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21:44) 깨어질 것이냐? 깨뜨려질 것이냐?
(마21:44) “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오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성취되어 가는 단면이 소개되고 있다.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예언이다. 말씀이 있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과 주께서 이 땅에서 행하실 일들 그리고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서 일어날 일들과 또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함께 펼쳐지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하나님의 계획들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생각이 필요하다. 성경은 종교적 경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기업을 물려받을 우리를 위한 삶의 지침서이며 오늘과 장래에 성취될 하나님의 예언들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오늘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의문들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며 우리의 믿음의 실제가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한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9)
A. 예언의 성취(1-17)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던 예수께서 벳바게에 이르러 두 제자를 보내며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2,3) 말씀하셨다. 마가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그곳에 가보니 말씀하신대로 나귀새끼가 매여 있고 주인이 왜 나귀를 풀려 하느냐 물어 주께서 쓰시겠다 하니 바로 보냈다 기록되었으며 마태는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4) 기록하였다.
이 일은 오늘날 우리가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 부르는 날로서 주님은 제자들과 그리고 함께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시편 118편을 찬송하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갔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길에 펴며 또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노래하였다. 시편118편 25절에는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기록되었다. 여기서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히브리어가 바로 호산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무리들의 찬송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셨다.
사실 오늘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수백년전의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일이였다. 그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기록하였다. 누가 이처럼 오백여년 후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또 예언을 하였다 해도 그대로 성취한다는 확률은 없다. 더구나 이 예언이 바벨론 시대의 다니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날, 동일한 일자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신묘막측한 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B. 예언의 이중성
천사는 다니엘 선지자에게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네 백성과 네 거룩한 백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단9:24) 하였다. 여기서 한 이레란 7년을 뜻하며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이 부분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성취된 사건이다. 그러나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이 부분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이 일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성취될 것이다.
천사는 계속하여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어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에 곤한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를 이룰 것이요”(단9:25)하였다. 예루살렘 재건 명령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이미 성취된 사건으로 이 일은 주전 445년 3월14일에 있었다.(대하36:22,23).
’69 이레’라 하였으므로 69x7은 483년이고 그때는 바벨론으로 일년이 360일이므로 173.880일이 된다. 따라서 주전445년 3월14일부터 173.880일을 환산하면 주후 32년 4월6일이 되는데 바로 이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신 날이다. 누가 이처럼 천년을 넘나들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를 계획할 수 있으며 성취할 수 있겠는가?
또한 천사는 다니엘에게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단9:26) 말하였다. 우리는 이미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므로 끊어진 사실을 알고 있으며 지금 우리 눈 앞에는 한 왕의 백성이 셋팅되어 가고 있음을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이제 곧 일어날 일로서 바야흐로 이스라엘의 남은 한 이레의 역사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C. 종교적 현실
예수께서 무리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니 온 성이 소동을 하기 시작하였고 주께서 성전 안으로 들어 가셔서 그곳에서 매매를 하는 자들과 환전하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시고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13) 하셨다. 이 말씀도 이사야 선지자로 미리 하신 말씀으로 주께서 친히 사람들 앞에서 성취하신 것이다(사56:7).
예수님의 성전 청소는 초기와 후기에 두 번 있었다. 그 당시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제물로 갖고 온 짐승들을 트집잡아서 물리치며 자기들의 짐승들을 바싸게 팔았으며 또한 당시 통용되는 로마화폐는 이스라엘 하나님 성전에 드릴 수 없다 정하여 비싼 수수료를 받고 환전을 하고 있었다.
주께서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친히 성취하고 계실 때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나와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분노하며 예수께 와서 너희가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냐고 따지기 시작했다. 이에 주님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16) 하셨다. 이 말씀은 시편 8편 2절에 기록된 말씀이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보며 생활 속에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보는 우리와 또한 성전에서 주일마다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자들은 어떠한가? 과연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성취되어가고 있는가? 또 우리는 우리 앞에서 성취되어 갈 말씀들을 살펴 보고 있으며 또 얼마나 가르치고 있는가? 이러다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기록된 그날이 도적같이 이르는 것은 아닌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II. 예언의 실제(18-22)
“길가에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앞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19)
A. 무화과나무의 저주의 예언(18-22) 창3장- ‘무화과나무 잎’
여기서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접하게 된다. 앞에서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취하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현장에서 실제로 성취되는 장면이 돌출되고 있다.
