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6장) 너희도 가려느냐?

이요나 2008. 4. 27. 09:09

(요한복음6) 너희도 가려느냐?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

 

요한복음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천상의 비밀을 펼쳐놓은 퍼즐들을 보는 듯한 신비로움을 느끼게 된다. 사도 요한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활 속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기념하며 그의 행하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생각들을 한편 한편 퍼즐로 맞추어 놓은 것 같다. 이를 위해 베드로는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 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1:19) 증거하였다.

 

요한은 태초의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증거함에 있어 한계 속의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 그 행하신 일들을 모아 각 장별마다 먼저 삽화를 넣은 다음, 세부 내용들을 개진하여 그 비밀한 이름들을 강론하였다. 그로 하여 요한복음을 읽노라면 눈을 떠 보이는 것과 눈 감아 보이는 것이 마치 신기루와 같아서 하나로 모아졌다가 흩어지고 흩어진 것이 다시 하나의 모습으로 다가옴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장에는 먼저 어둠을 밝히며 홀연히 나타난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모습이 그려져 있고, 2장에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혼인잔치의 삽화 뒤에 도사리고 있는 더러운 종교 행위들이 그려져 있다. 3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도 그리스도의 실체를 발견하지 못하는 종교 지도자 니고데모의 어리석은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고, 4장에는 삶에 찌들어 갈급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의 생수를 주기 위해 먼 길을 찾아 나선 예수님과 추숫꾼 된 제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으며, 또한 5장에는 38년 된 병자의 일어선 사이로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문이 열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6장에서 인생의 큰 문제를 종결하시는 만 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사람이 이 땅에 살아 온 이래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사람들은 하늘을 생각하게 되고, 또 이상과 철학과 종교적 신념 을 만들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창세이래 어느 시대이고 영생의 문제를 해결한 신도 없으며 사람도 없다.

 

우리는 앞에서 영생에 관한 여러 가지 그림을 보아 왔다. 이 영생의 열차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계시로서 인종과 문화와 종교와 그리고 지역과 시간을 초월하여 그 정하신 마지막 날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이 비밀한 하나님의 생명을 계시한 것이 성경인 것을 믿으며 이를 가리켜 우리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5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상고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 오지 않는 것은 저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려 하기 때문이라 말씀하셨다(5;39-44). 이는 마치 한 침상에 누운 부부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일은 오늘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한 시도 쉬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꿈꾸며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 빵과 재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세상과 전쟁을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요한복음 6장에서 이 문제를 종결 지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I. 예수 그리스도와 왕의 필요성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14)

A. 빵 문제 해결사(1-14) 오병이어

6장의 이야기는 갈릴리 디베랴 바다에서 펼쳐진다.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호수 서편 연안의 도시로 이 성읍은 로마 제 2대 황제인 디베료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도시이다. 오늘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곧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 두번째로 맞는 유월절 무렵에 있었던 일로서 사복음서에 모두 소개되고 있어 부활의 사건과 버금가는 내용이라고 하겠다(14:10-15, 6:28-31, 9:9-11).

 

3절에는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 나아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주의 뜻대로 하신 것으로 사람들과 같이 어떤 일시적인 감정에 이끌려 임으로 하신 것이 아니심을 알 수 있다. 

 

주께서 빌립을 시험하시고자 하셨다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활하며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친히 가르침을 받고 또 많은 이적들을 체험한 제자들의 영적상태를 시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빌립의 대답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그는 각 사람에게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 답하였다.

