a young maiden)이라고 해석하여 동정녀의 탄생을 부인하였다. 또한 오늘날도 예수님의 성령에 의한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려는 사람들도 이를 번역하여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고 번역한다.

 

이러한 해석과 번역은 젊은 여자가 아들을 낳은 것은 기적이 될 수 없음을 증거하려는 악한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그들은 학문적 해석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구약 성경에 기록된 ‘알마’라는 단어를 ‘처녀’의 의미로 기록한 것은 확실하게 증명된다. 사실 주네시아라는 학자는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말함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우리는 예수께서 탄생하기 전 200년 전에 70인의 성경학자들에 의해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성경은 ‘70인역’이라 하며 ‘셉투어전트’(Septuagint)라고도 부른다. 그들이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칠십년 포로생활로 하여 히브리어를 잊어 버렸고 그 당시는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정책으로 온 세상이 헬라문화와 헬라어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학자들의 설명이 없이도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70인 학자들은 아사야서의 메이야 예언 곧 ‘알마’를 ‘처녀’로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로 해석하였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사실이며 그들 역시 하나님의 성령께서 기름부으셨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성경번역에 관하여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사실 우리가 보는 한글 개혁성경은 중국 선교사들에 의해 영어성경 ‘NIV’버전을 번역한 중국어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지명이나 인명에 무리가 있고 언어도 고어체를 사용하여 현대인에게 상당히 낯설고 어렵다. 그러하여 킹제임스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말씀보전학회에서는 킹제임스가 아닌 다른 번역본은 모두 사단이 변개한 성경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쓰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역시 개혁성경의 기존 어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나는 우리 성경의 문제점이 있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이 성경이 사단이 변개한 것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이 땅의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무시하고 우롱하는 교만한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우리 성경의 번역에 있어 성령께서 개입하셨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번역 원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표현이 서로 다르고 유실된 부분도 있지만 그 부분은 성경을 가르치는 자의 몫으로 두면 문제될 것이 없다. 지금도 성령은 동일하게 우리 가운데서 말씀의 권위를 지키며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지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를 ‘영원한 성처녀’(Prepectul virginity)로 지칭하는 로마 카톨릭의 성경해석이다. 이것은 마리아를 신적 위치로 부각시킨 그들의 잘못된 교리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마리아는 요셉과 정상적인 결혼을 하였고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였다. 다만 주의 사자로부터 마리아가 성령으로 메시아를 잉태한 사실을 안 후 예수님을 낳을 때까지 부부관계를 갖지 않은 것이다. 마태는 1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들 곧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있음을 우리에게 소개하였다(마13:55,56). 이로서 우리는 오직 성경의 기록을 따라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따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믿음생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나로 하여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에 관한 계시의 말씀을 살펴 보게 하심에 감사 드립니다. 또한 이 말씀들을 통하여 아직도 주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면 미리 말씀하신 성경의 말씀들을 성취하고 계심을 감사드립니다. 부디 우리로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온전한 성도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