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17:20) 천국과 초월 믿음
(마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시공 속에서 펼쳐지는 장차 도래할 천국의 모습을 살펴 보게 된다. 또한 주께서 승천하신 후 이 땅에 펼쳐질 교회의 모습들을 미리 보게 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7장은 주께서 장래의 일들을 우리로 예비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재림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우리 교회들은 주께서 염려하신 대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시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따라 시간의 공간 속으로 들어 간 세 제자들과 함께 세상 사람으로는 가히 보지 못할 초월 세계를 목도하게 된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천국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몇 차원 공간의 거리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국은 우리와 함께 있으되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또 다른 공간의 질서 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여 인간 세상과 전혀 다른 분자 구조 속에 있다는 것이 된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5)
A. 엿새 후 높은 산
17장은 16장 마지막 절로부터 이어져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주님은 제자의 도를 말씀하시며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천사들과 함께 올 날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리고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어떤 제자들이 주의 재림 때까지 살 것이라 하신 것이 아니라 이제 곧 몇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 실제적으로 체험하게 될 천국의 환상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1절에는 “엿새 후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 섰더니” 라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누가복음 9장 29절에서는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째 쯤 되던 날”이라고 기록되었다. 마태와 마가와 달리 누가의 이런 표현은 날자를 24시간 기준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하루의 시작시점인 저녁 6시를 기준으로 할 것인가에 따라 이틀정도 더 추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예수께서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오르신 날은 일곱번째 되는 날이 틀림없다.
이러한 일정을 추정할 때 예수님은 가이샤라 빌립보가 가까운 지역에서 메시야 교육을 하신 후 엿새동안 걸어서 이 산으로 올라 오신 것이 틀림없다. 혹자들은 이 산이 무깃도 근방의 다볼산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가 올바른 성경적 지식이 없이 자기가 편한 대로 정했기 때문이다. 주님과 제자들이 오른 산은 ‘높은 산’이라 칭하였고 또 주께서 이 산에 오르기 전에 계셨던 곳이 가이샤라 빌립보 지역인지라 이 산은 가이샤랴 빌립보의 근원지인 헤르몬산이 틀림없다. 이 사실도 주님이 오시면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B. 예수 그리스도의 변화
마태는 그때의 모습을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여졌더라”(2) 기록하였다. 여기서 변형되었다는 헬라어는 완전한 변화를 의미한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 : 2)라고 기록하였고 또 다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 : 18) 기록하였다.
이 때 제자들은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보았다. 누가복음에는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셨다’(눅9:31)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환상과는 달리, 다른 공간에서 펼쳐진 실제적인 사건이 틀림없다. 우리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예언서의 말씀이나 계시록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의 생애는 실로 예수님과 같은 면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큰 물 기적적인 방법으로 건넜으며 사십일 동안 금식을 하였고 이 땅에 육체의 죽음을 남기지 않았다. 모세의 죽음에 대하여는 증거되었으나 유다서에는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사단과 변론하였다고 기록되었다(유1:9). 성경이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 하였으니 육체를 가진 인간이 죽음을 보지 않았다면 그 목적이 있을 것이며 그것은 결국 계시록의 때에 이루어 질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4) 말하였다. 참으로 당돌하고 용기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자기가 무슨 말을 할는지 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막9:6 참조).
그러나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만나고 있는 곳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 상황 속에서도 현재 자신들이 들어 와 있는 시간속의 세상이 현 세상보다 매우 좋다는 것을 느낀 베드로는 그곳에서 살고 싶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을 따르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곤하여 졸다가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고 기록되었다(눅9:32).
제자들은 졸음에서 깨어 영광의 사건을 보는 순간 정신을 벌떡 차렸을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 모세와 엘리야라는 것을 인지하였다는 것이다. 수십세기 이전의 사람들인데 사진도 없었던 시대의 인물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아마 주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미래의 세계의 상황을 인지할 수 있게 하셨을 것이다. 다만 베드로가 그때까지 아직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위치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곳에 세 사람의 초막을 지어 함께 살기를 원했지 않았는가 싶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는 소리를 들었다. 후일 베드로는 이를 증거하여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벧후1:16,17) 기록하였다.
이 때의 상황에 대하여 마태는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6-8) 기록하였다. 흡사 요즘 환타지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이 신비의 세계의 출입은 실로 그와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C. 엘리야의 미스터리
주님은 산에서 내려 오면서 제자들에게 명하여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 하셨다. 참으로 흥미로운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 같은 어찌 되었던지 간에 소문에 소문을 내어 신비의 세계에 대하여 증거하였을 터인데 말이다.
하긴 몇해 전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목사가 자기 교회에 사도들이 예배에 참관하고 있다고 영상물을 조작하더니 최근에는 어느 수녀가 마리아의 출연을 조작하여 떠벌리며 혹세무민하고 있다. 문제는 이 시대에도 이러한 일들에 미혹당하고 있다는데 있다.
