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태복음강해

(마태복음26:38) “피와 땀을 흘린 예수님의 고민”

이요나 2008. 3. 1. 12:44

(마태복음26:38) “피와 땀을 흘린 예수님의 고민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함께 깨어 있으라

 

마태복음 26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생전 마지막 날들에 있었던 내용들로 마태복음에서 가장 장이다. 사실은 실제적인 내용을 서술한 것으로 신학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 할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우리 믿음생활 속에 가장 중요한 것을 상실하기 쉬운 부분들을 발견케 하는 매우 중요한 내용들이다.

 

I. 베다니 만찬(1-16)  - 마가14:1-11; 요한 12:1-11 ,누가 7:36-5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13)

 

A. 유월절과 예수 그리스도(1-5)

종말에 있을 일들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을 답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2) 말씀하셨다. 말씀은 십자가 구속에 관한 마지막 가르침이시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 오시며 두번에 걸쳐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20:18-19) 말씀하셨다. 이제 예수께서 말씀이 성취되기 직전에 하실 일을 준비하고 계신 것이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3 명절 하나로서 유대인에게 있어 유월절은 다른 명절보다 우위에 있는 중요한 명절이다. 유월절의 기원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400여년동안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에 있어 떠나시기 전날 제정하신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피의 구속하셨다. 유월절 의식은 유대민족의 구속과 관계된 유월절 의식으로 지켜졌으며 유월절은 율법의 제정을 따라 해의 니산원 십사일 저녁 유월절(12:6) 다음날부터 칠일 동안을 무교절(12:15, 23:5) 나누어 지켜졌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셔 많은 이적들을 행하시며 민중들을 가르치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이 가야바 대제사장의 안에 모여 예수를 잡아 죽일 방책을 꾸미고 있었다. 그러나 유월절 명절에는 예루살렘 도성 사람들이 모여 들어 소요가 것을 두려워하여  명절에는 죽이지 말자 결안하였다. 마가는 계획들이 유월절 이틀 전에 있었음을 기록하였다.(14:1)

 

B. 마리아의 장례 준비(6)

6 이하 문단에 수록된 내용은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이다. 이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 자들이 무엇을 중히 여겨야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깨닫게 된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저녁이면 베다니에서 묶으셨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키로 떨어진 감람산 동쪽의 작은 마을이다.

 

베다니에는 주께서 사랑하시던 가족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리고 나사로가 살고 있었다(11). 병들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박히시기 이곳에 머물며 이들로 하여 많은 위로를 받으셨다. 요한은 때의 일을 기록하여 유월절 엿세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나라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 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중에 있더라” (12: 1,2) 소개하였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마르다는 항상 여러 가지 준비하는 일로 분주해 있었다. 아마 언니로서 마땅히 해야 일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주님 앞에 앉아 주의 가르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10:38-42). 나사로는 그때 무엇을 하였는지 없으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그의 누나들이 주께 편지를 보내어 사랑하는 자가 병이 들었습니다라고 전하였다. 아마 주께서 그를 무척이나 사랑하셨던 모양이다(요한11).

 

흥미롭게도 주님은 그곳에 머무시는 동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셨다고 기록되었다. 그는 물론 치유함을 받은 문둥이일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님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은 문둥이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둘 사람일 것이다. 어쩌면 마태복음 8장에 소개된 문둥이 수도 있고 아니면 누가복음 17장에 소개 고침받은 뭉둥이 열명 사람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주께서 세례 요한이 보낸 사람들에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11:5) 하신 바와 같이 문둥이를 고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 하나였다.

 

어떤 사람들은 누가복음 7장에 소개되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옥합을 깨뜨린 여인과 일을 혼동하여 베다니 문둥이 시몬을 동일 인물로 보는데 이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요한복음12장에 유월절 엿세 전에 주께서 베다니에서 머무셨다고 기록되었고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2) 하셨므로 일은 베다니 마리아의 집에 머무실 때에 있었던 분명하다.