베다니에서 저녁을 맞으신 예수께서 이른 아침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 가시다가 시장기를 면하시려고 길가의 무화과나무(올리브나무) 앞으로 가셨으나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를 저주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하시니 나무가 곧 말라 버린 것이다. 마가는 이를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랐다’(막11:21)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그 모든 내용들이 비유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포도원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무화과 나무는 복음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이다.
무화과나무가 성경에 처음 기록된 것은 창세기 3장 7절이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고 자신들이 벗은 줄을 깨닫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벗은 몸을 가렸다. 무화과나무 잎이 사람의 수치스러움을 가려 주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오늘날도 무화과 잎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24장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 광주리와 극히 악한 무화과 광주리 에 대한 말씀이 있다(렘24:2-8). 또한 호세아도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멸매를 봄같이 하였거늘..”(호9:10) 하였다.
원래 무화과나무는 잎이 나오기 전 2월경에 열매가 나오고 삼사월에 잎이 나오기 시작하기 때문에 만약 잎이 무성하다면 이미 익은 열매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잎이 무성하다면 자연이 그 열매가 나오면서부터 여물 때까지 그 과정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오늘 이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이제 곧 다가올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말씀 이후 이스라엘은 무화과나무처럼 뿌리부터 말라버려 버림을 받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그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교회를 세우신 후 승천하셨다. 그후 70년이 되는 해에 로마의 디토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멸망을 당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중단 되었다.
그러나 몇일 후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다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막13:28,29)고 하시며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막13:20)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라고 하신 말씀은 꼭 이루어질 예언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 것을 보고 있다. 멸망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1948년 5월14일에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땅에서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대환난의 때에 겨우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주께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43) 하셨기 때문이다.
B. 성경 말씀과 믿음과 기도
이처럼 기이한 일을 목전에서 목도한 제자들이 예수께 “무화과나무가 어찌 말랐습니까?”(20) 고 물었다. 이것은 마른 무화과나무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21) 하셨다.
이 말씀은 정말 놀라운 예언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써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면 산에게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그리 될 것이라 하신 것이다. 더욱이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22) 하신 말씀은 믿음의 기도의 중요성을 뜻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인용하여 여러 가지 설교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그들이 말하는 목적달성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 여기서 믿음이란 성경 말씀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그 말씀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을 때에 그 깨달음을 갖고 기도하면 주께서 모두 성취하신다는 말씀이다.
후일 사도 요한은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함은 들으심이라” (요일5:14) 하였고 또 야고보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성경은 우리에게 깨달음의 믿음과 기도를 요구하고 있다.
II. 합리적인 이론과 실제의 비합리(23-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42)
A. 권세의 시비(23-3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와 예수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느냐” 물었다. 그들은 지금 예수께서 성전청소를 하신 것과 또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는 것에 대한 권세의 근거를 말한 것이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이에 주님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하시며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물으셨다. 이에 그들이 서로 의논을 하였지만 만약 하늘로부터라면 왜 너희가 저를 믿지 않았느냐 할 것이요 사람으로부터라고 답하면 모든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므로 백성이 두려워 그리도 말하지 못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에 주님은 “그러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하시고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3년전 일이다. 미국 플로리다에 두어 달간 머물 때의 일이다. 나는 그 지역의 성도집에 머물며 그 집 사람들과 저녁마다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성경공부가 시작 되자 소문을 들은 인근의 몇 사람들이 함께 모여 들었다. 한 달이 될 무렵 어느날 그 지역 목사 3사람이 찾아와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 지역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갖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들은 그 성도들은 우리 교회 소속이니 당신이 성경공부를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였다. 주의 성도들을 내 성도 네 성도를 따지다니 그들이 과연 목사들인가 싶었다. 나는 그들에게 목사가 그 어디에 있던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성경이 명한 것인데 그를 못하게 하는 당신들의 생각이 불경스럽다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B. 두 아들의 비유(28-31)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물으시며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가 맏아들에게 이르되 아들아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가겠습니다 하고 답하고 가지 않고 둘째 아들에게도 그와 같이 말하니 가가 가지 않겠다고 하더니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이 두 아들 중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한 것이냐?’하셨다. 그들이 답하여 ‘둘째 아들입니다’ 답하였다.
이에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31,32) 하셨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위 비유 중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의 경우가 반대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첫째가 이스라엘이고 둘째가 이방인이라는 적용을 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여기서 주님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종교지도자들과 그들이 죄인이라고 취급하는 세리와 창기들 중 의에 갈급하여 복음에 순종하는 믿음의 태도를 언급하신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도 먼저 된 자들이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는 원리를 다시 확인하신 것이다.
