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2:27) 왜 민망하셨을까?
(요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조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의 경계가 없어지는 느낌이 든다. 봄이 왔는가 싶으면 어느새 여름의 무더운 열기가 극성을 부리고 가을이 되었나 싶으면 어느새 겨울의 찬 기운이 뼈 속으로 스며든다.
우리의 체감의 혼동은 사계절뿐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나라의 국시가 자유 대한민국인지 사회주의 체제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보수정권이 들어 선 이래 소고기를 빌미로 삼은 정치 세력들의 선동은 평화시위 문화 구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천주교, 불교는 둘째치고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염원해야 할 기독교까지 서로 앞을 다투어 서울광장을 깃발로 덮고 있다. 아주 이참에 대한민국을 문 닫자는 것인지 정말 민족의 장래가 참담해진다.
오늘 예수님은 빌립과 안드레 앞으로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뵙기를 청하는 헬라인 유대교 개종자들을 보며 "이제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말씀하셨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일까? 과연 그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맡은만한 재목이 되기라도 한 것일까?
이 말씀을 하신 후 주님은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하시며 아버지께 구원을 요청했다. 과연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이 두려워 자기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하신 것일까? 그러면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서서’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쩌면 예수님은 성취하신 십자가 위에 높이 선 제자들의 위상을 보셨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주님은 하늘 높은지 모르고 높아만 가는 교회의 위상을 보고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자 중에 있더라”(2)
A. 마리아의 올인(1-3)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동네 베다니에 머무셨다. 예수께서 오시자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아 잔치를 벌렸다. 마르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잔치 준비에 분주했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었다. 요한의 이러한 표현은 마치 계시록에 펼쳐진 부활의 세계의 하늘나라 풍경과도 같다. 우리는 그때에 오늘의 광경을 다시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의 주연은 단연 마리아다. 요한은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3) 기록하였다.
나드 향유란 히말라야산 감송향의 뿌리에서 채취한 고급 향료로서 이 향유의 값이 삼백 데나리온이나 된다고 하니 이 가격은 장정이 3년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서 모아 둔 돈의 값어치다. 보통 사람이 이 정도의 돈을 저축하려면 10년은 족히 모아도 쉽지 않을 것이다.
마가는 이 때를 가리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에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의 일로 기록 하였다(막14:1). 두 기록을 볼 때 그 일자가 서로 상충되는 것 같지만 요한은 예수께서 베다니에 오신 날을 언급한 것이고 마가는 그 잔치가 베풀어진 날을 언급한 것일 것이다.
B. 가룟 유다의 생각(4-6)
문제는 마리아의 이 같은 일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분을 내며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제자 중 가룟 유다가 나서 ‘이 향유를 어찌하여 허비하느냐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불평을 털어 놓았다. 이에 대하여 요한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가난한 자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기록하였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주의 일을 한다는 사람 중에 재물에 상당히 민감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들을 생각하며 많은 헌물들을 모으는데 주력한다. 만약 목사가 이런 일에 앞장 선다면 그의 속에서 가룟 유다의 영이 영이 역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에 예수님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니라”(7,8) 하셨다. 마가는 이 말씀에 대하여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14:8) 기록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마리아는 향유를 준비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마리아는 이 향유를 사기 위해 자기 일생을 누구에게 담보했을 수도 있다. 한 여인이 그 많은 돈을 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녀가 한 일을 말하여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막14:9)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기념하라 하신 일은 오직 마리아의 일과 자기 피로 세우신 새 언약 곧 성찬을 떼는 일 뿐이다(눅22:19). 여기서 기념하라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크리스마스와 같이 절기를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는 잊지 말고 회상하라 하신 것이다.
C. 사람들의 관심
흥미롭게도 9절에는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라도 보려 험이러라”고 기록되었다. 이제 이 유월절에 하나님의 어린양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실 것인데 그 일을 위하여 성경이 기록되었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신 것인데 이 백성들의 관심은 표적에 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친다는 기도원으로 달려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이 이처럼 벽창호가 된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잿밥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여러 가지 행사도 좋고 봉사도 좋지만 그들을 이끄는 봉사가 종교활동에 있어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주님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오늘 이 말씀을 본 당신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한 당신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할 것인가? 많은 헌금을 거두어 대형교회를 짓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를 할 것인가? 과연 당신은 당신에 속한 그 모든 것을 예수께 올인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진리를 알기 전까지 당신은 절대로 주께 올인하지 못할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신의 헌신과 봉사는 결국 소경들의 종교활동일 뿐이다.