 

마리아는 삼백데나리온의 가치가 되는 비싼 나드 향유 옥합을 들고 나아와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발을 씻었다 기록되었으므로 마리아는 향유 일부를 머리에 부은 예수님의 발을 씻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옥합에 담은 향유는 적은 양이었겠지만 값이 삼백데나리온이라면 노동자 일년치 월급에 해당되는 매우 귀한 것이다. 

 

마리아가 어떻게 이처럼 귀한 향유를 구할 있었는지 모르지만 유대인의 풍습상 처녀들이 자기 몸을 신랑에 드리는 첫날밤에 사용하기 위하여 좋은 향유를 준비하게 된다. 주님은 마리아가 행한 일을 말하여 저가 힘을 다하여 몸에 향유를 부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14:8) 하셨으므로 마리아는 일에 일생을 바친 것이라 하겠다.

 

흥미롭게도 일을 제자들은 당황하며 분노하였으며, 중에 회계 책임자였던 가룟 유다는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였느냐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있었겠다’(14:4,5; 12:5,6) 책망하였다. 이들은 마리아가 무슨 연유로 이와 같은 일을 했는지 알지도 못하였고 오히려 멍청하게 보였던 것이다.

 

 

이에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여자가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10-12) 책망하셨다. 사실 예수님의 장래를 위한 준비는 마땅히 그의 제자들이 해야 일이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일을 마리아에게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생각해 필요가 있다. 많은 주의 종들이 교회를 위하여 많은 물질과 힘을 쏟아 붓는다. 그러나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해 준비하는 교회는 얼마나 되는가? 오히려 주를 맞이하고자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교회들에 대하여 멍청한 사람들이라 말한다. 그러나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내의 믿음과 소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13) 하셨다. 얼마나 영광인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지를 기념할 것을 주문하셨는데 가지는 자기 몸을 깨뜨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성찬을 기념하라 하신 것이고 오늘 마리아의 행한 일에 대한 일을 기념하라 하셨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교회들은 어떠한가? 성경에도 없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면서도 정작 가지 기념에 관한 말씀은 뒷전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기념하라는 말은 크리스마스와 같이 축제로 지내라는 말도 아니며 부활절과 같이 겨란을 삶아 돌리라는 것도 아니다. 두고두고 의미를 음미하여 회상하고 너희도 이같이 행하라 하신 말씀이다.

 

C. 가룟 유다의 배반(14-16)

마리아의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 준비에 비하여 제자 하나는 예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정말 대조적인 비유가 아닐 없다. 마태는  때에 열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 기회를 찾더라” (14-16) 기록하였다.

 

하나라는 말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이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자신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고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하나된 원리이기도 하다. 성경은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만유의 아버지시라”(4:5,6) 하였다. 또한 후일 요한은 적그리스도의 실체에 대하여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니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2:19) 증거하였다.

 

가룟 유다가 받은 삼십은 원래 노예의 값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일에 대하여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삼십을 달아서 고가를 삼은 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11:12-13) 라고 예언한 있다.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 가장 영리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는 유대교에 활동하던 사람으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남다른 관계를 갖고 있었다. 성경이 이미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라에 앉지 아니하고”(1:1) 라고 말하였으나 그는 재물에 마음을 두고 부귀영화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악하다. 오늘날 메스컴에 보도되고 있는 일들을 보자면 정말 견딜 없다. 정부에서는 범죄를 없애고자 많은 방책을 내어 놓아도 성폭행과 살인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행위들은 앞에 심판을 받게 것이다. 성경은 이미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알리요마는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행위와 행실대로 보응하나니(17:9-10)라고 기록하였다. 

 

II. 유월절 축제(17-30) – 성경76 OT-48, NT-28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것을 이제부터 아버지의 나라에서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29)

 

A. 유월절 준비의 의미(17-19)

유월절 어린양 준비는 해의 시작달인 니산월이라고 하는 압비월 10일에 가족의 수에 따라 없는 일년 수컷 어린양을 선택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양과 함께 지내다가 14 저녁에 뼈를 꺾지 않고 잡아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무교병과 쓴나물을 급히 먹는다. 유월절은 할례받은 종들과 이방인도 함께 참여하였다. 다음날부터는 칠일동안 무교절이 시작되는데 이는 누룩을 넣지 않는 빵을 칠일동안 먹는데서 기인하였다(12:15, 23:5).

