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8장) 자유에 이르는 오직 한 길

이요나 2008. 5. 10. 14:19

(요한복음8) 자유에 이르는 오직 한 길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8장은 7장 말미로부터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 성경은 [753절로부터 8 11]까지 괄호로 묶었다. 이는 어떤 성경 번역 사본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것을 주석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번역본 킹제임스 성경에 번역되어 있고 또 초대교회 교부들도 이 귀절들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우리는 그대로 믿는다. 더구나 요한복음의 구조적 특성을 살펴 볼 때 요한은 각 장에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논제를 삽화로 먼저 펼쳐 놓고 그 내용을 하나하나 전개해 나갔다. 이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배려라고 하겠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요한복음 8장은 죄에 대한 인간의 사고와 성경적 해답을 다루고 있다. 특별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속에 나타난 인간의 죄에 대한 율법적 모순을 성경을 통하여 조명하셨다.

 

사람이 이땅에 살아 오면서 가장 큰 고민은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다. 인간이 이처럼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담이 선과 악을 선택한 이래 모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악을 행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하는 모순의 틀 속에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로 하여 인간들의 선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은 종교적 사고로 발전 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죄의 문제를 종교적으로 해결하고자 할 때마다 인간은 도리어 더 큰 죄의 장벽에 걸리고 말았다. 이는 창조자의 형상대로 만든 영혼의 문제를 종교적 의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므로로 발생한 영적장애다.

 

I. 율법의 죄와 양심의 문제(1-11) [7:53~ 8:11]의 구절들은 생략한 사본들이 있다 -KJV 포함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 하시고(7)

A.     간음 중에 잡힌 여자(1-2)

예수님은 축제 마지막 날 사람들 앞에 서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7:37,38) 외치셨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이 사람은 모세가 증거한 선지자다, 혹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시다, 혹 어떤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이니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아니다 하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그러한 여론도 잠시 뿐이다. 사람들은 집회가 끝나면 모두 다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흥미롭게도 서두에는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라고 기록되었다. 초막절 축제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 갔으나.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돌아 가셨다는 말이다. 이는 예수께서는 돌아갈 집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태복음8 20절에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하셨다.

 

예수께서 감람산으로 가신 것은 그곳은 예루살렘이 가깝고 그곳에는 사랑하는 가족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이 있어 늘 제자들과 머무시던 곳이기 때문이실 것이다. 여행 중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집에서 머문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더욱이 서로 마음이 통하고 목적이 같은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아침이 되시자 예수님은 다시 성전으로 들어 오셨다. 흥미롭게도 초막절 축제가 끝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음에도 예수께 나온 백성들이 있었다. 예수께 말씀을 들으러 나아 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초막절 명절 때에 외치신 생수의 강에 대한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먹히신 것 같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는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항상 천국복음을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B.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시험(3-5)

그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무리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늘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4,5)하고 예수를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시험을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정혼한 여인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가만이 끊고자 한 요셉이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아침에 나아 오신 것으로 보아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자는 밤 중이나 새벽의 일이 아닐까 싶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호재를 만난듯이 이 여인을 끌고 예수께 나와 예수를 시험에 빠뜨리려 했다. 이들의 계책은 참으로 빠져 나갈 수 없는 묘안이었다.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을 죄없다 하면 율법에 기록된 간음하지 말지니라(20:14) 하신 제7계명을 스스로 범하는 것이요, 만약 율법대로 돌로 쳐 죽이라 하면 로마법에는 유대인들에게 사람을 죽이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눈에 가시 같은 예수를 모함하기에 아주 좋은 계책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시험은 참으로 이중 인격적인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율법에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22:22) 기록되었기 때문에 만약 이들이 간음 중에 여인을 잡았다면 남자도 함께 데리고 왔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간음을 정의하여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5:28) 하셨고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5:32) 말씀하셨다. 이는 그당시 율법을 임의로 잘못 적용하고 있는 유대 지도자들의 만행을 지적한 것이다. 

 

C. 예수 그리스도의 대응(6-8) -  write (, kato graphin)

사람의 마음을 익히 아시는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몸을 굽혀 무엇인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기 시작하시니 유대인들이 계속 추긍을 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 하시며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을 땅에 쓰시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사용된 6절의 kato graphin’ 땅에 쓰기 위하여 라는 뜻이며 8절의 ‘graphin’ 쓰시다 하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묵묵히 무엇인가를 계속 쓰셨음을 있다. 어쩌면 십계명을 쓰셨을지도 모른다. 또는 그들의 죄들을 쓰셨을지도 아니면 용서와 자비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쓰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9절에서 저희가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9) 기록으로 보아 예수께서 쓰신 것은 그들의 죄와 관련된 성경적 말씀을 쓰신 것이 틀림없다.

