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4장) 예배의 Paradigm shift

이요나 2008. 4. 7. 15:13

(요한복음4) Paradigm shift 예배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우리는 앞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 보았다. 이는 한계 속의 인간의 의식과 영적 패러다임을 요구하신 것으로 하나님 나라 입성 코스이기도 하다. 인간의 실패는 대부분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하나는 생각이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데 있으며 또 하나는 그 생각이 범위를 지나쳐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여 먼저는 깨닫지 못한 심령에 있으며 두번째는 자기 교만에 빠진 것이다.

 

사람이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 시키려면 먼저 자신의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 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드려야 할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정신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먼저 거듭남의 필요성을 요구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물론 여기서 거듭남이란 하늘로부터 오는 의식으로 먼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택하심이 필요하다.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아니하면 내게 올자가 없다 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택하심과 부르심은 하나님의 예정에 속한 것이지만 이는 상대적이라서 인간은 그의 부르심에 응답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의식전환이 필요한데 사람들은 자기가 터득한 지식과 살아 온 종교와 문화적 배경에 그 의식이 사로잡혀 새로운 세계로의 의식전환은 훼방을 받게 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종들을 보내어 세례를 베풀게 하셨는데 이것은 물리적 현상을 통하여 각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침을 받게 하신 것이다. 이로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주님은 3장에서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으로 불매 내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3:8) 말씀하셨다. 이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육체의 한계를 초월한 사역적 속성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요한복음 4장은 바람과 같이 역사하는 복음의 실체가 사람들 속에 어떻게 전달되며 어떻게 활동하며 또 어떻게 그 열매를 거두게 되는가를 공부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4장에서 이방인 속의 가장 낮은 한 여인으로부터 최고 상류층의 고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복음이 영접 되었는가를 공부하게 된다.  

 

I. 믿음과 종교의 재발견(1-12)  종교의 실효성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

 

A. 상황적 배경(1-2)

4장 서두에는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로 가야했던 배경이 기록되었다. 그동안 이스라엘에 커다란 이슈로 등장했던 세례요한의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차츰 힘을 잃고 또 다른 새로운 세례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어 바리새인들은 바짝 기장을 더하고 있었다.  그들이 긴장을 더한 이유는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뒤에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지만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를 베풀며 세상 가운데 거세게 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요한은 2절에서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이는 3 22, 26절과도 관련된 삽입구로서 세례 요한의 사역이 쇠퇴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전환점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관한 말씀은 후일 부활 후 제자들에게 하신 지상명령(28:19)을 하실 때 언급된 세례가 등장되기까지 다시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는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세례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자 바리새인들이 이를 정치적으로 대응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기 때문에 세례를 중단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이미 요한의 세례와 또 제자들의 세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역에 그리스도께서 복음사역을 하시기에 충분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잠시 유대를 떠나 갈릴리 고향으로 내려가실 계획을 세우고 길을 떠나실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선택하셨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은 더 가까운 길도 있었고 사마리아인들에게 대한 오랜 세월 종교적 감정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의 상종을 끊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같은 선택은 특별한 예정이 있었던 것이다.

 

B. 환경적 배경(3-6)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열지파가 세운 옛 북왕국의 수도로서 B.C. 722년 앗시리아에게 패망을 당한 후 앗수르의 동방정책에 의해 자국 국민들과 군대들을 이주시켰다. 이미 북왕국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통치자들의 잘못된 종교정책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가르침에서 떨어져 나가 육신의 소욕을 따라 이방인들과 결혼을 하여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의 혈통에서 벗어나 있었다. 성경은 북왕국 사람들의 이와 같은 행위에 대하여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던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왕하17:33)고 기록하였다.

 

그후 남유다왕국도 중동일대를 평정한 바벨론에 패망을 당하여 유대인은 70년간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였으나 그들은 율법을 따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유대인의 혈통을 지켜왔다. 때가 되어 포로귀환명령이 떨어지자 유대인들을 고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는데 유대인은 불의한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전건축에 참여 시키지 않았다. 이에 서로 감정이 악화된 사마리아인들의 훼방으로 성전 건축은 느혜미야가 오기까지 중단 되기도 하였다.

 

후일 느혜미야가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4:2,3) 하고 비웃었다.

 

이에 사마리아 사람들도 그리심 산을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곳으로 삼고 그곳에 성전을 세워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임을 주장하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후일 앗수르 왕국의 쇠퇴하고 유대의 마카비 왕조가 일어나 주전129년 유대장군 요한 히르카누스가 그리심산 성전을 파괴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예수님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450년간 지속되었다.

 

후일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1:8) 말씀하셨다. 이는 바람과 같이 역사하시는 성령이라도 그 능력은 성령의 인치신 사람들을 통하여 운동하시는 지라 그리스도의 복음은 시간과 공간을 따라 이동될 것임을 미리 언급하신 것이다.

