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16:33) “평안의 지혜”

이요나 2008. 8. 20. 14:09

(요한복음16:33) 평안의 지혜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인생의 삶에 있어 가장 불안한 것인 내일의 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이며 기쁜 일은 앞날의 일을 미리 예측하고 현실을 꾸려 나갈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이는 사람이 창조로부터 한계를 넘을 수 없는 제한 속에 살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한되었다는 것은 자유의 속박이기도 하며 능력의 상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 이처럼 제한을 받는 것은 피조물로서 창조자의 뜻을 따르기 위한 것이다. 만약 처음 사람 아담이 이 한계의 질서를 깨달아 하나님을 아는 지혜 속에 거하였다면 그는 생명의 자유자로서 무한한 영생의 복을 누렸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인간은 비물질 기관과 물질 기관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물질기관은 우리의 몸을 이루는 육체이며 비물질 기관은 영과 혼에 속한다. 영은 신적요소로서 영이신 하나님을 감지할 수 있는 기관으로 이 영이 있어 인간은 신을 찾게 되고 그에게 예배로서 복종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은 인간의 정체성을 통괄하는 신적기관이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주체 곧 인격을 대표하는 혼적 요소를 갖고 있다. 이를 통하여 사고하고 생각하고 정서를 느끼게 된다. 이 기관의 중추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양심을 통하여 인간은 도덕과 윤리를 깨닫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슬픔을 감지한다. 인간은 이 기관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터득하며 한계 밖의 인생의 삶을 개척해 나간다.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하면서부터 인간은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어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고 추구해 왔다. 이로서 인간은 수많은 종교를 만들어 내었다. 만약 사람에게 이 소망이 없었다면 인간은 짐승과 같아서 영혼을 의식치 못하고 육체의 만족만을 위해 살았을 것이다

 

잠언기자는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기록하였으며 주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고백하셨다. 이는 세상을 사는 삶의 지혜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 가운데 있다는 말씀이며 그 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해 있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앞날을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고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을 전수하셨다. 이는 믿는 자들 속에 역사하시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능력이다. 이는 계시가 아닌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다. 이 사랑의 실상이 그의 성도 가운데 살아 주의 뜻을 성취하고 있다.

 

I. 거룩한 성령(1-15)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오늘 말씀은 13장에서 시작된 유월절 만찬으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13장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하나님의 집에 들어 가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컨셉에 대한 토론회라 하겠다.

 

또한 14장은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영적 축복에 관한 성령 세미나이며 15장은 제자들의 사역적 비전을, 16장에서는 성령의 실제적인 사역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강론이다. 17장까지의 진행으로 볼 때 15장과 16장은 유월절 만찬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 산책길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A. 장래를 위한 예고와 대비(1-6)

주님은 1절에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실족이란 헬라어 스칸달론은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기 위해 쳐 놓은 덫을 말한다. 따라서 이는 영적 타락의 모든 행위들을 뜻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사자들이 되었다고 해서 세상이 너희를 위대한 참피온을 기다리듯이 기대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이다.

 

아마 그 당시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부터 친히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듣고 배웠으며, 주께서 떠나신 후에도 보혜사 성령의 보내어 그들이 행할 사역을 도우시며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성취하실 것이라는 주의 약속을 받았으니 이제 그들이 세상으로 나가면 세상이 모두 자기들 발 앞으로 모여들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어느 시대에도 세상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나는 1993 5월 일본에서 갈보리채플 목사로 안수를 받고 서울로 돌아 와 갈보리채플을 개척했다. 그 당시 한국에는 나를 후원해 줄 육신의 형제가 있었고, 이미 척 스미스 목사를 비롯한 기라성 같은 갈보리채플 목사들의 축복을 받으며 돌아 온 터라 천군만마를 얻은 용장이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해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한국에 돌아 가면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이 진리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돌아 온 나를 쌍수를 들어 맞이해 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를 기대하는 사람도 없었고 도리여 나 같은 사람이 목사가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매년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신학생들도 같을 것이다.

 

주님은 앞으로 다가 올 박해를 말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 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2) 하시며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2,3) 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은 후일 주께서 택하신 이방인의 사도 바울 통하여 증거 되었음 알 수 있다.

