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8:37) 진리가 무엇이냐?
(요18: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꽂으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하시더라”
A. 체포의 상황(1-2) ‘기드론’= 검은계곡(히)
13장으로부터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컨퍼런스는 드디어 막을 내렸다. 이제 예수님은 그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반대편에 있는 동산으로 들어가셨다. 요한은 2절에서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고 주석을 달았다.
기드론이란 검은 계곡이란 뜻이다. 이 골짜기는 우기가 되어야 시내를 이루는 매마른 계곡이다. 이 골짜기 안에 구약시대에 저주받은 땅으로 불리던 힌놈의 골짜기와 여호사밧의 골짜기가 있다. 주님은 제자들과 이 골짜기를 건너 감란산으로 들어 오셨다. 그 중턱에 바로 기름을 짠다는 이름의 겟세마네 동산이 있다.
누가복음 22장에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눅2239-41) 라는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요한이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이 날은 유월절이므로 유대인의 가족 수대로 기록을 따라 어린양을 잡아 무교병과 같이 먹는 때이다. 기록에 의하여 그 당시 유대인의 인구를 비례하면 25만 6천마리 정도의 어린 양들이 제물로 희생되었을 것이라 한다.
이 많은 숫자의 어린양의 피가 제단에 뿌려졌다 할 때 그 피는 어디로 흘러 내렸을까? 더욱이 우기가 아니라 기드론 시내는 많은 물이 아니었을 것을 생각하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건너신 기드론 시내는 핏물로 흥건히 물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를 바라 본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싶다.
B. 음모(3) – 유대인 성전 수비대
유월절 만찬장에서 예수님으롭터 빵조각을 받고 나간 가룟 유다는 곧바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를 팔고 주를 잡기 위한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을 밝히고 병기를 들고 동산으로 왔다. 마태는 이를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 하나님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마26:47) 기록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군대란 성전을 관리하는 특별 수비대로서 하속들은 유대인으로 구성된 성전 수비대였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성경에는 다윗이 당한 배반에 대하여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데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삼하15:31) 기록되었다. 이와 같이 배신자는 항상 함께 밥을 먹던 자 중에 있다.
C. 예수 그리스도의 파워(4-9)
그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물으셨다. 다른 복음서에는 유다가 예수께 나아와 입맞춤을 한 것으로 신호를 삼았다고 기록되었다. 이에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 하니 주께서 ‘내노라’하시니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나타나는 파워를 발견하게 된다. 주님은 평범하게 한 말씀이셨는데 그들은 뒤로 물러나 땅에 엎드러졌으니 말이다.
이를 말하여 시편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시27:1,2) 기록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교회 안에 집회 중 엎어지는 일들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그들은 오늘 주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 성령이 임재하신 곳에는 능력이 나타나 사람이 넘어지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도 아니고 또 넘어질려고 하는 집회이므로 그것은 성령의 임재가 아닌 기획된 쑈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하여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는데 왜 손을 대면 넘어지고 이상한 괴음을 내곤 하는가? 더구나 주 앞에 넘어진 자들은 믿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를 잡으러 온 자들이 아닌가?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진리의 말씀을 따라 역사하시지 자신의 능력을 임으로 과시하지 않는다(요16:13-15 참조)
4절에는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라고 기록되었다. 요한복음 2장 25절에도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게 대하여 아무런 증거를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라”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후일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요일3:20) 말하여 범죄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 때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에게 내노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8) 하셨다. 이에 대하여 요한은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9) 기록하였다.
흥미롭게도 이 말씀은 구약의 말씀이 아니라 주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 주께서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심을 말씀하실 때 하신 말씀이다(요6:39).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구약의 말씀만 성취된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 곧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쳐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다. 이는 졸지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이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1) 하시며 말고의 귀를 고쳐 주셨다. 마태복음에는 이 부분에 대하여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니라” (마26:53) 기록되었다.
D. 메시야의 구금(12-14)
결국 예수님은 그들에게 체포되어 결박을 당하여 먼저 대제사장 출신인 안나스에게 끌고 갔다. 그때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으나 그의 장인이며 안나스가 실세를 갖고 있었다. 요한은 대제사장 가야바를 소개하여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14) 기록하였다.
