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2:1,2) 영적예배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서론) 로마서의 주제는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의’로서 주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다. 또한 로마서는 주제의 분류를 따라 크게 3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12장은 로마서 마지막 단락의 시작이다. 첫 단락인 1장부터 8장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다루는 교리적 부분이며, 두 번째 단락, 9장부터 11장에서는 ‘세대적(Dispensational) 구원’으로 하나님의 섭리 속의 구원의 소망을 다루고 있으며 12장부터 16장까지는 ‘성도의 성화’의 증거로 나타나는 성도의 의무와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에 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성도의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곧 ‘지위적 성화’와 빛 되신 진리의 말씀 의 깨달음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영적 성화’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그리스도의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충만한 그리스도의 형상이 만들어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로마서 12장에서 우리는 성화된 성도의 삶 속에 나타나는 영적 예배의 본질과 그 삶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과 온전한 사랑의 실천들이 기록되었다. 그 첫번째 과정은 영적예배로서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태도이며 이는 다시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
바울은 서두에서 우리의 합당한 영적예배를 위하여 다섯 가지 전제되어야 할 조건을 말하였다. 그 첫째는 ‘몸을 드리는 것’이며 둘째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며 세째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이며 네째는 ‘변화 받는 것’이며 다섯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예배의 정의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영적예배를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영적이란 말을 감성적 부분으로 받아드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사용한 단어 영적예배라는 헬라어 ‘logiken’ 로서 ‘합당한’, ‘이치에 맞는’을 뜻하는 영어 ‘Reasonable’ 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영적예배는 합리적인 예배라야 함을 피력한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합리적이지 못할 때, 그 예배는 결국 그들만의 축제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A. 첫번째 단계- “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 (1)
1. 전제조건(1) – 하나님의 자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전제 조건을 말하며 먼저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고한다’ 하였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주의 성도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의 권고 속에는 거룩한 성도 된 우리가 아직도 영적예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생각하건대 성경은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약5:11) 기록하였다. 이는 의인 된 성도들의 삶 전체가 모두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음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우리의 인내가 오랜 믿음의 경륜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도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눅6:36) 말씀하셨으며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으로 권면이나 사랑과 위로와 성령의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를 행하라’(빌2:1) 권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속에 있는 성도들이 마땅히 자비를 행하여야 할 의무가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2. 전제조건(2) – 산제사
계속하여 바울은 두번째 전제 조건을 말하여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산 제사’의 의미는 우리의 예배 행위를 말한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 번제 제물의 상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거룩한 산 제사는 구약시대의 불에 태워 드리는 화제로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수양의 전부를 단 위에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출29:18) 말씀 하셨다. 이는 하나님께 헌신된 자들이 자기 몸을 대신하여 수양의 전부를 태워 번제로서 모세는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1:9) 기록하였다. 이로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삶은 내장에서 정갱이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태워서 향기로운 냄새를 하나님께 드려야만 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의 도덕적인 삶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육체의 더러운 속성을 모두 불에 태워 오직 거룩하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도덕적인 삶을 요구하신 것이다. 성경은 이미 우리에게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1:15,16) 기록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는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입었지만 아직 너희 행실은 거룩하게 되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3. 전제조건(3) – 기뻐하시는 산제사
또한 바울은 너희의 산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헌신의 동기가 자신의 목적이나 억지로 하는 것이냐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기쁨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 사셨음을 알고 있다. 하나님도 그에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저를 기뻐하노라 하셨다. 이처럼 우리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 하면서도 결국은 자기의 목적과 영광을 위해 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10-12) 권하였으며 또한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히13:16) 증거하였다. 이로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과 그 행함이 그의 뜻 안에 있을 때 주께서 기뻐하심을 알 수 있다.
사실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자기의 생명을 포가하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우리에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6:8) 권고하였으며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증거하였다. 이는 우리의 머리 되신 주께서 산 제사의 본이 되셨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 그의 산제사로 말미암아 더러운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산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일까? 바울은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6:13) 하였고 다시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 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롬6:19) 증거하였다. 다시 말하여 세상의 더러운 일에 참예하지 말고 의로운 일에 헌신하라는 말이다.
B. 두번째 단계- 본받지 말라 (me suschematidzesthe)
바울은 영적예배를 위한 두번째 단계를 말하여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하였다. 이는 구원을 받은 믿음의 성도라도 세상과 세상의 조직에 속한 일들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저항을 해야 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에서 세상의 유혹을 받고 있는가? 저녁이면 성경을 보고 기도하는 대신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과 함께 웃고 즐기고 있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2:15-17) 증거하였다. 여기서 말한 이 세상의 것들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는 세상이 주관하는 정치와 철학과 이념과 풍속과 문화에 속한 모든 것을 뜻한다.
세상의 신이 노리는 것은 자기에게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주 예수를 믿어 자기의 권세 속에서 분리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몸 안에 죄성이 살아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세상의 풍속들을 통하여 우리를 유혹한다. 이를 인하여 베드로는 종말을 사는 형제들을 향하여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삼지 말라” (벧전1:14)하였고 바울도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6:19)고 권고하였다.
