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4:27) "인생 평안한가?”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의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인생 있어 가장 고귀한 삶은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부귀와 영광을 말할 것이다. 그로하여 사람들은 세상과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한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역사 속에 돈과 권세와 명예로 평안을 얻은 사람이 있었는가? 역사는 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누가 오늘 내게 당신은 왜 예수를 믿었느냐 말하면 나는 평안이 필요했습니다 답할 것이다. 또 다시 누가 너는 왜 예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평안입니다 답할 것이다.
오늘 주님은 그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의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자기의 평안과 세상의 평안을 대비하셨다. 이 말씀은 세상이 주는 평안도 있음을 인정하신 것이며 또한 우리에게 너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열왕기하 4장에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가 주 앞에서 이스라엘을 섬길 때에 엘리사는 그의 제자 게하시를 데리고 수넴으로 들어갔다. 수넴은 ‘두 안식처’ 라는 뜻으로 이 지역은 엘리사의 주거지인 갈멜산과 왕의 별장이 있는 이스르엘 사이에 있었다. 따라서 모름지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아버지의 위치에 있는 선지자 엘리사는 이 지역을 꼭 통과하여야만 했다.
수넴 땅에는 아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귀한 여인이 살고 있어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간곡히 권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그 남편과 의논하여 자기 집 담 위에 작은 방을 하나 지어 침상과 책상 도구를 설치하여 그가 이곳을 지날 때마다 머물도록 배려하였다. 엘리사는 그녀가 행하는 모든 것을 지켜 보고 생각이 주밀하다고 칭찬하였다.
본의 아니게 번번히 신세를 져야 했던 엘리사는 그녀의 집을 위해 무엇을 해 주고 싶어 수넴 여인을 불러 네가 원하면 왕이나 군대장관에게 부탁하여 너희 필요를 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나는 내 백성들 중에서 함께 자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며 정중히 거절하였다. 이 말은 부족함이 없이 평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에 입장이 더욱 난처해진 엘리사는 그의 종 게하시에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수넴여인의 남편은 늙었고 그들에게는 아들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엘리사는 수넴여인을 다시 불러 내년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전하였다. 그런데 기뻐 날 뛸 줄 알았던 이 여인은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십시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람께서 내게 평안한 삶을 위해 자식을 주시겠다고 하시지만 무자식이 팔자 아니겠습니까? 공연한 수고 하지 마십시요’ 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엘리사의 말대로 그 다음해에 아들을 낳았다.
수넴여인은 노년에 얻은 아들로 하여 더없는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자식은 그 부모에게 있어 믿음과 소망을 주는 기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가 아무 근심 없이 무럭무럭 자라던 중 어느날 그 아비가 아들을 데리고 들에 나갔더니 갑자기 아이가 머리를 붙잡고 딩굴기 시작하여 그 아비는 아이를 어미에게 데려다 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아무 연고 없이 어미의 무릎에서 죽고 말았다.
이에 수념여인은 죽은 아이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침상에 누이고 남편에게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갔다 와야 하리니 사환과 나귀를 준비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그 사정을 알지 못하는 남편이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오늘 어찌 저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냐 물었다. 이는 수넴여인이 초하루와 안식일에 엘리사에게 나아가 예배를 드렸음을 뜻한다.
남편의 말에 수넴여인은 “평안이니이다” 답하였다. 참으로 흥미로운 답변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은 우리에게 평안을 위해서입니다 라는 뜻이다. 아들의 죽음은 평생 아무 부족함 없이 더없는 복을 누리던 그녀로 하여금 지옥을 보게 한 것이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야 세상의 모든 복이 사람을 평안케 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이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평안 곧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달려간 것이다
오늘 하나님을 믿는 당신은 어떠한가? 과연 당신은 하나님의 평안에 들어가 있는가? 만약 당신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평안이 끼쳤다면 당신은 그 어떤 인생의 고통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그 어떤 근심과 두려움이 당신의 평안을 해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영혼은 인생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성경은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 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4:9,10)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이제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안식 곧 평안에 들어 가는 첫발을 딛고자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흥미롭게도 14장은 제자들의 내가지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이 질문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13:36) 물은 베드로의 질문에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이어진다.
