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10:16) 추수군의 지혜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면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1)
A. 천국복음과 열두 사도의 부르심
9장 마지막 단락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각 성과 촌을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신 내용이 기록되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는 많은 무리를 보신 주님은 깊은 연민의 정을 토하시며 제자들을 향하여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이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추수란 복음사역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말씀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에서 떨어져 나간 인간의 비통한 현실을 목도하시고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사명을 이루시기 위한 행보로서 영혼의 추수를 언급하신 것이다.
이제 주님은 주께서 이 땅에 오신 대명제를 성취하기 위하여 천국복음의 대권 위임자들을 제자들 중에서 선임하시고 그들을 사도라 칭하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으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하셨다. 인간 세상에서도 주권자들이 자기의 사람들에게 합당한 직분을 주어 그에 맞는 권세를 주듯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실제적으로 능력으로서 죄 가운데 유리하는 인간의 영혼을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권세이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복음의 전권대사에 해당된다. 예수님은 부활 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40일 동안 지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하시며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 약속하셨다. 제자들이 바로 이 성령세례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울 성령의 권능을 받은 것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에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에게 주신 권능 곧 파워에 대하여 좀더 민감해 질 필요가 있다. 이 권능은 세상에서 돈이나 또는 어떤 정치적 권세로 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영적 존재들의 특별한 능력을 제어하는 권능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받은 권능은 복음과 함께 역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한 신성의 능력인 것이다.
또 한가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은 ‘천국복음’이란 단어다. 이 부분을 우리가 묵과하게 되면 마태복음을 해석하는데 해석적 충돌을 갖게 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천국복음’(마9:35)이란 단어는 마태복음만의 특징 중의 하나로서 다른 복음서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나라’와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천국’이란 단어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의 개념이다. 믿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 한다면 천국은 이스라엘이 소망하는 이 땅에 실현 될 메시야 왕국을 의미한다.
B. 열두사도(2-4) - 막3:13
예수께서 부르신 “열두사도의 이름은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2-4)이다. 마태는 베드로의 이름을 맨 앞에 두어 예수께서 배드로를 중용하고 계셨음을 은연 중에 피력하였으며, 또한 혼동을 막기 위해 야고보의 이름 앞에 그의 부친들의 이름을 언급하였다.
바돌로매는 빌립의 친구인 나다나엘을 말하며, 가나인 사람 시몬은 민중 운동가 셀롯의 다른 호칭이다. 흥미로운 것은 다른 제자들은 모두 북이스라엘 사람들인데 비하여, 가룟 유다만 남쪽지역 가룟(Iscariot) 태생으로 그 말뜻이 ‘값을 주고 교환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 예수를 판 자라는 의미를 더하고 있다.
C. 사역자 수칙(5-15)
예수님은 부르신 열두 사도에게 명하여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3-8) 하셨다.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하신 말씀은 복음의 시대가 이방인에게 열린 것과 상충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이방인의 시대는 이스라엘의 배반으로부터 비롯되므로 주께서 사도를 세우신 시점은 아직 이스라엘의 온전한 구원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먼저 택하신 그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요 배려라고 하겠다.
주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신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외칠 때 나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마15:24) 말씀하시며‘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단호히 거절하신 바 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과 메시아와 천국에 얽힌 언약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후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전개되는 이방인 전도를 위해 세움을 받은 바울 사도는 천국복음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천국복음은 은혜의 개념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 있어 천국은 유독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특권 속에 있었다. 사실 이스라엘의 영광 속의 천국은 그들을 위해 남겨두신 그의 날에 다시 펼쳐질 것이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비밀이라 증거하였다(롬11:25).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또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말은 마태복음에서 언급된 천국이란 개념이다. 흥미롭게도 ‘천국’이란 단어는 다른 복음서는 물론 사도서신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디모데후서 4장 18절에서 한번 사용되었지만 여기서도 주의 영광이 세세토록 무궁한 왕국의 때로서의 종말론적 의미로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학자들은 마태복음 5장으로부터 11장에 이르기까지의 천국 복음의 개념은 오직 유대인에게 한하여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천국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용된 나라로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는 주를 믿는 모든 자들의 왕국이 될 것이다. 다만 마태복음이 유대인 입장에서 기록된 것을 감안할 때 천국의 개념은 하늘 저편에 있는 영원한 나라의 개념과 달리 이 땅에 펼쳐질 메시야 왕국인 것과 마태는 천국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점으로 이미 도래하였음을 은연 중 강조하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그러나 천국은 우리가 바라는 바 천년왕국의 때에 완성될 것이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천국복음 전파와 함께 부수적으로 펼쳐지는 사역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사역은 마치 이단들이나 행하는 것처럼 된 것은 복음사역이 왜곡된 결과라고 하겠다. 특별히 주님은 제자들에게“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하셨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가운데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하는 일들이 커다란 자랑처럼 홍보하고 물질과 관계 되고 있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주님은 복음사역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몇 가지 수칙을 말씀하셨다. 먼저 주님은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9,10) 하셨다.
