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2장 강해) 믿음의 본질과 삶의 기적

이요나 2008. 3. 24. 12:34

(요한복음2장 강해) 믿음의 본질과 삶의 기적

 

(요한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한복음 2장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구성되었다. 먼저는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과 두번째는 성전의 정의이다. 그러나 이 두 주제는 모두 한 가지 대주제를 표명하고 있는 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본체 예수 그리스도이다. 제자들은 가나 혼인잔치의 표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되는 삶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고 성경과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이 육신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의 본체되심을 깨달았다. 

 

흥미롭게도 2장 후미에는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저희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23-25) 기록되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러한 기이한 행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예수님은 유월절에 성전에 거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좇으시고 또한 소경이나 귀머거리들을 온전케 하셨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그 이름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그들의 믿음의 신실성이 결여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그들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되심의 성경의 계시를 따라 믿은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표적들을 보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2장을 읽으며 오늘날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삶의 변화가 아닌 종교적 활동에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성경의 조명을 받지 못하여 시시각각으로 변질 될 것이기 때문이다.

 

I. 가나의 혼인식 (첫번째 표적 삶의 변화)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4)

 

A. 설득의 매력

1절에는 사흘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서 혼인이 있어 예수와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다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사흘되던 날이란 나다나엘을 부르신던 날로부터이며, 곧 제자들을 부르신 지 일곱째날에 해당되는 날이며, 또한 유대인들은 처녀의 결혼은 수요일에 있고 과부들의 결혼식은 목요일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안식일로부터 사흘되는 날 곧 초혼자의 결혼식임을 뜻한 것일 수도 있다. 

 

거기에 예수의 어머니도 계시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혼인에 초대를 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가족은 신랑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가나 출신 나다나엘의 결혼식을 수도 있고(21:2), 성모 마리아가 혼인잔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생의 아들 요한의 결혼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참조, 19:25).

 

오늘날 젊은이들은 결혼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생에 있어 결혼식만큼 중요하고 뜻 깊은 날은 없다. 결혼은 인생의 전환점이기도 하고 인생의 새출발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인간사에 가장 먼저 개입하신것이 혼인제도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창조적 비상의 날로서 주님은 그러한즉 이에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19 :6)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결혼식에 누구를 초대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을 주례로 초대하고 일가친지와 선후배 동료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결혼식을 치룬다. 결혼식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성대하게 치루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두 사람의 혼인을 증인케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결혼식에 예수님이 초대되지 않았다면 그 결혼식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축복을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  

 

  B. 어머니의 믿음의 준비(3-5)

3절에는 포도주가 모자란 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시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모자란다는 말은 늦은이란 의미를 뜻하기도 하므로 늦게 온 손님들에게 대접할 포도주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혼인잔치에 많은 손님이 초대 되었으며 손님들은 흥취해서 신랑의 결혼을 축복하였다는 증거하기도 하다.

 

혼인 잔치집에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말은 잔치의 파장이란 뜻으로 혼인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의 흥을 깨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혼주로서 정말 큰 결례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마리아가 예수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했을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메시야 되심의 믿음을 제일 먼저 갖게 된 은혜받은 여인으로서 그녀는 혼인잔치에 돌발한 난제를 예수께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말에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4) 하셨다. 이 말은 문자대로 하면 여자여 당신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이다. 유대인들의 언어 관습을 모르는 우리로서는 매우 불경스런 말로 들리는 대목이지만 그러나 여기서 여자여는 하대한 말이 아니라 계시적 암시가 내포된 강조의 술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모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메시야의 계시를 받은 여자로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하나님 앞의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메시야 수태를 전하며  은혜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1 :28) 문안하였다. 또한 예수보다 여섯달 먼저 요한을 수태한 엘리사벳은 수태한 마리아가 자기에게 나아옴을 보고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있도다 (1:42) 축복하였다. 이와 같이 이 두 여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메시야의 계시를 받은 여인들이다. 

 

따라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은 어머니께서는 내가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할 것인지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4b) 라는 말씀은 나는 준비된 상황의 때를 따라 일을 합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나는 혈육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에 따라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그의 목적에 따라 일을 할 뿐입니다 고 말씀하신 것이라 하겠다.

 

사실 예수님은 30년 동안 묵묵히 요셉의 아들로서 목수생활을 하면서 때를 기다려왔습니다. 누가복음 2 52절에는 예수님의 열두살 때의 행적을 기록하며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기록되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세례 요한의 증거를 받아 세상에 나오시기까지의 행적에 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예정을 따라 이루어져 갔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는 그의 때에 대한 기록이 여러 번 소개되고 있다. 장막절 축제 때에도 예수님은 그의 동생들에게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는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7:8) 말씀하셨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아직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음이러라 (7:30) 기록하였다.