II. 시몬 베드로의 시험(15-18, 25-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27)
A. 대제사장의 뜰에서(15-18)
요한은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부분에 지면을 많이 할애하지 않았다. 이미 다른 복음서 저자를 통해서 소상히 기록하였기 때문에 중복을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요한은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 가는 과정을 살며시 기록하였다. 사실 아무런 연고없이 갈릴리의 시골 어부가 대제사장의 집안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요한은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 왔더니”(16) 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대제사장과 아는 제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지만 요한복음에 기록한 문체를 미루어 볼 때 이 제자는 바로 요한 일 것으로 추측된다. 요한의 아버지는 어부로서 나름대로 그 지역 사람들과 직업상의 교분을 갖고 있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문 지키는 여종은 베드로를 보고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의 하나가 아니냐”고 묻자 베드로는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흥미롭게도 18절에는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기록되었다. 그들과 숯불을 함께 쬐고 있다는 것은 적과의 동침을 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과거 예수를 영접한 후에도 도박에 빠졌던 일이 있다. 우연히 그런 곳에서 교회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서로 크리스천이 아닌 것처럼 모른 척 하였다. 이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본분을 망각하고 적과의 동침을 할 때가 있다. 참으로 얼굴이 뜨거워지는 모습들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6:14,15) 라고 경고하였으며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엡5:11) 명하였다. 이와 같이 주를 믿는 우리는 어떤 상황에라도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B. 적과의 동침
베드로의 부인은 다시 한번 이어진다. 이는 죄를 묵인한 사람들의 속성이기도 하다. 우리 말에 오십보 백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전쟁터에서 오십보를 도망한 놈이나 백보를 도망한 놈이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뜻이다. 또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도 있다.
비빔밥을 좋아하는 민족이라서 그런지 우리는 똥과 된장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할 때가 있다. 이는 꼴뚜기가 어물전 망신을 다 시키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아마 대부분의 크리스챤들도 한번 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뜰에서 심문을 받고 있던 중에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고 있을 때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그 제자 중의 하나가 아니냐 물었다. 이 때도 베드로는 아니라고 뻔뻔한 대답을 했다. 더욱이 베드로에게 귀를 벤 말고의 친척 중 한 사람이 베드로의 얼굴을 보고 ‘네가 그 사람과 동산에 함께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26) 물었다. 이에 베드로는 다시 또 부인하였다. 바로 그때 주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닭이 울었다. 정말 황망해 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C. 닭이 울다
마가는 이 사실을 기록하여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기록하였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사람인가? 그는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말씀하시며 너희가 나를 다 버리리라 말씀 하실 때 그는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 지라도 나는 주와 함께 죽을 것입니다’ 장담하던 자다. 그러나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며 주를 부인하였다.
과연 당신은 믿음생활 속에서 이런 상황을 경험한 일이 없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세월 예수를 부인하며 살았는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시몬아 사단이 밀 까부르듯 너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건히 하라” 하셨다.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가? 주님은 우리의 망언을 모두 참고 우리가 온전한 믿음에 설 때까지 기도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승리의 능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어리석음을 길이 참으신 주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인내하라 하였고 다시 주를 믿는 모든 가정에서 더욱 그리하라 권고 하였다.
III. 예수 그리스도의 심문(19-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세 속한 것이 아니니라”(36)
A. 대제사장의 심문(19-24) – 안나스의 뜰
예수님은 결박 당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려갔다. 그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했던 자 이기도 하다(요11:50). 안나스는 주후 6년부터 15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있던 사람으로 그 당시 유대권력의 실세였다. 그 아들들 넷이 대제사장에 올랐고 그 때 대제사장 가야바도 그의 사위였다. 가야바가 예수를 안나스에게로 먼저 가게 한 것으로 보아도 안나스가 산헤드린 공회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가야바는 예수님께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었다’(19) 이는 예수님의 세력을 간음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에 주님은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다.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안다”(20,21)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 사역에 있어 은밀하게 행하시지 않았다. 은밀하다는 것은 곧 온전치 못하다는 증거이다. 진리는 밝히 드러나는 실체이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주님은 그의 행하신 모든 말과 일에서 밝히 드러내어 행하셨다. 오늘날 많은 지도자들이 은밀히 밀담을 나누고 은밀한 일들을 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후일 그의 권세가 끝날 때에 그가 행한 은밀한 말과 일들이 들어나는 것이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대제사장의 하속 하나가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고 예수를 쳤다. 그에게 주님은 “내가 잘못하였으면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23) 답하셨다. 미가는 이 일을 미리 말하여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샀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미5:1) 증거하였다.