 

빌립은 주의 부르심을 받고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1:45) 증거한 바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른 제자들을 두고 빌립을 시험하신 것은 어쩌면 그가 성경적으로 가장 뛰어난 지략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후일 빌립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시며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말씀하셨을 때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요 그리하면 족하겠습니다 (14:8) 말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책망을 받은 바 있다. 이처럼 그는 영적인 문제에 둔감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나 이는 비단 빌립 뿐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제자들도 수많은 무리의 따라 옴을 보고 주께 이들을 보내어 음식을 사 먹게 하소서(14:15)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라 할 때 이백 데나리온은 수십년을 모아야 할 큰 돈이다. 제자들에게 이런 큰 돈이 있을 리 없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기근의 조짐이 서서히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벌써부터 식량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자구책에 나섰다. 금번 이명박 대통령도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외에 농지 확보의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이 땅에 기근이 온다면 그 누구도 식량위기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발견한 제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로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첫번째 제자가 된 사람이다. 그는 매사에 신중하여 말에 실수가 없고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는 일년 후 예수께서 붙잡히실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에 예배하러 올라 온 헬라인 몇 사람이 먼저 빌립에게 가서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합니다 하였더니 빌립이 안드레와 의논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나아가 말씀드렸다 기록되었다.(12:20-22). 이처럼 안드레는 매사에 신중을 기하여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며 매사에 경솔하여 말과 행동에 실수가 많은 나를 발견한다. 이러한 습성을 정말 쉽게 벗어버리지 않아서 일이 생긴 후에 후회를 하고 반성하며 회개하게 된다. 어쩜 나는 생각이 깊지 못한 빌립과도 같고 또 말이 행동보다 앞서는 시몬과도 같았는지 모르겠다.

 

안드레는 예수께 나아가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9) 말씀드렸다. 여기서 한 아이란 나이 어린 소년(paidaron)을 말한다. 또한 그 당시 보리는 동물의 먹이로 사용되던 것으로 보리떡은 아주 빈곤한 사람들의 점심 간식이었으며 물고기는 소금에 저린 것이었을 것이다. 이 아이가 어떻게 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를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 어린 아이를 발견한 것은 특이할 만하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6:37) 하시며,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가서 보라(6:38) 하시니 그들이 알아 보니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기록된 전후사정을 살펴 볼 때 예수님의 의도는 제자들의 손으로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그룹별로 앉게 하신 후 떡을 들어 축사하신 후 떡과 고기를 저희의 원대로 나누어 주셨는데 그 수효가 남자들만 오천쯤 되었고(9:15), 예수께서 그들이 배부른 후에 제자들에게 남은 것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도록 하라 명하시니 거둔 것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고 기록되었다. (이 내용은 마가복음 8 17절 이하에서 칠병이어와 함께 특별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1]


 

또한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창조의 능력과 풍족한 자원이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바로 인간의 고통을 체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와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떠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내신 자의 말을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ii] 그러므로 바울은 이를 증거하여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시리라 (고후9:10) 기록하였다.  

 

B. 폭풍의 해결사(15-40)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말하며 예수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움직임으로 술렁댔다. 이처럼 사람들은 먹을 것을 해결하는 사람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이번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급하게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하시고 사람들을 돌려 보내시고 홀로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급하게 배를 태우신 것은 제자들이 군중 심리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인생의 문제는 비단 빵 문제만이 아니다. 인생들은 한 세상 살면서 수도 없이 폭풍과 싸워 나아가야만 한다. 그로 하여 어떤 시인은 인생은 고해바다라고 말하였다. 한 세상 살면서 아무런 문제를 만나지 않고 평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는 정말 복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귀인도 인생의 폭풍을 만나지 않고 살다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그가 인생의 폭풍을 어떻게 대처했느냐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평안을 기원하였을 것이다.

 

다니엘은 이 세상을 다스릴 왕들이 바다에서 나오는 환상을 보았는데 그때 하늘로부터 네 바람이 불어 왔다고 기록하였다(7:2,3). 또한 계시록에서 요한은 마지막 때에 있을 일을 말하여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7:1)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풍랑은 거대한 영적전쟁인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바다로 나아갈 때에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다. 그 지역은 기압의 차이가 있어 거센 바람이 일어나는 곳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큰 바람으로 일어난 파도와 싸우는 것을 보시고 바다 위를 건너 배 있는 곳으로 오셨다. 다른 복음서에는 그냥 지나쳐 가려 하였지만 제자들이 예수를 보고 유령인가 하여 두려워 하므로 가까이 가셨다고 기록되었다. 주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보고 내니 두려워 말라하셨다. 이는 제자들 뿐만 아니라 사람이면 모두 놀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 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이 그를 유령으로 본 것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인간의 알고 있는 현실세계의 물리적 질서가 깨어지면 극도의 두려움을 느낀다. 이러한 두려움은 천재지변으로 오는 두려움과 또 다른 두려움이다. 이는 영적지각을 가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알고 있다면 주께서 우주만물을 통치하시는 분임을 익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폭풍을 잠재우시는 일은 그에게 일도 아니다.