 

II. 복음의 도전과 접근(7-19)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

A. 사마리아 여인과의 인터뷰

예수께서 제자들과 도착하신 곳은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로서 그곳은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또 그곳에 야곱의 우물이 있어 행로에 지치신 예수께서 그 우물 곁에 앉아 쉬셨다. 흥미롭게도 수가란 마을은 예로부터 술 주정뱅이의 도시 거짓말하는 자의 성(28:1)라는 좋지 않은 평판를 갖고 있었다. 또한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이라는 말은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서 금 일백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24:32) 증거로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그 곳에 도착한 시간은 제육시라 기록되었으므로 오후6시쯤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조한 중동지역임을 감안할 때 삼십대의 예수님이시라도 그 행로에 지치셨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동일한 물리적인 육체를 갖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때에 사마리안 여인 하나가 물을 길러 나온 것이다. 통상적으로  중동지역에서는 아침에 물을 길러 나오는 것이라 할 때 한 해질 무렵에 물을 길러 나왔다는 것은 무슨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들어 갔고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 하셨다. 이에 당황한 이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합니까?하고 물었다. 이는 아직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적대적 감정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접근 물과 생수

그녀의 말에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 하셨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녀와 상반된 견해가 아닐 수 없다. 정작 물이 필요한 사람은 예수님이신데 반대로 내가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를 네게 줄 수 있다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나는 네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였지만 너는 내게 생수를 구하여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하신 생수에 대한 개념을 알아 듣지 못하였다. 이는 앞에서 니고데모가 예수께서 성령으로의 거듭남을 말씀하셨을 때에 그 뜻을 깨닫지 못하였듯이 이 여인도 생수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자신이 터득한 지식만큼을 알 수 밖에 없는 모든 인간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오늘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생수에 대한 도전은 후일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선포된다.

 

요한은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증거하며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7:37,38)는 주석을 달았다. 이로서 우리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이후에 그를 믿는 자들에게 부어 주실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말씀을 미리 하신 것일까? 그것은 다가 올 추수의 때를 준비하기 위한 복음의 준비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마리아 여인은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습니까? 라고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아직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는 3장에서 언급된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으로의 거듭남을 깨닫지 못한 것과 같은 상황이다. 이로서 우리는 육체된 인간은 그 생각과 사고에 있어 자신이 터득한 지식의 한계를 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증거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이 예수를 향하여 라고 호칭을 바꾼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녀는 조금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적대적 관계를 갖고 있는 유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의 선물을 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 여인의 태도는 돌변한다. 아직 예수의 말씀을 깨닫지는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선물을 내가 네게 줄 수 있다는 말에 그녀는 그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는 존재임을 의식한다.

 

   C. 종교와 복음의 역학관계

그러나 이 여인은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물었다. 여기서 그녀가 우리 조상 야곱이라는 표현은 유대인의 종교적 우월감에 대한 도전이다. 이 말은 당신들은 혈통적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우리의 조상인 것은 이 우물이 증거하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를 내게 줄 수 있다고 말하는 당신은 과연 야곱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냐고 묻는 것이다. 비록 이방 여인이지만 그녀의 종교적 사고는 상당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할 때 종교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는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종교적 의식에 익숙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이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으로 인간은 그 지으신 자의 뜻을 따라 영혼의 곤핍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다. 그로 하여 사람들은 앞날에 대해 불안해 하고 초조하여 우상을 섬기며 또 미래를 점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여인은 아직 종교적 신념과 의식에 매여 있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생수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망하는 종교적 관심이 있음을 아신 예수님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람들의 궁극적 목표인 영생에 도달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복음서에는 부자청년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켜온 성실한 유대인이였다. 그러나 그는 영생에 이르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예수께 나아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주님은 그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 그러나 그 청년은 재물이 많은고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기록되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영생은 율법으로나 그 어떤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영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인간이 상실한 영혼의 본향이다. 이는 성경이 지향하는 최고의 목표로서 예수님은 영생에 대하여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고 정의하셨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 여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생에는 접근을 하지 못하고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여 주십시요(15) 라고 청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 여인이나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나 벽창호같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모든 인간들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소망하면서도 모두 광야의 시험에서 넘어지고 만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만남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는 못하였지만 사마리아 여인의 생수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그녀는 먼저 목마르지도 않고 또한 물 길러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은 생명을 위해서는 물을 마시지 않을 수도 없고 또한 나는 물을 길러 나오는 것이 싫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에서 이 여인은 아무도 없는 시간에 홀로 물을 길러 나왔던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아직 그리스도에 대한 의식이 전환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지식의 가르침과 종교적 의도가 있다 하드라도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을 이루지 못한다면 먹고 마시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D. 영생과 복음적 삶

그녀의 말에 주님은 가서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16) 말씀하셨다. 이는 그녀가 요구하는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선행될 일이 있음을 우회적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이 말씀 속에는 사람이 영생에 이르는 지혜를 얻으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임이 시사되어 있다. 오늘날 세상은 날이 갈수록 사랑이 식어가고 무질서한 성생활로 세상이 피패해져 동성애와 성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서도 인간의 본능적 자유와 성적 문화의 표현으로 포장되어 확장되고 있다. 오늘 이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조상의 후손으로 그가 준 우물을 마시며 그녀 또한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고 있지만 그녀의 생활은 성경의 가르침을 떠나 하나님의 뜻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들보다 낫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으며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라 한 것이다.