참으로 만왕의 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일개 하속에게 이처럼 봉변을 당하셨으니 참으로 황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종의 모습으로까지 자신을 낮추셨던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다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려 가신 후 로마 총독부가 있는 관정으로 그를 끌고 갔다.
흥미롭게도 28절에는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기록되었다. 그들은 예수의 죄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결국 로마정부에 의뢰한 것이다. 베드로는 이를 말하여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다”(행2:23)고 고발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로마인에게 의해 십자가 형벌을 받아야만 했던 유대인들의 율법적 속성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명실공히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하는 유대인들은 로마정부의 통치 하에 예속되어 산헤드린이라는 종교적 민족 자결기구를 통해서 종교적 통치권을 갖고 있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율법에 기록된 종교적 자유를 보장 받은 범위에서 로마의 통치권과 여러 가지를 타협하였다. 이는 자기들의 실세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B. 빌라도의 심문(28-32) 빌라도’(A.D.26-36)
관정에서 예수를 받은 빌라도는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너희가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하였다. 이에 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 답하였다. 이와 같이 빌라도는 유대인의 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고 사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종교적인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아내는 꿈으로 예수에 대한 경계를 받아 빌라도에게 이 사람의 죄에 대하여 관여하지 말라고 권고하기까지 하였다.
사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직접 처형할려고 했다면 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주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할 때에 그들은 예수를 돌로 치려고 했던 내용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유대인에게는 그들이 종교적 죄를 범하였을 경우 율법 곧 레위기 레24장 10절에 의하여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권한이 로마에 의해 보장되어 있었다. 그로 하여 후일 그들은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 율법을 집행하려면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백성이 손을 댈지니라”(신17:7)하신 말씀을 따라 백성들 앞에서 그의 죽일만한 죄를 고발할 증인이 있어야 하고 그 죄를 확증할 관원이 입회하여야 한다. 그런 연고로 공회에서는 예수를 잡아 그의 죄에 대한 증인을 채택하려 하였지만 증인들의 증언이 서로 엇갈려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행하신 말과 일에 옳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고 또 예수께서 백성들에게 행하신 의로움으로 하여 그 누구도 백성들 앞에서 거짓 증인으로 설 수 없으므로 그를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던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요한은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임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32)고 증거하였다.
또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마20:17-19) 하신 말씀이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빌라도에 대하여 많은 오해와 편견을 갖고 있다. 우리 머리 속에는 빌라도라는 사람은 극악 무도한 로마의 개와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빌라도는 전세계를 석권한 로마황제에 직할 된 장군이다.
그 당시 전세계를 제패한 로마제국은 예속된 나라를 다스리는데 두 가지 정책을 갖고 있었는데 보편적으로 해외 공관장과 같은 총독들은 로마 원로원에서 선발하여 보냈다. 그러나 분쟁 여지가 있는 곳에는 황제의 친위대 소속 군대를 보냈는데 빌라도가 바로 황제 친위대 소속이다. 따라서 그 누구라도 황제로부터 총독의 자리에 임명을 받으려면 가문과 덕망과 위용에 있어 황제의 눈에 들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유대의 총독이나 왕으로 임명을 받은 사람은 특별한 민족 유대인에 대한 풍속과 종교적 속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중을 다스리지 못하여 재임시 반란이 자주 일어나면 그의 출세 가도가 막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총독이나 유대 왕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최대한의 종교적 실권을 주고 자치적으로 유대인을 잘 다스리도록 유화정책을 펴왔다. 이런 이원화된 정치적 구조로 하여 총독 빌라도와 유대왕 헤롯은 서로 앙숙이였다. 누가는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23:12)고 기록하였다.
