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17:24) 예수 그리스도의 청원

이요나 2008. 8. 20. 14:10

(요한복음17:24) 예수 그리스도의 청원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9)

 

(서론) 기도의 주소와 대상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위에서 모두 발을 벗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선 곳은 세상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의 주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의 간곡한 기도 위에 설정된거룩한 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펴 볼 요한복음 17장의 겟세마네 기도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중 가장 길고 현실적인 기도이다. 주님은 이제 목전으로 다가온 십자가의 죽으심 앞에 주께서 완성하셔야 할 일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청원하셨다. 그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복음을 완성할 제자들의 위한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의 주소는 하늘에 있었다. 요한은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말씀하여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하늘이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우주가 아니다. 이곳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초소이다. 하나님은 이 곳에 계셔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또 친히 다스리신다. 그곳은 장차 우리가 들어갈 성도의 처소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다.

 

또한 주님은 아버지께 기도하였다. 아버지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서 이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뜻한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시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

 

다윗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5:2) 기도 하였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통치자 왕이시며 그의 주인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51) 하셨고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6:9,14) 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아바 아버지(14:36, 8:15, 4:6)이시며 유일하신 참 하나님(3)이시며,  거룩하신 아버지 (11)이시며,의로우신 아버지(25) 이신 것이다.

 

I. 첫번째 기도(1-10)  영화롭게 하옵소서(1,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5)

 

A. 주님의 자신을 위한 기도(1-5)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1) 기도하셨다. 이 기도는 매우 중요하며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영화롭게란 하나님의 신성과 거룩한 예배를 뜻한다. 그러나 실상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의 죽으심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가장 거룩한 예배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정말 애절한 청원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거룩하게 하여 그로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여 달라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또 인류를 위하여 위대한 죽음을 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고 그의 이름은 길이 사람들 속에 살아 남아 있다.

 

또한 악한 일을 하여 그 이름이 천대만대에 악인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 저주를 받고 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어떠한가? 역사적으로 볼 때 그의 죽음은 율법에 의한 합법적인 형벌이다. 유대인에게 있어 이단은 돌이킬 수 없는 저주의 형벌로서 로마의 통치권에 의해 합법적으로 집행된 사형이다. 그 누구도 이 형벌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대로 사람들의 손에서 정죄된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할 명분이 없으며 또한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먼저 자신의 죽음을 영화롭게 하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여 달라고 청원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9-11) 증거하였다.

 

계속하여 주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2) 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영생을 언급하셨다. 영생이란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를 믿는 자들의 영생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주께서 유일한 통치자이심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영생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영생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예수께서도 이 문제를 여기서 언급하신 것은 그러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영생에 대하여 무감각하다. 그들은 마치 영생은 이단들이 외치는 상투적인 교리인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영생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며 교회의 상징이다.

 

만약 우리에게 영생이 없다면 교회가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다른 종교와 전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며 교회는 단지 사교를 위한 집단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름 이름을 주시지 않았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면 영생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룰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주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 말씀하셨다. 이 말씀 속에는 많은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이는 구원과 믿음의 본질에 속한 정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고 구원을 받은 자는 모두 영생을 선물로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논리로서 이 정의는 불변한 진리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사망에서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자녀의 권세를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 구원이란 주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내가 살아가야 할 믿음의 삶의 과정이 남아 있다.

 

이를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는 혼의 구원이라고 말한다(벧전1:9). 그를 위해 주님은 그의 몸 된 교회에 사도와 예언자와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를 두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신 것이다(4:11,12).

 

   B. 그리스도 사역의 완성(4)

주님은 4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기도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하여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사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전하였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십자가의 구원을 뛰어 넘는 또 다른 일을 예언한 것이다. 이는 바로 주를 믿는 자들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중대한 사역이다.