 

남편을 데려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난처해진 사마리아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고 고백하였다. 이 여인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었지만 하나님의 선물을 언급하는 분 앞에서 감히 거짓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주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8) 하셨다.

 

이미 다섯 남편을 가졌었다는 것은 이혼 경력을 말한 것이며 지금은 다른 아내의 남편과 내연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보아 이 여인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에 처한 여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소망은 이 생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다음 생에서는 보다 나은 영생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피할 수 없는 인생에 지쳐있고 목숨을 위해 물을 먹는 것조차 그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주께서 그러한 자신의 아픔을 모두 알고 계심에 놀란 사마리아 여인은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이십니다고백하였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계셨고 또한 사람의 과거사까지 모두 알고 계신 것이다. 그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아직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다만 자기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을 줄 수 있고 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분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일 것이라는 확신이 선 것이다. 이미 성경에서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III. 신령한 예배로의 도전(20-26)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22)

  A. 예배의 대상

이제 자신이 대화하고 있는 유대인 선생이 선지자라는 것을 안 사마리아 여인은 그동안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던 종교적 의문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 여인은 당돌하기도 하고 상당히 도전적인 여인이 아닐 수 없다. 종교지도자인 니고데모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우리말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체면을 지키려 의심되고 궁금한 것이 있어도 마음으로 삭혀버리기 일수다. 그러나 지식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것으로부터 도전을 받으면 용감해진다. 비록 실수가 있을지라도 말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 물었다. 이 여인이 궁금한 것은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진실 된 것이냐는 말이다. 다시 말하여 어느 교회를 다녀야 옳은 것이냐와 같은 말이다. 나는 뒷산에 있는 조그만 개척교회에 나가고 있는데 유명한 사람들은 구원받을 만한 교회가 여의도에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에게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 하셨다. 이 말씀은 아직 너희가 이 산이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이런 물리적인 시설이 아닌 아버지께 직접 예배드릴 때가 이를 것이라는 말씀이다.

 

   B. 예배의 지혜

계속하여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22)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앞에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어떤 장소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고 여기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목적은 영혼의 구속의 주체와 그 질서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유대인에게 계시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여 너희는 혈과 육을 따라 구원자가 올 것이라 믿고 있지만 사실 메시야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올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나는 과거 예수를 영접한 후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내 믿음은 성경적 합의를 얻지 못한 정신적인 믿음이였다. 나는 주일 예배와 절기에 충실하고 십일조와 헌물을 아끼지 않고 또 사역자들을 공경하였지만 나의 열심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 아니라 종교적 지배를 따른 것이였다. 바울은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믿음을 가리켜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10:2,3) 증거하였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 하셨다. 지금 주님 진정한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을 언급하셨다. 이 말씀은 너희가 지금은 아직 너희가 생각하는 의식을 따라 예배를 드리지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진정한 마음을 따라 드리는 영적예배의 때가 올 것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하기 때문이다(24) 말씀하셨다.

 

많은 교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의 예배를 말하고 있다. 그들은 성도의 성령충만함을 외치며 자기들의 교회는 성령충만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예배는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아닌 인위적이고 물리적인 예배를 힘쓰고 있다.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 아름다운 성가대의 찬양과 고고하게 장식된 매끄러운 목사들의 설교, 날이 갈수록 교회의 예배는 카톨릭의 미사로 전향하고 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아멘을 외치는데 과연 이들의 예배는 이슬람교도들이 외치는 알라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C. 예배의 실체

그녀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도전적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는 말처럼 사람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을 뜻한다. 이는 유형의 성전과 대칭되는 말씀으로 하나님은 무형적 존재의 신이시지만 인격을 갖고 계신 분이므로 그가 받으시는 예배는 인간의 의지와 생각이 아닌 그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신실한 마음으로 드려져야 할 것이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사정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 계속하여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 증거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실 것입니다(25) 답하였다. 이 여인의 대답은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녀가 비록 비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 여인은 사마리아인으로서 메시야라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구사하고 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 앞에서 그에대한 소망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 여인이 무식하지 않은 여인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사마리아인의 종교적 배경도 알고 있으며 또 유대인의 종교적 관점도 이해하고 있으며 예배에 구심점에 대한 지대한 관심도 갖고 있었다. 또 예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가 온다고 말하셨을 때 그녀는 서슴지 않고 메시야를 거론하며 그를 번역하여 그리스도라까지 말하였다. 이는 종교적 지혜는 니고데모처럼 고상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보다 보다 감각적이고 이상적인 생활을 추구하던 사람들에게 더욱 강렬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