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4장) 그리스도의 발견

이요나 2008. 4. 12. 15:34

(요한복음4) 그리스도의 발견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바울은 영생을 말하여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의 소망이며 썩어질 피조물 또한 바라는 소망이라고 증거하였다(8:21). 그렇다. 이 땅의 사람들은 각기 자기 민족과 역사와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공동체적 소망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는 투쟁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인류의 숙제인 영생을 문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만약 인류에게 있어 영혼의 숙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수천년 동안 피와 땀으로 인류의 역사를 꽃 피워 온 지혜와 학문과 찬란한 문명의 발자취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땅 속에 묻혀버린 진시왕의 무덤과 같지 않은가?    

 

요한복음 3장과 4장은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서로 큰 대칭을 이루고 있다. 먼저 3장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유대인의 구원관을 주제로 하고 있고, 4장은 혼혈 유대인이라 할 수 있는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의 구원을 다루고 있지만 큰 맥락에서의 대주제는 영생이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 3장에는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가 출현하고 있고 4장은 전반에서 윤리적으로 타락한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을, 후미에서 이방인 왕족을 다루고 있다. 어쩌면 이들은 인류의 대변자들일지도 모른다. 이 땅에는 선택받은 사람들과 또 선택에서 떨어져나간 사람들과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종교적 관점을 갖고 있지만 이들의 궁극적 소망은 영생을 위한 영혼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공부할 이 내용들은 그동안 인류역사 속에서 그 누구도 풀지 못했던 영원한 숙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라고 하겠다.  

 

3장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밤에 슬며시 찾아 온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에게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이라도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여기서 정신적 변화를 통한 영적 거듭남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아직 때를 얻지 못하여 계시의 말씀이 가리워진 것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향한 유대인들의 종교적 열정이 성경적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10:2).

 

또한 4장 서두에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이 소개되었다.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태어 사마리아지역을 방문하시면서 이루어졌다. 사마리아 여인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였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계획된 의도였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신 표적들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 온 디고데모와는 대조적인 입장이다.

 

예수님은 유대인과의 상종을 꺼리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의 목마름을 위해 물 좀 달라고 하셨다. 지체 높은 사람이 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쉽지 않은 관례였다. 그러나 주님은 이 부도덕한 여인의 갈급한 영혼을 알고 계셨고 네가 청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선물 곧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네게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그녀에게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종교의식의 무익함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 여인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내가 알고 있으며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라 답하였다. 이는 위대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는 성령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접근조차 하지 못하였는데 이 여인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여인이 비록 부도덕하고 합당치 못한 종교적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인생의 궁극적인 소망 곧 영생에 소망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I. 추수의 재발견(27-42)  양식의 실효성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36)

A.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람들의 반응(27-30)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밝히셨을 그때에,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들어갔던 제자들이 돌아왔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을 나누는 것을 이상히 생각했으나 누구도 무엇을 구하십니까 어찌하여 저 여인과 말씀을 나누고 계신 것입니까?하고 묻지 못하였다. 아마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표정이 매우 진지하게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에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 말하니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 나왔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여인의 즉각적인 반응을 보게 된다. 이는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행동은 어떤 의식적인 계획에서 발동된 행동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 속에 나타난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의 표현이다. 그녀는 자신의 부끄러움 조차 잊어버리고 동네 사람들 속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난날 부끄러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부끄러운 생활과 관계없이 사람들 속으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이심을 증거하였다. 그리스도에대한 지식이 많은 것도 성경을 읽어 본 것도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는 구원의 기쁨과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으로 가득찼었다. 그때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었는지 신기하기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구원의 기쁨이 용솟음쳐 올라 그들로 사람들 가운데로 나아가게 한다. 이것이 복음의 속성이다.

 

B. 거듭남, 생수 그리고 양식(31-34) 

먹을 것을 갖고 돌아 온 제자들은 예수께 선생님(랍비) 드십시요하고 권하였다. 이 때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32)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누가 드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아직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신 양식이란 말씀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양식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영적 용어를 사용하셨다. 이는 앞에서 언급하신 거듭남, 생수과 같이 모두 영생에 속한 비유로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보편적 생활용어 속에 특별한 의미가 내포된 하늘에 속한 계시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아직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는 교회의 모두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양식에 대한 정의는 지금까지 말씀하신 거듭남이나 생수의 비유보다 더 구체적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씀하신 거듭남은 영적인 것을 의식하기 위한 정신적 패러다임을 통한 영적변화라 할 때 생수는 믿는 자가 받을 성령(7:38,39)으로 믿는 자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이다. 그러나 양식은 육의 양식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계획된 일들을 성취하는 원동력이라 하겠다.