 

바울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2:15) 하였다. 양심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두신 하나님의 저울이다. 이를 통하여 사람들은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 양심을 벗어나면 사람들의 마음을 악해져서 불의를 행하게 된다.

 

사람은 원래 그 모든 권리가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있다. 그 누구도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할 수 없다. 성경은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4:12)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은 오로지 공의를 따라서 행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에 가책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가 버리자 그곳에는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었다. 오직 죄없으신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한 분이 남아 그 여인의 죄에 대하여 논하시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10) 물으셨다. 여자는 주여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 하셨다. 주님의 의도는 너의 죄를 묵인 한다 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하지 않는데 있다. 주님은 죄는 누가 고소하므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으면 성립된다는 말씀이다.

 

흥미로운 것은 4절에서 이 여인을 고소하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향하여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이는 그 당시 랍비에 대한 칭호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께 라고 하였다. 이 여인은 예수를 만난 후 그가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이심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 하였고 이제 이 여인은 주의 은혜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성경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8:1) 기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재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분으로 알고 있다. 예수께서도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셌다(5:27)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에 앞서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16-18)고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심판의 문제는 구원의 완성을 위한 최종적인 판결인 것이다.

 

II.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적 정체성(12-29)  세상의 빛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

 

A. 세상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12-20)

12절에는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기록되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다시 그들에게라고 번역되었다. 이는 문맥상 다른 주제로 분류되었지만 말씀의 대상은 자기를 시험한 유대인들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말씀하셨다. 이는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을 향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는 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의 의지에 속한 믿음이다. 따라서 12절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언급한 것이다.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라 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 된 인간의 영혼의 상태를 언급한 것으로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 증거하였다. 빛은 어둠을 밝힌다. 또 세상을 밝히고 어두운 마음과 생각을 밝히고 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암흑 속의 영혼을 밝힌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흑암을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9:2) 하였고 다시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로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 (42:6) 증거한 것이다. 이와 같이 빛은 영과 혼과 육 모두를 비춘다. 

 

만약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주로 영접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고 당신의 영혼은 그의 빛을 받아 죄의 생활에서 나와 밝은 빛 가운데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1:13-14) 하였고 다시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 (요일1:7)라고 기록하였다.

 

13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가 참되지않다(13) 빈정대기 시작했다. 이에 주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4) 하셨다. 요한은 이미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5) 증거하였다. 이처럼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증거를 거부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바리새인들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현실적 사고로 보면 상당한 갭이 내포되어 있다. 그들은 누가 자신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얻으려면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율법적 근거를 요구한 것인데 예수님은 영혼의 속한 계시적 암시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거룩한 하나님의 신성을 접근 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주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하여야 할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러한 일은 그의 제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후일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으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14:2) 말씀하셨다. 이때 빌립은 이 말씀을 미처 깨닫지 못하여 주여 우리가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답하였다. 이처럼 하늘에 속한 계시는 인간의 사고로 접근할 수 없다. 더욱이 세상의 물리적 질서를 초월하여 인간으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커다란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 이 대화는 하나님의 택하신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나누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계시에 속한 천국백성의 비전을 주셨으며 천국 백성으로 살아갈 율법을 주어 스스로 죄를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서 조상들로부터 말씀하신 성경을 상고해 본다면 능히 그리스도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 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1:19) 증거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소망하는 모든 주의 백성들도 허탄한 의식에 사로잡히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말씀하신 바 하나님의 미리 하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살펴야 한다는 경계의 말씀이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16,17) 하셨다. 여기서 나를 보내신 이가 함께 하심이라 하신 말씀은 신적사고를 요구하는 말씀이다. 오늘 우리가 매일 매일 삶 속에서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들을 행하며 또 주께 우리의 마음을 고하고 노래함은 주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함이다. 이로서 우리는 이 세상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17,18)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증거하시기 위한 말씀으로 성경은 이미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느니라(1:2) 기록하였고 또 주님은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혜사 성령이 나를 증거할 것이요 너희도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거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15:26,27).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깨닫지 못하여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물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성적 깨달음이 없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종교적 의식에 빠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의 믿음이 육체의 한계를 벗어 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이에 주님은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19) 답하셨다.

 

B.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21-29)

예수님은 21절에서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치명적 모욕일 수 밖에 없다. 그들은 모두 조상 아브라함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저가 자결하려는가? 하였다.