 

주님은 계속하여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6) 하셨다. 이는 1절에서 언급하신 십자가의 사역과 또 다른 차원을 언급한 것이 분명하다. 주께서 말씀하신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늘에 속한 비밀로서 장차 우리가 영생에 들어가는 날 보게 될 영광이다. 주님은 여기서 우리에게 그 영광에 속한 것 곧 영생에 주목하게 하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먼저 세상 중에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6a)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를 사고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인격적인 것 곧 참 하나님을 아는 것에 속한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참 하나님을 알 수 있을 것인가?

 

계속하여 주님은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6b) 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들을 때 정말 주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억망진창인 내가 처음부터 아버지의 것이었다니 말이다. 이에 바울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3,4) 증거하였다.

 

C. 그리스도의 영광(7)

7절에서 주님은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하셨다. 이미 주님은 진리의 성령을 소개하시면서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16:14) 하셨고 다시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16:15) 말씀하셨다. 그러면 주께서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은 무엇을 뜻하신 것인가?

 

이에 주님은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로 믿었사옵나이다(8)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본질이 무엇이며 믿음이 성취하는 영생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말씀이다.

 

특별히 여기서 우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로 믿었사옵나이다하신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의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의 증거와 동일한 맥락을 가진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뜻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은 오늘 곧 십자가의 죽으심을 목전에 두고 자신이 아버지께 구하는 기도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밝히 말씀하여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9) 하셨다.

 

많은 교회들이 이 시점에서 전도를 외치며 세상으로 나가 주를 증거하자고 외친다. 그런데 주님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사람들 곧 주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어떻게 보면 이기적이고 편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날이 목전에 있다면 당신은 누구를 사랑하며 누구를 위해 기도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자기의 자녀들일 것이다.

 

이에 주님은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10) 하셨다. 결국 아버지의 아들로 하여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셨듯이 주께서도 아버지께서 주신 제자들로 하여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것 곧 아버지의 말씀을 받고 지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첫번째 청원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영광과 그의 제자들과의 영광이다. 이는 먼저는 영혼의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영광에 속한 기원이다.

 

II. 두번째 기도 (11-14)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

 

A. 제자들의 일치성

예수님의 두번째 청원은 제자들의 일체성이다. 주님은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 기도하였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는 제자들에게 요구하여야 할 말씀인데 여기서 주님은 아버지께 간구를 하셨다.

 

지금까지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하셨고 그 방법으로 내가  주와 또는 스승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3:14) 하시며 그것이 서로 사랑하라(13:34) 하신 말씀을 성취하는 새 계명임을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 교회가 이 말씀을 대할 때 정말 얼굴을 들 염치가 없다. 교회는 사분오열되어 서로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고 스스로 왕좌에 오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가 분열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곧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주의 말씀 가운데 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미 그의 제자들에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15:5) 하셨고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리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15:6) 하셨다. 

 

B. 제자들의 거룩한 성별

계속하여 주님은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 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12) 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시편에 기록된 말씀을 가리켜 성경이라 칭하셨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우리가 읽는 모든 말씀이 성경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을 말씀하신 것인가? 이는 하나님의 이름 야훼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와 그의 인격으로 성별하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만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된 것과 같이 제자들도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은 여기서 제자들을 거룩히 구별해 주실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오직 멸망의 자식 가룟 유다는 성경에 미리 기록하신 말씀을 따라 멸망의 길로 갔으니 이들은 모두 아버지의 이름으로 거룩히 성별하여 세상 가운데서 보전하여 주시기를 청하신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13) 하셨다. 이는 주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이유를 설명하신 것으로 여기서 이 말이란 앞에서 언급된 주의 이름을 보전하여 지키신 일이다.