이 말씀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 듯하나 우리는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신 뜻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복음 사역자들은 재물과 관련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빙자하여 각 지역을 돌면서 자신이 필요한 물질을 성도들로부터 충복을 받으려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아무것도 받지 아니하며 주의 이름을 이방에 전하는 사랑의 일군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권면하였다(요삼1:8).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다고 증거하였다.
계속하여 주님은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 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11) 하셨다. 이것은 전도여행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합당한 자란 준비된 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복음을 영접하기에 예비된 자를 의미한다. 마가복음 1장에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막1:3)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예비하라는 준비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합당한 자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라고 하실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이미 준비하시기 때문이다. 로마서에는 이스라엘을 고소한 엘리야에게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끓지 않은 자 칠천을 남겨 두셨다(롬11:3) 기록되었으며 바울은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5)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자는 전도를 위하여 나갈 때 사람의 외모나 친분관계에 치우치지 말고 오직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에 합당한 자인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또한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 머물라’(11b) 는 말씀은 이집저집으로 옮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복음사역 흔히 나타나는 일 중의 하나이다. 주의 종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서로 시기 질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분당지역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우리가 다 치우치기 쉬운 사람인고로 실수가 많고 또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경향이 있어 도리여 복음의 방해자가 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때마침 최근 마태복음을 강해하게 되어 새롭게 깨달은 말씀들을 마음에 새기며 합당한 사역자로서 본분을 다하고자 마음을 다짐하고 있다.
주님은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지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12,13) 하셨다. 합당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경외하여 복음에 순종할만한 사람을 말하지만 대부분 여러 가지 문제에 당면한 사람들이 많다. 누가복음 4장에는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달 동안 닫히어 온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랍다 한 과부에게 뿐이었다’(눅4:26)고 기록되었다.
이 부분을 살펴 보면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가 사는 집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집 과부의 아들이 병이 들어 급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이에 그 여인이 나와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왔느냐?”종지목을 대기 시작했다. 아마 이 여인은 엘라야에게 양심에 찔리는 율법을 많이 들어 왔었는가 보다. 어쩌면 복음적인 생활을 한 여인은 아닌듯 싶다. 결국 엘리야가 그녀의 죽은 아들을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히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혼이 다시 돌아 오게 하였다. 이에 그 여인이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인 줄 알겠습니다”(열상17:17-24) 자복하였다. 이와 같이 합당한 자란 우리 눈으로 보기에 좋은 외형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해 예비하신 사람이다.
내가 이 말씀을 미쳐 깨닫지 못했을 때, 몇 년 전 중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한인 교포교회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호텔에 돌아 오자 어느 집사님이 자기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전혀 안면이 없지만 한인교회 목사가 추천한 분이라서 나는 믿음이 좋으신 분이라 생각하고 그 집에 몇 일을 묶게 되었다. 그 집사님은 그곳에서 부동산업을 하면서 상당한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살림 형편으로 보면 한국의 중상층 정도의 규묘였다. 그 분은 자기 사무실 지하에 중국인을 위한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암흑의 지대에서 정말 생명을 내어 놓은 복음의 증인이구나 생각하여 존경스럽게 생각하였다.
그 집사님은 특유의 언변이 있어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몇일 지내면서 알게 되었지만 그 집사님은 교포들 가운데 재물과 관련하여 문제를 갖고 있었고, 또 지하 신학교와 관련하여 한국의 여러 교회들과 복잡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분이 지하신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자신들의 생활의 명분을 갖기 위한 수단이었다. 몇 일 묶고 있는 동안 그 집사님은 나에게 갈보리채플에서 목사 안수를 해달라고 청을 해왔다. 그때서야 나는 이분이 복음에 합당하지 않은 분임일 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귀국하였다. 결국 그분은 몇 년 뒤 중국 공안에게 출국을 당하고 말았다.