 

또한 주님은 유월절 명절에 참여한 이방인들이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구하는 것을 보고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2:23) 하셨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3:1) 기록하였다.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예수님은 보라 너희가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16:32) 하셨으며,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말씀하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17:1) 라고 기도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는 모두 십자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복음서에는 이러한 계시적 묵시적 표현들이 여러 번 소개되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26:39) 하셨으며 또한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셨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도 인간이신지라 십자가의 처형에 두려워하셨으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을 원망하셨구나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그는 인자이시되 사람이 아니시며 주깨서 그를 위해 오셨고 또 부활하여 승천하실 것을 알고 계셨으므로 죽음을 두려워하던가 또한 인간처럼 사사로운 욕망에 사로잡힐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망설임 없이 아들을 향해 칼을 들 수 있었듯이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죽은 자를 능히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온전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결코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C. 하인들의 믿음의 순종

아들 예수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곧 하인들에게 말하여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 지시하였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또 그가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예수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말에 대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인들이 마리아의 지시를 받아 자신이 어떤 말하여도 하인들이 실행할 의지가 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명령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항아리는 유대인 집 앞에 두어 통상 외출에서 돌아 올 때나 식사 시 손과 발을 씻어 정결케 하기 위한 항아리들로서 이 항아리는 보통 20-30갤론 정도의 물이 들어가므로 하인들이 채운 여섯개의 항아리의 물은 120갤론 정도가 될 것이다.

 

혼인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이 모두 손발을 씻고 들어 왔을 것이므로 물 항아리는 거의 비어 있었을 것이며 또한 중동의 지역을 생각할 때 대부분 동네 한 가운데 한 우물을 사용하였으므로 하인들이 물을 길어 여섯개의 항아리를 채우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항아리의 아구까지 물을 채웠다. 그것은 하인들이 어떤 말씀이라도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듣지 않았다. 또한 후일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열한 제자들이 식탁에 있을 때에 예수의 살아나심을 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은 제자들을 책망하셨다(16:14). 이처럼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것에 매우 둔감하다. 이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자기의 유익을 따라 그 권세에 순종하는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하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따라 항아리에 물을 채우자 예수께서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8) 하셨다. 그들은 주의 말씀을 따라 항아리의 물을 떠 연회를 주관하는 책임자에게 갖다 주었다. 이는 정말 순종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이 연회장에게 떠 다 준 것은  그들이 우물에서 길어 온 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없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이는 예수께 무엇을 하든지 그의 뜻대로 될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9절에는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하인들을 알더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을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들은 하인들인 것을 뜻한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의 순간을 체험하는 하인들의 기쁨을 생각해 보라. 이와 같이 믿음의 기쁨은 오늘날도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모든 자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

 

D. 칭송받는 신랑(9-10)  믿음의 대가 최상품의 포도주

이에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10) 칭송하였다. 기적은 예수께서 행하시고 일은 하인들이 하고 그 칭송은 신랑에게 돌아갔다. 이는 그날의 주인공이 신랑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가 이를 행한 것이 자신들의 공이라고 떠벌린다면 그날의 주인공 신랑은 매우 난처해질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라 (24:25,16) 하셨다. 이 말씀은 이 시대의 하나님 나라의 종된 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 주는 말씀이다. 

 

오늘날 주의 일을 하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떤 능력이 나타나면 마치 자신의 권능인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오신 것이다. 계시록에는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4:11) 기록되었다. 이는 모든 주의 모든 종들이 하늘 보좌 앞에 섰을 때 자기들의 모든 영광의 면류관을 주의 보좌에 던지며 외친 노래이다. 이와 같이 모든 영광은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다.

 

E. 첫번째 표적의 의미(11)  

11절에는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나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기록되었다. 이 한 줄의 메시지는 앞에서 있었던 모든 말씀들을 종결짓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부르신 제자들에게 첫번째 표적으로 물이 포도주를 변하는 것으로 선물하신 것이다.

 

여기서 표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을 나타내는 메시지이다. 특별히 요한복음에는 여덟개의 표적을 기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였다. 그 중에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이 그 첫번째인 것이다. 오늘 요한이 증거한 첫번째 표적은 그 제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의 초대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인생이 변화되어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찰 것에 대한 믿음의 확신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쁨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초대받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주어질 것이다. 만약 이러한 변화의 기쁨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아무 의미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계시된 믿음의 증거를 따라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면 당신은 누구보다도 먼저 삶의 변화를 발견하는 기쁨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것은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니 나는 이러한 기쁨에 충만하였노라(3:29) 증거하였다.

 

그후 주님은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제자들을 이끌고 가버나움으로 옮기셨다. 이는 가버나움이 갈릴리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로 정치, 경제, 종교적 중심지가 되어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은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셨다(12b) 기록하였다. 이는 가버나움에서 믿음을 발견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II. 성전과 그리스도(13-25) 공생애 첫번째 유월절 (2:13, 6:14, 11:55)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23)  

 

A. 예배의 문제(2:13-17)

2장의 두번째 문단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첫번째 맞는 유월절에 있었던 일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삼년 동안 세번의 유월절(2:13, 6:14, 11:55)을 맞이하셨는데 그때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백성들과 명절을 함께 하셨다.

