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5장) 성경과 믿음과 영생

이요나 2008. 4. 27. 09:07

(요한복음5) 성경과 믿음과 영생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과 4장에서 영생을 이루기 위해 서로 다른 생활권에 있는 사람들의 접근적 패러다임의 필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동일한 적용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니고데모와 같이 하나님을 믿되 영적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영적 접근을 하고는 있으나 영생에 이르는 지식을 갖지 못한 부류도 있으며 또 어떤 부류들은 삶 속에서 문제를 만나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절대로 그리스도에게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요한복음 5장은 영생에 이르기 위한 영적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세부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2008년도 들어 요한복음을 다시 강해하면서 요한복음이 영생에 관한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커다란 수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그 깊이와 넓이가 높이가 심층 깊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I.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1-15)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4)

 

A. 사건의 배경(1-5) 베데스다의 발견

요한은 5장 서두에서 유대인의 명절에 있었던 한 사건을 먼저 소개하고 있다. 그 후라는 어두로 보아 이 명절은 유월절 다음에 이어진 오순절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5장은 구조상 6장 뒤로 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다. 어쩌면 그들의 말도 일리는 있는 것 같지만 저자가 이러한 점을 모두 감안하여 기록하였을 것이라 생각할 때 5장은 4장과 6장의 삽입구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 양의 문이라 하는 곳에 있는 베데스다 자비의 집이라 하는 곳에서 있었던 일이다. 양문은 느헤미야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건축한 곳으로(3:1) 제물로 쓰일 짐승들을 성별하여 두는 곳이다.

 

3절과 4절에는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줄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 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라) 기록되었다. 흥미롭게도 어떤 사본에는 3절의 뒷부분의 (주석) 구절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7절에 물이 동할 때라는 말씀과 관련하여 볼 때 주석된 것과 같은 전설은 전해 내려 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층에 있는 지하수층의 물이 수압에 의해 땅 속에서 솟아난 것일지도 모른다. 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때의 사람들이 이런 특별한 자연현상을 보면 신적능력으로 생각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B. 예수 그리스도의 연민(6,7) 연약한 사람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수많은 병자들 중에서 특별히 38년된 병자를 주목하셨다. 6절에는 예수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셨다고 기록되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일부러 외면하고 지나칠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다. 이는 그가 어떤 상황에 있었던지 간에 그의 인격을 존중하여 임으로 행하지 않으시고 그의 의견을 물으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 된 인간을 다루시는 원리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병자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7) 답하였다. 병자와 같이 연약한 사람에게 도와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주변에는 연약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누가 도와 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아무도 돌아 보지 않기 때문에 하늘만 보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제자들의 믿음이 육신의 연약함을 이길 수 없음을 비통히 여기셨다(26:41). 이는 로마서 7장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너희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14:1)고 권면하였다.

 

예수께서 이처럼 병자들을 불쌍히 여긴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대제사장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남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5:1-2) 증거하였으며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8:17) 증거하였다.

 

C.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8)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다. 이 말씀은 매우 단순하고 강력한 명령이다. 38년 동안 자리에 누워 있던 병자에게 이 보다 더 절실하고 명확한 명령은 없다. 이처럼 이제 우리도 너절한 자리를 걷어 들고 일어서 걸어 갈 때다. 언제까지나 다른 사람을 제치고 기적을 체험할 것인가 하는 너절구레한 생각일랑은 벗어 버리고 구원자의 말씀을 따라 자리를 들고 걸아가야 한다.

 

주의 말씀을 들은 병자는 더 이상 망설일 틈도 없이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38년 자신을 붙들고 있던 병이 곧(즉시) 나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상상해 보라. 예수님의 말씀에 38년 간 누어있던 병자의 병이 나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자기가 누워있던 자리를 걷어 들고 걸어 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병자가 자기의 자리를 들고 걸어 나가자 유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율법적 시비를 걸어 왔다. 이에 그는 나를 낫게 한 이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였다 말하였다. 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단순한가? 그는 예수께서 네 병이 나았다 말씀하실 때 병이 나았음을 즉각적으로 느꼈고 따라서 그가 할 일은 주께서 하신 말씀처럼 자기의 자리를 들고 걸어 가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의 명령을 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병자의 병 나음을 축복하고 위로해 줄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지켜야 할 율법적 규례를 어기는 것에 대하여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구약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에서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17:21-22)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는 택함을 받은 성도로서 오직 여호와를 공경케 하기 위한 것이지 사람의 자유를 묶어 두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3:4) 하셨으며 또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2:11,12)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안식일에도 이처럼 율법과 관계없이 사람의 생명을 구하셨던 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셨기 때문이다.