 

유대인들에게 있어 유월절 첫날과 무교절 7일째는 성회로 구별되었으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며 의식은 영원히 지켜야할 규례(12:14-24)로서 기간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자녀에게 유월절 유래와 중요성을 가르쳤다(12:26,27) 유월절 어린양 잡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구속적 모형이 되었으며 제자들과 유월절 날에 가지셨던 마지막 만찬에서 베풀어진 성찬의식 떡과 포도주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속하는 영원한 생명으로의 기념이 되었다(22:19).

 

무교절 첫날이 되자 제자들은 어디서 유월절을 함께 먹으면 좋겠느냐고 주께 물었다. 이에 주님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때가 가까웠으니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18) 명하셨다. 마가복음에는 성내로 들어가면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리라”(14:13-15) 기록되었다. 이처럼 유월절은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준비되었고 후일 다락방은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곳이 되었다.

 

B. 배신과 사단과 그리스도의 승인(20-25)

유월절 시탁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사람이 나를 팔리라’(21) 하시며 제자들이 놀라서 근심할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리라”(23) 하시며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4) 말씀하셨다.

 

주께서 말씀하실 가룟 유다가 마음에 찔렸던지  랍비여 내니이까물었다. 속에는 이미 그의 감추어진 마음이 들어 있다. 주님은 그에게 네가 말하였도다”(25) 답하셨다. 아마 유다가 말을 들으며 자기의 마음을 들킨 같아서 매우 당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주께서 내가 조각을 찍어다 주는 자가 그니라 말씀하시며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사단이 그에게 들어갔다’(13:26,27) 기록되었다. 이처럼 사단도 주님의 사람에게는 주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들어 없다. 그러나 마음 속에 불의로 가득차 있다면 결국 그는 자기가 길로 가게 마련이다.

 

때문에 자기 스승을 판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배신은 오늘날도 비일비재하다. 사람의 마음이 원하는 바를 채우지 못하면 그들은 결국 자기 스승을 버리고 돈을 선택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너희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심길 없다 하였고 재물을 가진 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하셨다.  그러나 오늘날도 돈을 위해 그리스도를 파는 제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모두 가룟 유다의 마음을 가진 것이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제게 좋았을 것이라 하신 말씀을 회상할 필요가 있다.

 

C. 유월절 참여(26-28)

주님은 저희가 유월절을 먹을 때에 떡들 들어 축사하신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 먹으리 이것은 몸이니라하셨고 잔을 들어 사례하신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사함을 얻게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니라”(26-28) 하셨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성찬으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하여 대하는 유월절 양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양을 먹었듯이 하나님의 자녀 우리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양이 되시어 자기 몸을 깨뜨시고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22:19) 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9”11,12) 하였고 다시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겠느뇨”(9:14)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진은 피로 세운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1124-:26) 증거하였다. 그럼에도 오늘날 성찬을 기념하지 않는 교회는 무슨 연고에서인가? 그들의 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보다 높은 것인가?

 

D. 미래의 전망(29-30)

계속하여 주님은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것을 이제부터 아버지의 나라에서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29) 말씀하셨다.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소망이 들어 있다. 말씀은 주께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제자들과 함께 포도주를 마시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또한 말씀 속에는 이상 유월절을 나눌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의 피는 짐승의 피와 달라서 모든 죄를 사할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음으로 이후로는 이상 유월절 어린양 제도는 필요없다 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유대인은 아직도 유월절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무한한 평안과 기쁨과 소망을 누린다. 말씀은 우리에게 자유함을 허락한다. 어떤 죄에서라도 능히 구원 받을만하며 우리가 그가 주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성취한다면 우리는 이상 어떤 죄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증거하고 있고 그의 보내신 성령이 안에 역사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하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찬미를 드리며 감람산으로 나아갔다. 그들에게는 어떤 두려움도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증거가 그들에게 넘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III. 메시야의 기도(31-56) – 겟세마네 기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41)