예수께서 이 사건을 비밀하게 봉하신 것은 백성들 중에 오해를 일으켜 실족하게 될 일들을 경계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 가운데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증거하라 하셨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제자들은 그 시대의 가장 커다란 화두로 등장한 엘리야의 미스터리에 대하여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합니까?”(10) 하고 질문하였다. 이 말 속에서 그들은 아직도 세례 요한에 대하여 이상적인 이해를 터득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오늘날 계시록을 보며 갑론을론하는 우리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이에 주님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11,12) 말씀하셨다. 성경은 “이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았다”(13) 기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음에 대한 인간의 원리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어떤 신비에 쌓인 내용을 이해함에 있어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없다. 인간의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 내에서 생각하고 또 이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비밀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 수 있고 설혹 성경을 통해 전달된 메시지라도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과 알게 하심을 따라 현실 세계와 신비의 세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세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변화산상에서 초월 공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실존을 체험하였고 또 삶 속에서 실제로 세례 요한의 사역을 만나 보았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들은 바 성경 말씀 곧 서기관들이 증거하는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에 대한 이상적 이해가 가능해진 것이다.
수백년전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4:5)라고 예언하셨다. 그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예언의 말씀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엘리야의 등장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때가 되어 세례 요한이 미리하신 예언의 말씀을 따라 엘리야의 심령으로 와서 그리스도를 그의 백성들 앞에 소개하자 그들은 또 다른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생각했던 바와 달리 세례 요한이 엘리야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일으키지도 않고 또 기대 이상으로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로하여 그들은 예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던 것이다.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을 통하여 엘리야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나 인간 생활 실제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이 초월된 또 다른 현실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세기 초에 그러한 초자연적인 신비에 속한 것들의 이해를 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 이 시대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열린 하늘문으로 들어가 실제의 초월 공간을 다녀 온 제자들도 주님의 설명을 들은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요한 계시록에서 초월공간 속에 열린 천국과 이스라엘의 영광의 시간들을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교회들은 아직도 이 말씀에 대해 많은 오해를 거듭하고 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시에 본 열린문의 내용도 과학적으로 열 수 없는 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계시록 11장에 소개된 초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등장한 성경역사에 실존한 두 증인의 출현을 보게 된다.
이 두 사람은 적그리스도와 맞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다가 적그리스도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게 되다가 삼일 반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가 들어가 저희가 발로 서서 이리로 올라오라는 큰 음성을 듣고 그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간다(계11장 참조). 그러나 우리는 이 두 증인이 모세와 엘리야라는 확증을 내릴 수는 없다. 아직 우리는 현세의 공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II. 믿음의 현실(14-21)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
A. 9명의 제자들과 서기관들의 변론(막9:24)
이 내용은 예수께서 세 제자와 변화산상에서 내려와 산 아래 마을에 남아 있던 아홉명의 제자들과 만났을 때 발생한 사건이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자 한 사람이 달려와 꿇으며 간질에 걸려 심히 고생하며 자주 불과 물에 넘어지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구하며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니 능히 고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마태는 간질이라고 기록하였지만 마가는 귀신들린 내 아들을 고쳐달라고 하였다. 귀신들린 아이에게 나타난 현상이 마치 심한 간질병에 걸린 것 같았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 데려오라”(17) 하셨다. 이 말씀은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질책하신 말씀이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교회를 향한 말씀일지도 모른다.
주님은 앞에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는 당대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향하여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라고 하셨다. 그런데 오늘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고 페역한 세대라고 하셨다. 여기서 패역하다는 말은 뒤틀려서 잘못된 길로 나가는 행위를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마가는 이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여 그곳에 남아 있던 제자들이 서기관과 더불어 변론을 하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막9:14). 이를 본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막9:16) 질책하셨다. 여기서 변론이란 상대의 허물을 찾아내기 위한 논쟁을 뜻한다. 서로 교리적인 논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B. 간질- 귀신들린 아이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사도의 직무와 능력을 받았으므로 나름대로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귀신들린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치를 취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주님의 명을 받아 각 고을과 성을 다시며 귀신을 쫓고 병을 고쳤던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돌아와 주께 보고하여 “귀신들도 우리를 보고 도망하나이다” 하였다. 따라서 제자들은 어쩜 자기들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아이에 머리에 손을 얹고 귀신아 나가라 하고 소리를 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귀신은 그 옆에서 코웃음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로하여 서기관들과 논쟁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마가는 이 사건에 대하여 아이의 아비와 주님과의 현장 대화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주님은 아이의 질병의 발병에 대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고 상세히 물으셨다. 마치 의사와 같은 모습이다. 아비는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하였다. 그는 아들 속에 귀신이 역사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우이 주변에 일어나는 괴기한 일들을 보고 귀신의 역사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인생의 문제 속에서 영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제반 문제를 해결하는 첫번째 지름길인 것이다. 아비는 계속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겨 도와 주소서”(막9:22) 하셨다. 이 때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하시며 귀신을 꾸짖어 내어 쫓으셨다.
