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10:27) 선한 목자

이요나 2008. 6. 25. 15:14

(요한복음10:27) 선한 목자

(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성경에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비유는 양과 목자이다. 액자에 그러면 양과 목자의 평화로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양과 목자로 묘사하고 있다.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양과 목자의 이야기는 조상으로부터 그들의 삶과 직결 된 생활 속의 일이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도 그 당시 중동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양은 가족의 생명을 이어주는 중요한 가축이다.

 

특별히 모세의 율법에 명시된 유월절은 유대인의 삼대 명절 중 가장 큰 명절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의 대속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양과 목자의 이야기는 그들의 신앙의 토대이며 택한 민족의 위대함을 자랑하는 근거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6절에는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고 기록되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다름 아닌 양과 목자로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하신 것인데도 그들은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께 말씀을 들을 때  도대체 이 양반이 우리에게 무슨 이솝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하고 비웃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다.바로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비유로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도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두 가지로 전개된다. 먼저 주님은 양의 목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양의 우리와 문지기를 언급하시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곧 양과 목자의 관계를 설명하셨다. 두번째로 주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 말씀하셨다. 이는 양의 생명이 목자로부터 말미암고 또 보장된다는 원리를 설명하신 것으로 여기서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길을 설명하셨다.

 

I. 양과 목자(1-21)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6)

 

A. 예수님의 비유(1-6)  

101절은 문맥상 9장 마지막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주님은 앞에서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말씀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이끌어가는 주측이라 자칭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자신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하여 가르칠 필요성을 느끼셨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과의 인연이 조상들로부터 택하신 백성이라할 때 그들의 소경 된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깨우쳐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진실로 진실로 곧 이 말씀은 조금도 거짓이 없는 진리이니 너희가 꼭 깨달아 알 것이라는 뜻으로 아멘, 아멘이란 말로 말 문을 여셨다. 먼저 주님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하셨다.

 

이 말씀은 매우 쉬운 비유로서 목자 된 자의 질서를 언급하신 것이다. 만약 당신의 집을 들어 오는 사람이 문으로 들어 오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 온다면 그는 분명 도적질하던가 강도 짓을 하기 위해 들어 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세가진 원칙을 말씀하셨다. 먼저 문지기와의 관계 그리고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고 있음과 그리고 세번째로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알고 있음에 대해서다.  이는 서로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양과 목자의 관계다.

 

먼저 예수님은 문지기가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3a)라고 하셨다. 여기서 문지기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는 양의 우리에 대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공동체 안에는 그 마을에 공동 우리가 있어 아침에 목자가 양들을 불러 내어 초장을 찾아 풀을 먹인 후 저녁이면 마을 안에 있는 우리에 넣어 둔다.

 

이 때 목자는 작은 지팡이로 양의 문 앞에 낮게 막고 양들이 건강을 체크하여 우리로 들어 보낸다. 또 다른 우리는 마을 밖에 있는 돌담으로 둘러 친 우리로서 7절 이후에서 다시 언급된다. 그러므로 목자는 먼저 양의 우리를 맡고 있는 문지기와 서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문지기는 목자를 보고 문을 열어 양들을 들여 보내고 또 양들을 불러 내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우리가 눈치를 채야 할 것은 문지기를 피하여 담을 넘어 들어 가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그는 양의 목자가 아니라 절도와 강도인  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천지만물과 우리의 창조자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저자들은 모두 주의 오심을 고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은 친히 보지 못하였지만 그를 보고 즐거워하였다.

 

베드로는 다윗을 말하여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의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2:30,31) 증거하였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아브라함을 증거하여 그가 나를 보고 기뻐하였노라 하셨고 세례 요한도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1:31)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구약이던 신약이든 또 오늘날 우리도 모두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그 어느 시대이든 하나님의 양의 우리의 문지기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만 한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양을 맡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과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면 그는 문지기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과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는 큰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시대의 문지기는 누구인가?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리라(15:26,27)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양들이 목자를 따르는 이유를 말씀하여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는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한다 하셨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요한다. 나는 얼마전 우연히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게 되었다. 나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주제에  개를 키운다는 것이 내게 쉬운 문제는 아니었지만 하루이틀 함께 하는 동안에 정이들기 시작하였다.

 

다른 사람이 키우던 개라서 나는 그의 이름을 새로 지어 줄 수 밖에 없었고 개의 습성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몇일 동안 애를 먹어야 했다. 그러나 죠이는 얼마 안가서 내가 부르는 이름에 익숙해져서 이제는 죠이라는 이름을 듣고 꼬리를 흔들며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듣기 시작했다. 죠이는 어느새 나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밖에 나갈 것을 알고 먹이를 줄 것을 알고 있다. 이처럼 양과 목자는 서로를 알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짐승은 자기를 사랑하는 주인의 음성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를 들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알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이 주의 말씀을 알아 듣지 못한 것은 결국 그들이 주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타인은 음성을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하셨다.