 

A. 예수님의 예언(31-32)

예수님과 함께 성찬을 나누고 장래의 소망을 바라보며 의기 양양하여 찬송을 부르며 오리브동산에 올라온 제자들은 주로부터 뜻밖의 말씀을 듣게 된다. 주께서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 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31,32) 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며 이제 주에게 나타날 일들을 말씀하시며 이 일들이 모두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으로 그 예정하신 때에 성취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어린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과 또 주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바로 저주하신 것을 보며 예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장차 종말의 날에 어떤 일이 일어 날 것을 주로부터 자세히 들었고 그대로 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이에 주님은 그 앞에 일어날 일들을 하나하나 실행해 나가시며 제자들이 모두 도망할 것을 예언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다.

 

B. 베드로의 호언장담(33-35)

이때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습니다(33) 호언장담하였다. 베드로으ㅟ 이런 태도를 객기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앞을 내다 볼 줄 모르는 용기로 보아야 할 것인지 이해가 안되지만 이는 우리 모두의 태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과 같이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있는 인간은 자기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생각나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이에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네가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34) 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말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였다. 아마 나도 그곳에 있었으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신 예수님과 앞의 일들은 한치도 내다볼 수 없는 제자들 사이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일인 것이다. 백번천번 말해야 입만 아플 뿐이다. 베드로는 이미 이와 같은 일을 여러 번 겪었는데도 번번히 앞서서 낭패를 보고 있다. 이 또한 호언장담하기 좋아하는 인간들의 전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제자들이나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장래를 볼 수 있는 혜안이 있다면 서로 부정할 것도 객기를 부릴 것도 없이 서로 마음에 있는 것이 통할 것이다. 그러나 전지의 능력을 갖고 계신 주님과 인간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듯이 제자들도 주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을 것을 바라신 것이다.

C. 그리스도의 복종의 기도(36-46)

주님은 이런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 서쪽 기슭의 겟세마네 동산으로 함께 들어 가셨다. 이곳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하시고 여기서도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을 데리고 가시며 고민하고 슬퍼하시며 마음에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38) 하셨다. 여기서 주께서 고민 되셨다는 뜻은 무엇일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주님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아버지여 만일 만하시거든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9) 하고 동일한 말씀으로 세번을 간구하셨다. 누가는 이때의 상황을 증거하여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22:44) 하였으며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도왔다”(22:43) 기록하였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던 제자들에게 보시니 그들이 자고 있었다. 이에 베드로에서 너희가 나와 함께 시간 동안도 이렇게 기도할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39,40) 말씀하셨다. 참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호언장담하던 제자들로서는 민망하기 그지 없는 일이 아닐 없다.

 

