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25:46) 당신은 어디로 들어 갈 것인가?
(마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본 장에서 세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혼인잔치 때의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다. 이 세 비유는 모두 종말의 때를 준비하는 교회의 복음적 사역을 말씀하신 것으로 열 처녀 비유는 세상의 더러움에 빠지지 않고 깨어 성령의 인도함을 주의 재림의 때에 이르도록 준비하라는 뜻이며 달란트 비유는 복음을 맡은 교회가 무엇을 중히 여기느냐에 대한 말씀이며 양과 염소의 비유는 주의 재림 때에 우리 앞에 펼쳐질 실제적 상황이다. 만약 오늘 당신이 이 말씀을 능히 깨우칠 수 있다면 당신이 속한 무리에서 스스로 돌이켜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3)
A. 혼인잔치에 초청받은 열 처녀는 누구인가?
서두의 ‘그때에’ 라는 기록은 본 장의 말씀들이 마태복음 24장과 연결된 내용인 것을 나타낸다. 먼저 주님은 제자들에게 혼인잔치에 초청받은 열처녀의 비유를 설명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열처녀가 과연 누구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교파에서는 마태복음은 왕국 백성된 유대인을 향한 메시지로서 열처녀는 대환난 동안에 구원받을 유대인과 버림받을 유대인을 비유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열두사도 된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신 내용을 세부적으로 설명하신 것으로 24장의 문맥의 구조상 32절에 연결된 문장이다(참조 눅12:36).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 교회를 향한 메시지인 것이다.
그들은 주의 재림 때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위해 예비된 어린 양의 신부를 소개한 계시록19장에서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계19:9) 함과 같이 열 처녀는 오직 하나인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없고 이들은 혼인잔치에 초청받은 유대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청받은 자들은 분명 대환난을 통과한 유대인들일 것이다.
그렇다. 그들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신부는 오직 하나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4:4) 증거하였다.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오직 하나인 그리스도의 신부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열 처녀는 미련한 자 다섯, 슬기로운 자 다섯으로 결국 그들은 둘이라는 데 있다. 이는 주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마24:41,42)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으로 (이는 당신이 어느 그룹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깨우치는 중요한 말씀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는 계시록 2, 3장에서 주께서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신 말씀 속에서도 버려질 자들과 들림을 받을 자들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다. 사도 요한은 이 내용을 이제 있는 일이라 기록하였다. 바로 우리 교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믿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곧 교회의 성도로 부름을 받았으나 성령의 인침을 받아 어린양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성도의 옳은 행실에 대한 믿음의 증거를 받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처럼 행실이 개차반이라도 예수를 믿은 자는 모두 어린양의 신부가 될 것이라는 말은 절대로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19장에서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에게 아내가 예비되었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계19:7,8) 증거하였다. 과연 당신을 위해서는 세마포가 준비되어 있는지 자신의 행실을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은 것과 성도의 옳은 행실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내포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로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 것이다(벧후3:9)
흥미로운 것은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는 모두 등을 들고 나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3,4)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기름은 무엇을 뜻하며 또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누구이며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누구인가를 살펴 보도록 하자.
B. 성령의 기름 어떻게 준비하는가?
문제의 발생은 열 처녀 모두가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다’(5)는 데 있다. 이 말씀은 주의 재림이 상당한 기간이 설정되어 있음을 은유적으로 말해 주고 있지만 신랑을 맞이할 등불은 항상 켜져 있어야 함을 전재로 하고 있다. 따라서 등을 밝힐 기름을 얼마를 준비할 것이냐에 대한 재량은 처녀들의 생각과 준비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이러한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무슨 까닭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에는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였다’(눅19:11) 기록되었으며 사도행전 1장 6절에서도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조급하고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까지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동안 많은 교회들이 실족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주님은 앞에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24:42) 하셨다.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노아의 홍수와 관련된 말씀으로 파수꾼의 임무에 속한 것으로 영적 깨달음 속에 흠과 점이 없는 도덕적 정결함을 요구하신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4) 말씀하셨다.
주님은 계속하여 ‘주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의 복’(마24:45)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문맥상으로 보아 주인이 언제 올 지에 대한 준비를 언급하신 것이다. 따라서 주의 날이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지켜 보아야 할 것인데 그를 위해 때를 따라 합당한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천사가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를 말하며 “이 말을 간수하고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12:4) 한 말씀과도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주의 종 된 자들이 무엇을 예비하고 있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교회에게 맡긴 복음사역의 근간이 무엇인지를 언급하신 것이다. 여기서 예비란 지켜본다는 뜻으로 미래지향적 준비를 포함하며 25장10절에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다.