베드로가 주께 이 질문을 하게된 동기는 예수께서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그러나 일찍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너희에게도 이르노라”(요13:33)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저가 이방인에게 가려고 하는가 사마리아인에게 가려 하는가 하고 수근거렸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습니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답하였다. 참으로 베드로는 앞뒤 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는 한국 사람들의 피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은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가 이르노니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요13:38) 하셨다. 참으로 까칠한 답변이다. 그러나 결국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번 부인하고 말았다.
우리 말에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우리는 어떤 일에 앞뒤 생각없이 호언장담하여 낭패를 보곤한다. 그러나 오랜 인생의 경륜을 겪은 사람은 일의 흐름을 살피고 생각이 깊기 때문에 실패를 면하게 된다. 그만큼 일에 대하여 안다는 뜻이다. 따라서 오늘의 메시지의 핵심은 근심과 걱정은 무엇 때문에 생가는 것일까를 생각하면 그 답이 나온다. 마음의 근심과 두려움은 무지로부터 오는 것이며, 모든 것을 알 때 평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A. 영혼의 자각(13:36,37)
1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하셨다. 이는 제자들이 마음에 근심이 쌓여 있었다는 증거다. 사실 제자들의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3년 동안 예수를 주로 섬기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천국의 도를 가르침 받으며 이 땅에서는 천년왕국을 소망해 왔던 제자들로서는 이제 내가 곧 장로들에게 팔려 이방인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주의 말씀에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할 지 답을 알 수 없었다. 주께서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말씀하셨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한 제자들로서는 그 말씀도 납득되지 않았다.
주님은 이런 상황에 처한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있어 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 시점에서 그들의 가장 큰 근심은 자신들의 영혼에 관한 고민이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죽음에 대해서 이방인과 다른 사고를 갖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과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육체의 시간이 다 끝나면 조상들이 거하는 열조로 돌아가 안식을 한 후 마지막 날 곧 메시아의 날에 다시 살아 영생을 누린다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 나사로가 살아 나리라 했을 때 ‘주여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압니다’(요11:24)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그들은 이미 이스라엘의 유일 공동체인 유대교로부터 이단괴수의 무리로 출교조치를 당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에게 출교란 종교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오늘날 같으면 이 교회에 출교 당하면 다른 교회로 가면 되지만 유일신 공동체 속의 유대인들은 출교를 당하면 가족관계와 종교생활은 물론 죽어서 들어가 쉴 열조의 안식처를 상실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경 아들이 눈을 떠도 그를 고친 사람이 예수라 말하지 못하고 또 유대교 지도자들 중에도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았으나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 드러나게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요12:42).
주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집 곧 너희를 위하여 예비할 처소는 말할 것도 없이 영혼의 처소 곧 유대인들이 소망하는 영생의 안식처다. 이곳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의 열두조상들이 모두 들어가 있다. 아브라함은 이곳을 하늘에 있는 본향이라 하였으며(히11:14-16) 계시록에서는 장차 우리가 들어 갈 곳을 가리켜 ‘거룩한 성’(계21:2,10) 기록하였다. 베드로는 이곳을 가리켜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벧후1:11)라고 하였으며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단번에 들어가신 ‘성소’(히9:12)라고 기록하였다.
다윗은 고통 중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위로하였고 다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리하로다”(시23:6) 노래하였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영혼의 안식처를 바라는 것은 이스라엘 뿐이 아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 소망하는 곳이다. 만약 사람이 자기 영혼의 처소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는 영혼없는 사람이 되어 짐승과 동일하여 그 혼이 죽어 땅으로 내려 갈 것이다. 그로 하여 성경은 사람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땅으로 내려간다 기록한 것이다.
이로하여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영혼의 안식처를 찾기 위해 신을 찾고 또 그 신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수많은 종교들이 탄생한 것이며 그들은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가상의 나라를 만들어 사람들의 영혼을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단들이 모두 영생을 주재로 삼는 것도 그 이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시어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영혼들을 비추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다.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5:1)라고 증거하였으며 베드로도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을 줄을 여기노니 내가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1:13,14) 증거하였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인 것이다.
