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23:15) “눈 먼 인도자와 뱀”
(마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우리가 23장의 메시지를 온전히 분변하기 위해서는 문장의 구성부터 잘 관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문단구성이 난해하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이 메시지가 근본적으로 누구를 향한 것인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물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정죄한 것이지만 서두에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태는 서두에서 제자들과 무리 곧 주를 따르는 회중들을 위한 메시지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향후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끌고 나갈 지도자들에게 시사하는 말씀임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두번째로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특성을 언급하신 후 그들의 일곱가지 행위를 저주하셨다. 이것이 13, 14, 15, 23, 25, 27, 29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곱의 저주는 크게 셋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첫째는 소경된 인도자로 인하여 발생된 것(13,14,15)이며 두번째는 속과 겉이 다른 권위적 위선(23,25,27)으로부터 온 것이며 세번째는 선지자의 잘못을 알고도 돌이키지 않은 데(29) 있다.
그러나 여기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16절에 기록된 화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소경된 인도자 너희’라는 데 있다. 이것은 분명 입으로는 맹세를 일삼으며 무지하여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며 재물에 눈이 어두운 자들과 또한 ‘위선과 불법’(28)으로 가득한 자들에게 하신 경고의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메시지를 대하는 제자 된 우리는 자신이 지금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 깊이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종말을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12)
A.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세가지 특징(2-7)
주님은 서두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를 말로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2,3) 라고 말씀하셨다.
*권위의 도전
여기서 ‘모세의 자리’의 헬라어 카테드라(kathedra)는 ‘권위의 자리’를 의미하며 로마황제의 말이나 오늘날 주교의 자리에 해당하는 권위를 뜻한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 아래의 최고의 자리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 하셨다. 이것은 그들이 기록된 율법을 가르치고 있음을 뜻한다. 또한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하신 것은 저들의 언행이 서로 일치 하지 못하는 모순됨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계시록 2장에서 교회의 출발인 에베소 교회 지도자에게 네가 니골라당을 미워한 것을 내가 안다 나도 그들을 미워한다 하셨다. 여기서 니골라당이란 헬라어 제사장을 뜻하는 니콜(Nikol)과 평신도를 의미하는(Laity or Laocean)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평신도 위에 제사장직의 설립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특별히 거룩한 직분을 하나님 앞에 별도로 세운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장벽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음을 알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짐승의 제물로 인간을 위한 희생제사가 필요없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날 로마 카톨릭의 권위의 자리로부터 탈피한 우리 교회는 어떠한가? 다시 목회자의 권위를 세우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주님은 니골라당의 직제를 부활한 두아디라 교회를 큰환난에 던져버린다 하셨다.
2. 비종교적 행위
계속하여 주님은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 하셨다. 이러한 행동은 지도자 위치에 있는 극단적인 폐단으로 군주주의 권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자신들과 다른 사람의 인격의 격을 구분하는 것으로 주인과 노예의 신분으로 나누는 것과 같다.
오늘날 어떤 목사들은 자신들을 신의 축복의 통로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시 말로라도 대항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처럼 겁박을 하기도 한다. 사실 카톨릭의 신부들의 고해성사도 일종의 신적권위에서 출발한 것으로 스스로를 신부(神父)라 칭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신의 대리인으로 끌어 올린다.
3. 위선적 행위
계속하여 주님은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곧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5-7) 말씀하셨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엇을 보이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위선자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와 같은 행위를 좋아한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리라” (마태6:1) 하시며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6:16) 경계의 말씀을 하셨다.