누가복음에는 그 당시 상황을 소상히 기록하였다.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보내자 빌라도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람인 것을 빌미로 마침 헤롯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으므로 예수를 그에게 보냈다. 헤롯은 소문에 듣던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였는데 이는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실까 하였지만 예수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니 헤롯은 병사들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씌워 조롱한 뒤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다.
IV. 유대인의 왕(33-4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세 속한 것이 아니니라”(36)
A. 메시야 공방 (33-35)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여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다. 이와 같은 빌라도의 질문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총독 빌라도가 유대인의 종교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지금 네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오시기로 말씀하신 메시야냐 하고 묻는 것이다.
이에 주님은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고 물으셨다. 두 사람의 질문과 답변은 마치 선문답과 같이 서로의 마음을 살피는 고도의 신경전과도 같다. 빌라도의 질문에 주께서 이같이 반문하신 것은 ‘너는 진정 유대인의 왕”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알고 묻는 것이냐?’ 고 물으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내가 유대 총독이었다면 성경에서 유대인의 왕에 대한 말씀을 알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가 지금 나에게 이를 묻는 것은 네가 유대의 통치자로서 성경적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정치를 하는 것이냐 하고 물으신 것이다.
얼마 전 SBS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을 반증하는 방송을 하여 기독교계가 들고 일어났던 일이 있다. 그 내용은 이슬람교도들의 반론을 모아 제작한 것으로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을 반증하려면 성경을 토대로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증거를 토대로 하여야 하는데 그들은 기독교를 대적하는 세력 곧 마호멧을 메시야로 믿고 있는 이슬람의 증거를 토대로 하여 제작하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을 비방하기 위한 안티들의 모함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성을 왜곡시키며 성경을 인용하기도 한다. 그로 인하여 수많은 이단들이 파생되었고 또 교회가 분열되어 왔다. 요한은 후일 그의 서신에서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2:19) 증거하였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반문에 빌라도는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겨 주었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35)고 되물었다. 다시 말하여 유대인의 왕은 유대인의 종교적 문제이지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유대인의 왕의 실체를 알았더면 이와 같은 실언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그가 유대인의 총독의 지위를 탐했을 뿐이지 유대인의 왕에 대한 지식을 터득하고자 하지는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처럼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려하고 교회의 장로가 되어 존경을 받으려 하지만 정작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지 않는다.
A 빌라도의 메시야 공방 (33-35)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우선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 곧 메시야에 대한 성경적 지식을 얻었다면 먼저 유대인의 왕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다윗은 말년에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언을 받았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에게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히리라” (삼하7:12,13) 하셨고 다시 “네 집과 내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삼하7:16) 말씀하셨다. 다윗은 유대인의 왕 메시야가 자기 후손 중에 태어날 것을 기도하였고 그의 날을 바라보며 기뻐 하였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가르켜 하신 말씀도 아니며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을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다윗에게 메시야의 비전을 주신 하나님은 동일하신 말씀으로 솔로몬에서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쁘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왕상 9:4,5)라고 조건부 약속을 하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법에서 떠났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솔로몬을 통해서 오신다고 약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과 다른 족보가 소개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은 마리아는 다윗의 다른 아들 나단의 후손이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말씀하신 메시야 약속은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B. 성경의 약속의 성취
성경은 유대인의 왕에 대하여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말씀하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하였고 다시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사9:7) 예언하였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렘23:5) 기록하였으며 다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 집 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라”(렘33:17) 증거하였다.
또한 미가 선지자는 그의 태어나심을 말하여 “베들레헴 에브라디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5:2)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유대인의 왕에 대하여는 그를 믿는 사람들 속에서 수천년 동안 잉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후일 바울은그 제자 데모데에게 “만물을 살게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행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딤전6:13, 13) 권고한 것이다.
C. 진리 공방전(36-38)
주님은 빌라도에게 대답하여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았다’ 하신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과 또 다른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하여 언급하신 것이다. 이미 주님은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하셨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는 바리세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하셨다.