B. 이성의 자각(5-6)
주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가서 너희가 거할 처소 곧 영생의 안식처를 예비하신 후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과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다. 이제 곧 이단 괴수로 십자가 처형을 받아 죽어야 할 주께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도 알리라’(4)하신 말씀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이다. 이들은 아직 예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라 하신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도마가 말하여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5) 라고 물은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그 길을 알려 주십시요 물은 것이다.
도마의 질문에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6,7) 답하셨다. 참으로 갈수록 첩첩산중과 같은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곧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분이 자신이 하나님께 가는 길이요 진리며 생명이라니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의 심정도 답답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길과 진리와 생명에 대한 성경적 이해다. 길은 목표를 향한 방향이며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기서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신 것이다. 우리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면 유학생활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며 미국 입국을 위해 무엇을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누가 어느 회사에 들어 가려고 한다면 먼저 그 회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회사를 들어가기 위해 준비해야 할 일들을 습득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완벽하게 준비한 사람은 그 회사 들어가기에 수월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 가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이것은 한 세상 살면서 우리가 지켜야 할 도덕과 윤리에 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님은 이를 위하여 첫째는 이것이니 너희 주 여호와 하나님을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 하셨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다. 이는 모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그 길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인생의 길은 지뢰밭과 같아서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살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주께서 말씀하신 진리인 것이다. 주님은 아버지께 제자들을 부탁하시면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요17:17) 기도하셨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가는 길을 밝히시는 빛이 진리로서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생명은 무엇을 뜻하신 것인가? 이는 생존의 주권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 땅과 바다와 하늘의 모든 생명의 주권은 창조자 되신 하나님께 있다. 이는 태초에 여호와 되신 하나님과 함께 계셔 그의 계획을 따라 함께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증거하였다.
여기서 길은 우리의 이성과도 같으며 그 이성을 밝히는 것이 곧 진리이며 그 진리 속에 생명이 존재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를 알므로 하여 우리의 어두운 이성에 진리의 빛이 비추어 그 빛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주의 말씀인 것으로 안다.
II. 제자사역의 조건(7-24)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15)
A. 믿음의 조건
그러나 주의 말씀에도 제자들은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어 빌립이 나서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요 그러면 족하겠습니다”(8)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확실한 증거를 요구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체험적 증거를 뜻한다. 빌립이 이처럼 눈으로 보는 확신을 요구한 것은 인간은 보고 듣고 숨쉬며 감각을 통하여 모든 것을 식별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직 제자들은 영적인 부분에 대한 이해가 되지 않은 상태인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유대인은 기적을 원하고 헬라인은 은혜를 구한다 하였다. 이 말은 유대인들은 체험적 신앙을 요구하고 헬라인은 이상적 신앙을 요구한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아직도 유대인은 짐승을 잡아 성전에 바치고 정결의식을 행하며 유대인들은 이상의 만족을 위해 철학과 이념을 통하여 진리를 구축하고자 한다.
빌립의 질문에 예수님은 더욱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으로 답하셨다. 주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니와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 하셨다. 이는 한 사람의 인격이 형성되는 원리를 가시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누구의 가르침과 영향을 받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WORD)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WORK)을 하는 것이다”(10) 말씀하셨다. 만약 누가 문선명이의 가르침을 가르쳤다면 그 속에는 문선명이가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척 스미스 목사님의 설교를 갖다가 전했으면 내 안에는 척 스미스 목사가 계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성경을 가르쳤다면 내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11)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많은 지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격형성을 이루는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미 주님은 자기를 대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4)말하시며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신 바 있다. 그러므로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을 가리켜 아버지라 부르고 이단들도 교주를 아버지로 부르는 것 또한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12절에는 매우 흥미로운 말씀이 나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행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 보다 큰 것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12)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님은 장차 주의 제자들을 통해서 나타나실 거대한 일들을 언급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영역 안에서 일을 하셨지만 이제 이방인의 시대가 열리면 제자들은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의 능력을 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전제하신 것은 믿음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계신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 거하시며 그 말씀대로 행하시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안에 계셔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통하여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20절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제자들에게 있어 사역의 첫째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제자가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거하는 것이다. 제자의 입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붕어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역사하시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그 이유를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셨다. 