우리는 가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예수에 대하여 대화를 나눌 때 상당히 곤란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이것은 우리는 그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그는 그 어떤 설명을 듣고서도 우리가 하는 말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생각이 육체를 벗어나 하늘에 속한 지식을 알아야 하는데 사실 하늘에 속한 지식이란 성경의 말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과 성경을 논할 때 그들이 우리가 말하는 바를 접근하지 못할 때 속이 터진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그 접근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이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3,24) 말씀하셨다. 이제 예수님은 여기서 자신의 정체에 대한 원론적인 말씀을 꺼내신 것이다. 이는 그들의 굳은 마음을 깨우치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쯤되자 그들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의심이 생겨 네가 누구냐?고 묻기에 이른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니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을 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25,26)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실 확인을 나섰다면 그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주님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28,29) 하셨다.

 

예수님은 지금 전에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장차 그들에 의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으로 말씀하셨음을 암시되어 있으며 아버지와  함께 하고 계심의 의미가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또한 성경의 말씀을 행하므로 우리가 주의 택하신 자임을 나타낼 수 있으며 또한 주께서 함께 하고 있음을 증거할 있는 것이다.

 

III. 진리와 자유(30-47)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43)

A. 자유의 정의 (30-32)

흥미롭게도 벽창호 같은 유대인들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처럼 생명의 말씀은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 역사한다. 그러나 예수님 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31) 말씀하셨다. 이는 그들의 믿음이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듣고 일시적으로 그가 메시아인 것을 인정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말씀 안에 거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나는 가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갈보리채플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곧 돌아서게 되는 데 그들이 나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말씀에 거하지 못하고 목적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참 제자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것은 오직 생명의 말씀에 거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그 진리가 우리 안에 역사하여 우리를 얽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케 한다. 그 속에 생명의 빛이 거하기 때문이다.

 

B.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37-40)  나의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다

여기서 주께서 말씀하신 자유란 율법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사도 바울의 핵심사상이기도 하다(6:18, 8:2; 5:1). 이 자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며 그 진리 안에서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17:17).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온전한 자유함을 얻지 못하여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34) 반문하였다. 이에 주님은 자유의 진리를 말씀하여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34-36) 하셨다.

 

사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을 자유를 상실한 삶을 살아 왔다. 애굽으로부터 바벨론, 앗수르 그리고 지금은 로마의 속국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자부심 가운데서 위로를 얻으며 마음의 자유를 누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그들을 자유케 하실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원초적인 영적문제를 언급하신 것으로 예수님은 인간의 죄의 사슬에서 벗어난 진정한 영적 자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위선으로 가득한 유대인을 향하여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3:7-12) 책망하였다. 성경의 이러한 기록들은 위선으로 가득한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만약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자신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면서 적당히 죄를 짓고 산다면 그는 위선자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그 마음을 보시므로 훗날 주 앞에 설 때에 주님은 당신의 혼의 기록부를 펼치고 그 행위들을 판단하실 것이다. 성경은 이미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C. 이해가 부족한 원인(42-46)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하기 때문 (43)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의 기득권을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37,38)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에 아브라함은 정신적 지주이며 민족적 자존심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잡고 자신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성경도 이를 증거하여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4:22,23)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들이 육체를 따라 났느냐 약속의 말씀을 따라 났느냐가 주제이다. 따라서 그들이 혈통적 주장을 따라 거룩한 백성임을 말한다면 그들은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다. 그러나 만약 누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따라 믿음을 지킨다면 그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거룩한 반열에 들어 갈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1) 증거하였다.


나의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다 하신 주의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자신을 증거하시며 시종일관 내 교훈은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운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한번도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후일 바울은 주 예수를 믿는 유대인 교회를 향하여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4:2) 책망하였다. 이 말씀 또한 오늘날 주의 은혜 가운데 있는 우리도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들은 우리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다 주장하였다. 이에 주님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흰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39-42)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하신 일을 나도 행하듯이 너희가 아브라함의 아들이면 아브라함의 일을 할 것이다 하신 것이다. 따라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 하면서 악을 행하는 것은 너희 죄의 아비의 행사를 하는 것이다 말씀하신 것이다.

 

C. 이해가 부족한 원인(42-46)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하기 때문 (43)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크리스챤이라 하면서 세상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주여 주여 외치면서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마주 하면서 세상 사람과 같이 생각하고 세상 사람과 같이 말하고 세상 사람과 같이 행동한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 그의 아비 마귀의 욕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계속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단 한 분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41)주장하였다.

 

참으로 벽창호 같은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완고한 사람들은 사람의 말에 귀를 막고 자기의 주장을 굳히려 하지 않는다. 이에 주님은 너희가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43) 하셨다. 우리는 사람들과 어떤 주제를 토론할 때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계속 말꼬리를 물며 자기의 주장만을 편다. 이는 커뮤니케이션의 장애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미국산 소고기 수입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이는 정부의 사전 대책이 미흡에서 발생한 것이다. 물론 정치적 문제도 있겠지만 국민의 여론은 서로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하였을 때 큰 문제로 발생하게 된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래 계속 그 지지도가 하락하는 이유는 충분한 여론 수렴을 하지 않고 모든 국정을 기업가식으로 밀어 붙이는 데 있다. 서울시장으로서 서울시 정책은 이렇게 할 수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국가는 국민이 주체이다. 반대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고 확실한 지식과 정보를 갖고 반대자들을 설득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버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44) 하셨다.