여기서 주님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말씀은 무슨 뜻인가? 주님은 이미 앞에서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시험이 다가올 것을 말씀하셨다. 시험은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쉽지 않은 영적 유혹이다. 이미 열두 제자 사람이 시험에 너머지고 말았다. 이것은 잠들어 있는 육체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편승되어 있어 어떤 상황에서도 그의 능력 안에 있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다시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잔이 내게서 지나갈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시기를 원하나이다”(42) 간구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도 십자가 처형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셨다고 말한다.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주님은 완전 인간이시기 전에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하늘의 능력을 갖고 계신 분으로 결코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실 분이 아니다. 다시 살아 나실 것을 알고 계신 주께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5:7) 증거하였다. 말씀은 자기의 죽음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신 이에게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 하였다. 우리는 그의 간구와 소원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것이다. 여러분 같으면 죽음을 인지하고 있는 마당에 자신을 살려달라고 것인가 철없는 아들들을 하나님께 의뢰하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먼저 주께서 심히 고만하고 슬퍼하셨다는 말에 대한 정의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사용된 고민이란 말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자신에게 있을 사용된 말이 아니라 괴로움이 자신이 해결할 없는 다른 사람의 주권 속에 있을 사용된 말이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께서 마음이 심히 고민 것은 자신의 어떤 결점이나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떠나야 때가 되었는데도 아직 온전치 못한 제자들의 믿음 때문인 것이다. 그들을 주께서 선택하셨고 가르친 그들에게 천국의 성도 양들을 맡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잔이 내게서 지나갈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 간구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이시라면 사람의 뜻으로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달라고 간구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주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모든 것을 이루실 육체의 연약함을 이길 없는 제자들을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케 하여 달라고 소원하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약속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배반한 것을 미리 알고 계셨으며, 제자들이 모두 도망 것을 알고 계셨고 또한 자신의 믿음을 호언장담하던 또한 베드로 역시 세번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다. 또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와 함께 깨어 있어 시간동안만이라도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잠들고 있었다. 이에 주님은 복음의 일군이라도 그들의 육체로 능히 세상을 이길 없음을 알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차피 내가 십자가의 죽음을 피할 없는 것이라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달라고 간구하신 것이다.

 

D. 아버지의 약속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께서 떠나신 후에 그들에게 보내실 보혜사 성령에 대하여 교육하셨다, 그때 주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14:16) 하시며 보혜사 아버지께서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14:26) 하셨다. 또한 너희는 나보다 일을 하게 것이라고도 말씀하셨다.

 

아직 믿음이 아직 완성되지 못하여 육신의 생각에 이끌리는 제자들을 온전케 있는 것은 오직 아버지께서 보혜사를 보내 주시는 뿐이다. 그들이 온전히 거룩한 성품을 이루지 못하면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도 어쩔 없이 모두 악에 빠질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17:17) 간구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얻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피와 땀을 흘리며 간구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1:4) 하시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 되리라”(1:8) 하신 것이다.

 

주님은 세번 기도를 마치신 제자들에게 오니 아직도 그들이 잠에 취한 것을 보시고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리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45,46) 하셨다. 주님은 메시야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죄의 속성 속에 있는 육체의 연약함에는 어쩔 없음을 확인하셨다.

 

또한 주님의 간곡한 간구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제자들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약속의 때를 기다리는 뿐이다. 이렇게 하여 사실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모든 것은 주께서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셨다 하셨으며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16:33) 하신 것이다.

 

D. 배반의 입맞춤(47-50).

결국 열둘 중 하나인 유다가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파송한 군병들을 데리고 나타나 유다가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할 때 예수를 체포하기로 서로 군호를 짜놓았다. 유다가 나아와 입맞추자 예수님은 그에게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50) 하셨다. 이에 무리들이 나와 예수님을 잡자 베드로나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하인 말고의 귀를 베었다. 이에 주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여 네 검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52,53) 하시며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54) 하셨다.

 

E. 그리스도의 힘의 원천(51-54)

여기서 말씀하신 열두 영이란 열두 군단에 해당하는 수많은 천사들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의 힘과 능력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하신 것이다. 앞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모두 떠날 것이라 말씀하시며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16:32) 하셨다. 이와 같이 주님은 항상 이 세상의 질서 속에 사시면서 그 힘의 원천은 하늘에 있었던 것이다.

 

천사들은 주께서 오실 그 때에 함께 거느리고 오실 것이다. 물론 우리도 그때 주님과 함께 오게 될 것이다. 군사들은 검과 뭉치를 갖고 예수를 잡으러 왔다. 이에 주님은 침착하게 너희가 강도 잡는 것같이 검과 뭉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 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55,56)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일들은 성경에 미리 기록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길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다. 이미 성경이 말하여 이는 힘으로도 안되며 능으로도 안되며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는다증거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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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베드로의 메시야 부인(57-75)

이에 베드로가 예수 말씀에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리라”(75)

 

A. 공회의 재판(57-68)

예수님은 결국 대제사장들이 보낸 군사들에게 포박되어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로 끌려 갔다. 그곳에는 이미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공회를 모아 예수를 합법적으로 처형하려고 증거를 수집하려 혈안이 되었으나 많은 증인들 속에서도 확신한 증거를 얻지 못하였다. 이제 그들이 있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자백을 얻는 뿐이다.