II.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12-19)
“제자들은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16)
A. 복음의 과거와 현재(12-15)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소망하던 위대한 예언이 성취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이다. 그들을 이 날 하루를 보기 위하여 수천년을 인내하며 굴욕을 감내해 왔다. 이스라엘 백성이 위대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현실 세계 속에서 성취될 메시야 왕국을 기다려 온 것이다. 이 소망이 없다면 이스라엘도 인류 역사 속에서 멸망한 민족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 영광된 순간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수천년의 인내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이 시간을 놓치면 그들은 수천년의 굴욕의 강을 건너 마지막 약속의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이런 면에서 생각할 때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실로 민망한 백성이 아닐 수 없다.
이 일은 예수께서 마리아의 향유 옥합을 받으신 그 다음날이다. 이제 주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시기 위해 성경에 기록된 일을 손수 행하셔야만 했다. 이 일은 누가 대신 하실 수 없는 일로 왕되신 주께서 친히 행하셔야 할 일이다. 이 일을 위해 주님은 제자 둘을 보내어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풀어 오게 하셨다(막11:2-6).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 스가랴로 미리 말씀하신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슥9:9) 하심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오르니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주를 맞아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하고 외쳤다. 이 말씀은 바로 시편118편의 메시야의 노래가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이날을 위해 이스라엘은 있었고 이날을 위해 예루살렘이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찬송을 부르며 종려가지를 흔들고 있는 무리들은 지금 자기들의 눈 앞에서 성경이 성취되고 있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 하는 그 의미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지금 여느 때와 같이 군중심리에 휘말려 종교적 활동에 취해 있는 것이다. (오늘 서울 광장에서 촛불을 든 무리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원래 종려나무 가지는 초막절에 흔들도록 정해진 것이다. 율법에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자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레23:40)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일이 유월절에 일어난 것은 참으로 기이하다. 따라서 이 일은 초막절을 지키기 위한 종교적 습관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스스로 성취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요한은 이 일에 대하여 “제자들은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16) 기록하였다. 그 당시 종려나무를 흔들며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송축하던 그 무리들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깨달아 메시야이신 구원자되신 왕을 맞으러 나온 것이 아니다 이 무리가 예수를 맞은 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을 행하신 일을 듣고 예수를 보러 나온 것뿐이다(17,18).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이미 이 일을 위하여 성경은 수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하여 예언하였건만 그를 맞이해야 할 그 백성들은 한갖 종교적인 행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그 진의를 알지 못한다. 이것은 결국 역사의 몫이다. 이처럼 인간은 한계 밖을 넘지 못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다만 우리는 진리의 이상을 따라 오늘을 보고 장래를 꿈꿀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 스스로 성취되고 있다. 이것인 진리이며 살아 숨쉬는 복음의 역사인 것이다.
C. 복음의 미래와 현재(16-19)
그러나 요한은 종말의 때를 사는 우리에게 종려나무의 무리들을 다시 한 차례 소개하여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계7:9,10) 라고 기록하였다.
이 일은 구약의 성취가 아니라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장래에 대한 예언이다. 어쩌면 우리 세대에서도 보게 될 수 있을 이 장관은 아직은 성경의 비밀로 가리워져 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고대하며 이 땅에서 그를 맞기로 예비 된 주의 백성들은 이 위대한 장관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목도하게 될 것이다.
요한은 이들을 가리켜 ‘큰 환난 중에서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계7:14)이라고 증거하였다. 다시 말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충만한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큰 환난에까지 이끌려간 무리들이다. 그들은 그때에서야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만군의 왕이심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우리는 오늘 이 메시지 속에서 종려가지로 송축하는 큰 무리와 함께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송축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가 설 자리는 이 자리 밖에 없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오늘의 이 장관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다니엘에게 예언된 말씀이다. 이방의 도성에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의 재건을 꿈꾸는 다니엘에게 가브리엘은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전하였다. 여기서 칠십 이레란 70 주간을 말한다.
