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3장) 독생자의 영광

이요나 2008. 4. 1. 15:11

(요한복음3) 독생자의 영광

 

(요한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우리가 공부할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 가장 중요한 대목 중의 하나이다.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의 모순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초석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기 위한 거듭남의 필요성과 거듭남을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사랑의 표현을 깨닫고 그를 믿어야만 하는 교회와 믿음의 역학관계를 말씀하셨다.

 

I. 다시 태어남의 필요성(1-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A. 유대인의 딜레마(1-3)

3장 서두에는 유대인의 관원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소개되었다. 승리자라는 뜻을 가진 니고데모는 산헤드린이라는 유대인의 의결기관인 최고 평의회의 한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 이 기관의 대부분은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바리새인이란 자신들을 특별한 종교적 사명을 받아 거룩하게 성별된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분리주의자들이다(1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5: 20)고 말씀하신 바 있다. 이처럼 그들은 유대교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자신들이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는 중추적 세력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부패한 모습을 말하여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니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14-15) 말씀하시며 그들의 의가 정당치 못함을 지적하셨다(18:9-14).

 

또한 예수님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8:39) 하시며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음으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8:44) 하셨다.

 

성경은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이 파송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예수를 임의로 판단하려 하자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7:50) 고 힐문한 바 있으며  예수께서 돌아가셨을 때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근을 가지고 와 장사 준비를 하였다(19:39) 기록함으로 후일 니고데모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동의한 사람으로 소개하였다.

 

3절에는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기록되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 왔다는 것은 그가 유대인들의 눈을 의식하였다는 것이며 또한 개인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그가 예수를 찾은 것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계시를 따라 온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많은 표적들을 보고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도 우리는 종교적 특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적과 기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목사들이 여러가지 묘기들로 돌풍을 일으키는 기도원이나 세미나장을 찾아다닌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사람의 영혼을 미혹시키는 특별한 묘기를 갖고 있는 자를 스승으로 섬기고자 하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이 같은 속내를 아시는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하셨다. 여기서 사용된 거듭남에 해당되는 헬라어 아노덴(anothen)위로부터 태어나다라는 뜻으로 영어의 born again과 같이 중생을 나타내는 말이다. 요한은 31절에서 예수를 소개하여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소개하였다.

 

예수님은 여기서 거듭남은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한 수단으로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여 메시야의 왕국을 보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지식을 받아 드릴 때 먼저 그에 대한 소망과 관심과 의식을 갖고 있어야 어떤 의견이 개진될 때 그 지식에 대한 지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사고 속에서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요한과 안드레와 베드로와 빌립과 니고데모가 모두 메시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들이 예수를 만나 그로부터 천국에 관한 메시지를 듣자 그가 메시야이심을 깨닫고 고백하였다. 이와 같이 서로 비전과 이념과 동일한 사상을 공유할 때 그에 대한 지식과 지혜의 분배가 가능해짐을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예수님의 첫번째 표적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며 이로서 제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비밀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B. 교회의 토대(4-8)

4절에서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라고 벽창호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이는 그가 벽창호가 아니라 그가 예수님간에 영적 대화의 채널이 열리지 않아서 그의 사고와 지식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접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다른 종교 사이에 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는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계시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개설된 채널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로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와 그의 교회를  비방하고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냐 묻는 유대인들에게 그의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라 답하셨다.

  

    *물리적인 탄생

니고데모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믿음의 사고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것이 아니고 현실적 종교활동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거듭남에 대한 사고와 소망이 없음으로 물질 세계의 범주 안에서 생각할 뿐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네가 거듭남에 대한 지혜를 얻지 못한 것은 믿음을 갖지 못하여 물세례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신 것이다. 이에 성경은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리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주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7:29,30) 기록하였다.

 

계시란 하나님의 뜻 안에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이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보내신 자들을 통해 전해진 말씀에 순종하는 것 뿐이다. 이 계시는 종교적 열심으로도 알 수 없으며 종교적 지위와도 관계없다. 오직 그의 부르심에 순종한 자들의 믿음을 따라 알게 하신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1:17)라고 기원한 것이다.

