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29) "하나님의 어린양"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새상 죄를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우리는 앞에서 말씀이 육신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살펴 보았다. 생명되신 말씀이 그의 존재라할 때 빛은 그의 이성으로 그가 온 것은 어둠 속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26)
A.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의 공식 시무 제사장인 사가랴 가문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부분은 하나님의 영광 속에 계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대한 사람들의 증언이다. 사도 요한은 이미 6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기록하였다. 세례 요한에 대하여는 이미 우리가 공관복음서를 통해서 공부한 바다. 그는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집도할 수 있는 명문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 났다. 그의 탄생의 신비에 대한 일들은 누가복음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나아가 낙타 털옷을 걸치고 자연생식을 하며 세례를 베풀며 “너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3:7-11) 외치며 내적 회개를 하라고 외쳤다. 이에 온 예루살렘과 유대 사람들에게 마음의 동요가 있어 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에 그 당시 종교 집권자들인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긴장하기 시작했고 요한이 하는 일을 조사하기 위해 사람들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B. 그리스도, 엘리야, 그 선지자(마호멧)임을 부정(20-21)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 물었다. 이는 네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메시야라도 되는냐고 묻는 것이다. 요한은 그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답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그러면 네가 엘리야냐 물었다. 그때에도 요한은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 답하였다. 이에 그들은 네가 그 선지자냐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답할 수 있도록 바른대로 말하라고 재촉하며 너는 네게 대하여 무어라고 하느냐 물었다.
그들이 세례 요한에게 엘리야냐고 물은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구약의 미자막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는 그가 내 앞에 가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3:1) 하였고 다시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데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4:5-6)고 예언되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세례 요한의 탄생에 대한 기이한 일들을 그들도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성전에서 예배를 집도하고 있던 제사장 사가랴에게 보내심을 받은 가브리엘 천사는 세례요한의 아버지 스가랴에게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지으라 하고 그의 태어남에 대하여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1:17) 전하였다.
후일 예수님께서도 그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에 대하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구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마11:11) 말씀하셨고 다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줄을 깨달으니라” (마17:12,13) 말씀하셨다. 앞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다시 엘리야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며 그의 증거를 통하여 영적각성을 하게 될 것이다(계11:4-12).
또 그들이 말한 ‘그 선지자’란 모세가 말하여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신18:18-22) 하였기 때문이다. 이슬람교 도들은 이 선지자가 마호멧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 것이다.
C.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 광야의 음성(22-23)
그들의 질문에 세례 요한은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답하였다. 아마 그들에게 이 말은 선문답과 같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40:3)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다. 이미 600여년 전에 하나님은 이 일들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이다.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게 하라는 말씀은 매우 기이하다. 미국 갈보리채플을 일으킨 척 스미스 목사의 제자 중 스킵 하이직이란 목사가 있다. 그는 기독교 디즈니랜드라 불리우는 캘리포니아 오랜지 카운티를 벗어나 그 나름대로 자신의 소망을 피우려 생각하고 뉴멕시코주의 알부퀘크라는 광야와 같은 곳으로 들어 갔다. 그곳에서 그는 직장을 잡은 후 아파트 회의실에서 성경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 아내 외 다섯명이 모였다.
처음 그는 모임에 나온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은 각자의 교회가 있고 나는 여러분에게 신앙생활을 위한 성경공부를 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각자의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십시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그 당시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양들을 도적질한다는 말들이 떠 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비난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삼십명에서 오륙십명으로 늘어나자 그 마음 속에서 이들은 단순한 성경공부가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어느날 그는 모임에서 우리가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찬성을 하였지만 스킵은 그 결정을 위해 마음에 부담이 생각기 시작했는데 쉽게 내릴 수가 없이 잠시 휴가를 내어 그 아내와 함께 고향 레냐로 내려왔다. 뉴멕시코에 산지 6개월 되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날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너는 내게 6개월을 빚지고 있다’는 음성을 들었다. 그가 처음에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그는 우선 1년간 그들을 섬길 것이라 마음을 정했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뉴멕시코로 들어가 성도들과 의논을 한 후 마침 임대 광고에 나와있는 260석의 영화 상영관을 주일 오전1시까지 빌려 예배를 드리고 1982년 2월에 교회를 법인으로 등록하였다. 그후 그들은 스포츠 시설을 인수받아 축구장을 성전으로 개축하고 지금은 이만명이상의 큰 교회로 성장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 밖에서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곳에서 그의 일을 하시고 계신다.