그는 부연하여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 나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참호)가 이룰 것이며" 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시간표는 일곱 이레, 육십이 이레, 칠십 이레로서 기름부음자 곧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어나기까지 육십구 이레가 지나고 그러면 칠십 이레와 사이에 한 이레의 텀이 생기게 된다. 이 한 이레 곧 인류 앞에 놓인 칠년 큰 환난이다. 이때에 이스라엘은 회개의 영이 부어지고 영적 부흥이 크게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적그리스도와 대결구도를 갖게 될 것이다. 이 흥미진진한 사실에 대하여는 계시록에서 공부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 재건 명령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이미 성취된 사건으로 이 일은 주전 445년 니산월 정월(3월14일)에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내려졌다(대하36:22,23). 이 일의 내막은 느혜미야에서 자세히 읽을 수 있다. 여기서 ’69 이레’라 하였고 이레는 칠년이므로 69x7은 483년이며, 그 당시 바벨론력으로 일년을 360일로 계산할 때 173.880일이 됩니다. 따라서 아닥사스다 왕이 예루살렘 재건 명령이 내린 주전445년 3월14일부터 173.880일을 환산하면 주후 32년 4월6일이 되는데, 흥미롭게도 이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신 날이다. 이 얼마나 정확한 예언인가? 누가 이처럼 천년을 넘나들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를 계획할 수 있으며 성취할 수 있겠는가?
계속하여 천사는 다니엘에게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단9:26) 말하였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의 끊어짐은 이제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유월절 명절이 끝나면 십자가 처형으로 성취될 것이며 그 십자가 터 위에 우리 교회가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이 십자가 사건은 이미 2000년 전의 일이므로 다니엘에 말한 바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스라엘의 남은 한 이레(7년 대환난)를 향하여 2000년이나 달려 온 셈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일들에 대하여 더 망설일 시간이 없다. 지금 우리 앞에는 다니엘이 말한 바 ‘한 왕의 백성’ 곧 로마제국의 백성들이 거대한 모습으로 세팅되고 있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에는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오셨지만 이제 다시 오실 때에는 대적하는 모든 무리를 멸하시고 승리의 백말을 타고 오실 것이다(계19:11,14). 이 승리의 대열에 서 있어야 할 당신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도 자신도 깨닫지 못한 성경의 말씀을 뇌아리며 종려나무를 흔들고 섰을 것인가? 크리스마스 축제의 준비를 하는 당신의 모습 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III. “영광의 때와 이스라엘”(20-36) – ‘누가 빛의 아들인가?’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36)
A. 영광의 때의 도래(20-26) – ‘이방인의 때’
20절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요한은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벳세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 하니”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에 소개된 헬라인이란 그리스 사람으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이 먼 이방 땅에서 예루살렘까지 예배를 드리려 왔다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평범한 이방인이 아니라 나름대로 학문을 겸비한 지도자 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제자 빌립을 가리켜 선생이라고 부른 대목이다. 이들이 빌립에게 선생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제자들의 삶의 모습이 존경받을만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들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주를 따르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에 빌립은 동료 안드레에게 가서 의논하고 그와 함께 예수께 가서 그 일을 고하였다. 이 러한 상황을 보신 예수께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 하셨다. 지금까지 주님은 아직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언급하셨다(7:30, 8:20). 그런데 이제 주님은 자기의 때가 왔음을 언급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의 때를 언급한 것은 바로 여기서와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와 팔려 가실 때 하셨다(요17:1, 막14:41).
헬라인인 주께 면담을 요청하실 때에 주께서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 말씀하신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주님은 이미 앞에서 다른 우리에 속한 양들도 한 목자에게 나올 것을 언급하신 바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죄사함이며 또 하나는 제자들의 시대를 여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믿는 헬라인 지도자들이 자기의 제자에게 선생이라 부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비로서 복음의 씨가 맺은 것을 아신 것이다.
이에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 하셨다. 이는 아주 자연적인 원리를 말씀하신 것으로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비유는 자기의 생명을 버려서 다른 생명을 낳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주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25) 고 말씀하신 것이다.
