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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4:33)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능력

이요나 2007. 11. 19. 18:16

(마태복음14:33)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능력

 

(14:33)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소이다 하더라

 

유대인들의 배척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명성은 온 유대와 예루살렘에까지 이르러 실정자인 분봉왕 헤롯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헤롯은 그 즈음에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인 터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신적권능과 관련된 소문을 듣자 두려워했다.  

 

I. 헤롯 안디비스의 메시아 반응(1-12)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러한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니라(2)

 

여기에 소개되는 헤롯은 헤롯대왕이 사마리아 여인 말다케가 낳은 아들 헤롯 안티파스이다. 헤롯대왕의 자기가 다스리던땅의 셋으로 나누어 그의 아들들을 분봉왕으로 세웠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렸으며 유대는 그의 형 헤롯 아켈레오가 다스렸다. 

 

헤롯에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을 듣고 두려워했던 것은 자신의 사생활을 비난한 이스라엘의 선지가 세례 요한을 목베여 죽였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의 문란한 사생활을 비난한 것은 의로운 생활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의 통치자가 문란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헤롯가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였지만 헤롯 가계는 헤롯대왕의 유대교 개종으로 명분상으로는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개종한 이방인들도 율법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음란한 사생활에 대하여는 율법적 제재를 받는 것이 당연하였으며 하나님의 선지자로 보냄을 받은 세례 요한으로서는 국가 지도자의 부도덕한 행위를 책망하는 것은 당연한 직무였다. 오히려 오늘날과 같이 정권과 결탁하여 아부하는 목사들이 잘못된 것이다.

 

그당시 헤롯 안티파스는 나바티안의 딸 아리타와 결혼을 햐였다. 그후 로마에 살고 있는 이복동생 헤롯 빌립1세의 처 헤로디아의 미모에 매료되어 그녀를 충동질하여 본처와 이혼을 하고 헤로디아와 결혼을 하였다. 다시 말하여 제수와 결혼을 한 것이다. 해롯은 자신의 이러한 행위를 책망한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 했으나 백성들이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죽이지 못하다가 그의 생일 잔치에 왕들과 귀인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 때에 그의 처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춤을 추어 마음을 기쁘게 하자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주리라고 맹세를 하였다. 그러자 살로메가 그 어미의 사주를 받아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담아 달라고 청한다.

 

헤롯은 이에 크게 궁지에 몰렸으나 초청한 귀인들 앞에서 맹세를 한 터라 할 수 없이 요한의 목을 베어 소반에 담아 그녀에게 주고 말았다. 이처럼 통치자의 충동적인 무모한 말 한마디가 하나님의 보내신 선지자의 생명을 가볍게 앗아 가고 말았다. 우리는 구약에서 다윗이 우리아의 처 밧세바를 범한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은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죽여야 했었던 사실을 알고 있다. 이처럼 치정 사건은 살인까지 불사하게 됨을 알 수 있다.

 

II. 오병이어의 기적(13-21)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6)

 

A.     백성을 향하신 예수님의 관심

세례 요한이 죽은 후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빈들에 가시니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따라 나섰다. 아마 이들은 평소 세례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이들을 불쌍히 여긴 주님은 이들 중에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다. 앞에서 이미 주님은  무리를 보시고 민망이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9:36)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영적 지도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그 사람들의 저녁 식사가 걱정이 되었다. 사먹을 것도 없는 빈들이었고 그들 중에게는 떡 다섯덩이와 물고기 두마리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주님께 날이 저물었으니 무리를 마을로 보내어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여달라고 주문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께서 빌립의 마음을 떠보는 말로 소개되었다(6:5). 그 때 안드레가 나와서 여기 한 어린아이에게 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가 있는데 이것으로 이 많은 사람들에게 소용이 되겠습니까?하고 답하였다.

 