 

예수님은 삼년동안 제자들과 동거동락하며 제자들의 영적, 정신적 그리고 모든 삶의 지주가 되셨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떠나신다는 것은 그것이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길이라 해도 이리와 같은 유대인 소굴에 고아와 같이 내버려져야 할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근심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제자들이 불안과 근심에 싸여 버린다면 복음사역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들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성별된 자들임을 스스로 알게 하실 필요가 있었다. 제자들이 이를 깨닫게 되면 그들은 기쁨으로 충만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가르치신 성경 말씀을 통하여 거룩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신 것이다(6). 다시 말하여 제자들이 충만한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들 속에 거룩하신 아버지의 이름 곧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이 그의 말씀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와 같은 말씀을 참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도 하셨다(15:11).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9,10) 하시며 내가 이것을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5:11) 하셨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신 것은 제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한 것이며 계명을 지켜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를 이루게 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를 통하여 제자들이 아버지 하나님과 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보전되는 길 곧 거룩한 성별을 말씀신 것이다.

 

C. 제자들의 당면한 문제(14)

제자들의 또 다른 문제점은 세상이 미워하는 것이다. 주님은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14)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주께서 말씀하신 세상은 어떤 세상을 뜻하는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지 않게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나라에 가게 된다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미워하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영적인 문제인 것이다. 주님은 사람들이 나를 이유없이 미워하였다고 하셨다. 또한 이 말씀은 종교적 마찰을 뜻하기도 한다. 바울은 이방인 사도로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려 다녔다. 그러나 그가 가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세상과의 영적전쟁을 언급하신 것이다.

 

주님은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를 말씀하여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라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으로부터 대적함을 받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사람들의 효과적인 삶을 위하여 어떤 철학적 논리를 편다던가 하면 세상은 당신을 위대한 사람으로 받아드릴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영혼의 구원과 영생을 가르치려 한다면 세상은 당신을 공격할 것이다.

 

최근 국가와 사회제도는 모두 그리스도의 복음을 밀어내려 하고 있다. 동성애 차별금지법을 통과하려 하고 있고 동성애자의 인권을 내세워 동성간의 합법적인 결혼생활과 입양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또한 학교에서는 성교육을 빌미로 콘돔 사용법을 가르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남녀의 성관계는 오직 결혼한 부부에게만 허락된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상으로부터의 공격을 우리는 무엇으로 이길 수 있을까? 이는 곧 제자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별하는 길 뿐이다.

 

III. 세번째 기도(15-19)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옵소서(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15)

 

A. 기도의 목적

이제 우리는 삼차원적인 말씀을 접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 살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다. 주님의 세번째 청원은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 위함이니이다(13) 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이 죄많은 세상에서 빨리 나를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우리 말에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이런 기도를 한다면 그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님은 계속하여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16) 하셨다. 오늘 나는 이 말씀을 들으며 내가 믿음을 가진 지 오랜 세월 동안 세상에 속해 있었던 시절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라 하여 카날 크리스천이라 부른다. 우리말로 무늬만 크리스천이란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는데도 이처럼 세상에 속한 사람 곧 카날 크리스천으로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앞에서 언급하신 말씀처럼 아버지의 이름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인 성경으로 구별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고 또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참조, 15:7).

 

우리가 이처럼 세상의 악으로부터 구별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의 악은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몹시 달콤하고 마음을 흥분시키며 견딜 수 없도록 화려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그것들은 사람의 본성에게 호소하며 유기물로 이루어진 우리의 육체는 곧 중독되어 스릴과 전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파괴적이어서 만약 당신이 마약에서 갖는 전율을 즐기고자 한다면 마약은 당신의 영혼을 사로잡고 당신의 인생을 멸망시킬 것이다.

 

복음서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은 지극히 거룩한 자입니다 소리쳤다. 이것은 오늘날 귀신이 들끓는 세상의 부르짖음이기도 하다. 세상은 우리에게 소리치며 거룩하다고 하는 당신들은 우리와 관계 없으니 우리들의 일에 상관마시오 라고 외친다.

 

이것은 우리의 거룩한 가치관에 대한 도발로서 우리가 성경의 가치관을 말하려 하면 그들은 시민단체를 동원하여 인권유린이라고 우리를 고발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사실 그들은 영화와 T.V, 인터넷 매개체를 통해 그들이 즐기는 삶의 가치관을 우리에게 어떻게 강요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성별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관이 하나님 아버지의 인격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커다란 위안이며 아름다운 일인가? 이 축복을 위해 우리의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악으로 둘러 쌓여 있는 당신을 지켜주시도록 기도하신 것이다.

