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디모데서강해

(딤전1:19) 목회자의 믿음과 양심

이요나 2005. 3. 3. 10:31
(딤전1:19) 목회자의 믿음과 양심

(딤전1:18-19)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이른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갖으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서는파선하였느니라

우리는 지난 주에 유다서를 마쳤습니다. 목요일 저녁 성경공부에서는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를 마치고 데살로니가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 주일에 서로 다른 두개의 설교를 준비한다는 것이 제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기도 합니다만 성경책의 남은 부분이 얇아질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살펴볼 디모데서와 디도서는 목회서신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바울의 목회 말년에 기록된 것으로 자신의 목회를 정리하면서 후계자에게 당부하는 유언에 해당하는 서신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아직 사역자 하나를 키우지 못한 제가 이 서신을 시작하기에 합당치 못한 느낌이 돌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지금 바울이 복음을 이어갈 차세대 목사들에게 무엇을 당부하고 있는가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소망의 그리스도
바울은 1절에서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앞에서 살펴 본 각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들의 서두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구속의 주이신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언급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싱앙 생활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원초적 존재성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축복 속에서 본질적으로 죄인된 존재였음을 일부러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진실은 하나님은 나의 구원의 주이신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언급하였습니다. 교회서신에서는 항상 믿음과 사랑이 먼저 고취되고 있었던 반면 종말의 성도를 일깨우는 목회서신과 사도들의 일반서신에서는 오히려 소망이라는 단어가 앞서고 있습니다.

소망이란 말은 현실적 환난과 고통에 근거하고 있는 말입니다. 넉넉하고 풍요로울 때에는 소망이란 망각된 말일 수 있습니다. 그 현실이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10년전 우리나라에 IMF가 왔을 때 강남권의 사람들은 '이대로'라는 축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엄청난 달러를 갖고 있었고 현실적으로 고통을 실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오늘 우리가 살펴 보는 디모데전서 서두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의 차세대에 대두되고 있는 두가지 현상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물질문명의 발달로 발생될 그리스도에 대한 가치관과 또 다른 하나는 정치적 변화 가운데 발생될 그리스도인들의 수난입니다.
 
 1절에서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사도의 이름으로 편지를 한 것으로 우리는 이 편지가 사도권 속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향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편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부름받은 모든 사역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인것입니다.

 참 아들
바울은 2절에서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하였습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 즉 영적인 아들을 의미합니다, 또 디모데란 공경이란 말과 하나님이란 말의 복합어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뜻이 됩니다.

디모데의 이름은 사도행전 16장 1절에 처음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 중에 만났고 제2차 전도여행 중  루스드라에서 데모데를 사역에 영입시켰습니다. 사도행전 16장 2절에는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디모데는 바울을 만나기 전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바울이 있는 곳이나 또 바울이 교회와 성도들의 일로 가야만 했던 곳에는 늘 데모데가 보내졌습니다,  또한 그는  바울과 함께 옥중에서도 같이 있어 바울의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바울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기원하였습니다. 다른 서신에서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던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긍휼을 기원한  것으로 보아 바울은 제자 데모데가 장차 받게될  고난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탄생
바울은 3절에서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9장과 20장에는 바울이 에베소에 어떻게 들어 갔으며 어떻게사역을 하였는지 상세히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두란도 서원을 세우고 3년 반 동안 제자사역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처음 에베소에 둘렀을 때 그곳에는 이미 주를 믿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고 안수하므로 그들에게도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후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면서 그 지역적 요건과 그 당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에베소에 아시아 지역의 교두보가 될 교회를 세울 것을 서원하여 삼년을 머물며 제자를 양육하였습니다. 바울은 '내가 꺼리끼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다'(행19:27)하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모여 놓고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라가 너희에게 들어 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안다"(행20:28-30)하였습니다.그러므로 바울은 데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하였던 것입니다. 

 신화와 족보의 변론
여기서 다른 교훈이란 헬라니즘과 유대인의 히브라이즘입니다. 이 둘은 마치 서로의 부족한 것을 보완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론적인 결점을 보충하며 결속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교훈의 특징은 사변적 변론이었습니다. 사변적 변론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지어낸 말을 뜻합니다.

저는 미국에 머문동안 어느 집사님의 서재에서 '다빈치 코드'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얼마전 신문에 보니까 그 저자가 쓴 또 다른 책 천사와 악마에 관한 것이 번역되었더군요.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심한 분노와 고통이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 내용이 얼마나 악한지 어떻게 인간의 머리에서 이런 글들을 지어낼 수 있을까 이해가 않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은 나름대로 세상에 이미 나돌고 있는 의심의 말들과  소문들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예수와 막달라의 불륜을 언급하며 다빈치의 그림 속에 얽힌 소문들을 추상적으로 역은 것입니다. 그의 결론은 예수의 제자들이 날조하여 성경을 기록하였고 막달라가 나은 아이는 파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책들이 전세계 가운데서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란 원래 같은 말이 됩니다. 시작이 신화이고 끝은 자신들의 위장되고 화려한 족보로 남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유명해지려면 우선 자기의 조상을 신적인 위치로 끌어 올리게 마련입니다. 그 신적 요서를 만들기 위해서 신의 이름들을 지어내고 신들의 역사를 또 짓고 그 신들의 전쟁과 화려한 애정행각 그리고 자손들에 이르기까지의 신화를 계속 창출해 냅니다.

