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태복음강해

(마태복음27: 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요나 2008. 4. 4. 11:55

(마태복음27: 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27:46) “제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I. 산헤드린의 재판과 가룟 유다의 비극(1-10)

(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의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것을 끊고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A.       배경(2a)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하는 것은 예수님을 로마법정에 세우기 위한 고소의 빌미를 만들기 위함이다. 그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어서 모든 것에서 로마의 법적 통제를  받았다. 물론 로마정부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특성을 알기 때문에 제사장들과 서기관 장로들로 구성된 산헤드린에게 종교적 치리권을 주어 유대인을 다스리도록 하였지만 유대인에게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권한이 없어 사형에 처하는 심문은 총독이 하게 되었다.

 

일은 성경에 미리 예언된 일로서 우리는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형을 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놓고” (22 : 9)라고 기록되었으며, 다시 그런즉 이스라엘 자손이 들에서 잡던 희생을 회막문 여호와께로 끌어다가 제사장에게 주어 화목제로 여호와께 드려야 것이요” (17:5) 하였다.

 

또한 다윗은 이날의 일들을 미리보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의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것을 끊고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2:2)증거하였으며 다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118:27) 증거하였다. 결국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하신 말씀을 따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시기 위해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졌다.

 

B. 가룟 유다의 비극(3-10)

흥미롭게도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 가룟 유다에 일에 대하여 때에 예수를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대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매어 죽은지라”(3-5) 기록하였다.

 

여기서 사용된 후회라는 헬라어는 메타멜로마이’(metamelomai)로서 회개와는 전혀 다른 말이다. 이것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반성인 것이다. 그러나 유다의 반성은 너무 늦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마치 에서와 같이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기자는 이러한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12:15-17) 경계하였다.

 

때늦은 깨달음이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죄한 자이심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주어진 회개의 시간을 상실한 것이다. 이미 성경은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7:25) 경고하였으며  예수께서도 이미 그들을 부르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자러라 (6:70,71) 말씀하셨다. 그가 만약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면 스스로 그리스도를 파는 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7:12) 기도하셨다. 이처럼 이미 가룟유다에 관한 것은 성경에 기록되었고 그가 만약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면 결코 후회될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조차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B.       위선자들에 대한 성경의 증언(6-10)

가룟 유다가 은을 성전에 던져 놓고 가서 자살해 버리자 제사장들은 피값을 성전 돈궤에 넣는 옳지 않음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는데 성경은 이름은 오늘까지 피밭이라 불리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가룟 유다의 이런 행동에 대한 대제사장들의 행한 일들도 성경에 모두 예언되었다는 것이다.

 

9절에는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었다 하였지만 말씀은 후일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삼십을 달아서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11:12-13)라고 증거되었고 시편기자는 이를 말하여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69:25) 하였다. 이처럼 성경은 시대를 통하여 여러 부분들 증거하고 있다.

 

후일 베드로도 일을 말하여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사람이 본래 우리 가운데 참여하여 직무의 부분을 맡았던 자라 (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 나온지라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방언에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1:16-19) 증거하였다.

 

 

II. 빌라도의 심문과 고문(11-31)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피를 우리와 예수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25)

A.       거짓 증거에 대한 정직한 답변

예수께서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었다. 이에 주님은 말이 옳도다하셨다. 말씀은 우리가 여유를 갖고 생각해 필요가 있다. 사실 당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지만 실제로 백성들 중에서 왕노릇하시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으나 사울 왕에서 쫓기던 것처럼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을 당하시고 이방인에게 심문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주를 영접하며 모름지기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왕이 되시어 예루살렘에서 그들을 통치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심문에 한마디도 답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심문에 답하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을 미리 말하여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깍는 앞에 잠잠한 양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53 :7) 증거하였다.