C. 주인의 포도원 비유(33-46)
계속하여 주님은 그들에게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여 “어떤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을 파서 포도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세워서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먼나라를 갔더니 열매를 맺는 때가 되어 실과를 받으려고 농부들에게 자기 종들을 보내니 농부들이 그 종들을 잡아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그가 다시 더 많은 종들을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와 같이 행하므로 그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며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저를 죽이고 그의 상속을 가로채자 하고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내쫓고 죽였느니라”(33-38) 하시며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오면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39) 물으셨다. 이에 그들은 ‘그 사악한 자들을 무참히 멸하고 자기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 것입니다’ 답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은 주께서 물으신 두 비유에 대하여 모두 정확한 답변을 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론적으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물으신 비유에 대한 뜻은 합리적인 믿음은 그 이론과 실제가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서에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3-25) 기록하였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은 가장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의롭고 선하며 믿음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이 생각하는 도덕관이며 윤리관이며 종교관이다. 죄의 문제를 다룰 때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정작 자신에게는 관대한 잣대로 재려고 한다.
과거 다윗은 자신의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부하의 아내를 간음을 행하고 그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부하를 남의 손을 빌려 죽였다. 이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어느 부자의 집에 늦은 시간에 손님이 왔는데 부자가 자기 양을 아껴 잡지 아니하고 오직 한 마리 밖에 없어 자식처럼 여기는 집의 양을 빼앗아 잡은 비유를 말하며 왕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이에 다윗은 ‘그런 놈은 가만이 두어서는 않된다. 사배로 갚아야 할 것이다’ 답하였다. 남이 한 것은 불륜이고 자신이 한 것은 로맨스라 한 것이다.
이에 나단은 ‘옳소이다. 바로 이 사람이 왕이요. 주께서 불의한 사울의 왕위를 빼앗아 왕에게 주고 양들을 잘 돌보리라 했거늘 왕은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벼렸소. 만약 왕이 필요한 것이 있었다면 주께서 이것도 주고 저것도 주시지 않았겠오?’ 답하였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 기준에는 관대하려는 습성이 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의의 도를 파괴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요한이 의의 도로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않았다 한 것이다.
D. 누가 뭐라고 해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될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물으셨다. 이 말씀은 시편118편에 기록된 말씀이다. 이 비유를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 건축 중에 일어 났다고 한다.
이스라엘 성전은 아름다운 미석을 다듬어 지었는데 석공들이 채석장에서 돌을 떠 성터로 움반하였다. 각 돌에는 그 번호가 있어 건축자들은 도면에 적힌대로 돌을 마추어 쌓았는데 어느날 번호가 맞지 않는 돌이 온 것이다. 건축가들은 그 돌이 잘못 온 것으로 여겨 밖으로 둘려 버렸다. 그리고 성이 완성되어 성전 머릿돌을 세우려 했는데 머릿돌이 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건축자들이 채석장으로 사람을 보내어 머릿돌을 달라 하니까 머리돌은 이미 벌써 보냈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저기 찾아 보니 그들이 필요없는 돌이라 생각하여 밖에 굴려버린 돌이 그 도면에 꼭 맞는 머리돌이였던 것이다.
또한 성경에는 돌과 관계된 많은 예언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풀이하여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단2:34,35) 하였다. 이것은 장차 이 사단의 왕국을 멸하고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뜻한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역설하며 “우리가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10:4) 증거하였으며, 후일 베드로 사도는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경에 기록하였으니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며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5-8) 하였다.
이제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43) 하시며 다시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44) 하셨다. 주님은 지금 당신에게 공이 이미 당신에게 넘어갔으니 네가 결정할 일만 남았다고 하신 것이다. 이미 주께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의 말씀이 너희에게 있으니 너희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열매맺는 백성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라는 말씀이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직도 당신의 마음 속에 당신의 주도권을 지키고 싶은 욕심이 있는가? 그렇다면 돌이 당신의 머리에 떨어지는 날 당신은 가루가 되어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신약강해 > 마태복음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23:37) “눈 먼 인도자와 뱀” (0) | 2008.01.12 |
---|---|
(마태복음22:14) “택함을 받은 자” (0) | 2008.01.08 |
(마태복음20:33) "땡잡은 사람들" (0) | 2007.12.22 |
(마태복음18:3) 천국의 조건 (0) | 2007.12.08 |
(마태복음17:20) 천국과 초월 믿음 (0) | 2007.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