주님은 무리들을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니 제자들이 떡을 받아 무리에게 주니 그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두니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 참으로 놀라운 이적이 아닐 수 없다.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남자들만 오천명이면 아이들와 여자들을 합하면 최소 15000명의 사람들이다. 열두 제자가 열씸이 떡을 나른다 해도 수백 번은 더 왕래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기적은 물량의 원리에 위배된다. 물질은 소모품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떼어도 떼도 없어지지 않고 부족함이 없이 그 무리들의 배를 충족시키고 남은 것이 떡을 나르던 열두 제자들의 바구니에 가득 찼다니 이것은 마치 이솝이야기에 나오는 요술 방망이와 같은 이야기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모든 물질과 물량의 원리와 질서를 창조하신 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창조하신 모든 천지 만물들이 주 하나님의 뜻 대로 운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시록 기자는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4:11) 기록되었다. 다른 성경에는 만물이 주의 기쁨을 위해 있나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주님은 앞에서 제자들에게 공중의 나는 새를 비유하시며 새들도 주께서 먹이시거늘 너희일까 보냐 하셨다. 따라서 주의 백성들의 생명은 주의 주권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제자들을 통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장차 그들의 손에 길 잃은 양들을 맡기셨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유물론자들인 공산주의는 모두 실패를 하고 말았다. 그들의 실패는 그들의 논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천지만물의 질서와 인간의 생사화복이 창조자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고 아들 예수님은 그를 그의 제자들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맡기셨음을 때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한 모든 국가는 그리스도의 기적 가운데 위대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누리고 있다. 

 

III. 물 위를 걸으심(22-36)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하시고(31)

 

A.      주님의 염려

예수 그리스도의 두번째 이적은 바다 가운데서 나타났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무리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자. 군중들 속에서 분이 바로 오시기로 하신 메시야라고 믿으며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를 눈치채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서둘러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하셨다(6:14-15).

 

예수께서 제자들을 서둘러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하신 것은 제자들이 군중심리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것이다. 여명의 군중이 일어나 제자들을 부추겨 일어서면 소동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2002 월드컵과 대선을 치루며 군중심리에 충들을 받으면 아무도 막을 없는 사태에 처한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군중들의 충돌은 대게 정치적 목적을 가진 집단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다. 만약 제자들이 군중들의 심동심리에 휘말리면 결국 제자들이 충동되어 일이 것잡을 없이 혼란스러워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제자들을 서둘러 보내신 예수님은 무리들을 진정시켜 마을로 보내시고 기도를 하시기 위해 혼자서 산으로 오르셨다. 사경에 이르러 제자들이 바다 가운데서 바람을 만나 고생을 하는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을 구하시기 위해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배를 향하셨다. 여기서 사경이란 새벽 3시부터 여섯시까지를 말한다. 그러니까 주님은 중에서 혼자 밤을 새며 기도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바람에 휘말리던 제자들이 위를 걸어 오시는 주님을 보자 유령인줄 알고 두려워 소리를 질렀다. 아마 제자들 뿐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기절할 정도가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하셨다.

 

이때 베드로나 나서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위로 오라 하소서하고 칭하였다. 이런 상황에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에 주께서 오라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위로 걸어서 예수께 가다가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무서워 빠지게 되었다. 그는 급히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고 소리치자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붙잡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의심하느냐하셨다.

 

우리가 장면을 한번 머리 속으로 그려보자. 과연 세상에서는 일어 없는 기적이다. 영화에서나 나올 그런 이적이다. 이것은 완전히 세상의 질서가 중단되지 않으면 일어날 없는 상황이다. 우주 비행사가 무중력 상태에서 훈련을 받는 모습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바람이 부는 바다 가운데를 걷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어떤 분임을 있다. 그는 모든 질서를 창조하신 분으로 질서를 친히 운행하시는 분이시다. 천지만물의 모든 질서가 그의 장중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상황에 충동을 받은 베드로도 함께 위를 걸을 있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바다를 걸을 있었다. 다만 그의 의식 가운데 심하게 불어 오는 바람을 보자 속으로 빠져 들어 갔던 것이다.

 

오늘 메시지는 우리의 믿음이 오직 천지만물의 모든 질서를 주관하시며 친히 운행하시는 주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던가 주변 환경에 휘말리면 우리의 믿음을 상황에 충동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있다.

 

우리는 때때로 나는 오직 주님만을 믿으며 산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속에서 어떤 문제를 만나면 우리는 주님을 잊어버리고 문제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과연 그럴 때마다 나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속에 있는 자인가 생각하게 된다.

 

먹고 살아가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주께 기도하며 주께 나의 전체를  맡겼다고 말하면서 먹고 살아가는 문제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없는 일이니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스스로 주님을 한계 속으로 묶어 놓고 우리의 능력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주님의 양이라면 당신의 생명과 모든 길은 오직 주님께 맡겨야 것이다. 그러면 어떤 상황이 닥칠지라도 우리의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채우시고 극한 위험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일을 위해 주님은 땅에 오셨고 그의 제자들을 보내신 것이다. 교회는 그분의 몸으로서 그를 따르는 양들의 먹을 것과 위험에서 지키는 목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