여기서 경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복사하여 담은 작은 상자로서 랍비들은 이것을 손목이나 머리에 매고 다녔다. 또한 옷술을 크게 한다는 것은 교황이나 주교들의 도포 끝단에 다는 화려한 술들을 뜻한다. 오늘날 기독교 케이블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한국의 유명교회 목사들 또한 날이 갈수록 주교들과 같은 화려한 예복을 걸치고 등장하지 않는가? 문선명교도들의 축제의 사진들을 보라 문선명 교주 부부와 그 자녀들은 마치 신라시대의 제사장들 같지 않은가? 오늘날에도 의복으로 권위를 포장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더욱 높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은 특별한 의복을 입기를 좋아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여 에덴동산에 두셨을 때에는 그들이 벌거벗었어도 부끄러움이 없었는데 사람들은 그 지위에 맞게 옷을 걸쳐 자신의 권위를 돋보이려 하고 있다.
우리는 근래에 와서 자주 텔레비전을 통하여 헌법재판소의 대법관들이 붉은 제복을 입고 판결을 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자주색 법복을 걸치고 근엄한 표정으로 판결문을 낭독하고 묵묵히 그 자리를 떠난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국민의 권익을 위해 법률을 시행하는 판사들이 특별한 법복을 꼭 입어야만 권위가 서는 것인가 의심스럽다. 권위는 제복이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입각한 말과 행동의 일치에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만약 오늘날 권위를 높인다고 해서 대통령이 옛 왕들의 옷을 걸치고 신년인사를 한다면 그건 분명 코메디이다.
얼마 전 제17대 대통령 당선자 인수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청와대의 기구를 대폭 축소하고 오랜 동안 대통령 휘장으로 사용하던 봉황을 없애기로 하였다 한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개혁이 아닐 수 없다. 그 권위가 신령한 동물로 나오는 것처럼 생각했던 옛 대통령들은 스스로 청와대 우상을 섬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 세운 목자적 직무이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권위를 모세의 자리에 올려 놓고 백성들을 지배하고 통치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이들을 향하여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롬2:17-22) 책망하였다.
B. 제자들을 향한 명령(8-12) – 봉사와 섬김의 본질
주님은 이제 제자들을 향하여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8) 하셨다. 이 말씀은 곧 너희는 존경받는 위치에 서지 말라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른 제자들에게 커다란 쇼크의 말씀이다. 오늘날 신학생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어떤 반응들이 일어날까 싶다. 그들이 바라는 바는 모두가 존경받는 목회자가 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9) 하셨다. 이 말씀 또한 이해가 쉽지 않은 말씀이다. 바울도 디모데를 아들이라 하였고 또 베드로도 마가를 가리켜 아들이라 칭하였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10)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이제 우리는 주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의 위치를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를 세우심은 우리로 사람들의 존경과 공경의 대상으로 세운 것이 아니며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속하여 그의 의를 전하기 위해 세우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셨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데 있다. 오늘 주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모두가 스스로 최고의 선생이 되고자 하고 또 교단의 총수가 되고자 하며 사람들을 가르치는 지도자의 위치에 서고자 한다. 이것은 혈통으로 되는 일도 아닌데 그 권위를 얻고자 권위자 앞에 줄을 서며 또 스스로 지도자가 되고자 한다.
바울은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나느니라”(골2:16-23) 증거 하였다. 이미 이러한 일들이 초대교회에 나타나려는 움직임들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권위에 대한 마음이 있음을 아시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베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마11:29) 말씀하셨고 다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20:28) 말씀하셨다.
오늘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특성을 언급하시며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셨고 다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낮아지리라”(12)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섬김의 본질이 겸손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렇다고 그 맡기신 직무를 다한 자들에게 세상에서 멸시받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섬기는 자로서의 봉사의 자세를 말씀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후일 하늘에서 받을 상급을 바라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5:6) 증거하였다.
II. 저주 받을 일곱 가지 위선 행위 (13-36) - 13, 14, 15, 23, 25, 27, 29
“뱀들아 독사의 세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3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저주 받을 위선적 신앙 일곱가지를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들의 행위를 저주하시기 위한 것보다는 장차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고 나갈 그의 제자들에게 경계의 말씀으로 하신 것이다. 그들 또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 말씀하신 일곱 가지 저주는 크게 두 가지 주재로 나눌 수 있는데 세번째까지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신성과 그의 임재하심을 알지 못하는 무지 속한 것이고 네번째로 일곱번째의 저주는 속과 겉이 다른 지도자의 위선에 속한 것이다. 주님은 항상 그들의 특성을 언급하신 후 그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셨음을 알 수 있다.