 

오늘날도 물과 성령에 대한 말씀은 많은 교회에서 그 지혜를 얻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그의 사도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6:15-16) 말씀하셨는데도 사람들은 굳이 세례에 대하여는 종교적 의식으로 치부하려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아직 성령에 대한 지혜를 터득치 못하고 니고데모와 같이 벽창호와 같은 소리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물질의 한계에 속하여 있고 또한 정신적인 요소를 갖고 있어 그 영적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극복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니로라 (8:47) 증거한 것이다.

 

* 이성적인 탄생

여기서 주께서 말씀하신 물과 성령에 대하여 살펴보자. 요한은 후일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이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나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니라(요일5:5-8) 증거하였다.

 

여기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이 아니라 피로 임하셨고라고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라 해도 될 것을 요한은 굳이 물과 피로 임하셨다 하였고 다시 물로만이 아니라 피로 임하셨고라 하였으며 거듭 성령과 물과 피라 기록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심의 속죄와 성령의 능력으로만 임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일한 물리적인 사고와 이성을 가진 육체를 갖고 오셨음을 이해 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체험과 이성적인 극복의 필요성을 피력한 것이다. 후일 벽창호와 같은 니고데모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를 발견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성적 관심과 충격적인 체험을 통하여 얻게 된 것이라 하겠다.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윗은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하리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가할 것입니다 (119:9) 하였고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119:50) 증거하였다. 예수님께서도 그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다 (15:3) 하셨으며 그들의 보전을 위하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17:17) 간구하셨다. 이는 모두 우리의 믿음이 그의 말씀과의 이상적 관계를 갖어야 할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이에 성경은 우리에게 그가 그 조물 중에서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18) 하였으며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1:23) 증거하였다.

 

우리에게 물리적인 요소가 필요함은 우리의 정신적 의지가 세상의 더러운 것에 물들어 있어 우리 영이 진리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리움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하여 성경은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라 (36:25-28) 하였다.

 

   *성령으로의 태어남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시며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6,7) 하셨다. 사실 성령에 관한 지혜는 그가 친히 우리에게 증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적요소이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도 우리의 영이 깨어 있을 때에만 감지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음 사람들이 성령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심지어 육체에 속한 감정을 말하여 성령이라 말하기도 하고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육에 속한 것은 육이고 영에 속한 것은 영인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내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8) 하셨다.

 

사실 바람은 그 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 모양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바람이 스쳐간 그 흔적으로 바람이 있었음을 알뿐이다. 이와 같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를 통해서 어떻게 역사하는 지 알지 못한다. 그는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0-21) 하신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 오신 교회의 특성이다. 이로서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거룩함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많을지어다 (벧전1:2-5) 기원하였으며 바울도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 (3:5) 증거하였다.

 

II. 거듭남의 비밀(9-21)  어떻게 태어날 수 있는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15)

 

A. 니고데모의 딜레마(9)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으로의 태어남에 대한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는 여전히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9)고 반문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같지만 아무리 성령에 대하여 많은 가르침을 받아도 그 생각이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깨어나지 못하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힐문하셨다.

 

이는 비단 니고데모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 지 알지 못한다. 그는 그들의 믿음이 육체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여기에 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민족으로 주 하나님 여호와를 향한 열정을 갖고 있다 하드라도 그들이 성령에 관하여 알 수 없는 것은 성령이 그들 속에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의 전함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지혜가 오직 그의 보내신 자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를 말하여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려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1) 하셨다. 나는 최근 많은 동성애자들을 상담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그들은 내가 전하는 말을 도무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또 들어도 믿으려 하지도 않는다. 나는 분명히 아는 것을 말하고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데 그는 나의 증거에 도무지 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권고를 받아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은 모두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성경적 소망을 꿈꾸며 나의 증거를 듣기를 기뻐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하셨으며 다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 증거하였다. 결국 여기서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 온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13) 하셨다.