우리가 세상의 즐거움을 따라 산다는 것은 짐승처럼 산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영이 없음으로 그 생각은 온통 몸의 소욕을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하였고 ‘너희가 육신으로 살면 반듯이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8:13) 경계한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이 세상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C. 세번째 단계 - 마음을 새롭게 함(anakainosei) – 의지적 단계
영적예배를 향해 우리가 해야할 세번째 단계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의지적 단계로서 나의 믿음의 시작이며 또한 선한 것을 선택 할 수 있는 능력의 첫발이기도하다. 그러나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말 속에는 믿는 우리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고 있음이 시사되어 있다.
믿는 우리는 늘 그리스도의 뜻 안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가끔 자신도 모르게 새상 한 복판에 가 있는 나를 발견한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 다윗을 가리켜 그는 하나님과 마음을 합한 자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믿음과 영적 지혜를 갖고 있었던 다윗도 목욕을 하는 밧세바를 보자마자 한 순간에 무너져 간음을 하였고 또 지나쳐 살인까지 하였다. 또한 사도 바울은 죄된 육신의 모순 됨을 말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7:25) 하였다. 이와 같이 육체적 모든 갈등이 그 마음에서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잠언 기자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하였고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라고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에 풍습에 물든 몸을 산제사로 드린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생각이 세상을 따르지 못하도록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죄에서 죽어야 하며 매일 성령의 능력 안에서 다시 살아 나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과 의지는 결코 믿을 것이 못된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미리 말하여 ‘이는 능으로도 아니되고 힘으로도 아니되며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는다’ 기록한 것이다.
D. 네 번째 단계 - 변화를 받음- 거룩한 성화
영적예배의 네번째 단계는 ‘변화를 받는 것’이다. 이것은 본받는 것과 다른 차원으로 새로운 탄생을 뜻한다. 본받는다는 것은 어떤 모델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이지만 변화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같다. 전혀 다른 형태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증거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힘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고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데 까지만 가능할 뿐이다. 그것도 사실 쉬운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 한 것이다. 따라서 변화는 오직 온전한 믿음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기록하였다.
또한 변화를 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기질에 더 이상 이끌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육신이 죽고 새로 태어남으로 가능한 것인데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3:6,7) 하신 말씀처럼 영적 거듭남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인 것이다.
이에 바울은 믿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 그 어느 무엇으로도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 증거 하였다(롬8:35-39).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변화받은 자로서 오직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롬8:16)기록 하였고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서 우리가 온전한 성화를 이루는 것이다.
E. 다섯째 단계– 하나님의 뜻을 분별 – 이성적 지혜
끝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아내가 그의 남편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져야 하고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요한은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1:5) 하였다. 그는 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여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라”(요1:9) 증거하였으며 그는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시며(요1:1; 요일1:1)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b) 하였다. 우리가 빛을 생각할 때 어둠을 밝히는 물리적인 빛과 사람의 마음을 밝히는 이성적 빛과 영혼을 밝히는 진리의 빛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요한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말씀되신 빛으로 조명하여 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나타나는 영적현상을 설명한 것이다.
예수님은 간음현장에서 끌려 온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시며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믿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말씀하시고 다시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11:9,10) 하셨다. 이는 사람이 영혼을 비추는 빛을 상실하여 죄의 어둠에 잠들어 있음을 가시적으로 언급하신 것으로 주께서 말씀하신 빛이란 사람들의 영혼을 비취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뜻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잘못 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뜻을 알지 못하여 잘못된 일들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자기들이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지만 진리의 빛 가운데 나타나지 않는 일들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다. 또한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빛은 우리 가운데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주님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40)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를 설명하여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하셨고 다시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다 내게 오느니라”(요6:45) 하셨다. 여기서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 것인가? 결국 아들을 보고 믿는 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는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기록되었다. 이는 주께서 우리 안에 진리의 성령이 역사하는 원리를 설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하시며 계속하여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하였노라”(요14:1415) 하셨다. 여기서 주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것’ 곧 ‘내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님은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하시며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7:16) 하셨고 ‘나는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말하고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한다’(요8:28b, 38b)하시며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하셨다. 이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모두 빛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진리의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세상에 남겨 둘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어버지께로서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니다”(요17:8) 하셨다.
계속하여 주님은 ‘내가 기도하는 것은 오직 저희로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 위함이라(요17:15) 하셨다. 여기서 제자들을 보전하여 달라 하신 것은 제자들이 세상의 교훈에 빠지지 않게 하여 달라 하신 것이다. 이에 주님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요17:17) 말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온전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의 말씀에 있음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성도 된 우리는 주께서 택하시고 세우신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통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마땅할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여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살전4:1) 하였고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를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살전4:3-6a) 증거하였다. 우리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사도 서신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도서신에는 성도의 실제 삶에서 해야할 일과 하지 말하야 할 일들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골1:9)라고 기도하며 우리를 향하여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7) 명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2-3) 가르친다. 그리하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주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실 것이다(빌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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