A. 무지한 종교 행위 3가지(13,14,15) - 신성과 임재의 무지
이제 주님은 제자들에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저주 받을 일곱가지의 행위를 지적하셨다. 먼저 주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 가지 않고 들어 가려 하는 자도 들어 가지 못하게 하는도다”(13) 하셨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천국문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 지도자의 무지
흥미롭게도 누가복음에는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 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눅11:52) 기록되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들이 천국과 관련된 지식을 가르칠 임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최근 각 교파들에서 가르치는 신학적 교리들을 살펴 볼 기회가 있었다. 그들이 종종 우리가 가르치는 종말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과 성령에 관한 지식에 의문을 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구원관과 종말론 교리들을 살펴 볼 때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그들의 말하는 것은 그들도 아직 깨우치지 못한 성경의 계시로서 그들은 그에 대한 성경적 지식을 탐구하려도 하지 않고 다만 자신들의 교파에 근거한 교리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갈보리채플에서 가르치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라고 말하면서도 끝내는 자기들의 교리로 돌아가 버린다. 그것은 만약 자기 교파의 교리를 부정하면 그곳에서 목사의 권위를 받은 자신들의 위치가 가치적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를 가르친 스승과 아비와 지도자의 가르침을 따라야 후일 자기도 그 자리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2. 잘못된 지도자의 기도
두번째로 주님은 14절에서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위선자들이여 너희가 과부의 집을 삼키고 겉치레로 길게 기도하는 도다”(KJV-한글성경 없음) 하셨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위선자들의 기도의 목적이 헌금을 받아내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방법을 가르치실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말씀하시여 우리의 기도대상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심과 또 그 목적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예배하고 그의 나라가 속히 임하시기를 기원하며 그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라 하셨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끔 다른 교회의 헌신예배에 설교자로 초청 받을 때가 있다. 대부분 그럴 때의 설교 제목은 그 교회가 필요로 하고 있는 부분에 맞춰 주기를 주문하고 또 설교 전 대표기도를 통해서 나오는 기도문은 하나님이 아닌 성도들에게 향하여 교회를 위해 헌신적 믿음이 나타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왜 이곳에 왔는가 하는 후회가 되기까지 한다. 과연 그들은 왜 목회자가 된 것일까? 그들은 교회의 직무를 상실한 것이다.
3. 잘못된 가르침의 결과
세번째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15) 하셨다. 이 말씀은 참으로 듣기 조차 민망하고 두려운 말씀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목사가 되지 않는 것이 휠씬 복이 될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영혼에 속한 범죄이다. 주님은 가룟 유다에게 네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말씀하셨다.
성경은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5:16) 하였다. 우리는 이들의 영혼이 계시록 20장에서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는 것을 보게 된다.
보라-1 (여기서 주님은 16절에서 22절에 이르기까지 잠시 화제를 바꾸어 위에서 언급하신 세가지 저주받을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그 근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 말씀을 듣는 대상인 제자들과 무리들이 꼭 귀담아 들어야 할 메시지이며 그들의 벋은 가지 된 우리 또한 살펴 듣고 잘못에서 돌이켜야 할 예언적 메시지이다)
A. 소경 된 인도자의 문제점 (16-22)
주님은 16절에서 “화 있을진저 소경 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어리석은자)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하셨다. 이 말씀은 앞에서 언급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빗대어 하신 말씀이지만 주님의 의도는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향하신 것이다.
맹세에 관하여는 주께서 이미 산상수훈을 통하여 “옛사람에게 말한 바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읍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느니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을 좇아 나느니라” (마5:33-37)말씀하셨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갈 그의 성도들이 경솔히 호언장담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기 때문이다.