이것은 사역의 위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제자들이 주의 일을 위임받을 것인가? 주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13)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무엇이든지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면 성취된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하셨다. 다시 말하여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구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사역을 위임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이며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이였는가에 대한 사고가 필요하다. 주께서 알지도 못하고 당연히 하시지 않을 일이라도 예수 이름으로 구하면 하시겠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 말씀을 오해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체 주께서 내게 로또를 당첨하게 하신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대형교회를 지어 주겠다고 말한다. 어느날 내게 다른 교회에 다니며 성경공부를 하던 어느 형제가 와서 성령세례를 위하여 침례를 받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이 성령세례를 받아 커다란 사업가가 되어 한국교회를 위해 선교센터를 짓고자 서원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형제는 다른 교회를 나가며 당신의 스승이 있는데 왜 내게 세례를 받으려 하느냐 물었다. 그랬더니 그 형제는 우리 교회에서는 침례가 아니고 약식 세례식이기 때문에 성경대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 성경대로 행하지 않는 목사를 스승으로 섬기고 있으니 당신도 성경대로 행하지 못할 것이라 말하였다. 아마 지금 그 형제는 선교센터를 짓기 위해 주의 이름으로 열심히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원하는 선교센터를 짓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14) 말씀하셨다. 이는 깊은 이해와 깨달음을 요구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은 이 말씀과 함께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 하셨다. 이 말씀은 이미 13장34절에서 명하신 말씀이다. 이 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곧 주의 성도의 일체함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일체하심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가 일체가 되는 것을 뜻한다. 결국 이것은 교회의 온전함을 요구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를 위해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 곧 하나님의 영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
B. 보혜사 성령
이제 주님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취하기 위하여 만세전에 계획하신 성령을 그의 제자들에게 보내실 것을 말씀하신다. 세례 요한은 이미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나보다 먼저 오신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 증거하였고 예수께서도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을 받으리라’(행1:4) 약속하셨다. 그 약속대로 제자들은 오순절에 이르러 성령세례를 받았고 그 성령의 능력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6)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청함으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신 것이며 그의 역할은 보혜사이며 그는 제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이란 말은 동질의 대리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의 역활이라는 뜻이다.
보혜사라는 말은 네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먼저 대변자 곧 변호사(INTERCEDE)의 역할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INSTRUCT)의 뜻도 된다. 또한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IMPART)이며 위로와 나눔의 친구(INFLUENCE, INSPIRE)이기도 하다. 그가 하나님을부터 와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그를 소개하여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7) 하셨다.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여 그는 이성적이고 지식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 인격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신 것과 같이 성령은 지각을 갖고 있는 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의 지각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의 말씀을 받아 그 영혼이 진리로 비췸을 받은 제자들은 저를 알고 그는 그들과 함께 하고 또 그들 속에 거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함께 라는 말은 헬라어 ‘para’로서 옆에 있는 상태를 뜻한다. 또한 ‘속에’라는 말은 ‘en’으로서 우리의 안으로 들어 가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가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가 우리의 이성을 비추어 우리로 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18) 하셨다. 고아와 같이라는 말씀 속에는 제자들이 주와 함께 하지 않으면 결국 고아와 같은 입장이라는 뜻이다. 이는 진리의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또 그들 속에 없다면 그들은 영적인 미아처럼 되어 버릴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시다. 사실 오늘날 예수를 말하고 성령을 말하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 미아가 되어 헤매고 있는가?
C. 보증(19-24)
주님은 그들에게 다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날에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9,20)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나타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날이 이르면 제자들의 영안이 열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 제자들이 그리스도안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속에 거하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서 영적 질서를 언급하신 것으로,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계신 것에 대한 주의를 요구하신 것이다.
주님은 21절에서 다시 한번 계명에 대한 주의를 언급하여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말씀하셨다. 이에 가룟인 아닌 유다가 말하여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하고 물었다. 우리는 이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주께서 ‘나타내신다’하신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유다는 주의 나타나심을 천년왕국 때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23,24) 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에 대한 개념이다. 주님은 이를 설명하여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주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내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하신 말씀과 같이 주의 말씀 안에서 나타나실 성부 성자 성령의 역사를 뜻한다. 이는 제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켜 그의 뜻대로 행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오늘 우리는 무엇이 아버지의 말씀이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오늘 보고 있는 성경이다. 성경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될 수 있고 고전 문학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우리에게는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권능이시다.