6절에서 주님은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6) 말씀하셨다. 성경은 이미 여러 번 주께서 밤 중에 이르실 것을 언급하였다. 바울도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5:2) 증거한 것과 같이 주 예수의 오심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모두는 신랑이 밤중에 도적같이 오실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그룹이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은 가지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고 슬기있는 자들은 기름을 담은 그릇을 함께 준비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미련한 자들도 불을 밝힐 하드웨어는 준비하였지만 등을 밝힐만한 기름 곧 소프트웨어는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련한 자들은 자기들이 충분한 일을 하였으므로 신랑이 자기들 생각한 때에 올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며, 슬기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깨어있음이 주의 기름부음에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그들은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부족할까 하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였다. 이것으로 우리는 모두에게 기름 준비의 시간이 충분하였으며 미련한 다섯 처녀는 다른 일이 허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신부들이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기름이다. 또한 기름은 성령을 뜻한다. 사도 요한은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증거하였다. 이 말씀은 믿는 자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면 관건은 이 기름을 어떻게 준비하여야 하는가에 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미련한 자들에게 파는 자들에게 가서 사라 하였으니 분명 사야 하는 것은 틀림없다.
계시록3장에서 주님은 스스로 부요한 자라고 여기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하라”(계3:18) 하셨다. 또한 주님은 씨뿌리는 비유에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며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13:44) 하셨으며 다시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5) 하셨다. 여기서 산다는 말에 대하여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자기 인생을 건 사람들은 알 수 있으리라.
나는 지금도 1988년도를 잊지 못한다. 그당시 나는 신학을 하면서도 이태원에서 한가락 하는 유흥업소 대부였다. 3개의 클럽을 이끌며 하늘 높은지 땅 깊은지 모르고 흥청망청 육신의 정욕이 이끄는 대로 살아 왔다. 그렇다고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말라 나의 구원은 하늘이 감동할 만한 커다란 증거를 갖고 있다. 만약 내가 그때 일본에 가서 다시 한국에 돌아 왔다면 나는 어쩌면 지금 연봉 13억 받는 어느 목사 밑에서 흐능청대는 목회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창세로부터 입은 주의 은혜가 있어 한국으로 돌아 올 수 없는 상황에 처해 국제 거지가 된 몰골로서 하늘을 보고 울어야 했다. 다행이 주의 돌아 보심이 있어 만난 것이 갈보리채플이다. 내가 서울의 모든 재산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놓아야만 보화가 묻힌 밭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물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방황이 없을 수 없었으나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기름을 원하는 자들이 값 비싼 희생을 치루는 필요함은 그 기름이 세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환상 중에 금 기름을 흘러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감람나무의 두 가지를 보았는데 천사는 그에게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슥4:11,-15) 하였다. 또 우리는 계시록에서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를 보게 되는데 이 둘은 대환난 기간동안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의 증인이다(계11:4).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기름부음은 자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라는 것이다. 스가랴는 “이는 힘으로도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진리의 성령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며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16:13)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진리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원리를 설명하신 것으로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스스로 무엇을 들을 것인가 또 어떻게 들을 것인가 삼가 주의해야 할 것이다(마4:24, 눅8:18).
오늘날 어떤 교회들은 전도를 많이 하여야 한다고 전도폭발과 같은 프로그램을 치중한다. 또 어떤 교회들은 성령은사를 치중하며 방언과 예언과 병고침을 치중한다. 또 어떤 교회는 새벽기도를 어떤 교회는 찬양과 봉사를 중히 다루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계시록에서 많은 일들로 분주했던 교회들에게 회개하라고 책망을 하셨다.
C. 제자들에게 주신 두 가지 메시지(13)
주님은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교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그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하였지만 주님의 뜻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계2:21-23) 하셨다. 여기서 큰 환난이란 교회의 휴거 후 이를 7년 대환난을 뜻한다.
또한 충실한 빌라델피아 교회 지도자를 향하여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라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3:8,10)하셨다. 이것으로 우리는 빌라델피아 교회가 큰 환난을 면하게 될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이 두 교회를 비교해 볼 때 두아디라 교회는 그들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에 있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주께서 금하신 것을 용납하였으며 회개의 경고를 무단히 지나쳐 버렸다. 그러나 빌라델피아 교회는 어떤 일을 행하기에 힘을 쓰는 것보다 오직 주께서 열어 두신 문을 향하여 나아갔다. 그들은 비록 세상에 나타난 큰 능력은 없었으나 오직 주의 말씀을 지키며 그 이름을 배반치 않았던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고 주께서 그 앞에 두신 열린문으로 계속 들어간 결과이다.