1. 영적 신앙의 상실
여기서 말씀하신 성전은 지성소 곧 하나님의 임재하신 곳을 말하며 또한 맹세란 신앙인의 믿음의 신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너의 믿음의 본질이 어디에 있으며 내가 무엇을 중히 여기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말씀은 오늘날 모든 성도들에게 다시 고취되어야 할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이다.
우리 말에 제사보다 젯밥에 마음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그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비유한 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말이 소경된 인도자들의 어리석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소경된 지도자들의 무지를 책망하신 말씀이다. 주님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넘어진다 하시며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함이라”(요9:40) 하셨으며 다시 “너희가 소경이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9:41) 하셨다.
많은 성도들이 주일이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가지만 그 목적은 자신의 부귀와 재물을 위한 기복신앙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기복신앙이 소경된 인도자들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당신이 잘 살기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많은 헌물 드리기 위해 부자가 되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미 주님은 산상수훈을 통하여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6:21) 하셨고 엄히 경계하여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지도자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은 믿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섬김보다 헌물에 있기 때문인 것을 깨우치신 것이다.
2. 신적권위의 상실(20-22)
계속하여 주님은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20-22)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앞에서 하신 말씀의 후속조치로서 우리가 무엇으로 맹세를 하든지 간에 그 모든 생활의 범위가 하나님 안에 속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과 임재하심에 대하여 소홀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땅과 하늘과 바다와 내 영혼이 머물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신이 임재하심을 믿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도 말하여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를 화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약5:12) 증거하였다.
민수기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은 범죄하여 그 생명을 스스로 해하였거니와 그들이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되었나니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편철을 만들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리라 하신지라” (민15:38-40).
이 말씀은 고라의 반역을 심판하실 때 하신 말씀으로 범죄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진 성물들은 주의 임재하심으로 거룩하게 되었음을 증거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않으면 누가 너희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하시며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 하셨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노래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내게 속한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깨달아 거룩한 품성을 지켜야 할 것이다.
C. 위선적 종교행위 4가지(23,25,27,29) – 속과 겉이 다른 종교행위
이제 주님은 다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일곱가지 저주 받은 행위 중 남은 네 가지를 언급하셨다. 이 부분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세가지 저주에 속한 위선이 하나님의 신성의 무지함에서 오는 것이었다면 네번째 속한 것은 사람의 속과 겉이 다른 데서 오는 위선에 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 의와 자비와 믿음이 없는 십일조(23)
먼저 주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양(커민)과 근채(아니스)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중한 바 의(공의)와 인(자비)와 신(믿음)을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23) 하셨다. 이 말씀은 아주 희귀하여 다루기 쉽지 않은 향료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십일조 생활을 하면서도 그들 속에 나타나지 않은 공의와 자비와 믿음을 책망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그들이 자랑하는 십일조는 축복을 받으려는 심리가 내포된 것으로, 정작 그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실천되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성도들이 모든 수입금에서 십일조를 드리며 그것으로 자신들의 믿음의 척도를 자랑하고 있지만 정작 사회 일면에서 그들의 생활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얼마 전 뉴스에서 기초생활 수급자 과부할머니가 매년 정부로부터 받는 생활보조금을 모은 전액을 자기보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 써달라고 기탁한 것을 보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남에게 베푸는 즐거움은 베풀어 본 사람밖에는 알 수 없다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매달 수백만원씩 십일조를 드리며 자신의 의를 나타내려는 사람과 이 할머니 중에 누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인가?
2.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25)
주님은 25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들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하셨다. 이것은 다섯번째의 저주다.
우리는 속과 겉이 다른 사람은 이중인격자라고 말한다. 사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식탁을 중히 여기며 그릇을 깨끗하게 다루었다. 이미 주님은 먹는 것은 뒤로 나가지만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하셨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을 포장하려는 속성이 있다. 더욱이 이러한 속성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강하게 나타난다. 스스로 자신은 거룩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집안에 성구가 새겨진 장식으로 가득채우고 자동차 안에서는 늘 찬송가가 흘러 나온다. 그런데 그들의 생활을 들어다 보면 정말 요지경을 보는 것과 같다.