 

오늘 이 사건은 우리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시사하고 있다. 이는 제자들이 주의 말씀을 순종하였어도 풍랑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신 일로 우리가 시험을 당한다면 그 시험은 주께서 친히 해결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임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기록하였다. 이는 주께서 모든 일을 관장하고 계심을 증거한 말이다.

 

또한 우리는 마가복음 4장에서 풍랑을 잠재우신 일을 볼 수 있다. 이 일은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신 후 일어난 일로서 오늘 우리가 살펴 본 내용과는 또 다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천국복음을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실 때, 예수님은 배 뒷편 고물에서 주무시매, 큰 광풍이 일어나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된지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고 소리를 쳤다. 이에 예수께서 깨어 일어나 바람을 꾸짖어 잠잠하라 명하신 후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4:37-40) 책망하셨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들이 예수와 함께 가는 길에도 풍랑이 불어 올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그와 함께 인격적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뜻하지만 만약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예수께서 잠자고 계시다면 악한 영들은 우리 삶 가운데 풍랑을 일으킬 것이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당황하지 말고 속히 우리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우는 일일 것이다.

 

II.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22-29)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의 인치신 자니라 (27)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잘 산다고 말하여 믿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믿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당신에게 너는 왜 예수를 믿느냐고 다시 묻는다. 당신이 만약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이라면 당신은 주께서 원하신 대답을 마지막 단락에서 찾게 될 것이다.

 

A. 그들의 목적

이튿날이 되자 오병이어를 체험한 수많은 사람들은 전날 밤 제자들이 배를 타고 떠난 것을 보았으나 예수께서 함께 가시지 않았으므로 예수를 찾았으나 그곳에 계시지 않음을 알자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에서 예수를 만나니 놀라서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습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주를 찾은 백성들의 목적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뜻과 상반된 갭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메시야적 계시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다만 모세로 하여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생각하고, 광야생활 때처럼 예수께서 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 생각했다는 말씀이다.

 

이에 예수님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27)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너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이제 너희는 영생의 문제에 눈을 떠야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리까? 물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질문의 요지가 어떻게 하여야(How to~) 곧 방법론을 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답변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 하셨다. 이는 너희의 초점을 방법론에 두지 말고 누구에게(Who is)로 두라 하신 것이다.

 

이 말씀에 사람들은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30,31) 말하였다. 이들은 인생의 문제 곧 빵의 문제의 해결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당신은 모세와 같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분입니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냐 묻는다. 이에 많은 목회자들이 전도프로그램, 기도하는 방법, 찬양하는 방법,  병고치는 방법, 신학교, 아버지학교, 신부학교 등등 교회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을 쏟아 놓는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보내신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답하고 있다.

 