마가복음6장에는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기록되었다. 이것은 복음이 임하는 곳에 분쟁의 요소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늘 충동적인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도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요 검을 주러 오셨다 하심과 같이 은혜가 있는 곳에는 사단의 역사로 사람들 사이에 서로 분쟁이 일어날 소지가 있다.
주님은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집이나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4) 하셨다. 참으로 야박한 말씀같지만 이 문제는 영혼의 구원과 관계된 말씀이다. 다시 말하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영적 권세 곧 성령에 대한 순종이냐 불순종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사자를 영접하는 일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평안이 그의 집과 그의 성안에 임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느 성이나 마을에 들어 갈 때 합당한 자를 찾기 위하여 많은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II. 영적전쟁(16-33)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28)
A. 사역의 지혜(16)
이제 주님은 복음사역과 관련된 실제적인 영적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지침들을 말씀하셨다. 앞에서 말씀하신 것이 제자들 스스로 삼가해야 할 것이라면 여기서는 어쩔 수 없이 세상 가운데서 겪어야 할 필연적인 전쟁에 임하는 전투 태세를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주님은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16)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양과 이리, 그리고 뱀과 비둘기를 대조하여 영적전쟁의 현실을 설명하신 것이다. 양은 목자의 인도함을 받는 초식동물이며 이리는 짐승을 잡아 먹는 육혈동물이다. 주님은 ‘유리하는 백성을 보시며 목자없는 양과 같다’ 하셨으며 ‘양의 옷을 입고 나오는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켜 노략을 일삼는 이리’라 하셨다(마7:15). 다시 말하여 복음 사역자는 길잃은 양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들로서 양들을 이리 곧 거짓 선지자들 손에서 지켜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그러므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하셨다. 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한 첫 사람 아담을 유혹하기 위해 사단이 이용한 가장 지혜로운 짐승이다. 오늘날 뱀이야 저주를 받아서 땅에 기게 되었지만 처음 당시에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대범한 존재였던 것 같다. 오늘날도 우리 중에 함께 사는 사람들 중에는 온갖 지혜로서 사람을 유혹하여 넘어뜨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를 위해 성경은 나와 함께 밥상에 앉은 자가 발 뒤꿈치를 들었다 기록하였다. 또한 비둘기는 홍수 중에 고통 받는 노아에게 새로운 신천지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달한 새로서 포유류와는 달리 젖샘의 통하여 새끼를 키우는 날짐승으로 사람들이 주인의 뜻에 순종하는 순한 새다.
예수께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하신 말씀은 먼저 뱀이 하와를 유혹한 과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사람을 시험하였고 후일 예수님도 동일한 수법으로 시험하였다. 여기서 시험이란 테스트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없으면 결국 이리들에게 사로잡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뱀같이 지혜로우란 말씀은 뱀처럼 교묘한 말로서 사람을 살피라는 말이 아니라 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을 테스트 하듯이 너희도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하여 뱀의 간교함에서 자기와 양들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나는 가끔 하나님의 양들을 성경을 들어 유혹하고 시험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인터넷이듯 기독교 방송이건 이런 사람들은 특유한 언변을 갖고 사람들의 감정을 흔들어 그 마음을 훔치고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면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13:7) 하였으며 다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증거하였다.
B. 사역의 현실과 주체(17-23)
주님은 18절에서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하셨다. 이것은 복음사역자들에게 있을 종교적 위협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미 세상은 그들의 신들로 가득하며 그 신들은 자기들의 신념과 논리를 갖고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우리가 어떤 새로운 이념과 논리들로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그들 사이에서 피흘리는 전쟁을 치루어야 할 것이다. 이로서 고대로부터 이 세상은 늘 상반된 이념과 논리들로 전쟁 중이다.