 

후일 바울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나도 나세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할 줄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다(26:9-11) 증거하였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장차 박해가 일어날 것을 말씀하시며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4a) 하셨다. 우리 말에 사람이 무식하먄 용감해진다는 말이 있다. 이는 앞뒤 분별없이 자기 생각대로 날뛴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다면 그에 대한 대책을 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주님은 이 말씀과 함께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4b) 말씀하셨다. 이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제자들을 핍박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수장인 예수께서 계셨기 때문임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는 이제 너희가 내 자리에 서게 되므로 너희를 공격하고 박해할 것임을 경고하신 것이다. 따라서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유비무환을 위한 대책이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그 어떤 말씀일지라도 장래를 향한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이다. 이를 알고 우리가 조심하여 믿음을 지켜 순종하면 복을 받고 지나쳐 돌아서면 화를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가 말씀 밖을 넘지 말라 하였고 내가 너희에게 모든 말씀을 다 전했다고 증거한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5,6) 말씀하셨다. 이 말씀 속에는 주의 심요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이 말씀은 너희가 앞에서는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여 근심을 하였으나 나의 전하는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에 대한 지식을 터득하므로 근심을 하지 않게 되었으나 이제는 너희가 당할 박해가 있을 것을 말하니 그때에는 내가 없으므로 그를 막아 줄 사람이 없으므로 마음에 근심이 생겼다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그 앞에 있을 일들을 알지 못할 때에도 근심을 갖게 되고 또 장차 앞에 일어날 화에 대한 대책이 없을 때에도 근심을 하게 된다.

 

B. 성령의 역사의 실상(14:16-17; 15:26)  책망하심->자각과 확신

이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근심하지 않아도 될 그 대책을 말씀하여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7,8) 하셨다.

 

이 말씀은 매우 난해하다. 그러나 주께서 하신 말씀을 깊이 드려다 보면 아주 오묘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여기서 너희에게 실상 곧 현실적 상황을 말한다 하셨다. 이 말씀은 너희 가운데 나타날 성령의 역사는 가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나타날 현상임을 일깨우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너무 가상적 신비로 접근하려 한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영적 신비를 쫓게 되고 그로하여 성령이 우리 삶에 실제로 동참하고 있음을 놓치고 있다.주님은 이미 앞에서 진리의 성령이 너희와 함께 하시고 너희 속에 계실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는 성령이 믿는자들과 동거동락하심을 언급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 생활 속에 공존하고 계심을 뜻하며 실상 속의 존재이심을 뜻한다.

 

따라서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삶의 질서 속에 나타날 실존적 현상으로 세상에 드러날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는 성령이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이 성령에 의하여 책망을 받게 되는 것은 실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날 세상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그의 성도와 교회를 저주하는 나라가 어떠한가를 살펴 보라. 그들은 끊임없이 교회를 박해 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그들의 세상이 바뀌기까지 책망하여 무릎을 꿇게 하신다. 이 모든 일이 오랜 역사 속에서 때를 따라 속속 실현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 눈 앞에서 구 소련이 어떠했으며 중국이 어떠하며 또한 북한의 실상이 어떠한가?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나라가 잘살고 있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이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실상인 것이다.

 

B. 세상에서의 성령의 역사(14:16-17; 15:26)  자각과 확신

오늘 주님은 성령의 역사를 두 가지로 구분하여 말씀하셨다. 하나는 세상을 대한 성령의 역사이며 하나는 제자들을 대한 성령의 역사다. 이는 14장에서 이미 언급하신 성령의 본질적 사역과는 또 다른 말씀이다.

 

14장에서 언급하신 성령의 사역은 그의 본질적인 사역을 말씀하신 것으로 주님은 진리의 성령은 주를 믿는 성도와 함께 계시며 그들의 속에 계신다고 하셨다. 이는 믿는 자들을 도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꾸기 위한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이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은 주를 믿지 않는 세상에 대한 성령의 역사와 또 하나님의 나라를 이끌고 나갈 교회 곧 그의 사역자들 속에서 역사할 성령의 역할을 소개하신 것이다.