 

우리 몸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은 그 세부 조직을 활발히 운행하기 위해 물과 음식을 섭취하여 만들어진 산소와 영양분이 혈관을 통하여 온 몸에 전달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식이 많고 영적으로 충만해도 물과 음식을 끊으면 육체의 생명은 끊어지게 된다. 또한 인간은 혼에 해당하는 정신적인 요소가 있다. 이는 인간의 자아로서 사고와 의식과 감정을 다스리는 인격기관이다. 이로서 우리가 보고 듣고 배움을 통하여 많은 지식과 지혜를 습득하여 사회적 교통을 나누게 된다. 이러한 정신적 요소는 짐승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주관하는 중추기관은 으로서 우리는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고 경배하며 또 하나님의 계시를 터득케 하며 하나님과 영적 교류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만족하기 위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충만케 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양식이다.

 

C. 양식과 하나님의 뜻(34-38)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는 말씀은 6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진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몰려 온 사람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의 인치신 자니라(6:27) 말씀하셨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말씀은 영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주님은 계속하여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8,39) 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을 말씀하신 것으로 주님은 계속하여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6:40) 말씀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는 믿은 자들의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말씀하신 것이다(벧전1:9).

 

그러면 주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온전케 하는 양식은 과연 무엇일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여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습니다(17:4) 하시며 계속하여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으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알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습니다(17:8) 증거하셨다. 이는 그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실체를 깨닫게 된 것 과정을 설명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은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으므로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으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입니다(17:14) 하셨다.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하여 제자들이 세상에서 당할 핍박과 환난을 말씀하신 것이며 이를 위하여 주님은 내가 간구하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입니다 (17:14) 하시며 저희로 진리로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17:17) 간구하셨다. 이것으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양식의 실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아직 양식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35) 하셨다. 이는 말씀하신 때가 추수 때인 것을 말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속담을 인용하신 것으로 이 말씀은 추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단계를 거처야 한다는 필연적인 과정을 말씀하신 것으로 심지 않은 것을 거둘 수 없다는 섭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때에 이 속담을 사용하신 것은 지금이 바로 추수의 때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이미 넉달 전에 씨를 뿌린 것을 거둠과 같이 지금은 너희가 거둘 때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복음은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뿌려졌고 추수를 위하여 너희를 보낸 것이라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36) 말씀하신 것이다. 

 

바울도 이 기쁨을 말하여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을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후9:10,11)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복음은 씨를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속하여 주님은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37,38) 말씀하셨다. 이 말씀 속에는 근본적으로 구원의 토대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내포하고 있다.

 

이에 예수님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거둔다 하셨으며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3:10,11) 증거하였다.

 

추수에 관하여는 흥미로운 말씀들이 성경에 소개되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며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13:,39)라 하셨고 다시 인자가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13:41) 하셨다. (이는 우리의 깊은 사고와 이해를 필요하는 말씀이다.)

 

계시록 14장에는 추수와 관련된 또 다른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요한은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안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기록하였고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14:14-16)증거하였다. 이 일들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추수 때의 일을 언급한 것으로 영혼의 추수는 천사들에게 맡겨진 것임을 알 수 있다.

 

D. 세상 사람들의 공통된 소망(39-42) 영생의 열매

39절에는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는 믿는지라 기록되었다. 복음전파는 매우 단순한 원리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발견에 대한 증언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 공감을 갖게 한다. 이것은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중에는 많은 성경적 지식을 갖고서도 사람들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성경적인 지식은 없으나 그리스도를 발견한 어떤 사람들의 증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한 경우가 많이 있다. 나 또한 어떤 목사나 전도사들의 전도를 받아 주를 영접한 것이 아니라 그늘진 인생의 자락에서 사마리아 여인처럼 살던 어느 한 여인의 증거로 예수를 영접하였다. 이를 생각할 때 아직까지도 복음의 원리는 우리 가운데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여인의 증거를 듣고 예수께 나아 온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께 자기들과 함께 유숙하시기를 원하니 예수께서 그곳에서 이틀을 머무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세계에 대한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셨을 것이다. 요한은 41절에서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41,42) 기록하였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는 복음전파의 온전성을 전하는 메시지다. 다시 말하여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22)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결국 이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것과 영생에 이르는 온전한 양식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그 일을 온전히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다.