 

G. 예수 그리스도의 도전(14-15)

그러나 흥미롭게도 요한은 여기서 예수님과 유대인의 대립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예수님은 그곳에 사람이 많은고로 그곳을 피하셨고 그들의 고소에 대한 답변은 병이 나은 사람의 몫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에게 있어 더 이상 율법적 대응은 무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를 낫게 한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후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를 만나 이르시대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4) 하셨다. 다시 죄를 범치 말라 하신 것은 간음 현장에서 끌려 온 창녀에게도 하신 말씀이다(8:11). 이 말씀은 네가 병이 나았지만 아직 죄에 묶여있다고 경고하신 말씀이다. 어떻게 보면 이 말씀은 병의 근원이 죄로부터 기인된다는 말과도 같이 들리지만 여기서 주님은 네가 아직 구세주를 모르니 죄의 문제가 정리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저주의 질병에서 놓임을 받는 것보다 먼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할 것을 전재하고 있다. 

 

마가복음 2장에는 중풍병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그를 들 것에 메어 가버나움에 계신 예수께 데리고 나아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은고로 집안으로 들어 설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고 병자를 침상채 주 앞에 내렸다. 저희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5) 하셨다. 그리고 예수의 이러한 말씀을 참담하게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람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2:9) 말씀하셨다. 따라서 주께서 하신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살펴 본 38년된 병자의 일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II. 영생과 심판과 부활의 주 (16-29) - 하나님과 동등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

 

A. 유대인의 시기와 증오(16-18)

병에서 나음을 받은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고치신 이는 예수라 하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한다 하여 예수를 핍박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 말씀하셨다. 이에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만 범하는 것뿐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친아버지라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을 삼으심을 인하여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14:7) 하셨음으로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았다는 그들의 생각은 그들이 아직 성부, 성자, 셩령의 삼위체하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B.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19-23)

이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19) 하셨다. 아버지께서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아들에게 보이셨다는 말은 이해하기 매우 생소한 말씀이다. 육신의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고 계심을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육체적 물질에 제한을 받고 있다. 마음은 수 만리 밖의 일을 생각할 수 있고 장래 일을 꿈꾸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할 수 있지만 육체는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아들에게 모두 보이셨다 하신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도 생각해 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차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우리의 소망하는 바를 하나님께 모두 고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장래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친히 들어 알고 있다. 우리도 이러하거늘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보이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하셨다. 여기서 더 큰 일이란 장차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리라(21) 말씀하셨다.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는 말씀은 매우 경이롭다. 이는 자기와 관계성을 언급하신 것이다.

 

우리는 구약에서 엘리사가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린 것을 보았다. 수넴여인은 이방여인으로서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엘리사의 선교여행에 선을 베풀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자식이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들을 주었고 또 그 아들이 갑자기 죽자 애통하는 수넴여인을 위하여 아들을 살려 일으켰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후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으며(7:22), 죽은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셨고, 또 사랑하는 자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셨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사람들이였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22,23) 하셨다. 심판이란 최종적인 재판 판결 용어로서 이는 동작이 완결된 상태를 뜻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하게 공경을 받아야 할 것은 전재하고 있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창조자 되신 아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요한은 후일 그의 서신에서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요일2:13,a) 기록하였다. 이로서 오늘날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여야 함은 그가 우리의 생명의 주이시며 또 영생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를 공경치 않으면 마땅히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C. 영생과 심판과 그리스도(24)

이제 예수님은 자신에게 위임된 부활을 통한 심판의 권세를 세부적으로 설명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영적 삶과 죽음을 대비하신 것이다. 이 말은 결코 육신의 죽음이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권세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붙어 있다. 주님은 내 말을 듣고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10:17) 하였다. 두번째 조건은 나를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뜻한다. 바울은 후일 구원을 요청하는 로마 간수에게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16:31) 말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이처럼 영생에 이르는 길은 아직 간단한 원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주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 간단한 믿음의 원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영생의 약속이 주어진 것이다. 이로서 주께서 말씀하신 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하심이 우리에게 성취 되었고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1) 기록하신 것이다.