C. 믿음의 신적요소
이 상황을 지켜 본 제자들은 멀슥해져서 예수께 나아와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하고 물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못할 것이 없으리라”(20) 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믿음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이 믿음은 제자들이 알고 있는 보편적인 믿음의 의미와 다른 것이었다. 여기서 주님은 각 사람이 갖고 있는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를 떠나 그 믿음의 실행단계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말할 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국한 시키려 한다.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하였다.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졌다 하는 것으로 자신이 믿음 있음을 강조하려 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보편적인 믿음이 실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되고 있느냐를 요구하고 계신다. 만약 우리 기독교가 하나님과 자신의 일방적인 관계만을 믿음이라 한다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의 계명은 유명무실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만한 믿음을 요구하신 것은 우리의 믿음이 세상의 원리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신적속성에 속한 믿음을 언급하신 것이다. 비록 그 믿음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라해도 그 믿음의 실체가 나의 생각과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에 의한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신적속성의 믿음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 제자들은 이미 사도로 부름을 받았고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복음을 선포할 권세를 받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제자들은 능히 귀신을 쫓지 못하였던가? 이것은 그들의 사역적 바탕이 하나님을 뜻을 따르지 않고 어떤 교리적 바탕과 인간적 생각에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앞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셨다. 이것은 비단 그들의 교리에 휘말리지 말하는 말씀 뿐이 아니라 너희도 저희와 같은 종교적인 사람들이 되지 말하는 경계의 말씀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제쳐 놓고 서기관들과 본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서로 교리다툼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복음사역자의 사명에서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글 성경에는 기록이 빠졌지만 킹제임스 성경에는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나가지 않느니라” (마17:21) 기록되었다. 또한 마가도 “이르시되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9:29) 기록하였다. 다시 말하여 이 권세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아들에게 주신 것이므로 이를 위해서는 주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하여야 하고 성령의 나타나심을 위해 금식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금식을 하는 것은 영적영역을 감지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 살면서 육체적인 감각이 살아 있어서 귀신과 같은 영적부분을 감지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금식을 하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맑아지고 우리 안에 영이 긴밀하게 느껴지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의 믿음은 영적 영역에 있어야 할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영적 영역에 있다면 물질세상의 어떤 요서처럼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성에 있음을 알려 주신 것이다.
III. 오해와 실족(22-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실족)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27)
A. 메시야 문제(22-23)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22) 말씀하셨다. 마가는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였다 기록하였다. 또한 누가복음에는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눅9:43,44)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말씀이 숨김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주님은 장차 있을 메시야의 고난에 대하여 두번째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장래의 일이기도 하지만 제자들이 직접 눈으로 체험한 것과 같은 많은 이적과 하늘에 속한 능력을 나타내신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게 될 것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신 말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런 방법을 택하여야 하는 지 알 수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속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니엘서를 비롯한 예언서에 종말에 관한 많은 말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먼저 받은 유대인들이나 또 그리스도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도 아직 이 말씀에 대한 바른 분변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말씀들은 하나님께 속한 계시라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신 종들을 통하여 예언될 것이기 때문이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12:4) 하였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가 되기까지는 다니엘을 통하여 언급하신 하나님의 계시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계시록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요한에게 전달되었다. 요한이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기록하려 하였더니 하늘에서 “일곱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계10:4) 하였다. 이로서 우리는 하늘에 속한 계시는 주의 허락하신 때가 아니면 알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B. 세금문제(24-2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돌아 오자 반 세겔 받는 자 곧 당시 20세 이상의 남자들에게 성전세를 받는 자들이 와서 왜 너희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않느냐 다구쳤다. 참으로 난처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수께서 성전세를 내자니 성전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난처해 지고 또 내지 않자니 현세의 법에 위법이 된다.
이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물으셨다. 베드로는 “타인에게 받습니다” 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장차 이 땅에서 펼쳐질 천국에도 통치구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하셨으니 말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교회의 면세에 대하여 언급하는 시민단체들이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종교시설도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공평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장차 주의 나라가 임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세를 면하게 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양자로 입적을 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저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27)하셨다. 이 일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라는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장차 이 땅에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의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미 초월 공간 속에 펼쳐진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한 베드로로서야 이해가 되겠지만 아직 그 세계를 깨닫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타당한 말을 한다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가끔 타교단 목사들을 만나 장차 올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하여 변론을 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변론은 교단적 교리적 논쟁으로 시시비비가 일어나고만다. 그때마다 나는 이들과 논쟁을 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느끼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일들이 그들에게는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아는 것을 말하여도 그들에게는 신학적인 논쟁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다수 속에서 나는 도리어 이단적 교리를 갖은 사람으로 오해를 받게 된다.
오늘 우리는 이 모든 말씀을 통하여 천국의 지혜는 그 아들들에게 주신 권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친구라 하시며 친구에게는 비밀이 없다 하신 것이다. 이제 이 위대한 사실을 아는 우리는 누룩을 가진 자들과 변론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아는 지혜로서 사람들을 긍휼이 여겨 악한 영들로부터 구원해 내어야 할 것이다. 주님은 이러한 초월 믿음을 갖기 위하여는 기도와 금식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만이 세상 속에서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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