 

참으로 리얼한 지적이다. 사람들을 앞에 대놓고 이처럼 바른말로 공격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서로가 인격과 체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지식을 갖지 않고서는 이처럼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은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45)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인간이 죄인이 된 원초적인 문제를 거론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 인간은 사단에게 미혹되어 진리를 저버리고 스스로 마귀의 자식이 되고 말았다. 그러하여 가인은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형제 아벨을 죽였으며 그는 유리하는 자가 되어 스스로 높은 성을 쌓고 거짓의 아비가 되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46)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누구냐고 물으신 것이며 또한 나는 오직 진리만을 말하며 내게는 죄가 도무지 없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죄가 없다면 죄의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D. 진리의 말씀에 눈이 가리운 이유(47-59)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47)

계속하여 주님은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47) 하셨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는 세번째에 해당하는 이유이다.

 

예수께서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언급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들이 속에 하나님의 보내신 자의 말을 듣지 않고 또 그의 말씀이 그들 속에 없으므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조차 없는 상태가 된 것은 그들이 사단의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영적상태를 지적하시자 그들은 일제히 너는 사마리아 사람이다, 네가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다고 대적하기에 이르렀다. 문단상으로 보면 사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었던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직 그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참 제자자 되지 못하고 아직 죄 가운데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영적 상태를 지적하자 그들은 일제히 예수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도 비일비재하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 귀신논쟁이 분분하다. 어떤 영적인 교리에 부딪히면 서로 정죄하기 일 수다. 이로써 교회가 대립되고 분열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대항에도 흥분하지 않고 냉정하게 대처하셨다. 이 일은 흥분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아직 그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에 정확한 성경적 근거로 제시하여야만 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 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49,50)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여기서 귀신들린 자들이 행하는 은유적인 비행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사실은 자신들의 영광을 취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단의 계획인 것이다. 사단은 예수께도 나와서 네가 내게 절하면 이 모든 영광을 네게 준다 말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나는 오직 하나님을 공경하고 내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광의 종착역은 영생에 이르는 길임을 말하여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50) 증거하셨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매우 흥미로운 말씀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성도들의 영적 축복을 언급하신 것이로 후일 주님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너와 함께 하리라(14:23) 하셨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사용된 죽음을 보지 않고라는 말은 히브리서 11 5절에서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다 는 말씀에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진리에 눈이 멀게 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단의 역사다. 성경은  그 중에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4:4) 하였고 다시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11:3) 기록하였다.

 

두번째는 인간의 악행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인간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나타난 욕심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잘못된 종교적 관행들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종교적 의식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서 사람들의 믿음이 진리를 따르지 못하고 사람의 행위를 따르게 된다.

 

E. 진리와 성경의 관계(52-59)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네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었다.

 

이에 주님은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54,55) 하셨다.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살펴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귀납되었다. 바울도 주께서 성령으로 사역자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게 하기 위함(4:12)고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믿음의 본질은 먼저 성경의 말씀을 아는 것이며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이로서 성도가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고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 하셨다. 이 말씀은 결국 유대인들의 분노를 폭발하게 한 기폭제가 되었다. 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받드는 아브라함이 예수를 기쁨으로 섬겼다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네가 오십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말하느냐 분노하였다. 이에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58) 답하셨다. 결국은 본노를 참지 못한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치려고 분개하였고 예수님은 더 이상 성전에 계시지 못하고 그들을 피해 밖으로 나가셨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 분노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우리 보다도 먼저 아브라함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은 곧 그들의 조상이요 그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나라의 말에 걸쳐 번역된 성경을 읽고 있지만 그들은 원어로 된 성경을 갖고 있으며 성경을 조직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오늘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그들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또 들어 갈 곳이 없으므로 성경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약 창세기의 말씀만이라도 심도 깊게 살펴 보았다면 아브라함을 방문한 하늘로부터 온 세 천사가 누구인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90:2) 말하였고 다시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데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11:19) 증거하였다.

 

그러나 과연 우리 같았으면 어떠했을까 싶다. 오늘 우리는 이미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듣고 또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 이 모든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종교적 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알아 성경의 말씀에 도무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누가 그들에게 교회의 휴거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멸망을 말하자면 교회는 민감한 반응을 갖고 오히려 귀신들린 자로 여기든가 이단으로 대응하려 한다. 오늘 성경은 당신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친히 당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