B. 백성들의 영적 현실(27-40) 하나님의 인치신 자

흥미롭게도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일 곧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신 일을 생각하며 그와 같은 일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접근하고 있다. 이는 모세와 예수를 동일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여 그들은 조상의 때에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가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 것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만 이 광야의 생활에서 모세와 같이 빵의 문제를 해결해 줄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2,33)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대목에서 진실로 진실로 라는 강조어를 4번에 걸쳐서 사용하셨다. 26절에서는 떡을 찾아 나선 사람들을 향하여 또 32절에서는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소망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리고 47절에서는 나를 믿는 자들에게 그리고 53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에 참여한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다. 동일한 문맥 속에서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표출해 내는 것 또한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 나타나신 창조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나게 된다. 먼저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나는 참 떡이다(6:32)하셨고, 후일 주님은 간음 현장에서 끌려 나온 창녀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하셨다. 또 주님은 하나님의 교회의 기초을 말씀하시며 나는 양의 문(10:7)이며, 나는 선한 목자라(10:11) 하셨다. 또한 주님은 교회를 이끌어 갈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라고 하셨고 다시 나는 참 포도나무요(15:1, 5)라 하셨다. 이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C. 사람의 의지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이제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 청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말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에 지친 인생의 고통을 고백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로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35,36)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도 이처럼 의식이 전환이 되지 않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믿고 있는 의식 가운데 고착되어 있어서 그 벽을 뛰어 넘기가 쉽지 않다. 가령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장로교회를 다녔다고 하자 그 사람이 순복음교회에서 행하는 어떤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였다 해도 그가 갖고 있는 신앙의 틀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내가 처음 갈보리채플을 만난 후 종교적 벽을 넘는데 몇년이 걸렸다. 내가 갖고 있던 순복음식 신앙관이 내 머리 속에 굳게 배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목회자가 되었을까 생각하면 심히 두려워온다. 아마 나는 지금 내가 가장 경멸하는 목사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말씀하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37) 하시며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8,39) 말씀하셨다.

 

이것으로 우리는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주권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모두 하나님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단편적으로만 생각할 때 이 말씀은 칼빈주의자들의 예정론을 손들어 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하여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40)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뜻이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 국한 되었다는 말씀이다.

 

III. 생명의 양식(41-59)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5)

A.     수군수군(투덜대다)  - 지도력의 문제(41-42)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수군거린다는 말은 투덜댄다(gogguzo)는 말이다. 그들은 서로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 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 왔다 하느냐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군거림은 비단 그때만이 아니다. 그들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큰 팔로 구원을 받아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면서도 계속 투덜댔으며 오랜 역사 속에서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들의 말을 들을 때도 수군거렸다. 바울은 우리에게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기 말라 (고전10:10) 경고하였다. 이는 오늘날 우리도 계속 수근거리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투덜대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예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는 요셉의 아들 목수로서 결코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만 알 수 밖에 없는 한계 속의 모든 인간들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지도력의 문제에 속한다.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나님의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양자의 택함을 받은 유일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 됨의 나음을 말하여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3:2) 하였고,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로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리라 아멘(9:4,5) 증거하였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아신 예수님은 너희는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44) 하셨다. 여기서 이끄신다는 말은 주도권을 하나님께서 잡고 계신다는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는 언제나 동일하다. 오직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만 예수께 올 수 있고 그들을 마지막 날에 살리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이끄시는 그 시간은 상당히 긴 시간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계속 마지막 날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예수께로 이끄시는 것일까?

 

B. 하나님의 이끄심(43-46) 영혼의 주도권

이제 예수님은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45) 하셨다. 결국 이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만이 올 수 있다는 말씀 아닌가? 이러한 의아심을 갖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은 이는 아버지를 본 자들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이 아버지를 보았느니라(46) 하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이끄시는 방법 곧 매개체를 언급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신 자 곧 그 아들을 알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자녀 삼아 가르치셨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미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31:3) 기록하였고 다시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며 너는 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내가 두려워 아니할 것이며 공포 그것도 너를 가까이 하지 못할 것이며 (54:13-15) 증거하였다.

 

갈보리채플의 가장 큰 특징은 성경 전체를 심도깊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감동받을 설교를 듣기를 원한다. 그들은 설교자가 자신들의 감정 곧 심금을 울려 주기를 원한다. 무엇인가 자신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줄 설교를 들으면 눈물을 흘리며 은혜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때에든지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짓 선지자는 교사들이 즐겨쓰는 방법이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고 만족하게 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사람의 목소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원한다면 당신은 텔레비전을 켜기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갈보리채플의 성경강해가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말한다. 그 사람은 아직 자기 인생의 지루함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육체가 바라는 것들을 듣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하고 만져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수천년동안 수군수군대며 지루해 하는 사람들 속에서 오직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을 중심으로 그 계보를 써내려 왔다.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이 마지막 날까지 이를 것이다. 이것이 창세이래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다. 만약 이 부르심이 없다면 창세 이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보지 못하였을 것이며 영생에 이르는 문을 발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C. 영생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47-51)

이에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47,48) 말씀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다시 영생을 거론하신다. 이 영생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생명의 떡인 것이다. 이제 당신은 생명의 떡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는가?