나는 그동안 7여년 동안 지켜 온 한남동 채플을 새롭게 리모델링 하여야 할지 아니면 떠나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 벌써 몇 년째 이 일을 놓고 고민하고 있지만 아직 아무런 확신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내 마음에 확신하고 있는 것은 이제는 무슨 일을 하던지 내 임의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실패는 지금까지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나와 무엇을 하시고자 하신다면 내게 어떤 방법으으로도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D. 침례의 논쟁(24-28) - 그리스도인 세례도 아니며, 유태인의 세례도가 아니다.
세례 요한의 대답을 들은 그들은 그에게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25) 물었다. 이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에 대하여 묻는 것은 그 권세에 대한 질문이다. 다시 말하여 요한이 세례를 주기 시작하자 수많은 유대인들이 자복하고 그에게 나왔기 때문이다. 마가는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1:5) 증거하였다.
이에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26,27) 하였다.
다시 말하여 나는 다만 그의 종으로서 내 직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가문은 다윗의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대제사장의 명문 가문이며 그의 외침에 온 세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은 단호하게 “I am not worthy…”, “for a task meant only for a slave” 말하였다.
II. 세례 요한의 예수 그리스도 증거(29-34)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31)
A. 우리들의 죄를 지기 위한 어린양(29)
요한은 29절에서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흥미롭게 생각할 것은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고 양가는 서로 친척관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들은 요한과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충분한 교분을 갖고 있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에 주력하였고 특히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그 초점을 두었다.
여기서 ‘어린양’은 복수가 아닌 단수이다. 성경에서 어린양에 대한 첫번째의 증거는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22:8)에서 기인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미리 계시하신 것으로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다’는 말 곧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탄생되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그당시 유월절 명절에 256,000마리의 어린양이 희생 당하고 이를 위해2000여명의 제사장들이 봉사했다 전한다. 이는 매년 예루살렘에서 3.000.000명에서 5.000.000 명의 죄사함이 거행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마다 늘 드리는 제사로서는 그 백성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음으로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신 것이다(히10:1-5)
B. 세례 요한의 목적(30-32)
계속하여 세례 요한은 그를 증거하여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30) 하였다. 이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나섰다. 그러나 요한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선재하심 곧 그가 사람으로 오신 것은 내 뒤이지만 사실은 먼저 계신 분이다 증거한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그는 분명 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왔으나 이 세상의 질서에 구애 받고 있지 않으며 이 세상의 질서에 속할 수도 없음을 시사한 것이다. 바울은“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다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7)고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는 계시에 속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는 내 뒤에 오는 사람으로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 한 것이다.
계속하여 요한은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31) 하였다. 요한은 분명히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피력하였다. 그는 구원을 베풀려 온 사람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세례요한의 침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가 다른다는 점이다. 세례 요한은 우리 교회를 위해서 온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먼저 택한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의 오심을 증거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세례를 통하여 그 백성들로 하여 회개케 하여 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한 것이다.
C.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 – 성령으로 세례를 주기 위해
32절에서 세례 요한은 “내가 보매 성령이 비들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증거하였다. 복음서에서 성령이란 단어는 항상 이 장면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하심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임을 증거한다. 성령의 나타나심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나타난 구원의 표징이다.
요한은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33,34)증거하였다.
마가복음에는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3:11,12) 기록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가 전혀 다른 것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세례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세례요한의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선지자로서 그 백성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의 역사를 증거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일 뿐이다.
사도시대에도 이러한 문제가 있었다. 바울은 에베소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물었다. 이는 그들의 사역 속에서 성령의 나타나심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에게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물었다. 그들은 우리는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 하였다. 이때 바울이 말하여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한 것이 무엇이냐 회개하고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리라 하지 않았느냐 하였다. 이에 그들이 세례를 받으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다(행19:1-7). 그러므로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 증거하였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세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받지 않아도 될 것인가?많은 교회에서 세례는 의식에 불과하므로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교회의 연중행사로만 행하고 있다. 이것은 카톨릭의 영향도 있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세례를 언급하고 있으며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제자를 삼으라 하셨다. 이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하고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실 성령에 대하여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내가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부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사42:1) 하였고 또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늘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라” (사11:2) 하였으며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61:1) 증거하였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 하셨다. 이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다.
III. 메시야 발견(35-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51)
35절부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할 제자들을 부르시는 일들이 기록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아래와 같은 다섯 가지의 흥미로운 문답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을 구하느냐?”(38), “와 보라”(39),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41), “나를 좇으라”(43),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45).
A. 안드레와 요한(35-39) – 세례요한의 제자
35절의 ‘이튿날’ 이란 말은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일정은 29절과 또 43절에서도 볼 수 있으며 다시 2장 1절에서 ‘사흘되던 날’이란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이 내용들은 사도 요한이 의도적으로 세례 요한의 증거로부터 그리스도의 사역의 시작이 일곱째 날에 이르게 한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복음서를 볼 때 과연 이 일들이 7일 동안에 일어난 일이냐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도 요한은 여기서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신적작정 속에 있음을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알려주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35절의 내용은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소개 되고 있는데 한 사람은 요한이며 또 한 사람은 안드레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모두 어부이면서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으로서는 특별한 신앙관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들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지만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새로운 가르침으로의 비전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각 시대별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받을 백성들을 예비하셨음을 알 수 있다(롬11:7).