 

이 말씀은 잘못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엘리야처럼 이 땅에서 하늘로 끌려 올라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장차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일들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님은 여기서 사람의 아들로 내려 오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하실 뿐이다. 다시 말하여 하늘의 일 곧 성령에 관하는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다 하신 것이다.

 

B.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필요성(14-15)

벽창호 같은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의 설교는 계속된다. 어쩌면 이는 성령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오늘날 우리 교회들을 향하여 외치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님은 그가 알 수 있는 성경의 지식을 깨우치기 위해 모세오경에 기록된 성경적 예증을 들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14) 하셨다.

 

이 말씀은 민수가 21장에 기록된 말씀으로 애굽의 400년간 종살이 속에서 그의 백성을 이끌어 내어 아브라함으로 약속한 가나안 땅에 들이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종 모세를 보내어 백성의 인도자로 삼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속에서 많은 이적들을 경험하면서도 육체의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고달픔을 인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하는가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21:5)고 원망하였다. 이에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백성들을 물게 하여 백성들이 죽게 되었다.

 

그때서야 백성들은 모세에게 나아와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여 범죄하였으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해주십시요(21:17) 간구하여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라 물린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21:8) 말씀하셨다. 이에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세우니 뱀에 물린 자들 중 그를 본 자들이 치유함을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말을 믿지 못하여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대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우리가 뱀에 대한 성경적 비유는 이미 창세기로부터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3:1) 기록하였고 다시 그의 정체를 말하여 큰 용이 내어 �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12:9) 기록하였다.

 

따라서 문제는 간교한 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미혹당하는 죄의 속성을 가진 인간에게 있다. 이는 우리의 육체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죄의 소욕은 누구라도 이길 수 없어 바울은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8:17)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놋뱀은 공중권세 잡은 자의 유혹을 따르는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모든 인간을 뜻한다. 바울은 이를 말하여 너희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을 따라 범죄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2:2,3) 증거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 땅의 모든 인간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장대에 달아 올린 놋뱀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5)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절대적 믿음의 필요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장대의 달린 놋뱀을 볼 것이냐 보지 말 것이냐는 사람의 의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눈에 보이는 세상에 속한 것을 선택할 것이냐 말씀을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선택할 것이냐에 있다. 이것은 이성적 선택으로 자유의지라고 말하며 이는 하나님의 주된 품성인 자결권과도 같다.

 

바울은 이를 증거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3) 기록하였고 예수님도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12:31,32) 하셨다. 이는 우리 가운데 나타난 물리적인 상황에 대한 이성적인 각성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음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는 영적각성으로 이루어진다.

 

C.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이유(16)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6)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작은 성경책이라고 말할 정도로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의 비밀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 사상은 유대인의 사고와는 다른 생각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언약된 독생자의 비밀은 오직 이스라엘만의 영광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은 계시를 따른 것이 아니라 조상으로부터의 택하심에 매여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7,18) 말씀하셨다. 이 또한 그들로서는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자기 중심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였고 의인의 세상과 죄인의 세상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상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영생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도 그 생각의 범위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부분은 오느날 교회도 디시 생각해야할 부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의 개념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삶의 복 그 이상이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된 하나님의 계시적 생명이다. 후일 주님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5:26) 하셨으며 이를 설명하여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17:3)라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은혜로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죽으심 없이는 들어 갈 수 없는 문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심판의 개념을 말씀하여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19-21) 하셨다. 유대인에게 있어 정죄의 의식은 율법에 기준 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종교적 도덕과 사회안녕 질서를 위한 법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정죄는 심판의 결과로서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을 토대로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여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5:8) 하였으며 후일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여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3:16) 하였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외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4:9-10) 증거하였다. 이는 세상으로  구원에 이르러 심판을 받지 않게 하려함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8:1) 증거한 것이다.

 

III.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위한 컨셉(22-36)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은 한량없이 주심이라(34)

 

A. 세례에 대하여(22-28)

요한은 이 단락에서 다시 세례에 관한 것을 언급하였다. 이는 세례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대한 오해를 정리하고 새 시대를 향한 도전의 필요성과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실제적인 일들과 영생을 얻기 위해 실행하여야 할 믿음의 단계들을 설명하였다. 