 

D. 부활과 심판의 성격(25-29)

계속하여 주님은 더 세부적인 설명을 하여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 나리라(25) 하셨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4:23)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 때란 장차 일어날 부활의 때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타나는 영적부활을 말씀하신 것이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리라는 말씀 또한 거듭남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하여야 한다. 이는 종교적, 도덕적 죄에 빠져 있는 자들의 영적 죽음에서 살아나 영적 삶에 이르게 된다는 믿는 자들의 영생의 속성을 언급하신 것으로 다시 말하여 주님은 여기서 먼저 정신적인 중생의 필요성을 강조하신 것이다.

 

바울은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렸도다 (2:1) 하였고 다시 그러므로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5:14)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영생은 우리의 영적 각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니고데모의 거듭남을 말씀하신 것이며 사마리아 여인의 영적 예배로의 각성의 필요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26,27) 하셨다. 예수님은 여기서 생명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생명이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창조자되신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아직도 진화론자들은 생명이 창조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부인하며 작은 미생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러하여 그들은 인간도 원숭이가 진화된 것이라 말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지혜자들이다. 그 많은 시간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지식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이들이 그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었다(1:21,22)고 증거하였다.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의 권세를 주셨다라는 말씀은 매우 매력있는 말씀이다.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심판에 왔듯이 오직 한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로 말미암아 다시 부활의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이다. 흥미롭게도 다니엘서에는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모든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7:13-14) 기록되였다. 이와 같이 다니엘의 믿음은 수백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28절에서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8,29) 말씀하셨다. 여기서 부활이란 앞에서 말씀하신 영생의 원리와는 달리 실제적인 죽음에서의 다시 살아남을 언급하신 것이다.

 

여기서 무덤이란 실제적인 묘지를 의미하므로 앞에서 언급된 사람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얻어지는 영적 부활뿐이 아니라 이미 죽어 무덤에 있는 자들까지 마지막 날에 살리실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후일 나사로의 부활과 관련하여 다시 이 부분을 설명하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11:25, 26)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의 두 과정을 보게 되는데 먼저는 생명의 선한 일을 행한 자들의 생명의 부활이며 또 하나는 악한 일(PHAULOS-가치없다) 을 행한 자들의 심판의 부활이다. 또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여기서 말씀하신 선한 일이란 일반적인 사회성의 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속하였느냐를 보는 것이다. 성경이 이미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시다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죽은자의 부활과 관계하여 다니엘은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12:2) 라고 증거하였으며 바울도 말하여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증거하였다.

 

또한 이 결과에 대하여 계시록 기자는 천년왕국 후에 있을 백보좌 심판을 말하여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베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20:4-5) 기록하였다. 이 모든 것을 주께서 미리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생명의 주권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알 수 있다.우리가 살아 있던 죽어 있던 인간의 죽음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에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내 말을 믿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으리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 하셨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이며 최상의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서 더 나아가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8) 말씀하셨다. 이는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III. 구원의 증거와 그 문제점 (30-47)  사람의 영광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38)

 

A. 판단과 증거의 원리(30-38)

계속하여 예수님은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30)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의 원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창조의 주체이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하실 수 있으나 스스로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하신다 하셨다. 요한복음 16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께서도 자의로 말하지 않고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이를 것이라 하셨고 내 것은 곧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라 하셨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을 갖고 말하지 않고 많은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바리새인들도 선생 된 랍비들의 이름으로 말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들이 그처럼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과 말을 이용하는 것은 자기의 지식을 사람의 영광으로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31,32) 하셨다.

 

B.     증거의 주체(30-38)

우리가 어떤 증거를 위해서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하나님도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진리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이 또한 변하지 않는 복음 증거의 원리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33) 하셨다.

이는 요한을 예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설명하신 것으로 요한은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증거를 받았고 또 요한은 자신에 대하여 나는 선지자가 말한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 증거하였고 선지자로 미리하신 말씀을 따라 진리의 빛 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증거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말씀으로 역사하셨던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4) 하셨다. 이 말씀은 구약의 증거는 세례 요한의 까지로 하나님의 아들 빛되신 주 예수께서 친히 보내심을 받았으니 더 이상 사람의 증거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요한을 말하여 요한은 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35)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요한의 빛과 그리스도의 빛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켜서 둔 등불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를 통해서 자기가 빛 되심을 증거하실 필요가 없이 그 자신의 하시는 일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을 이루므로 그를 증거하는 이는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36)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의 복음을 맡은 제자들에게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5,16)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세례 요한을 보내셨듯이 이제 주님은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께서 이루신 일들을 증거할 등불을 손수 켜신 것이다. 