주님은 요한복음 17장 5절에서 ‘세상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냈다’ 하셨고 다시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다’(요17:8) 하셨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사랑하는 우리가 오늘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지 그것은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III. 그리스도의 약속(25-31)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26)
A. 성경의 말씀(25-26)
주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몇 가지 약속을 하신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보내시는 성령께서 오시면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하셨다. 여기서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은 상기시킨다는 뜻으로 주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깨우치신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앞에서 성령의 존재와 사역적 위치를 언급하신 후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오늘 14장을 푸는 데 중요한 열쇠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앞서 주께서 말씀하신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들어가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약속을 얻지 못하면 그 누구라도 그 길을 알 수 없고 진리를 만날 수 없고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이에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15)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룰 때 이 약속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께서 가르치신다는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요한은 후일 서신에서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서 거하라”(요일2:27) 기록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이 말을 하기에 앞서 적그리스도를 말하여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 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2:19)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한 바 성령의 기름부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인 사도와 하나가 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약속인 것이다.
B. 마음의 다스림
두번째로 주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 하셨다. 이는 주께 있는 평안을 상속하겠다는 말씀이다. 또한 여기서 평안을 끼친다는 말씀은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을 뜻하신 것으로 이는 어떤 사람의 인격적 영향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악한 사람과 함께 하면 그 사람에게서 악한 영향이 내게 미칠 수 있고 또 선한 사람과 함께 하면 선한 영향이 미치게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장차 사도들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끼쳐질 영향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또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겠다는 말씀은 그 평안을 소유하고 계심을 뜻한다. 자기에게 없는 평안을 남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과 같지 않다 하셨다. 이는 세상의 방법으로도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리지만 주님의 평안은 세상의 평안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서두에서 잠간 수넴여인에 대하여 언급하였듯이 수넴여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세상에 필요한 것을 다 갖춰 모든 면에서 평안을 누리 있는 중 사람의 힘으로 얻지 못할 자식까지 얻게 되어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평안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날 예측하지 못했던 자식의 죽음 앞에서 그녀가 누리던 세상의 평안은 일순간에 무너졌다. 그때서야 그녀는 하나님의 평안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 앞으로 나아갔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겪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안은 유대인들이 소망하는 ‘살롬’에 해당하는 헬라어로서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평안 곧 살롬은 물질과 건강에 그 비중을 두었지만 헬라인들은 정신적인 면 곧 진리를 터득하여 얻는 마음의 평안함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주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신 말씀 속에서 우리는 생활의 부요나 육신의 강건함보다 제자들의 정신적인 면 곧 이성적인 부분을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마음의 평안이 무너지면 물질과 건강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마음의 근심은 현실 상황과 장래에 대한 무지에서 온다.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있고 장래를 바라 볼 수 있다면 근심을 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주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리니……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먼 항로를 떠날 때 항로에 밝은 선장을 만나면 풍랑이 일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대학 시험을 앞둔 사람이 좋은 선생을 만났다면 그는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은 제자들에게 최고의 조언자 보혜사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니 너희가 충만한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니 마음의 근심이나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약속을 사도행전 1장에서 보게 된다.
C. 부활의 확신(28-31)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약속은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이다. 주님은 “내가 갔다고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28) 하셨다. 제자들에게 부활의 약속을 하신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내가 너희를 갈릴리에서 먼저 보리라 말씀하셨다.
자, 이제 생각해 보자. 이 세상을 이끌고 갈 그리스도의 사도들에게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항상 부족하게만 여겼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와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상기하고 깨닫게 하고 그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평안이 주어졌다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두려워 하겠는가? 더구나 주께서 처소를 준비하시고 다시 데리려 온다 하셨으니 그들은 아무것도 근심할 바가 없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날 누가 있어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여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도 주께서 주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칠천명을 남겨 두신 것을 내가 아오니 주여 이제도 동일한 말씀으로 나타내어 주시옵소서. 아멘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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