 

이때 배드로는 요한의 주선으로 가야바의 종들을 통하여 가야바의 집으로 들어갈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처결이 어떻게 되는가 보기 위해 대제사장 하인들 틈에 끼여 불을 쬐고 있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막강한 권세를 쥐고 있던 대제사장 안나스의 사위로서 빌라도 전임 총독 임명된 자이다.

 

유대인의 공회는 70명으로 조직된 유대민족 최고 의결기관으로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로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저녁이나 안식일이나 절기 때에는 재판을 없게 규정되었으므로 우선 공회의 증거를 얻기 위해 가야바의 뜰에 모인 것이다.

 

사람들의 거짓 증거가 쏟아지자 대제사장이 일어나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62,63) 하자 예수께서 네가 말하였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64) 말씀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자신이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것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이로서 공회판결의 답변을 이끌어 대제사장은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냐’(65) 물었다. 여기서 참람한 말이란 하나님의 신성을 모욕하였다는 말이다. 이에 무리들이 사형에 해당한다 답하므로 공회는 일방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무리들이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며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질을 하고 조롱하였다.

 

B. 베드로의 맹세(69-74)

그러나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베드로의 행동이다. 그는 군중들의 무리 속에서 숨도 쉬지 못하고 되어가는 일들을 지켜 보고 있었다. 혹시 여러분들은 악한 무리들의 격양된 상황 속에 들어 일이 있는가? 군중들을 선동하는 자들의 구호에 따라 군중들은 분노하고 분기를 참지 못하여 광분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속성들이 최근 악한 사람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집회 속에 모인 무리들은 정확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무리를 선동하는 리더들의 말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는 중에 이끌려 나간다. 그러한 속에 베드로가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첫번째 부인은 가야바의 여종에 의해 정체가 들어 났다. 그녀는 베드로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말하자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하며 앞문 쪽으로 꼬리를 감추었다. 그러나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사람이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 증거하자 베드로가 이번에는 맹세하며 내가 사람을 알지 못한다 부인하였다. 그러나 베드로의 부인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베드로의 말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너도 진실로 당이라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73) 하자 그때 베드로는 한발 나아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답하였다. 닭이 것이다.

 

참으로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있는 것인지 참으로 허망한 순간이 아닐 없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의 문제는 그가 어떤 무리 속에 어떤 상황 속에 있느냐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그는 지금 깨어 기도하고 있어야 때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존하지 않고 예수님의 결국을 보려고 그들 속에 스스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벌써 주께서 어떻게 것인지 미리 말씀하셨고 이는 모두 성경에 미리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C. 울음소리(74-75)

75절에는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기록되었다. 베드로를 깨우친 것은 닭울음 소리였다. 말못하는 짐승이 미련한 종을 깨우친 것이다. 과거 발람 선지자의 의롭지 못한 것을 막은 말못하는 나귀처럼 말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일들을 경험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세상이 이끌려 어느 사이에 세상 무리 속에 동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주님은 베드로가 자신의 믿음과 충성을 호언장담할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까브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희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22:31,32) 당부하셨다. 결국 닭이 베드로가 깨우친 것도 주님의 기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 증거하였다.

 

우리는 그들 속에서 조롱을 받으며 스스로 그리스도 됨을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화살을 벗어난 미련한 종을 일깨우는 것은 결국 성경의 말씀 뿐이다. 밧세바를 범하고 살인까지 한 다윗왕도 결국 나단 선지자의 말씀이 있기까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주께서 깨어 나와 함께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세상이 되어가는 결국을 알고자 한다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 속에서 조롱을 받으며 주를 부인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를 위해서 오직 우리는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깨어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잠들지 않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