 

나는 가끔 기막힌 인생살이 속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간증을 듣는다. 그들의 증거를 들으면 눈물겹도록 참담한 인생 가운데서 그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들의 간증은 더 이상 우리에게 어떤 지식을 전달하지 못한다. 이들은 겨우 마음밭을 갈아 믿음의 씨를 뿌렸을 뿐이다. 이들이 성장하여 곡식을 거두기까지는 넉달이 지나야만 한다.

 

바울은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5:12) 경계하였으며 또한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 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4:1,2) 증거하였다. 이를 위하여 주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사도와 예언자와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를 세우신 것이다(4:11-14)

 

II. 믿음의 재발견(43-54)  말씀의 실효성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온 집이 다 믿으니라(53)

A. 갈릴리의 두 반응(43-45)  이틀 후- 4:40

이틀 후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은 갈릴리로 돌아 와 먼저 고향에 들러 그들에게도 영생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나 주께서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13:54,55) 하고 그가 구세주이심을 영접지 않았다. 이에 주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음을 받지 못한다(44) 하시고 그곳에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셨다(13:58).

 

이는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제일 먼저 터득했어야 할 사람들은 사실 고향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많은 기사들을 들었으며 예수님께서 성장하시는 동안 성실한 삶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이다. 사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예수님과 함께 자란 육신의 형제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을 믿지 않았었다(7:4). 이러한 섭리 또한 힘들고 어렵지만 예수님처럼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복음의 이방지역을 가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께서 갈릴리로 돌아 오시니 갈릴리 사람들이 그를 기쁨으로 영접하였다. 이들이 이처럼 환영한 것은 그들도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 속에는 어떤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드리는데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가장 가까운데 있는 사람들이라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어떤 편견에 휩싸일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그 행한 일들을 통해 믿게 된다. 이러한 복음의 원리들은 오늘날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B. 왕의 귀족의 구원(46-47)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

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 오시니 흥미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일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혼인잔치가 있었던 가나에서 있었던 일이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돌아 오심을 듣고 왕의 신하가 아들의 병들어 죽게되어 예수를 찾아 온 것이다. 여기서 왕의 신하란 왕족 또는 헤롯 궁전의 높은 직위의 사람을 뜻한다. 그는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고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를 만나러 32km를 찾아 온 것이다. 이 일은 갈릴리 지역에서 큰 이슈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47) 간청하였다. 내려 오셔서라는 말 속에는 그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에 대하여 접근하지 못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에 주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 답하셨다. 이는 네가 나에 대하여 아직 바른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는 영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물질주의자라서 어떤 표적과 기사를 보아야만 그리스도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자들이다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한 채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 간청하였다. 이것은 물질적 한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넘지 못하는 현실적 사고라고 하겠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도 없으며 어떤 신적 표적과 가사를 보아야만 영적 범위에 접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육체된 인간의 딜레마를 알고 계신 예수님은 그에게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50) 하셨다.

 

그러자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집으로 내려가니 가는 길에서 집에서 온 종들을 통해 아들이 살아 났음을 들었다. 이에 그가 언제 낫기 시작하였는가 물으니 어제 제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다 하였다. 그는 그때가 바로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때인 것을 알고 그가 하나님의 보내신 구세주이심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믿었다.

 

오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실체를 바르게 조명해 주는 대목이다. 만약 오늘날 우리가 길에서 예수를 만났다 해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 창조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눈에 보이는 실체를 통하여 현실 속에 나타나지 않는 실체를 감각하기에는 한계 속에 있는 인간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을 때 그의 영적 능력은 우리 가운데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가 가늠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나는 추수꾼들이 추수할 만한 믿음에 도달되었는가 생각해 보자. 혹시 아직 니고데모와 같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종교적 관점에 매여 있어 영적 거듭남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또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부도덕한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인지..그도 아니면 아직 그리스도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리스도를 찾아다니는 것은 아닌지? 오늘 주님은 이 메시지를 통하여 우리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양식을 갖고 있는가를 물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