요한은 두 제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다니심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37)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성경에 계시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표징이다. 이로서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구약을 통하여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후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으니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의 증거를 받은 두 제자 요한과 안드레가 예수를 좇으니 예수께서 그들이 좇는 것을 보고 “무엇을 구하느냐”물었다. 이는 너희가 왜 나를 좇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기록에 의하면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지간인 것으로 보아 이 두 가족들은 서로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마27:56, 요19:25). 따라서 요한과 안드레가 따른 것은 스승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해 비로서 예수께서 메시야이신 것을 알 수 있다.
예수의 물으심에 두 제자는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38b)답하였다. 사도요한은 히브리어 ‘랍비’를 헬라어 ‘선생’으로 번역하여 자신의 글의 대상이 헬라인들을 향한 것을 의도한 것이라 생각된다. 주님은 그들에게 “와 보라” 하셨다. 또한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십시쯤되었더라”(39b)는 기록으로 그들은 예수님과 온종일 함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날이란 그날 온종일을 뜻하며 제십시는 로마 시간으로 오전 10시를 뜻한다. (유대인의 시간으로는 오후 4시에 해당된다).
B. 안드레의 형제 시몬(40-42) – 가버나움에 거주
안드레는 이 기쁜 소식을 형 시몬을 찾아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였다. 여기서도 요한은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고 주석을 달았다. 헬라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안드레는 형 시몬과 함께 예수께 나아왔다. 이것으로 우리는 안드레와 시몬 두 형제가 그들이 비록 어부였을지라도 메시야를 향한 비전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 주 앞에 나오자 예수께서 보시고 “내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하셨다. 원래 그의 히브리식 이름은 시몬이다. 주님은 그의 이름을 그 당시 사용하던 아람어로 ‘게바’ 곧 ‘바위’의 뜻을 가진 헬라어 ‘베드로’라고 부르셨다. 주께서 그의 이름을 ‘헬라어’ 베드로로 직접 말하지 않고 그 당시 사용하던 아람어 ‘게바’라고 한 것은 주께서 그가 요한의 아들 시몬인 것을 잘 아시듯이 그가 그 당시 하이칼라에 속하는 헬라어에는 둔한 것도 아셨던 모양이다.
마가복음 1장 29절에는 주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설교를 하신 후 곧 나와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들어가 그의 장모의 병을 고쳐 주신 기록으로 보아 그들은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으며 장모를 모시고 형제와 함께 한 곳에서 살았던 것 같다. 마태는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마4:18) 고 그들을 소개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안드레를 통하여 예수님에 대한 사전 정보를 갖고 나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정보를 갖고 있다 하드라도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유대교의 종교활동에 열정을 갖고 있는 유대인이었다면 메시야에 대한 정보는 귀전으로 흘려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을 세례 요한의 제자로 따르게 했던 것으로 보아 그는 메시야에 대한 강한 비전을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베드로의 눈으로 보는 모든 환경은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확신을 갖게 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강의는 마음을 설복하였겠지만 아직 예수님으로부터 세례 요한과 같이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베드로서는 우선 생업이 목구멍의 포도청이었을 것이다. 아마 이러한 사정은 오늘날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결국 그는 메시야를 눈으로 보고도 생업을 정리하지 못하고 다시 고기잡이로 나섰다. 그에게 고기잡이는 천직과도 같았고 고기를 잡아 끌어 올리는 순간은 마치 하늘의 기쁨이 쏟아지는 듯 했을 것이다.
어느날 주님은 호수가에서 그물을 씻는 배드로 두 형제의 배에 오르사 배를 띠우게 하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하셨다. 이에 베드로는 ‘우리들이 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 답하였다. 이는 우리가 어부로 생업을 하며 잔뼈가 굵었으나 오늘은 허탕을 쳤습니다만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물을 던져는 보겠습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들의 눈에 예수는 목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고기가 얼마나 많이 그물에 잡혔는지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그들은 놀라서 주변에 �던 동료들을 불러 그물을 올리니 두 배에 채우고도 남은 것이다. 이 광경을 목도한 후에게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이에 그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1:17) 하셨다. 이와 같이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를 따르고 섬기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갈보리채플 사역을 하면서 우리에게 소망을 가진 젊은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나 내 작은 세미한 음성 밖에 들려 줄 것이 없는 나는 그들의 눈에 너무 보잘 것없고 초라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도 나를 떠나지 않고 따르는 몇 사람들을 위해 속히 하늘의 문이 열리기를 간구하고 있다.