B. 민망한 현실(27-29) – ‘깨닫지 못하는 주의 백성’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열매를 맺으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람들은 자기의 희생이 아닌 방법을 통해서 영광의 열매를 맺고자 노력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은 장차 제자들의 사역적 자세를 언급하신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를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증거하였다. 여기서 봉사의 일은 무엇일까 이는 바로 양육에 속한 것으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일보다 다른 방법으로 봉사를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자기의 몸을 드려 열매를 거두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힘으로 교회를 세우려 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영적예배를 말하며 먼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12:1) 고 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26) 하셨다. 이는 자기와 같은 섬김의 방법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섬김 곧 봉사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주된 섬김은 무엇이였을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복음의 시작에 행하신 일이 제자를 부르신 것이다. 과연 오늘날 우리 교회가 제자사역을 하는 것인지, 과연 자신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것인지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면 그 죽음의 뜻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주님은 이를 13장에서 깨우치고 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주님은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27) 기도하셨다. 여기서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라는 말씀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는 뜻이다. 정말 너희의 상태가 정말 어처구니 없다는 말과도 같다.
주님은 민망하다는 말씀을 세번째 하신다. 먼저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 선 마리아와 문상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그리고 세족식을 하신 후 ‘나의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요13:20) 말씀하신 후에 말씀하셨다.
민망하다는 말은 황당하고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처했을 때 사용되는 말이다. 내가 내 제자들에게 같은 말을 수십번 말하여 이제는 알 때가 되었는데도 못알아 먹는다면 정말 민망할 것이다. 나도 내가 얼마나 민망했던 사람인지를 이제야 알겠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여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하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두려워하여 이 기도를 하셨다고 말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오신 것이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부족함 때문이다. 주님의 바람은 그들이 자신과 같은 섬기는 자의 의미를 깨닫기를 원했던 것이다. 오늘날처럼 교만하여 살아 펄펄 뛰면서 열매를 맺는 자들처럼 될까 보아 민망하셨던 것이다.
C. 그리스도의 관심(28-36) – ‘이스라엘의 영광’
이런 민망한 상황에서 주님은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리라”(28)는 응답을 들으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염려와 민망하심과 관계 없이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있음을 언급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들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곁에 서서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을 듣지 못하여 우뢰가 울었다 말하기도 하고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29)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매우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은 여기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장래를 염려하시고 그들의 상태를 보고 민망해 하신 것이다.
이제 이 때가 지나면 이스라엘을 향하던 하나님의 때는 이방인에게 향할 것인데 이제 빛이 있을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그들은 벽창호와 같으니 이제 주님은 그들을 택하신 하나님께 의뢰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여 달라고 기원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말씀하시어 이스라엘의 영광이 영원할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이제 주님은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31,32) 말씀하셨다. 이는 주께서 어떻게 죽으실 것은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십자가에 들려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말하여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고 물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말이다. 이들은 비록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신들은 스스로 무식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는 것이다. 1+1은 2인것만 알았지 1X1은 1인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에 주님은 “아직 잠시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들이 되리라”(35,36) 하셨다. 이 얼마나 그의 백성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인가? 눈 앞에 있으면서도 그들 스스로 구원을 빛을 받지 못하고 어둠의 세력 가운데로 들어가는 자기 백성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그들에게는 아직 빛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많은 표적과 이적을 보고도 더 무슨 증거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런데도 믿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IV. “영광의 메아리” (37-50)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41)
A. 믿음의 이율배반(37-43) – 출교
흥미롭게도 36절에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고 기록되었다. 이는 더 이상 저희와 논쟁이 불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단락부터 새 단락으로 구성하였다(한글 성경은 앞 문단에 예속 됨).
요한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과 말씀을 들었음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지 않은 것은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바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이는 바울이 로마서 10장과 11장에서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영광을 다룬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하겠다.