 

22절에는 예수와 제자들이 유대 땅에 유하시며 세례를 주셨고, 세례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었다고 기록되었다. 이 부분은 마치 어둠과 새벽이 갈라지는 경계선과 같은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저자 요한은 여기서 세례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한 때에 잠시 나타났던 종교적 혼란을 설명하려는 듯하다.

 

요한은 이 때의 일을 설명하여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25) 기록하였다. 여기서 결례란 율법에 따른 유대인들의 정결에 관한 규례로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다양한 세례의 규례들을 갖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유대인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 사이에 논쟁이 생겼다는 것은 서로의 종교적 교리에 대한 마찰이 생겼음을 뜻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유대교적 세례와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대한 상위점에 대한 변론을 했던 것 같다. 더욱이 세례 요한에게 몰렸던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몰리기 시작하니 종교적 마찰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로마 카톨릭에서부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죤 칼빈, 웨슬레의 교리적 쟁론 등 우리 교회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교리적 논쟁과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거듭하여 왔다. 이러한 변론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으며 장차 갈보리채플이 한국에서 힘을 얻게 되면 또 한차례 쟁론이 일어날 것이다.

 

이에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에게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27,28) 답하였다. 어떻게 보면 앞에 온 사람은 허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복음의 릴레이션쉽 가운데 설정된 하나님의 계획이다. 우리는 그 여정 속에 예정된 사람들로서 우리는 앞에 오는 것을 바라보며 내게 주어진 일들을 전하는 것 뿐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기록하였다. 이는 우리의 믿음이 오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날에 속해 있음을 증거한 것이다.

 

B. 신랑의 친구의 기쁨(29-30)

계속하여 세례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에 충만하였노라(29) 증거하였다. 요한의 기쁨은 벌써 계시록 19장에 가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된 교회를 맞이하기 위한 사역이 출발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말하였다.

 

오늘날 세상의 모든 일이 지고 새고 하는 가운데 우리는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새로운 지식이 나타나고 옛 지식들은 그 토대로 남아 있어 기쁨을 누리고 있으며 새 세상은 마치 소망의 아들들에게 펼쳐진 알곡을 거두는 탈곡마당과 같다. 이는 옛 것이 지나고 새 것이 오는 세상의 원리인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모든 때를 따라서 진행되고 있음에 관심을 두었다. 이는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이 자신의 생각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곧 계시를 따르셨음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하겠다.

 

요한은 눈 앞에 열리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를 말하여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31-33) 증거하였다.

 

내가 일본에서 갈보리채플에 대한 비전을 바라보고 그 부르심에 동참한 지 어연간 12년이 지났다. 그동안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지나간 때를 생각하면 왜 내가 그처럼 어리석은 일을 하였는지 후회가 막급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지난간 때를 돌이켜 보면 내 지식이 거기에 이르러 앞으로 더 나갈 수 없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서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8) 하신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알 것만 같다.

 

계속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34) 증거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의 보내신 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칭한다. 많은 이단 괴수들이 이 말씀을 들어 자신들이 곧 성령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는 성령이 개뿔도 없는 것이다. 만약 누가 주의 보내심을 받았다 하면서 돌팔이와 같은 말을 한다면 그는 성경도 알지 못할 뿐더러 성령께서도 그 안에 역사하지 않는 것이다.

 

C. 영생의 기쁨(31-36)

끝으로 요한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에게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5,36) 증거하였다. 여기서 만물이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의 세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언급한 영생 속에는 그 모든 만물의 존재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로서 장차 우리 앞에 나타날 영광을 말하며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8:19)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계시록 기자는 이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멸망하실 것을 예언하였다. 천하 모든 만들이 주로 말미암고 주의 기쁨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생의 복이 얼마나 영광된 것인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를 믿지 않으므로 하여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죄이며 심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