 

37절에서 예수님은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37a)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떤 매개체를 통하지 않고 예수께서 사랑하는 아들되심을 친히 말씀하신 것을 뜻한다. 요한은 이를 증거하여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1:11)기록하였고 또 변화산상에 주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실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형제가 예수님과 함께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9:7)는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었다.

 

C. 믿지 못하는 이유(37-38)

계속하여 예수님은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37a) 말씀하셨다. 이는 어느 시대에도 사람이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그의 형상을 보지 못하였음을 증거하신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은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거룩하신 영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를 증거하여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하셨고 또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온 자만이 아버지를 보았느니라(6:46) 하였으며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4:12)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누가 하나님을 보았다던가 친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던가 하는 말은 거짓일 수 밖에 없다.

 

또한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38) 말씀하셨다. 우리 성경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연결어미가 생략되었다. 이는 더욱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형상을 보지도 못하였는데 더욱이 그 보내신 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께서 전달하시는 메시지 를 듣지 못하였다는 뜻을 강조한 것이다.

 

구약은 모두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의 메시지이며 신약은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듣고 보신 예수님의 증거와 그의 보내신 자들이 성령으로 말씀을 받아 기록한 것이다. 성경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하였고 사도 베도로 또한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1) 증거하였다.

 

따라서 이 땅의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형상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의 보내신 자들의 말을 듣는 길 뿐이다. 이에 세례 요한은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1:23) 증거하였으며 예수께서도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7:29,30) 증거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은 미리 보내신 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일 주님은 주의 부활을 보고 전한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은 제자들의 믿음이 없음과 마음의 완악함을 책망하셨다(16:14)

 

D. 성경의 말씀의 역할(39-47)

계속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39,40)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며 성경을 세밀하고 살펴보고 연구하며 묵상하는 너희는 과연 무엇을 알기 위함이며 무엇을 얻기 위함이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믿음의 최고의 목적이 무엇이냐 묻는 말과도 같다.

 

여기서 주님은 영생에 대하여 다시 거론하셨다. 이 영생에 관한 말씀은 요한복음의 대주제이고 우리 믿음의 최상의 목표이고 소망이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영생이 없다면 그것은 세상 말로 허탕이다. 인내의 연단을 겪으며 거룩한 성도의 삶을 몰두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성도들의 초점을 교회성장에 모으고 교회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메시지는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에 대한 객관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한 때 나는 갈보리채플 목사가 되어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하는 일에 열성을 가진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내가 전하는 성경의 메시지에 많은 의심을 품으며 갈보리채플이 이단이 아니냐 묻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왜 문자대로 해석하려 하느냐 묻기도 하였다.

사실 목회자란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 성경을 논하자면 벽창호를 만난 것처럼 울화통이 터지고만다. 이들은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들으려 하지 않고 신학을 따지고 한편으로는 기적으로 쏟아지는 축복을 기원한다. 초신자들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 기뻐 날뛰는데 그들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또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그 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가 태초에 계신 말씀 곧 로고스이시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기록하여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는 하나나님의 말씀이심을 부각하였다. 

 

또한 베드로는 후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입으셨다 증거하며 이어서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1:19) 증거하였다. 이는 우리에게 성경 말씀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오묘하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깨달음에 있어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41절에서 (더욱이)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칭찬과 찬양과 영예를 받고자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 사람들과 같이 야망에 있지 않고 오직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오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영광을 취하는 모든 거짓 선지자들에게 큰 올무가 되는 말씀이기도하다.

 

계속하여 주님은 그가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말씀하여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42)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유대인들의 속을 들여다 보고 계신 것이다. 그들은 보내신 자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서로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주님은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니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43) 하셨다. 이는 후일 사람들을 미혹할 적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경고를 하신  것이다. 후일 주님은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13:6) 하셨고 바울도 이를 증거하여 그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살후2:8-12) 증거하였다. 우리는 이 실체를 계시록에서 보게 된다.

 

이처럼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을 영접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 서로가 영광을 취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 말씀하셨다.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신들의 야망을 성취하고 스스로의 영광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향해 주님은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45) 하셨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큰 쇼크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이 믿는 바 하나님의 위대한 종 모세가 그들의 허물을 하나님께 고소할 것이라니 말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려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46,47)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그들의 모순점을 지적하고 계신 것으로 그들은 선지자 모세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들의 믿음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있지 않다는 말씀이다.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말하는 수많은 무리들이 과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주를 만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이 아직 패역하고 음란하며 재물에 탐욕을 부리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영생에 이르는 지혜를 가졌다면 장차 주의 날에 함께 얻을 영광을 바라 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