요한은 계속하여 저희가 믿지 못한 이유를 기록하여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을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40, 사6:10) 고 증거하며 흥미롭게도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기록하였다. 이는 선지자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세계를 볼 수 있었음을 증거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사람들은 항상 지난 이야기들 곧 역사를 들추어서 그 사실을 증명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앞날에 대한 무지의 소치다. 그러나 성경은 지나간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에 각 시대별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장래에 다가 올 일들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성경은 역사책이 될 수도 있고 예언서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사람들이 하나님의 빛을 받아 이사야처럼 주의 영광을 바라 볼 수 있었다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장래의 일들을 준비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주의 장사를 준비한 마리아의 일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함께 기념하라 하신 것이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마음으로 성경의 기록을 본다면 그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처럼 목전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도 믿지 못할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 그 원인을 말하여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제도을 언급하였다. 사실 이스라엘 지도자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많았으나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유대교에서 출교하기록 결의 되었기에 그를 두려워한 것이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나는 본래 갈보리채플 사람이 아니였다. 나는 순복음을 다녔고 장로교 총회 신학과 오순절 신학을 공부하였다. 나도 오늘 장로교 사람들과 같이 칼빈주의 5대강령을 믿었고 또 순복음의 오중복음을 신봉하였다. 그러나 내가 갈보리채플의 목사를 만나 성경을 공부하니 성경은 그런 것을 기록하지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 가운데서의 믿음 생활과 영생에 관한 지혜를 전하고 있다. 그러니 구원론이 어떻고 성령론이 어떻고 종말론이 어떤 것을 지지고 볶을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따라 진리의 말씀을 발견하고 진리의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 온전한 삶을 살아 그리스도의 날에 들어 가는 것이다.
12년 동안 갈보리채플 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상담을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갈보리채플의 가르침에 동의를 하면서도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소속된 교단의 교리가 우리와 상반되고 우리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그 교단을 떠나야 하는 교단적 구조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43) 하신 말씀을 그들 스스로 이루고 있는 것이다.
B. 믿음의 목표와 그 결과(44-50)
예수님은 이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44,45) 하셨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여기서 이해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동등성에 관한 것이다. 이는 권위의 질서를 말씀하신 것으로 각 국에 나가 있는 대사들이 한국 정부를 대신 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오신 분으로 사역적 권위에 있어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다.
또한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라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46)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빛의 역할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를 이해하면 요한복음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경에서 빛이란 세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에 생명의 빛이 비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신적인 요소가 있어 오직 주를 믿음을 때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게 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모양대로 지으셨음으로 우리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감성적이고 이성적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모든 것을 생각하고 터득하고 이해하는 자각기관으로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듯이 인간도 자신의 의지를 따라 결정하고 선택한다.
결국 세상에 나타난 인간의 모양은 이것을 통하여 인격이 형성되며 한 사람의 인격은 그가 터득한 온전한 지식과 선한 양심을 따라 나타난다. 이것이 곧 진리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말하여 진리의 성령이라 하였고 그가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 하셨다(요14:17, 16:13).
예수님은 계속하여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하려 함이로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자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47,48) 하셨다.
이 말씀은 매우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이 말씀은 적용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을 주께서 심판하지 않으신다. 이는 하나님의 뜻은 주를 믿는 사람들의 온전한 구원을 위하여 인내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 곧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리스도의 날이 오면 사람들은 자기가 행한 행위대로 그의 심판대에 서야 한다. 바울은 이를 말하여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그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을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기록하였고 후일 요한은 이 심판의 날을 말하여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20:12)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여 “믿음의 결국은 혼의 구원이라”(벧전1:9) 기록한 것이다.
주님은 계속하여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한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49,50) 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언급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경의 권위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곧 앞에서 배우겠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보내실 성령에 대하여도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하시며,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요16:14) 하셨다. 여기서 주께서 말씀하신 ‘내 것’이란 아버지께서 주께 주신 말씀이다(요17:8)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신 빛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진리가 무엇을 말씀하신 것인지 이해가 요구된다. 이처럼 성부 성자 성령은 주를 믿는 자들 속에서 동일한 권위와 질서 속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끝으로 주님은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50)하셨다. 이 말씀 속에는 그 제자들을 향한 커다란 명령이 내포되어 있다. 이는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으므로 영생을 향한 너희도 내가 가르친대로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네 마음대로 설교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우리 또한 이 명령이 영생인줄 알아야 할 것이다. 아멘 아멘(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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