 

계속하여 예수님은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 온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49,50) 말씀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출애굽당시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은 자들의 죽음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는 그들의 하나님의 원대하신 뜻을 따라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육신을 위하여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에 투덜대던 사람들이 모두 시험을 받아 광야에서 죽은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들은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대한 선언을 하신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51) 하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예고하신 말씀으로 지금까지 성경에 기록된 계시들이 이 한 순간을 위해 기록된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옛 사람들이 나의 한 날을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하셨다.

 

D. 영과 육의 딜레마(52-59) 대화의 불통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증거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여전하다. 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먹게 하겠느냐?(52)고 수군수군댔다. 이는 이들이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으면서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만약 이들이 성경공부를 바르게 하였다면 주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아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브라함과 사무엘과 다윗과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그리고 세례 요한과 같은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이를 증거하였는데도 그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직무유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았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의 기업을 물려 받지 못할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투덜대는 사람들을 위하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3-55) 하셨다. 이보다 더 자세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이 미리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라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5:38) 하신 것이다. 

 

이제 주님은 주의 살과 피를 먹으므로 나타나는 결과를 말씀하여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56,57) 하셨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심과 같이 주를 믿는 성도들의 그리스도와의 일체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성도와 일체하심을 증거하여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하셨고 다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자기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일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하셨다. 또한 바울도 이를 증거하여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로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4:4-6a)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 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58) 말씀하셨다. 이는 자신은 모세로부터 내린 떡과 다른 것을 언급하신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과 다르다는 것을 시시하신 것이다.

 

IV. 믿음 배신의 세 그룹(60-7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70)

A.     말씀의 난해성 (60)

흥미롭게도 오늘 주께서 말씀하신 사람들은 세 부류이다. 먼저는 수군수군대며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두번째 그룹은 믿음이 있는 소수 집단이며 그리고 배교자들이다. 이는 오늘 당신에게도 적용될 말씀이기도 하다. 당신은 과연 어느 그룹에 있는가?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부디 믿음이 있는 소수 그룹 속에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면 당신은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영생에 넉넉히 들어 갈 것이다.

 

흥미롭게도 59절에는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다고 기록되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거리에서 복음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의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께 가르침을 받으러 회당 모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하여 강론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따르던 사람들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며 하나 둘 씩 돌아섰다. 여기서 어렵다는 말은 Skandalon으로 오늘날 스캔달과 동의어다. 스캔달은 내용을 온전히 알지 못할 때 발생하는 가십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갈보리채플을 다녀갔다. 그들은 갈보리채플의 가르침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갈보리채플의 가르침은 너무 어렵다고 말하였다. 이는 갈보리채플에서 목사되기가 너무 힘들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갈보리채플은 자신이 목사가 되기 위한 사람들을 세우지 않고 주의 부르심 가운데 복음의 소망을 가진 자들에게 복음의 열매가 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B. 예수님의 도전(61-63)  