 

먼저 주님은 세상에 대한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시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8) 하셨다. 여기서 주께서 사용하신 책망(엘레게인)이란 헬라어는 문책과 확신을 뜻하는 말이다. 단지 책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인정할 때까지 확신을 갖게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성령은 세상으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달음을 갖을 때까지 책망하여 확신시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다 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셨다. 사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 때 자신들이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열심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후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들고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죄를 토로하였다. 이에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받으리라(2:37,38) 증거하였다.

 

계속하여 주님은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깨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10) 라고 하셨다. 흥미롭게도 주님은 여기서 너희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였다. 이는 믿는자들의 의를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지 않은 의는 인정할 수 없음을 책망하시여 자각하고 확신케 하신다는 뜻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를 믿어 의인이라 칭하면서도 그 의인됨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행위로 의를 행하고자 한다. 이로서 교회가 분쟁이 일어나고 교만과 패역으로 가득차게 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은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며 율법 안에서의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광야에 이르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았을 때 스스로 자신은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하였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와 같이 온전하라 하셨다. 그러나 죄인 된 인간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 질 수는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는 믿음의 가치인 것이다.

 

또한 주님은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음이니라(11) 하셨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세상의 종말을 두려워하며 죽음 이후에 심판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그의 영이 세상의 심판이 있을 것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심판은 사단이 쥐고 있는 세상의 권세 곧 죄의 문제를 송두리째 풀어 놓은 것이다. 이로서 실상 사단은 사람들을 옥죄일 빌미를 상실한 것이다.

 

C. 제자들 속에서의 성령의 역사(14:16-17; 15:26)  진리와 장래 일

이 말씀을 하신 후 주님은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12) 하셨다. 이는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한계를 언급하신 것이다. 사람은 어떤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 지식을 수용할 수 있는 지식과 체험적 관계가 먼저 수립되어야만 한다. 아무리 좋은 지식이라도 그 지식을 수용할 바탕을 이루지 못하면 개발의 편자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며 많은 지식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성령이 오셔서 영적인 일들을 스스로 자각하게 하실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3) 하셨다. 이는 제자들 가운데서의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신 것이다. 이는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사역으로 주님은 이미 성령과 그의 제자들이 주를 증거할 것을 말씀하셨다(15:26,27).

 

예수님은 성령을 가리켜 진리의 성령이라 칭하셨다. 이는 보혜사 성령과 또 다른 칭호다. 보혜사란 돕는 역확로서의 직임이지만 진리의 성령이란 성령의 본질적 인격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령의 인격은 진리 그 자체란 뜻이다. 주님은 먼저 주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하셨다. 이로서 주께서 말씀하신 바 지금은 너희가 감당 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케 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진리라는 말씀은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질서에 속한 모든 지식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의 이치 곧 도덕과 윤리이며, 또한 사람을 가르치고 다스리는 삶의 직무에 속한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된다. 바울은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이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1:19) 증거하였다.

 

또한 인도하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미 주님은 진리의 성령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 하셨다. 그러나 인도하신다는 말은 현실적 체험을 뜻한다. 목자가 양의 필요를 모두 알고 있듯이 주의 계획과 질서를 따라 깨우치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라고 하셨다. 이는 그의 인도하심이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듣는 것 곧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말씀들을 따른다 하신 것이다.

 

성령은 또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셨다. 장래일이란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모든 일들 곧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에 속한 일들을 알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이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에 속해 있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분명하게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14) 하셨다. 여기서 말씀하신 내 것이란 무슨 뜻인가? 주님은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15) 하셨다.     

 

최근 어떤 교회에서는 성령의 인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성령운동이 아닌 성령운동을 말하며 성령은사가 아닌 성령은사를 말한다. 또 그들은 성령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기도 하고 성령의 이름으로 주의 일을 하려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성령은 이름이 없다. 그는 다만 진리의 영으로서의 그의 인격을 갖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낼 뿐이다.

 

. 성령의 열매(16-33)   성경적 이해와 믿음의 확신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을 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21)

 

A. 이해의 문제(16-19)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신 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말씀 하셨다. 생명의 본질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이며 인생의 궁극적인 고통과 기쁨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이성적 이해를 요구하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도 제자들은 그 말씀을 납득할 수 없었다.