 

또한 다윗도 증거하여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38:12-15) 증거하였고 후일 베드로도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다”(벧전 2:21-23) 증거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변할 것이 없는 것은 그가 행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얽으려는 그들에게 일일이 답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말씀을 읽을 성경 기록하신 말씀들에 대하여 너무 불평불만을 많이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 앞에 일일이 답변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두 증명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B. 유월절의 특별사면 제도

예수께서 심문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자 그를 기이히 여긴 빌라도가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음을 들어 백성들을 향하여 내가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들은 강도 바라바라고 소리를 질렀다. 백성들이 바라바를 내어 달라고 것은 바라바가 로마에 대적하여 강도질을 하며 부분적으로 백성들을 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성들 중에서 행하신 생명의 길들을 모두 잊어 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없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참가했던 수많은 군중은 모두 어디에 갔으며 병고침과 귀신에서 놓임을 받은 증인들은 모두 어디에 있었을까 싶다. 그러나 정치세력 앞에 앞잡이 군중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자신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저희도 저희가 하는일으로 모르고 행하니 저희를 용서해 달라고 하신 것이다.

 

C. 뜻밖의 증인들 (19) – 옳은 사람

흥미롭게도 19절에는 총독 빌라도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소서 오늘 꿈에 내가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하였다. 어떤 외경에는 그녀의 아들이 예수님께 병고침을 받아 그녀와 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총독의 아내가 예수가 옳은 사람이라고 증거한 것과 그로 인하여 꿈에서까지 많은 애를 썼다니 기이한 일이 아닐 없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누가복음에서도 발견하게 되는데 예수와 함께 나란히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 하나가 증거하여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23:41) 하였으며 또한 십자가 집행 현장에 있던  백부장이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23:47) 증거하였다. 이처럼 예수님의 의로움은 여러 분야의 사람들 속에서 증거되었다.

 

D. 빌라도의 근심과 군중의 선택

총독 빌라도는 많은 사람들의 거짓 증언에도 예수님을 사형할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여 예수를 살리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군중들이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크게 선동하는 바람에 결국 빌라도는 민란이 일어날 것이 두려워 무리 앞에 손을 씻으며 나는 사람에 대해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하고 예수님을 그들의 뜻대로 내어 주었다. 이에 유대인들은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환호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관한 모든 계획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일의 진행 과정들이 사람들에 의해서 되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고발 되었고 빌라도에 의해 집행되었다. 그러나 빌라도에게 결정적인 손을 들게 것은 유대인 군중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준 사람들은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읽을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돌변할 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들을 체험한 사람들이 없었던 것일까? 그들은 처음부터 모두 사단에게 내어준 사람들이였을까? 그러나 혹시 2002 월드컵 결승전 응원에 참가했었던 사람들이나 당시 시청 촛불집회에 참가했었던 사람들은 군중의 무리를 이끌어 가는 보이지 않는 영들의 실체를 체험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악한 일을 도모하는 정치적 수단에 역사하는 악한 영들의 역사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총독 빌라도가 7번이나 예수님의 무죄를 두고 번민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우리 마음 속에도 발생한다. 어떤 일을 해야 것인가 말아야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서게 결과는 문제를 많이 번민을 하였느냐에 있지 않고 최종적인 선택이 어떠했느냐에 있다. 아무리 많은 번민을 하고 많은 사람들의 옳은 증거가 있다해도 자신의 최종적인 선택이 옳지 못하면 망설임과 번민은 모두 허망하게 뿐이다.

 

나는 가끔 동성애로 인하여 고민하는 청년들 중에 빌라도처럼 고민하고 번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은 동성애가 악하고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임을 알며 그에 대한 나의 증거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육체의 연약함을 말하며 다시 개가 토한 것을 먹고, 더러운 곳에 다시 누워버리고 만다.

 

베드로는 후일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가르치지 말라고 때리는 제사장들을 향하여 우리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5:29) 증거하였으며 다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의인을 잡아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7:51-53) 책망하였다.

 

범죄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너무나 확실하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10:26,27) 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일생동안 신앙적인 중대한 결정을 해야할 때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생각하여 의로운 일을 외면할 때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에 대한 결과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보응된다는 것은 진리다.  