공회란 유대인의 최고의 종교적 정치 기구인 70인으로 구성된 산헤드린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공회의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넘겨졌고,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 사도들이 모두 공회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계속하여 주님은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하심이라”(18) 하셨다. 이 일은 장차 사도들과 그 교회가 선교를 통하여 세상 나라에서 핍박을 당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일들은 아직도 이슬람권이나 회교국, 공산독재 국가에서 빈번히 일어 나고 있다. 복음이 들어 가는 곳마다 모두 피흘림이 따르고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가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19,20)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사역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령께서 일하시지 않으면 육체의 연약함을 가진 인간의 의지로는 도저히 복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을 대적하는 자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영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영적전쟁의 배반자가 혈육을 나눈 가족이라는데 있다. 주님은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하리라”하셨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죽인 것은 모두 한 혈육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처럼 영적전쟁은 자기들의 옳다고 하는 일을 위해 한치의 양보도 없이 죽음을 불사한다.
최근 이락이나 아프카니스탄 사태를 보라. 그들은 자기들을 반대하는 자들을 죽이기 위해 스스로 자살폭탄이 되어 영웅이 되고자 한다. 이런 일들은 이념과 종교적 다툼이 있는 곳에는 끊이지 않고 있다. 계속하여 주님은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목적을 위해 살아간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전사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다.
여기서 ‘나중(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신 것은 과연 언제까지를 말하는 것일까? 이 말씀은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결코 개인의 일생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70이레와 관련된 예언의 말씀으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인 것이다. 이 말씀은 23절의 말씀에서 더욱 확실하게 규명된다. 주께서“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 인자가 오리라”(23)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들은 주께서 살아계신 초림 때를 국한하여 생각하면 앞뒤를 이해할 수 없다. 장차 예비된 이스라엘의 구원의 날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이처럼 천국의 때는 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예언의 이중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하며 ‘주께서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4,5) 증거하였다.
C 영혼의 주체(24-33)
계속하여 주님은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가가 그 상전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이 바알세블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24,25) 하셨다. 이것은 이 땅에 역사하는 영적 질서를 언급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질서는 오직 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들 안에서 활동한다. 사단의 세상은 늘 거미와 같아서 제자가 스승을 넘어 뜨리고 종이 상전을 넘어서 주객이 전도된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그 진리의 질서를 따를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 낼 수 있느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그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막3:23-26) 하셨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의 분쟁을 보면 정말 이들이 그리스도의 질서 안에 있는 종들인지 아니면 사단의 종들인지 알 수가 없다.
26절에서 주님은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를 말씀하셨다. 그 하나는 우리가 주를 위해 은밀히 행한 선한 일들 설혹 사람들 앞에 오해를 받은 아픔이 있더라도 그 모든 것을 밝혀질 것이며 또한 우리를 대적하기 위해 행한 질투와 시기와 훼방들이 모두 밝히 들어 날 것이라는 말씀이다. 현실은 항상 왜곡되고 역사 속으로 묻히기 쉽다. 그러나 진리는 역사 속에서 밝히 들어 나고 악한 일 또한 역사 속에서 백일하에 들어 나고 만다.
게속하여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에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리라”(27) 하셨다. 이것은 복음의 상황이 바뀔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 복음은 그 시초에서부터 사람들의 핍박을 받으며 은밀하게 전파되었다. 복음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고 십자가의 고난을 넘고 정착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리의 날은 밝아 온다는 것이다.
주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28) 하셨다. 여기서 사용된 ‘두려움’(fear) 에 해당하는 말은 우리 성경의‘하나님을 경외하라’에서 사용된 최극단적 공경에 속한 두려움이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멸하다’는 말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의 시간에서 제외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그는 불지옥에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이 참새와 같지 않으며,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질 수 없다’하셨다. 그 이유는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과 하나님의 다른 것 중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인간은 유한되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시다는 것이다. 가끔 우리는 하나님은 사람의 인격차원에서 생각한다. 그래서 현대의학이 고칠 수 없는 병이라도 걸리면 하나님도 이 일은 하지 못하실 것으로 생각하고 가능한 범위내에서 기도를 하려한다. 그러나 태초부터 영원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흙으로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생의 모든 것을 친히 주관하신다. 하물며 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 아들로부터 복음의 대권을 위임받은 자들에게 속한 일이겠는가?
그러므로 주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932,33) 하셨다. 이 말씀은 정말 두려운 말씀이다. 사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주를 부인하였는가? 하나님의 능력을 대소평가하고 오히려 나의 능력을 앞세우려 했던 일은 없던가? 자신의 실패를 돌이켜 보라 그 실패의 원인이 어디서 왔는가? 그 모든 일에서 주를 인정하고 주의 지혜와 그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면 우리는 결코 실패 하지 않았을 것이다.