그들의 수군거림을 들은 예수님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61,62) 말씀하셨다. 이는 십자가의 죽으심 이후 부활이 있을 것을 가시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에서 미리하신 말씀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63) 말씀하셨다. 사실 이 말씀은 매우 어려운 말씀 중에 하나다. 최근 많은 거짓 영들이 나타나 이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가르치는 말이 영의 말씀이라 말하며 자신을 영적인 지도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모두 이 세상에 있는 일을 말한다. 돈과 명예를 위하여 축복을 외치며 성도들의 마음을 미혹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주의하여야 할 것은 잘못된 가르침을 통한 영적인 미혹이다. 그들은 때로 기적과 표적을 보이기도 한다. 이미 성경은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2:9,10) 고 기록하였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8:6) 하셨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하였으며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 (3:5) 증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자 한다. 야고보는 이런 자들을 향하여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1:18) 하였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자들 중에 영에 속하지 않은 자를 말하여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64)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문맥을 따라 살펴 볼 때 이들은 주께서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 속에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올 수 없다 하였노라 (65) 하셨다. 다시 말하여 아버지께 보고 배우지 않으면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모두 미리하신 성경의 말씀을 통해 인도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말하여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1:23) 하였고 다시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려 하셨다 (벧후1:4) 증거하였다.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 하신 말씀은 매우 까칠하게 들린다. 그로하여 가르침을 받는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니 아니하더라 그러나 주께서 하신 말씀은 하늘에 속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일에 목을 매는 사람들에게 까칠하게 들릴 뿐이다. 바르고 진실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조심의 교훈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성경은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1:20,21) 기록하였고 또 경계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함이라 (4:12) 하였다.

 

C. 선택받은 자들

이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 물으셨다. 나는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사람들이 갈보리채플에 꿈을 갖고 왔다가 돌아갈 때마다 아파하며 남은 몇 사람을 추스려 왔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정말 이들마저 가버릴까 보아 마음을 조리며 기도할 때가 있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일어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니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하며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습니다(69)하였다. 베드로의 대답은 매우 정확하였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는 완벽하게 깨달은 사람같기도 하고 어떤 때의 말을 들어 보면 참으로 단순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삼년 중 두 해가 지난 때의 일이라 생각할 때 베드로는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충실하였다는 증거다.

 

나는 최근 갈보리채플로 나오는 몇 사람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나는 이들을 보며 늘 기도하여 이들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자들인가 생각하며 기도한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 주의 부르심을 따른 사람들이라면 주의 거룩하심에 동참하였을 것이다. 주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님은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70) 답하셨다. 바울은 주의 택하심을 말하여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 하였으며 베드로도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전1:2) 축복하였다. 이 비밀한 계시가 각 사람들 속에 역사하여 인생으로 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케 한다.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신 말씀은 참으로 듣기에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이들 중에 누가 자신을 팔 자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어떻게 이를 아셨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아시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알고 계신 예수님은 그들 중에 누가 마귀의 자식인지 충분히 아셨을 것이다.

 

후일 베드로는 가룟 유다를 말하여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1:16-26) 증거하였다. 이는 그가 성경에서 그에 대한 모든 일들이 기록된 것을 증거한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모두 살아있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 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말씀 속에 하늘 속한 모든 생명이 들어 있고 영생을 향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보며 어렵다 말하며 수군수군대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은 만약 우리가 그들 중에 있다면 우리 또한 가룟 유다와 같이 마귀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



[1] 마가복음 8장에는 예수께서 이방인 지역을 돌아 오실 때에 따라온 수많은 사람들의 허기짐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물으시고, 제자들이 준비한 떡 일곱개를 축사하여 사천명을 먹이시고 남은 것을 거두니 일곱 광주리였다고 기록되었다(8:1-9).

 

흥미롭게도 이 두 사건은 마가복음 8 17절 이하에서 우리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바다를 건너실 때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는 자신들이 떡을 준비하지 못한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8:17) 하시며 내가 떡 다섯개를 오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또 일곱 개를 사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를 거두었더냐? 물으셨다. 이에 제자들은 각각 열두 바구니입니다. 일곱 광주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8:14-21) 물으셨을 뿐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읽는 자들의 몫으로 남기셨다.

 

우리가 이 말씀을 살펴 볼 때 예수님의 질문의 초점은 남은 떡을 채운 열두(12) 바구니와 일곱(7) 광주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오병이어는 유대인 중에서 일어난 이적으로 제자들의 손에 들려 주 앞에 전달 된 한 어린아이의 떡으로 말미암고, 칠병이어는 이방인들 중에 일어난 기적이라할 때 이는 모두 복음의 기적의 원리를 비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을 택한 백성 유대인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제자들 앞으로 나와야 할 것과 또 이방인의 구원은 복음을 위하여는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완전한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 시사되어 있다.

 

[ii] (열상17:9-16)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서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