 

예수께서 그리스도 사역을 시작하시며 첫번째로 맞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행하신 것은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것과 환전상들을 쫓아내신 것이다. 이들의 위선적 종교 행위에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칙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쫓으시고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시며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16) 분노하셨다.

 

성전 안에서 이러한 장사는 오랫동안 내려온 관행이었다. 성경은 제사장의 어른들과 백성들도 크게 범죄하여 이방 모든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거룩하게 두신 그 전을 더럽게 하였다 (대하36:14) 고 기록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흠없는 제물이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이 가져 온 제물들을 타박하고 비싼 값으로 자신들의 짐승들을 사도록 했다. 또한 그 당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어 로마화폐를 사용하였는데 그들은 이방인의 돈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는 구실로 많은 수수료를 떼고 환전을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3번째 유월절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났다. 마가복음에는 환전상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11:15) 기록하였으며 주께서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11:17) 기록하였다. 이 말씀은 주께서 이사야의 글에서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56:7) 하신 말씀은 인용하신 것으로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예수님 앞에서 그대로 성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절에는 제자들이 성경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기록되었다. 이 말씀은 시편에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69:9)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제자들이 성경말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현실 속에 나타난 일들을 보고 성경의 말씀을 기억해 내기란 쉽지 않다. 이는 계시의 나타남이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우리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성도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동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며, 그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삶 속에서 기억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읽고 배운 것이 없으니 기억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14:26) 하셨다. 그러나 생각이란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있어야 나는 것이다. 가르침을 받은 것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일은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의 말씀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각 교회가 추구하는 신앙생활에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현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얻지 못한다면 그의 믿음은 생활은 변화되지 못하고 변화된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 이 일을 행하시자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 고 따져 물었다. 여기서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은 메시야로서의 증거를 보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여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보내신 징표를 보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미 메시야의 표적은 예수의 탄생과 함께 나타났으며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나사렛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일들과 또 그 앞에 보내심을 받은 세례 요한의 표적들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많은 표적들이 믿어지지 않은 것은 그들의 생각이 성경의 조명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은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4:2) 증거하였다.

 

B. 이성적 혼란(18-22)

이에 예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19)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헬라어 나오스이다 이는 14절에서 언급된 성전 히에론 (hieron)과 다르다. 히에론은 외형적 Temple을 뜻하지만 나오스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지성소를 뜻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 곧 교회의 외형성과 내면성의 중요성을 함께 언급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은 그들이 성경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다만 외형적 종교적 신앙생활에 급급한 나머지 주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사십육년 동안 지었거늘 내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20) 힐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21).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의 왕이 된 헤롯대왕이 유대인의 환심을 얻기 위해 성전을 해체하여 리모델링 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시작이 기원전 19년에 시작되어 46년 동안 지속되고 있었고 A.D. 64년까지도 완성되지 못했다. 이 성전이 A.D. 70년에 로마 티도장군의 예루살렘 공격으로 불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연대가 기원 후 37년이 경임을 알 수 있고 이로서 예수께서 기원전 5년에 탄생하신 것을 계산하면 예수님의 나이가 삼십세쯤 되었음을 알 수 있다(3:23 참조).

 

 

22절에서 요한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는 주석을 달았다.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제자들도 주께서 하신 말씀을 미쳐 깨닫지 못하였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그의 때를 따라 오직 성령을 통하여 증거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6:19) 증거하였다.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성전이 우리 안에 세워졌음을 증거한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복이며 영광인 것이다.

 

그러함에도 오늘날까지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외형적 교회에 치중하고 있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잘못된 가르침과 종교의식에 미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바울은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4:3-4) 증거하였다.

 

C. 믿음의 근거(23-25)

요한은 그 당시의 상황을 서술하여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으로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23-25) 기록하였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믿었다는 말씀은 11절에서 그 제자들이 물이 포도주로 변한 표적을 보고 가진 믿음는 전혀 다른 맥락이다. 제자들은 성경과 또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해서 메시야를 향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로 친히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자들로서 주께서 행하신 첫번째 표적 곧 물로 포도주를 변화시킨 표적의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월절에 예루살렘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의식적 종교활동에 참여한 사람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원래 그 이름 예수는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계시를 통하여만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어떤 행위로 나타난 것을 통하여 예수를 믿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의 계시를 터득하지 못하여 그 뜻하신 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후일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6:26) 하셨다. 이 말씀은 너희의 믿음의 본질이 어디에 있느냐를 언급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로서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 오느니라(7:45) 하셨다. 그들은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 메시지를 보는 우리에게 응답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믿음을 표출하려고 하지만 그는 사람이 아니신 하나님이시므로 우리의 믿음을 구태여 표출할 필요는 없다. 그는 메시야를 향한 우리의 진실된 마음을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후일 베드로는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1:19) 증거하였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눈에 나타난 화려하고 거대한 성전에 있는가 아니면 성경의 말씀을 따라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깨닫고 있는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주께서 그의 종들을 세우시고 집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게 하신 것이다(24:25,16).

 

만약 당신이 귀신 쫓아냄이나 병고침과 같은 기적들을 보고 믿는다면 당신의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통하여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는다면 당신의 믿음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