 

이에 주님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의문하느냐? 물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보리라 에 대한 헬라어의 의미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에서 언급된 보다를 뜻하는 헬라어는 오프세스테(OPSESTHE)데오레오 (THEOREO)가 소개되고 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오프세스테(16:22)는 영적 실재 곧 실체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를 뜻하며 데오레오(20:14)는 단순히 어떤 사물을 지켜 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실체에 대한 각별한 주의를 요구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육체의 죽으심과 부활의 영체에 대한 자각을 갖기를 원하신 것이다.

 

B. 확신의 문제 (20-28)  그리스도의 약속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 말씀하셨다. 우리 말에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다. 화가 도리어 복이 된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여기서 자신이 이제 곧 십자가에 집행되어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부활의 기쁨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를 비유하여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21) 하셨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열매 곧 교회의 탄생을 말하여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여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너의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4:10) 기록하였다.

 

주님은 여기서 제자들이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있을 때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은 해산을 앞 둔 여인과 같다고 비유하신 것이다.  

 

이에 주님은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다시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3)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 된 성도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명확한 깨달음을 통한 이해와 확신이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하여 주께서 보내신 진리의 성령이 제자들에게 역사하는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23) 하셨다. 이는 우리가 확신한 바에 대한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 위함이다. 주님은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 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4) 하셨다. 이것이 믿음의 확신 가운데 성취되는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III. 계시와 실상(25-33)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리라(25)

 

A. 비사(비유)의 계시 십자가 이전은 제자들이 스스로 자각해야 할 계시

25절에는 흥미로운 말씀이 기록되었다. 주님은 앞에서 미리 말씀하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에 대하여 이것을 내가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25) 하셨다.

 

여기서 비사란 복음서 여러 곳에서 나타난 비유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비사라는 말은 청중에게는 감추고 있으나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생각과 사유를 해야하는 비유의 말을 뜻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은 계시에 속한 것으로 감추어진 것이지만 이제 성령의 때가 오면 더 이상 계시 속에 감추어질 것이 없이 모두 현실 속에 들어 날 일이라는 말씀이다. 이는 이제로부터는 더 이상 계시의 때가 아니라 계시의 성취의 때가 이를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과 함께 주님은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27)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제자들과 자기의 사랑을 필레오로 설명하셨다. 이는 비밀이 없는 친구로서의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임을 뜻한다. 이로서 우리는 제자들이 주께서 하신 말씀을 모두 이해하고 그의 말씀을 실천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성경적 계시의 일치와 믿음의 일치를 뜻한다.

 

B. 십자가의 확증(25-30)

주님은 이제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셨다. 이는 주께서 성육신 하심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에 해당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와 같은 말씀은 이미 여러 번 말씀하셨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불과 조금 전만 해도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 말씀 조차 그들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은 주께서 우리에게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습니다(29,30) 대답하였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지금 성령을 받은 상태는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과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에는 어떤 특별한 영적 능력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후일 요한은 하나님의 영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적 그리스도의 영이라(요일4:2,3) 증거하였다.

 

여기서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분별하는 것은 영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말에 이신전심이란 말이 있으며 초록은 동색이란 말이 있다. 이는 같은 생각 같은 사고를 갖고 있을 때 통하는 말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영은 동일한 생각과 이해와 확신을 따라 일치함을 이루게 된다

 

나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본다. 그리 어렵지 않은 말씀인데도 그들은 나와 상반된 생각을 하고 있다. 이는 그들과 나의 관심이 서로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이로서 우리 사회는 우익과 좌파가 발생하며 서로 대립을 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말을 들은 주님은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고 물으셨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까지 삼년이 걸렸다. 그러나 주님은 조금 후에 나타날 그들의 행보를 말하여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하셨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먼저는 실재로 제자들은 예수의 잡힘을 보고 놀라 도망을 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는 곧 이루어졌다. 또 다른 의도는 그들도 예수님처럼 실질적인 일체를 이루게 되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이는 성삼위 일체하심을 언급하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은 곧 그렇게 되었다.

 

끝으로 주님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 하셨다. 과연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그들을 주 안에서 평안케 누리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렇다. 우리가 앞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 수 있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와 일체가 된다면 주께서 사람의 마을 아시듯이 또 세상의 일들을 미리 알 듯이 제자들도 그와 같이 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두려운가?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그것은 세상을 미리 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의 말씀을 따라 순종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만이 우리를 공격하는 세상의 영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