 

E. 로마병사들의 조롱(26-31)

결국 예수님은 그들의 뜻대로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졌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군대를 모으고 주의 옷을 벗기고 붉은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리고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하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지어다조롱하였다.(28-29). 또한 그들은 다시 예수님의 옷을 갈아 입히고 얼굴에 뱉으며 머리와 얼굴을 치며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갔다.

 

이처럼 세상에는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도 알지 못한채 행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이들을 보며 저희를 용서하소서 저희가 자기가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신 것이다. 이사야는 이들을 향하여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먹듯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 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53:4-5) 고발하였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악한 일들에 가담하지 않고 그들 속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가야바 제사장의 안에 들어간 베드로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번이나 맹세로서 부인한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일들로 하여 우리는 세상에는 아직도 훼방하는 영들이 역사하고 있음을 있다. 야곱은 임종시 아들 레위와 시몬을 향하여 혼아 저희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49:6) 예언하였다.

 

 

IV. 십자가에 못박히심(32-56)  - 골고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내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32)

 A. 구레네 사람 시몬(32)

이제 예수님은 예정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해 병사들에 이끌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해굘이라하는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자기가 못박혀 죽어야 나무 십자가를 걸머지고 처형의 장소까지 간다는 것은 정말로 가혹한 일이 아닐 없다. 그당시 십자가 심판은 황제와 국가에 반역한 자들에게 행하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으로 마가는 이를 소개하여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15:21)이라 소개하였다. 사람의 이름은 후일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를 개척한 사람들 중에서 발견되며 사도 바울은 그의 가족의 헌신에 대하여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어머니는 어머니니라” (16:33) 증거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자기 인생의 여정에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을 만나게 된다. 오늘 글을 쓰는 자신도 생각을 해보면 죄인 중에 괴수인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는지 기이한 일이다. 이것이 은혜이며 생의 가장 위대한 기적인 것이다. 나는 내가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는 악한 자들의 속에 분류되어 있지 않음을 감사한다. 비록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육신의 더러운 옷을 입고 육체를 즐기던 사람이었으나 주께서 혼을 위로하실 내가 돌아 있었음은 중의 복이 아닐 없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전에는 우리도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은혜를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2:3-5) 증거하였다.

 

B.       예언의 성취(34-36)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자 그들은 예수께 쓸개를 포도주를 억지로 마시려 하였다. 이는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69:21)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맛보시고 그것이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덜하게 하려는 것임을 아시고 거절하셨다. 굳이 고통을 피하실 이유도 없었고 아버지께서 십자가를 지게 하셨음으로 주께서 순종하셨을 능히 그를 지실만한 믿음과 능력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또한 병사들은 예수를 못박은 후에 옷을 제비 뽑아 나누었다. 이는 당시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죄인의 옷을 지니고 있으면 액땜을 있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일을 말하여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22:18) 기록하였다.

 

빌라도는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이란 팻말을 붙였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달라고 청하였으나 빌라도는 내가 것을 썼다고 말하였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강도들이 함께 십자가를 졌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자기 죄로 인하여 십자가 처형을 당했지만 중의 사람이 주에게 자기의 영혼을 부탁하여 주로부터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은혜를 입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들을 말하여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53:12) 증거하였다. 이처럼 성경에 예수님에 관한 일들이 상세하게 예언되었음에도 말씀을 맡은 유대인들이 이를 부인하고 도리여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었다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C. 사람들의 반응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더욱 가관이다. 39절에는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39,40) 하였다.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라는 말은 요한복음 2 19절에 기록된 것으로 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실 유대인들이 표적을 요구할 하셨던 초기사역 중에 하셨던 말씀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란 말은 흥미로운 표현이다. 이것은 그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무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종교의식과 현실주의에 빠져 메시야적 계시에 무관심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들의 신앙은 성경적 계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율법적 행위와 죵교활동에 근거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시편기자는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3:2) 기록하였으며 다시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하나이다”(시편22: 8)증거하였다. 또한 그는 메시야의 슬픔을 말하여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22 :6) 하였으며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69:20) 기록하였다.