주님은 10절에서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 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하니, 주께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10-12) 말씀하셨다.
우리는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는 말씀을 앞에서도 들은 바 있다. 주님은 좋은 열매 맺는 나무와 나쁜 열매 맺는 나무를 비유로 말씀하여 ‘주여주여 하는 자가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하시며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2,23) 말씀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혼인잔치는 신랑이 오면 바로 문이 닫힌다는 것이며 준비되지 않은 자들은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혼인잔치의 주권이 주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미 주님은 앞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수족을 결박하여 어두움에 던지라 하였고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22:14) 엄히 경계하셨다.
주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3) 하셨다. 이로서 주께서 하신 혼인잔치 때의 열 처녀 비유는 주의 재림을 맞기 위해 교회가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고 무엇을 준비하여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4) 하였으며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계22:11)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가 무엇을 하던지 본인이 택한 결과에 이른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행하는 일이 누구의 뜻이냐에 있다는 것이다.
II. 달란트 비유(14-30) – 눅19:11-27, 마13:12; 막4:25, 참조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15)
A. 소유를 맡김
주께서 두번째로 말씀하신 비유는 달란트 비유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새 그 종들을 불러 자기의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르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14,15) 라고 말씀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달란트는 화폐의 단위가 아니라 무게의 단위로서 그 가치는 금, 은, 동에 따라 정해진다. 그러므로 종들이 받은 것은 금 달란트이므로 최고의 가치를 뜻한다. 화폐로서 금을 능가하는 더 이상의 가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유 속에 세가지 전재된 사실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는 주인이 ‘그 소유를 종들에게 맡겼다’는 것이며 두번째는 금 달란트를 주었으므로 주인은 종들에게 ‘최고의 재능을 주었다’는 것이며 셋째로 각자에게 달란트의 수를 따로 정했다는 것은 주인이 ‘그가 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를 정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들의 모든 재능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종들은 그 받은 재능 안에서 맡긴 일을 능히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 능력의 범위 안에서만 자신들이 맡은 일을 충실히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그 종들은 자기 임의대로 행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B. 재능과 능력의 범위(15)
주님은 계속하여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 와 저희와 회개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16-20)고 말씀하였다.
이 말씀을 살펴 보면 매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나 두 달란트를 받은 자가 장사하여 주인이 맡긴 량과 동일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주인이 자기에게 준 능력의 범위를 넘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주인이 주신 능력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한 주인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종들에게 있어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C. 칭찬을 위한 전제 조건은 충성과 성실함 (21, 23)
또한 주인은 그들에게 모두 똑같이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지어다”(21, 23) 칭찬 하였다. 이 두 사람의 능력과 이익을 남긴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는데도 그들의 보수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종들이 받는 대가는 많이 남기고 적게 남긴 것에 따라 보수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인이 나누어 준 재능의 무게를 따라 그들이 주인의 뜻을 성실히 행하였느냐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주인은 종들의 충성도를 본 것이다.
또한 주인은 두 종에게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 하였다. 주인은 그들에게 최고의 가치인 금달란트를 주었다. 한 달란트는 34kg으로 다섯 달란트라면 170kg으로 성인 두 사람의 몸무게와 같다. 이는 무게로나 가치로나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이는 주인이 갖고 있는 최고의 상태다. 그러나 주인이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 한 것은 주인이 준 능력대로 주인이 준 것을 그대로 하면 되기 때문에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여 떼 놈과 같이 곰의 재주는 넘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들은 주인이 맡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토대로 똑 같은 붕어빵을 만든 것이다.
D.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문제점(24-27)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에게 나와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24,25) 하였다.
여기서 이 종은 주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였으므로 그로 하여 주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자기가 맡은 것이 잘못 될까 싶어 땅 속에 묻어 두고 주인이 올 동안 다른 일로 세월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과 같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계시록을 땅에 묻어 둔 것과도 같다.
이에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26,27) 하였다. 이 말은 네가 없었다면 차라리 다른 곳에 맡겼을 것이 아니냐고 말한 것이다. 주인은 “그 종의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28) 하며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9) 하셨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는 지혜가 필요하다. 잘못하면 앞의 말씀과 균형이 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 부분을 설교할 때 달란트 비유를 교회에서 활동하지 않은 성도들을 책망할 때 사용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25장의 비유들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오늘날 교회 지도자에게 하신 말씀으로 이 달란트는 무엇을 비유한 것이냐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는 교회의 지상 목표를 아는 것이며 그것은 복음전파로서 복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곧 성경이다.