C. 빌립을 부르심(43-44) – ‘말을 사랑하는 자’
43절에는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기록되었다. ‘벳새다’란 말은 ‘어부의 집’이란 뜻을 갖고 있다. 결국 그들은 한 동네 친구들인 셈이다.
우리 말에 초록은 동색이란 말이 있다. 끼리끼리 모인다라는 뜻이다. 성경공부를 즐기는 사람들은 성경공부에 힘쓰고 교회성장에 목을 맨 목사들은 교회성장 세미나에 불을 킨다. 그와 같이 같은 비전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 어울리게 마련이다.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에게 부르심과, 전도생활의 상황을 깨우치는 메시지이다.
흥미롭게도 빌립이란 말은 ‘말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이다. 유대인이 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름으로 보아 그는 상당히 직설적이고 성격이 급할 것 같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던 날, 주께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마음을 떠 보실 때에 빌립이 선뜻 나서서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이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요6:7) 말하였다.
또한 주께서 세상을 떠나실 것을 말하시며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하시니 이때도 빌립이 나서서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습니다” (요14:8-9) 하였다. 이처럼 빌립은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사람이었다.
D. 나다나엘의 자각(45-51) - “하나님의 선물” “바돌로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고 그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은 빌립은 곧 바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이라”(46) 전하였다. 나다나엘은 마태복음에서는 ‘바돌로매’ 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으며(마10:3) 그는 갈릴리 가나 사람이였다(요21:2).
우리는 빌립의 말 속에서 그들이 이미 모세오경을 비롯한 역사서와 구약의 예언서를 공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빌립과 나다나엘은 그냥 구약성경을 읽은 것 뿐이 아니라 두 사람은 서로 메시야에 대한 비전을 갖고 함께 성경공부를 한 것이 분명하다.
빌립의 말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핀잔하였다. 이는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요7:52) 전언으로 보아 성경 어디에서 나사렛에서 선한 일들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또한 당시 빈곤자들이 살고 있는 나사렛 출신 중에 선한 사람이 날 수 있느냐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에 빌립은 ‘와 보라” 이는 예수께서 안드레와 요한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은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과 같이 와서 보고 들으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신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간사한 것이 없도다”(47) 하셨다. 이 말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간사함이 없어 수치될 것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간사함이란 야곱이 에서의 복을 빼앗았을 때 이삭이 에서에게 말한 바 ‘야곱의 간교함’(창27:35)와 같은 뜻이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종은 간사함이 없어야 한다’(사53:9) 하였다. 이와 같이 주께 부름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한 지식을 가져 흔들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에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주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내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48) 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또 사람들이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실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무화과나무 아래서 그는 현시대를 한탄하며 장차 이 땅에 임할 메시야의 나라를 꿈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가 선지자는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미4:4)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감람나무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을 지칭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포도나무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많은 그 가지에 열매를 맺는 것이라면 감람나무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기름부음을 받는 특별한 지혜를 받은 사람을 뜻한다(계11:4). 또한 무화과나무는 화려한 꽃을 피지 않고 열매는 맺는 나무로서 일년에 두번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나무이다. 후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잎이 무성하면 내가 문 앞에 와 있는 줄 알라 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예수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49) 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이는 그동안 그가 쌓아 온 진리를 터득한 순간이기도 하고 영혼의 소망이 성취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자각이 없으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0) 하셨다. 그렇다 그들은 살아생전에 사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눈으로 목격한 자들이다. 태초부터계신 말씀을 목격한 자이며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목격자인 것이다. 이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영광 중의 영광이다.
E. 인자와 하늘의 열린 문
예수님은 다시 그에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51) 하셨다.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아멘 아멘’이다, 이처럼 아멘을 거듭하여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특징으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다.
또한 “하늘이 열리고”라는 말은 ‘계속 열려 있는 것’을 뜻한다. 이 단어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도 사용되었으며(막3:16) 스테반의 죽을 때 바라 본 것이기도하다(행7:56).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자유로운 교통을 뜻한다(사64:1). 성경에서 이러한 표현이 제일 먼저 기록된 곳은 창세기 28장 12절의 “꿈에 본즉 사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다리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에서 출발하였다.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뜻하신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교통을 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사람이신 ‘인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내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셨다. 후일 주님은 가야바에게 “너는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선 것과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막14:62) 하셨다.
주께서 이 땅에 친히 오셔서 하늘 문을 여셨으므로 우리는 장차 주께서 말씀하신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며 또 그 문을 통하여 주께 나아갈 것이다. 주님은 빌라델피아 교회에게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3:8) 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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