 

V.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57-66)

이에 성소의 후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51)

A.       예수님의 죽음과 성경의 증거

45절에는 제육시로부터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였다 기록되었다. 유대인은 오전6시부터 오후6시까지를 열두시간으로 구분하였으므로 제육시는 정오가 된다. 가장 해가 높이 있을 시간에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는 것은 정말 경이한 일이다. 어둠이 오후 3시까지 이어진 것이다.

 

제구시 즈음에 주님은 크게 소리질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외치셨다. 엘리는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1인칭 접미사를 붙인 헬라어로서 나의 하나님이란 뜻이다. 말씀은 시편22 1절의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하신 말씀의 성취이다.

 

다윗은 여기서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22:4,5) 하였으며 다시 내가 때부터 주께 맡긴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하나님이 되셨사오니"(22:10) 증거하였다. 이로서 주께서 다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하신 것은 끊어질 없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언급하며 독생자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소망하신 외침이신 것이다.

 

앞서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아버지께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9) 간구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절대적인 소망을 표명하신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과 그의 사람들을 향하신 복음의 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사람들은 저가 엘리야를 부른다’(15:35) 하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2:9) 증거하였다. 얼마나 은혜인가? 세상이 있으므로부터 누가 그와 같은 일의 있었는가? 우리가 과연 자신을 위하여라도 이런 아픔을 감내한 일이 있었는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마땅한가?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5: 2) 기록하였다.

 

B. 기이한 사건들

51절에는 이에 성소의 후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51-53) 기록되었다. 성소의 휘장이란 성전과 지성소를 가로막은 통으로 두꺼운 커튼으로서 성소 안에는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 일년에 한번 희생의 피를 갖고 들어 가던 곳이다. 휘장이 둘러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 이상 가려질 필요 없으며 이상 피의 희생을 드릴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사야는 이를 미리 말하여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53:11) 하였고,  히브리서 기자는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제물로 거룩하게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0:10-14) 증거하였다. 이처럼 우리의 무거운 죄를 위하여 그는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신 것이다.

 

 

무덤이 열리고 무덤 속에 잠자던 성도의 몸이 일어나 저희가 부활 후에 무덤을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는 말씀은 매우 흥미롭다. 이것은 마치 신령한 세계와 세상의 질서가 함께 공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는 것으로 보아 모든 사람들이 이들은 있었던 것은 아닌 같다. 아마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자들과 그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면 부활한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마 이들은 영원한 부활이 아니라 주님과 같이 낙원으로 들어가 주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목격한 백부장과 예수를 지키던 사람들이 때에 일어난 상황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증언하였다. 후일 이들은 복음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목격하고도 믿을 없었다면 그는 정말 기이한 사람이 아닐 없다. 그들은 예수가 살아 것을 결코 수도 없을 것이며 보고도 믿지 못할 것이다.

 

    C. 두 종류의 사람들

55절에는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섬기며 좇아 온 많은 여자들 중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들 곧 사도 요한 형제의 어머니도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이들은 모두 주와 복음의 일군들을 섬기던 여인들이다. 이제도 복음의 대열에는 항상 믿음의 여인들이 동반하고 있다. 남자들보다 여인들이 더욱 열정을 갖고 있는 것 또한 기이한 일 중의 하나이다.

 

날이 저물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예수를 따르던 제자가 빌라도에게 나아가 그의 시체를 달라고 청하여 예수님의 시신를 가져다가 여인들과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가 준비한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품(19:39, 23:56)과 함께 세마포로 싸서 바위 안에 판 새 무덤에 넣고 큰 돌을 굴려 무덤의 입구를 봉하였으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 앞에 앉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예수님께서 사랑하던 제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빌라도에게 나아가 예수가 살았을 때에 사흘 후에 살아 것을 증거하였으니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하여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소문을 것이니 군사로하여 굳게 지키게 명하라 청하였다. 그러나 빌라도는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너희 것하라고 하니 그들이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처럼 현실적인 위협에만 급급하는 것이다. 너는 지금 어느 무리 속에 있는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제자들 속에 있는가? 아니면 복음의 훼방꾼 속에 있는 바리새인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