 

B. 양의 문(7-18)   또 다른 양의 우리

예수님은 7절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7-9)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또 다른 양의 우리를 소개하셨다. 앞에서 말씀하신 것이 유대인 공동체 안에 있는 양의 우리를 말씀하신 것이라면 여기서 말씀하신 우리는 마을 외각에 있는 양의 우리를 설명하신 것이다.

 

목자들은 아침에 동네에 있는 양의 우리에서 자기 양들을 불러내어 좋은 풀을 찾아 멀리 나간다. 날이 저물어 동네에 오지 못할 때에 목자는 목자들이 들에 만들어 놓은 양의 우리에 양들을 넣는데 이곳은 돌이나 흙과 나뭇가지로 둥글게 처 놓은 임시 우리라서 우리의 문이 없다. 그래서 목자는 양들을 우리 안으로 들여 놓은 후 자신이 우리 입구에 가로 질러 누워 우리와 밖의 경계가 된다. 다시 말해 목자가 양의 문이 되어 양들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8) 이 말씀은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흥미롭다. 여기서 주께서 말한 먼저 온 자란 결코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양의 우리의 문지기로서 목자의 양을 맡아 목자가 올 때까지 양들을 관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보다 먼저 온 자란 자기 들이 양들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 양 곧 주의 백성들을 자기의 먹이로 배를 채우는 종교 지도자들을 말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물이 될 짐승을 팔며 환전을 해주는 사람들의 상을 뒤집으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강도의 굴혈로 삼지 말라 하셨다. 이처럼 예수께서 오셨을 때 하나님의 양 이스라엘 백성들을 문지기의 역할을 해야할 지도자들이 절도와 강도가 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빙자로 백성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사두개인은 천사와 부활을 믿지 않는 유물론자들이 되 버린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은 양들의 생명이 목자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먼저 구원을 언급하셨다. 여기서 구원이란 생명의 근원 곧 영혼을 말씀하신 것이며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말은 예수를 통하여 하늘의 양식인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들을 향하여 내 목장의 양무리를 멸하여 흩으는 목자에게 화 있으니라 (23:1) 하였고 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34:2) 증거하였으며 또 선한 목자를 따르는 자들을 향하여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10:28)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됨을 알 수 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1) 하였고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16) 증거하였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충만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11절에서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 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주님은 앞에서 양과 목자의 관계를 통하여 양을 돌보는 목자의 사명과 그 질서를 말씀하셨고 여기서는 목자의 품성을 언급하신 것이다.

 

헬라어의 선하다 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칼로스(kalos) 아가토스(agathos)이다. 아가토스는 도덕적으로 선한 것을 뜻하며 칼로스는 매력적인 은사적 능력이 내포된 선행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선한 목자는 도덕적인 것뿐 아니라 그를 통해서 나타나는 선한 매력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와 삯군을 비교하여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12) 하셨다.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보다 먼저 온 자들이다. 따라서 흥미로운 것은 양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데 먼저 온 삯군들에게 절도와 강도를 당하고 또 이리로부터의 늑탈이다.

 

여기서 우리는 종말론적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만약 누가 삯군의 우리에 들어 있다면 그는 곧 다가올 적그리스도에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양들이 선한 목자를 만났다면 목자에게 넘치는 사랑의 은사의 매력에 흠뻑 취하여 들어오며 나오며 꼴을 얻고 더 풍성이 얻어 큰 목자장 앞으로 인도될 것이다.

 

그러면 선한 목자의 그 매력은 무엇인가?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4,15) 하셨다. 이 말씀은 마치 숙명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부모와 자식과 같은 혈연적 인연과도 같다. 그러므로 대신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의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위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일들을 본다. 그들은 결코 자신의 영광과 자기의 생명을 위하여 살지 않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따라 목숨을 내어 놓았다. 이것은 바로 최고의 은사에 속한 봉사인 것이다. 따라서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은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18a)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고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또 다른 목적을 언급하신 것으로 이방인의 구원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 곧 예수 그리스도에 부여된 권세가 전인류 구원을 목표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성경의 개요를 크게 둘로 말하자면 하나는 목자와 양이요 둘째는 하나님 안에서의 하나 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이스라엘로 세상의 빛이 되어 이방을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로 들어 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영적 교만으로 그들의 불순종은 택하심에서 버림을 받았고 이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목표는 지체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말미암아 우선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를 말하여 바울은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16-18) 증거하였다. 

 

계속하여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3-6) 기록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성취하는 우리 교회의 맡은 바 최종적 사명으로서 성령 안에서 교회의 일치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는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 하셨고 다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하시며 (17b) 이 권세를 말하여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18)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계명에 대하여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권세 곧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곧 계명이란 뜻이다. 주님은 이 계명에 대하여 이후 여러 번 말씀하셨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계명을 말할 때 십계명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켜야 할 최고의 율법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후일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말씀하셨다.