 

B. 제자들을 보전하는 길

그러면 제자들을 세상의 악으로부터 온전하게 보전하는 길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아버지께 기도하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청원하셨다. 이는 진리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이다.

 

나는 요한복음 17장을 가장 좋아한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과 진리에 대한 정의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주 예수를 믿어 구원을 이룬 우리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말씀으로서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온전히 성별되어 영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나는 이 말씀을 터득하기까지 너무 오랜 세월을 낭비했다. 과거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시절을 차제로 치고라도 주 예수를 믿어 영혼의 기쁨을 누리며 주를 찬양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그 오랜 세월동안 나는 정말 몸서리칠 정도로 악한 생활을 거리낌 없이 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먼저는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상금인 영생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고 두번째는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거짓교사들에게 이끌려 주께 육체의 것을 드리고 육체의 일을 찬양하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는 이처럼 허망한 일들이 우리 성도들 안에 자행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계속하여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8,19) 기도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이 거룩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듯이 주님도 그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은 자신을 스스로 거룩하게 하신다 하셨다. 이는 주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셨음을 뜻한다. 따라서 제자들도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IV. 네번째 기도(20-26)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4)

 

A. 영광을 향한 유일한 길(21-23) 교회의 일치

예수님의 네번째 기도 곧 마지막 청원은 사도들로 인하여 구원받을 성도들 곧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중보이다. 우리는 이 기도 속에 포함된 자들이기도 하다. 20절에서 주님은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만을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소서(20,21) 간구하셨다.

 

우리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정말 특별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베드로는 이 축복을 말하여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1:4)라고 증거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어떤 행위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며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주신 은혜도 아니다.

 

여기서 신의 성품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일치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한 몸으로 연합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부부가 한 몸이 되는 것과 같다. 성경은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24) 기록하였으며 후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를 맞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가 된다는 의미는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임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신명기 6 4절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시니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오직 하나에 속하는 히브리어 에하드는 단일 집합명사로서의 유일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라는 공동체적 개념 속에서 살고 있다.

 

B. 온전한 교제(FELLOWSHIP)(24-25)  완전무결을 상태

계속하여 주님은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2) 하셨다. 주께서 말씀하신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아들에게 주셨고 또 주님은 제자들을 자기의 영광에 참예케 하셨다. 바울은 이를 말하여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8:17,18) 증거하였다.

 

그러나 이 영광은 아무나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23) 하셨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완전무결한 상태 곧 영과 혼과 육에 전혀 흠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와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누가 주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하려면 그는 주께서 말씀하신 기준 온전함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이는 아름다운 그리스도 형상의 재현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를 뜻한다. 그러한 사람이 곧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4) 간구하셨다. 이 얼마나 영광스런 말씀인가? 여기서 주님은 자기의 제자들을 자기와 동등한 영광 가운데서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형제들이라 말씀하셨고 또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C. 사랑의 커뮤니티(26)

 이제 주님은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5,26) 기도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바 아버지의 이름에 대하여 깊은 사고를 갖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여호와의 증인이 말하는 야훼가 아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의 권위이며 하나님의 권능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그의 말씀 안에 있고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면 아들을 사랑하신 사랑이 우리 안에 역사하실 것이며 그리스도의 인격이 우리 안에 나타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주님은 여기서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라고 하셨다. 여기서 사용하신 알다라는 헬라어는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 이름을 아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통한 부단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또한 이 지식은 진행형으로 점진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누가 나는 신학교를 나오고 목사가 되었으니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여기서 주님은 진리의 말씀 안에서 끊임 없는 정진과 투쟁을 요구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예수님! 오늘 아버지께 간구하신 주의 기도를 대하는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어 그 사랑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주여 부디 내 안에 계시어 나로 온전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