물론 이러한 신화는 헬라에서 시작된 것이고 족보는 유대인에게서 유래됩니다. 오랜세월 속에서 서로로 궁합을 마춰 헬라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웨디마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이런 것들이 역사하는 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에 왜 문제가 생길까요?

그것은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때였고 복음이 사도들의 입을 통하여 전해지고 있었던 때라서 그와 마추어서 또 다른 신화들이 자창 예언자와 교사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훼방하기 위하여 그 당시 세상에 만연되어 익숙해진 이방 사람들에게 접근하게 된 것입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바울은 5절에서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였습니다.

바울은 먼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시로부터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으로 하여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해 우리의 안에 두신 하나님의 품성입니다. 바울은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그 양심이 율법이 되어 자신을 가르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 교회 가운데 발생된 묘한 일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선생이 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선생'이라고 하였습니다만 결국 그 당시 율법이란 유대교와 그리스도 교회에 예속된 종교적 교리로서 율법의 선생이란 교회의 지도자들을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학교에서 쏟아져 나와 교회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복음을 전파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들의 설교를 들어 보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신학을 설법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 까지는 좋은데 요즘에는 그것이 멕히지 않으니까 축복에 대하여, 귀신에 대하여 여러가지 말들을 지어 사람들의 영혼을 휘어잡으려 합니다.

바울은 9절에서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을 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 하는 자며 거짓 맹세를 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논리는 이미 고린도서와 갈라디아와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기업을 받지 못할 자로 언급된 말씀입니다만 율법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말을 다시 말하는 것은 이런 것에 대한 규제를 하는 바울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도전하며 괴변을 늘어 놓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헬라 철학자들은 그노시스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로 불리우는 그노시스 사상이란 모든 물체는 신으로부터 방출되어 떨어진 것으로 사악하다는 개념입니다. 즉 신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이분법적인 논리를 성립한 것이 됩니다.

그들은 오직 선한 분은 신이시며  이 세상은 사악한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선하신 신이 물질인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사물(아이온)을 방사하였는데 그로부터 계속 방사된 물질이 발생되어 하나하나마다 그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로서 신화적인 존재에서 족보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족보란  단계별로 점점 못할 수 밖에 없는 사다리식의 조직을 갖게 되는데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통하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란 마치 암호와 같아서 오직 고도의 교육과 훈련을 받은 자만이 도달 할 수 있다고 하여 영적 단계의 계급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런 지어낸 말들(사변적 변론)은 두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하나는 물질은 악한 것이어서 육체의 행위는 더러운 것이라 하여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금욕주의를 주장하며 또 다른 하나는 물질은 사악한 것이므로 인간의 육체 또한 악한 것이어서 우리 육체속에서 발생되는 욕구를 충족한다고 해도 결국 육체는 신적인 영역에 오를 수 없이 파괴되고 소멸되는 것으므로 거룩한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며 향락을 당연시 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논리는 더 발전되어 육체로 오신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여 그가 육체였다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없고 자신들과 같은 고도로 훈련된 존재일 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로서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영마다 적그리스도라고 정죄한 것입니다.

따라서 헬라의 그노시스 주의자들과 유대교는 서로 같은 사고를 갖고 율법에 기록된 음식물의 규제, 금식과 절기 등을 강조하는 금욕주의적 사고를 갖게 되었으며 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율법교사들을 통해서 고도의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지식이 교회안에 만연 된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이러한 잘못된 이단적 지식은 세상에 가득하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교회 안에까지 침번한 것입니다. 복음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자들이 자신의 우월감을 강조하며 계급식 종교행위를 조장하고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로 성경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 정권에도 이런 이분법적인 논리로 국가를 다스리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의 영혼 속에 존재한 신적요소를 말살하고 물질주의적 사고로 공산주의와 같은 사회주의를 탄생시켜 공동분배의 원칙을 주장하면서도 엄격한  계급사회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 계시록에 나오는 니골라 당이 바로 이러한 사상 속에서 발생된 이단인 것입니다.

 선한 양심과 믿음
바울은 18절에서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너를 지도한 예언이란 성경의 말씀을 말한 것입니다. 그당시는 모두 사도들의 입술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주신 말씀으로 오늘 우리가 보는 바 성경인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19절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에서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파선이란 풍랑으로 깨어진 배를 말합니다. 양심을 버린자는 그의 믿음이 깨어진 배와 같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들 중에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단에게 던저 버린다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짓을 할 수 없도록 사단의 징계권에 던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역사로 고난받은 욥의 고난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단이 믿는자에게 역사한다는 것은 혹독한 징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자신의 재물을 팔아 교회에 헌납하면서도 양심을 속이고 성령 앞에 거짓을 말하여 죽음으로 내어던진 바된 삽비라 부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주를 믿는 사람들 속에서 양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들 속에 양심이 살아 있다면 성경의 기록된 책망의 말씀을 듣고 회개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경계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여 듣기 좋은 신화와 족복의 말들을 찾자 나서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 가운데 양심이파선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에게 이러한 사람들을 사단에게 너어 줄 권세를 주셨다는 것은 정말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스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일에 너무 열심을 내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어 버려 주께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에 기록된 경계의 말씀으로 나를 가르치며 선한 양심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