III. 사역의 보상(34-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42)
A. 이상의 대결 – 가족과의 대립
주님은 34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하셨다. 이 말씀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하신 말씀과 대치되는 말씀이다. 또한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품성이 평화인 것이라 할 때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다. 믿지 않는 자들이 생각할 때 하나님은 마치 전쟁을 즐기시는 분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와 세상의 이상이나 사고들과 대립될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각 나라는 그 나라의 민족들에 의해 추구하는 이상과 이념이 있다, 그 누구라도 그 이념을 반대하던가 다른 이상을 세우려 하면 그가 누구라도 곧 전쟁이 일어난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바로 이런 관점이라 하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겸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라고 하였고 다시“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2:25)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 하셨다. 복음으로 하여 아들이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아비가 아들, 어미와 딸이 아니라 아들이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새로운 세대가 구 세대를 향하여 반기를 드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떠한가? 완고한 불교가정이나 유교가정에서 복음을 따르기란 쉽지 않다. 애당초 결혼할 때부터 커다란 전쟁을 치루어야 한다. 그들의 생각과 사고가 분명할수록 종교적인 대립은 어느 쪽이 결단이 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독자라도 아들이 예수를 믿으면 출교하여 관계를 끊었다. 이처럼 한 집에 두개의 이념이 함께 공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기록한 것이다.
B. 합당한 자와 합당치 않은 자
이에 주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37) 하셨다. 누가는 ‘내게 오는 자가 바기 부모, 처자와 형제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14:26) 기록하였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교는 혈육의 관계의 질서를 무시해도 된다는 말씀 같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사람과의 관계에 제 1순위로 놓고 있다.
여기서 주님은 사랑의 원리 곧 아가페의 진리를 논하고 계신 것이다. 혈육에 해당하는 사랑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아가페가 될 수 없다. 혈육간에 사랑은 필레오나 스토로게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 안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사랑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1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우선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걸림돌은 모두 가지 혈육에서 비롯된다. 아내와 자식과 부모와 형제자매로 인하여 성경이 요구하는 복음의 질서를 따르지 못하고 자기의 집과 자기의 목숨을 위하여 살아간다. 교회 일보다는 아내와 자냐를 기쁘게 하려 부모가 말하는 잘못된 종교원리에 복종하고 만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계속하여 주님은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셨다. 여기서 사용된 ‘합당한’이란 말은 13절에서 사용한 것과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13절에서의 합당한 사람을 찾으라는 말씀은 ‘준비된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합당한 제자란 ‘가치가 있는 중요한 사람’을 뜻한다. 주님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자로서의 최상의 가치를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39절에서 주님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9) 하셨다. 이것은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를 언급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합당한 자인 것이다. 사람이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생 때 같은 자식을 앞세우고도 살아가야 하는 것인 모진 목숨인 것이다. 더욱이 자기의 눈으로 보지 못한 세상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정말 특별한 사명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다’(롬3:7) 증거하였다.
C. 합당한 보상
여기서 우리는 과연 우리가 부모 처자 형제까지를 버리고 오직 주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의 십자가를 질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또한 그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이에 대한 보상은 바로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 이 땅에서와 영원한 세계에서 누릴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를 위해 보모형제 처자와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서 배로 받고 내세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없다 하신 것이다.
주님은 “녀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하셨다. 이 말씀은 주께서 세우신 제자들의 위상을 말씀하신 것이다. 복음을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진 자들은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하셨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각자 자신들이 행한대로 상을 받는다. 이것은 믿음으로 들어 가는 천국과 달리 부름을 받은 제자가 각각 무엇을 했느냐에 따라 그 주어지는 상이 다르다. 만약 당신이 합당한 예언자를 영접하였으면 당신도 예언자의 상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합당한 의인을 영접하였다면 당신 또한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합당한 하나님의 사람을 영접한 당신에게 그의 합당한 상급이 당신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끝으로 주님은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나는 이 말씀에 감격한다. 혹시 여러분 중에 누가 주께서 받으시기 합당한 제자가 있어 그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었다면 그 아름다운 손길은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에 성경은 엘리야를 섬긴 사렙다 과부의 상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자된 우리는 주께서 받으시기 합당한 복음의 제자가 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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