E.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의 원리(28-29) – 풍부하심
또한 우리는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신 말씀을 다른 곳에서 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다. 바로 씨뿌리는 비유 곧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다. 주님은 마가복음 4장 24절에서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것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셨다. 또한 누가는 동일한 대목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눅8:18) 기록하였다. 이는 모두 씨 뿌리는 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실 때 사용된 말씀이다.
여기서 헤아림은 무엇을 말하는가? 혹시 당신은 어느 교회들처럼 돈을 세는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이것은 바로 성경의 말씀을 헤아리는 것을 뜻한다. 이제 당신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 종이 왜 악하고 게으른 종인지 알겠는가? 그는 능히 자신에게 주어진 무게만큼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도 말씀을 살펴 보지도 않아 계시록에 이르도록 열려져 있는 문으로 들어 가지 않고 다른 일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6,17) 하시며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7:18) 말씀하셨다.
또한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에서 주께서 사랑하신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를 알고 있다. 이 말씀은 추수사역 중,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감추시고 오직 성령으로 알게 하신 복음의 계시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이르신 말씀이다(눅10:21,22 참조). 마르다는 주를 맞는 다른 일에 늘 바삐 준비하였고 마리아는 주를 맞아 그 발 밑에서 주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주님은 자신의 일을 돕지 않는 마리아를 책망하여 달라는 마르다에게 “마르다야 네가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셨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2) 하셨다. 이로서 주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듣던 마리아는 제자들도 준비하지 못하였던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자가 되어 주님으로부터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하라” 는 칭송을 받았다(마26:13).
이 말씀은 오늘날 주의 복음을 맡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말씀이다. 먼저 우리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살펴야 하며 이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가르침인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만약 누가 자기에게 준 말씀의 능력을 이용하여 대형교회 짓기에 급급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아니요 그는 주께서 보내는 자가 아니다. 주님은 목수이심에도 이 땅에 대형교회를 짓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때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부흥되면서 성도 섬기는 일이 바빠져 오히려 교인들 중에 분쟁이 일어났다. 이에 베드로가 일어나 너희 중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 일곱을 세우라 우리는 말씀 가르치는 일과 기도에 전념하리라 하였다(행6:4). 이처럼 교회는 겨자씨만한 씨앗이 자라 잎이 무성하면 그 가지에 새들이 깃든다. 교회는 이때가 가장 위험한 때이기도 하다.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4:9) 하였고 다시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4:11) 증거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말하며 주께서 행하지 않은 일들을 일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주의 이름과 주의 말씀을 도용하여 자기의 배를 채우는 자들이다.
III. 양과 염소의 심판(31-4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31)
A. 어느 때의 일인가?
세번째 하신 양과 염소의 비유는 주께서 임하셨을 때의 말이다. 이로서 제자들이 질문한 것에 대한 마지막 답변인 것이다. 이 부분은 사실 우리 교회와는 관련되지 않은 것이다. 하늘에 오른 성도는 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 함께 왕 노릇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대환난을 통과한 사람들의 일이다.
주님은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31) 하셨다. 성경은 주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증거하였고 유다도 “아담의 칠세 손 에녹도 예언하여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팍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1:14,15) 증거하였다. 이 때는 하늘의 신적 요소가 현실 속에 그대로 드러나는 때로서 계시록 19장에서의 일이다.
주님은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2,33) 하셨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는 오직 전지전능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은다는 것으로 우리는 주께서 7년 대환난 중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을 멸하신 후 대환난을 통과하여 살아남은 이 땅의 모든 민족들을 친국 하시는 것이다. 이미 주께서도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요5:22, 27) 말씀하신 바 있다.
계시록 19장 15절에는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시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적 그리스도의 통치 때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용케 살아 남아 있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된다.
다니엘서 12장을 보면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여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일을 지낼 것이요 기다려서 일천삼백삼십오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단12:11,12) 기록되었다. 이것은 7년 대환난 마지막 후 삼년 반 때의 일이다. 이 때 주께서 재림하실 것인데, 1290일에서 1335일까지는 45일이라는 기간이 포함되어 있다.
7년 대환난은 후삼년반 곧 1260일에 마칠 것이지만 그로부터 30일 곧 1290일이 지나고 또 45일이 지날 것이라 했음으로 이 때 주께서 특별히 하시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30일 동안에 계시록 19장 17절 이후에 나오는 바와 같이 왕들의 고기 잔치가 있을 것이고 45일 동안 만국을 모아 양과 염소로 나누는 작업을 하실 것이라 생각된다.