이러한 성경적 논리는 성경전체에서 변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장차 그가 들어갈 본향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디윗 또한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내 육체는 희망에 거히리니”(행2:25,26) 라고 증거하였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답변을 들은 빌라도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이에 주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답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자신의 나라는 진리 속에 있음을 증거하신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 하고 콧방귀를 뀌며 지나갔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며 진리에 대한 깊은 우리의 사고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서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 이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오셨고 또 우리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우리의 의를 위하여 하늘에 오르셨고 또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이는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내가 이를 위해 났으며 이를 위해 세상에 왔나니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하신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이로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온전한 분변을 할 필요가 있다. 주님은 이미 “진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진리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아버지께 청원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진리의 본체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증거한 것이다.
한글사전은 진리(眞理)를 정의하여 ‘참된 이치. 또는 참된 도리이며 논리 명제가 사실에 정확하게 들어맞음. 또는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아니하는 바른 판단’ 이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두산백과사전에는 '허위(虛僞)와 함께 그 어느 것인가가 명제 또는 판단에 부착하는 성질이며 참인 명제의 파악 또는 참인 판단이 지식이고, 지식은 참이기 때문에 지식이 되는 것이므로, 진리는 인식에 관한 초월적인 가치이며, 지성(知性)이 노리는 목적으로서의 초월적인 대상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사고(思考)와 존재의 합치(adaequatio rei et intellectus)’라고 정의 하였으며 그리스어 ‘alētheia’는 본래 ‘은폐되지 않은 것, 드러나 있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진리는 존재 곧 드러난 그 자체의 모습, 존재의 진실상(眞實相)으로, 그 자체를 드러나게 하는 것, 한마디로 '이성(理性)의 현주소'라고 정의하였다.
헬라시대에는 여러 가지 많은 진리 중 유일한 참 진리는 곧 신(神)에 기인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이것이 사물을 창조하는 신적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그들은 진리를 ‘로고스’와 함께 생각하였으며 그들은 어떤 존재이든 배후에 진리의 존재 곧 로고스가 있음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헬라의 ‘소피스트’(sophist)들에 의해 ‘진리란 각자에게 타당하게 생각되는 지성이다’라 정의되었으며 이 논리를 바탕으로 상대주의가 탄생했다. 또한 이러한 논리는 ‘지성은 지성의 외부 곧 물체 본질에는 도달할 수 없지만, 지성을 통해 진위를 판별한다’는 주관주의(主觀主義)로 발전하였으며, 이에 칸트는 ‘지성 안의 기준이 진리의 기준이다’라고 말하여 구성주의(構成主義)를 주창했다.
이처럼 진리 논쟁은 끊임없이 석학들 사이에서 변증되었으나 결국 그들은 인간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논리가 자신을 따르던 사람에 의해 먹이사슬이 되어 부메랑이 되어 돌아 왔기 때문이다.
D.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38-40)
그러므로 오늘 주께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내게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18:37) 하실 때 총독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콧방귀를 뀐 것은 이미 고대의 석학들에 의하여 진리는 없다고 증거되었는데 이 시대에 무슨 진리 타령이냐고 비아냥 거린 것이다.
이와 같이 진리는 그 철학자나 권세가라도 알 수 없고 만날 수도 없는 것은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그의 말씀을 통하여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무릇 진리 안에 속한 자는 나의 말을 듣는다’ 하신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진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외면하고 강도 바라바를 선택하고 말았다.
오늘 이 말씀을 대하여는 당신은 어떠한가? 과연 당신은 진리에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아직 이 세상의 신에 매료되어 재물에 쌓기에 전전긍긍하며 이른 아침부터 포도주와 독주에 취하여 그들만의 축제에 빠져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빌라도와 같이 강도 바라바를 선택한 것이다. 이미 성경은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이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나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라"(살후2:9,10)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아직도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이 악한 영들에게 유혹을 받게 하여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당신을 심판하실 것이다(살후2:11,12 참조) 그러나 만약 당신이 진리에 속한 자라면 당신은 진리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릴 것이며 당신의 영혼은 영생을 얻을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던지 간에 나와 나의 집은 진리를 선택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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