 

또한 주님은 보혜사 성령의 오실 것을 말씀하시며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14:15) 하셨고 다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 하셨다. 다시 말하여 보혜사 성령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 가운데 역사하고 있음을 언급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제자들이 맺을 열매를 말씀하시며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10) 말씀하시며 이 계명을 설명하여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12) 하셨다. 이와 같이 계명은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14) 하셨다. 결국 예수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계명 곧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은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권세요 사랑이요 계명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 계명을 지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면 우리의 보상은 무엇인가?  히브리 기자는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3:20) 기록하였으며 다시 그리하면 목자 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벧전5:4) 증거하였다.

 

C. 유대인들 사이의 분쟁(19-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유대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들은 저가 귀신이 들렸거늘 어찌하여 그의 말을 듣느냐 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귀신들린 자가 어찌 소경의 눈을 뜰 수 있게 하겠느냐 하였다. 참으로 이들이야 말로 기이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자신들의 조상으로부터 증거되어 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눈 앞에 두고 그의 입으로 나오는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이들은 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다.

 

이들이 이처럼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된 것은 무슨 연고일까?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율법과 예배에만 빠져 성경에 기록된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 교회 가운데는 아직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 하다. 

 

II. "아버지와 동등 (22-42)  수전절(Hanakkuh) - 봉헌 (Dedioation) 8일간의 축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27)

 

A. 유태인들의 요구(22-24) 우리의 의혹을 풀어달라

요한복음 두번째 단락에서는 의혹에 쌓인 유대인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이 이어진다. 이 일은 수전절에 있었던 일이다. 하누카(Hanakkuh)라고 불리는 수전절은 봉헌(Dedioation)이란 의미를 가진 율법에 명시되지 않은 유대의 명절이다.

 

하누카는 수리아 아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에 의해 더렵혀진 성전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께 다시 봉헌한 날을 기념하는 축제로서 8일간 지속된다. 이날은 유대력 겨울에 해당하는 925일부터 8일간 진행된다(기슬르월/ 양력11-12). 이 때도 예수님은 성전에 계셔 솔로몬 행각을 왕래하셨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몰려와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의 마음을 의혹케 하려느냐 그리스도라면 밝히 말하라 다구쳤다.

 

이에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25,26) 대답하셨다. 아마 가축을 키워 본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으로 키우는 동물들이 자기의 음성을 알아 듣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은 알아 듣지 못한다. 우리 교회에는 다른 교회를 다니던 성도들이 방문을 많이 한다.

 

그런데 그들은 얼마가지 않아서 우리 교회의 예배 스타일에 대하여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이렇게 하라는 식으로 자기들 입맛에 맡도록 바꾸자고 주장한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지만 그들은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그래도 보기 좋은 것이 먹기도 좋지 않느냐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예배에 관하여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4:24) 말씀하셨다.

 

초대교회 시절에 이방인 교회의 전초지인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에 의해 개척되었다. 이때 유대의 유명한 사람들이 와서 형제들을 가르쳐 너희가 모세의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큰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이 문제는 예루살렘에 있는 공회에 붙여져 많은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도 믿는 바리새인들로부터 많은 신학적 논쟁이 제기 되었다. 이처럼 오늘날도 많은 성도들이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여 많은 의혹을 제기 하고 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답변(25-30)

주님은 그들에게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7,28) 하셨다. 유대인들이 참 목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성경의 말씀에 근거된 것이 아니라 율법과 외적 예배에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들은 그로부터 오는 영생의 선물을 얻게 될 것이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29,30) 말씀하셨다. 여기서 하나란 질적으로 동등하다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을 분노케 하여 돌을 들게 하였다. 그들의 귀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행동에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물으셨다. 이에 그들은 선한 일을 인하여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라(33) 답하였다. 이로서 그들은 그들이 고대하는 메시야가 올 것을 믿으면서도 그가 사람으로 오실 것에 대하여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 성도가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로 들려 올라갈 것에 대하여 믿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겠으며 또 장차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셔서 이 땅에 천년왕국을 세우는 일을 의심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아니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34-36) 답하셨다.

 

이 말씀은 시편 82편의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지존자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 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같이 엎더지리로다” (82:6) 하신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 시편 82편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이 신과 같고 지극히 높으신 아들이라 칭할지라도 그를 거역하여 불순종한 자들은 모두 범인처럼 죽음을 맞게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성경은 폐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입술로 나오신 것이므로 하나님은 인생을 아시나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아니하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23:19) 하신 바와 같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거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37,38) 하셨다. 이 말씀은 후일 보혜사 성령께서 오실 때 증명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함께 하리라(14:24) 하셨다. 여기서 우리란 성부 성자 성령을 말씀하신 것이다.

 

D. 요단강 사람들의 영접(40-44)

예수님의 자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담아 듣지 않고 예수를 잡아 공회에 넘기려 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으므로 주님은 그들의 손을 벗어나 다시 요단강 건너편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으로 가셨다.

 

예수께서 이곳으로 가신 것은 그곳 사람들은 이미 세례 요한의 세례에 참여하고 그의 증거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말하여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41) 증거하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은 문지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오실 자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주의 양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의 역할이며 또 우리 복음 사역자들의 임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 이 땅에는 양들을 탈취하는 삯군들이 있어 양들을 갈취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따르는 자들에게 있음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