B. 양들은 누구인가? – 대환난 중 구원받을 의인들
어쩌면 이들의 대부분은 유대인이겠지만 7년 환난 때에 이르러서야 정신을 차린 휴거하지 못한 교인들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 때까지 이 글이 살아 있어서 요나의 증거를 듣는 듣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아브라함의 백성 유대인을 돕게 되기를 바란다.
계속하여 주님은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4,35)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된 나라라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말이다. 이들은 지금 대환난을 통과한 무지막지한 고통의 늪을 건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창세로부터 예비된 자들이라면 왜 휴거를 당하지 못하였을까?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은 완전한 것이 이룰 때까지 그의 모든 예정 가운데 은혜 입을 자들이 예비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나와 함께 이 글을 보는 나의 친구들은 대환난의 세상 이전에 들림을 받을 자로 창세로부터 예정된 자이기를 기원한다.
C. 누가 주의 형제인가? – “제자의 이름으로 작은 소자에게~” (마10:42)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37-40) 하셨다.
살펴 보건데 ‘이 의인들이 대답하여~~ ” 기록되었음으로 주께서 오른편에 둔 양들은 주 예수를 믿는 의인들이 틀림없다. 그러면 여기서 주께서 ‘내 형제’라고 하신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들은 언제 주를 믿어 의인이 되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왜 굶주리고 병들고 나그네 되고 옥에 갇혔어야 할까?
복음서에는 주께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50) 하셨고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28:10) 말씀하셨으므로 그들은 제자 된 성도가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주의 제자들이 대환난에 이르렀다면 문제가 된다. 그들은 모두 하늘에 이르러 지금은 주와 함께 임한 자들 중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환난 기간 동안 주를 영접한 성도 유대인들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 두어야 할 것은 대환난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의 때이므로 14000명과 두 증인의 활약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살아 남아야 하므로 적그리스도의 체제를 피해 살아 남기란 지옥을 통과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때 누가 그들을 돌보아 준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천사다.
그렇다면 과연 고난받는 주의 형제들을 돌보는 자들은 누구일까? 악한 적그리스도의 체제에 몰입된 세상 사람들은 결코 그들의 보호자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고발하고 저주하고 핍박하였을 것이다. 이미 주께서 그들을 향하여 “저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로 들어가라”(41)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이 창세로부터 예비된 상속자였다는 것에 주의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전에 우리와 함께 있어 이 땅에서 주 예수를 영접하여 주의 기업을 함께 받아야 했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비록 잘못된 목자를 만나 휴거를 당하지 못하였으나 그들은 주 예수를 믿은 자들로서 정해진 기간에 주의 의에 이르지 못하여 홀연히 어두움에 처해진 것이다. 그들은 교회가 휴거된 후 대환난이 이르자 자신들의 온전치 못했음을 깨닫고 그제서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세상 사람들 속에 빠지지 않고 대환난 동안에 회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전에 그들이 빛도 이름도 없는 가난한 종들을 섬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미 주께서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하시지 않았던가? 때늦은 깨달음이긴 했지만 지난 날 작은 종들과의 만남을 통해 전해들은 계시의 메시지가 그들의 영혼을 일깨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 극한 상황에 처한 주의 형제들을 성심으로 섬기게 되었을 것이다.
D. 왜 우리에게 전하시는가?
또한 주님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네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옷에 갇혔을 때에 돌아 보지 아니하였느니라”(41.42) 하셨다.
원래 여기서 언급된 영영한 불이란 게헨나로서 사람을 위해 준비된 곳이 아니라 마귀와 그 추종자들을 위해 준비된 불지옥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 가는 지옥 하데스와 죽은 영혼이 머문 사망은 모두 백보좌 심판 때에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 그런데 대환난을 통과하여 살아남은 자들이 천년왕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영한 불못에 던져진다니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다.
이들은 주께서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하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4.45)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모두 비유이고 또 7년 대환난 이후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일이지만 주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비유로 하신 것은 이 말씀을 듣고 미리 깨어 예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우리는 주의 형제 곧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인 것을 살펴 그의 삶을 돌아 보아 어려움을 돕고 그의 필요를 채워야 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미혹된 시간에 당신의 영혼이 주를 깨닫게 되어 주와 함께 천년왕국을 상속 받게 될 것이다. 주께서 이에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이 들어 가리라” 하신 말씀 기억해 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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