3. 회칠한 무덤과 같은 위선자(27)
주님의 이들의 위선적인 생활태도를 말하여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과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27) 하셨다. 이 얼마나 리얼한 표현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지도자들의 생활이라면 이들이 저주를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보라-2 이제 주님은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의 종된 지도자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8) 하셨다. 그러므로 주께서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속과 겉이 다른 위선된 행위들을 고발하는 것은 바로 오늘의 당신과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4. 깨우침이 없는 믿음생활(29)
마지막으로 주님은 “화있을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29-31) 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참으로 한심한 인간들의 작태를 보게 된다. 우리 말의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강아지를 흉본다는 말과 같다. 자신의 영적 상태를 깨우치지 못하고 어리석은 남의 것은 잘 찾아 낸다. 오늘 이 말씀을 보건데 이들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다. 성경에서 조상들의 잘못을 발견하면서 그 조상들의 무덤에 관심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성경 속에 나타난 아브라함이 그 아내를 판 일을 자주 입에 올리고 또 다윗의 간음을 말하며 나는 절대로 다윗과 같이 태어났다면 그런 악한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 바로 거울 앞에 서서 당신의 죄악들을 낱낱히 펼쳐 놓아 보아라. 거울에 비친 당신의 얼굴이 얼마나 위선 덩어리인가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치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린다’(약1:23,24) 하였다.
III. 이스라엘을 향한 종말적 예언(32-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39)
A. 위선자들에게 임할 지옥의 판결 (32-33)
주님은 이런 지도자들이 받아야 할 형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을 하셨다. 먼저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하셨다. 이것은 그들의 죄를 채우라 말씀하신 것이다. 회개할 기회가 있기도 하지만 예정된 심판을 받기 위해 죄를 더 채우라는 것이다. 아직 너희가 더 범해야 할 죄가 남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울은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을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며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살전2:14-16)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하신 이후에도 진노의 날이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조상들이 한 죄들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33) 하셨다. 이미 세례 요한도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임박한 진노를 어떻게 피하겠느냐 책망하였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로 예배와 말씀을 맡으며 율법을 중히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뱀들이라 하시고 독사의 새끼라 칭하신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성경에는 뱀과 독사 용은 모두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단을 상징한다. 계시록에는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계12:9) 기록되었다.
또한 예수님은 주를 대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음으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하신 바 있다.
B. 초대교회시대에 이루어질 일들
주님은 계속하여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34)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 후 유대인들이 교회에 위해할 일들을 예언하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이 말씀이 그대로 실천되었음을 보고 있다.
계속하여 주님은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5) 하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 가리라”(36)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성경이 창세기부터 역사서까지 39권인 것을 증명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히브리인들은 오늘날 우리의 구약같이 39권의 성경을 갖고 있었는데 그 중에 창세기가 그 처음이고 역사서가 그 마지막이었다. 이로서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외경이 비성경적인 것을 알 수 있다.
C. 이스라엘의 국가적 예언(37-39)
이제 주님은 예루살렘에 임할 재앙을 예언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37) 하셨다. 참으로 안타까운 예루살렘 애가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의 돌이킴을 위하여 끊임없이 그의 종들을 보내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농부의 비유에서와 같이 그 보내신 종들을 죽이고 상속자 되신 그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는가?
예수님은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38) 하셨다. 이것은 주후 70년에 로마황제의 군대 디토장군에 의해 멸망 당할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로서 이 지구상에서 이스라엘의 이름을 끊어졌으며 또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도 더 이상 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마지막 한자기 성취될 일을 말씀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39) 하셨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오르며 즐겨 부르는 시편118편에 기록된 다윗의 노래이다. 또한 두 예언은 이미 다니엘 선지자자 미리 말한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단9:24-27)으로 이제 우리는 그 결말을 계시록에서 다시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죄의 사함을 받는 날에 ‘주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도다’ 함을 노래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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