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 21장)"너는 누구를 따를 것이냐?"

이요나 2001. 3. 6. 23:44
(요한복음 21장)"너는 누구를 따를 것이냐?"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르치심이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오늘 우리는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세 번째 재회의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현실 속에서 부활의 영체와의 대면에 대해 아직 그러한 체험을 하지 못한 우리는 그 사실적 묘사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할 수 없다. 다만 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능력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대로 믿을 뿐이다.

 

이 일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우리가 함께 누릴 축복이기도 하다. 우선 우리가 이해하여야 할 것은 부활의 영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옛 모습일 수도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이며 시간과 공간적 제한 없이 그의 뜻에 의하여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며 물질 세계의 질서 속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부활의 영체가 물질세계에 속하였다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요한복음 21장의 중요핵심이 네가 다른 것 보다 나를 아가페(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물씀의 요지는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으로 본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 속에는 주께서 하신 말씀 아가페가 전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어떤 다른 번역본에는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기록되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사람이었던지 아니면 어떠한 물체였던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주님의 요지는 네가 세상의 그 어느것 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페)하느냐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베드로를 포함하여 부름받은 목회자 아니 우리 교회에게 물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물음에 계속 "필레오"(사랑)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사랑이라는 말의 표현이 많지 않습니다만 헬라어에는 그 사랑의 목적과 성질에 따라서 다른 표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남녀간의 사랑을 우리는 "애로스"라고 합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사랑을 포함한 것입니다. 또 "펠레오"라는 헬라어는 친구 또는 부모 자식간에 갖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반복해서 사랑(아가페) 하느냐고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왜 "펠레오"라고만 대답하였을까 우리를 궁굼하게 합니다. 그러나 지금 주께서 내게 나타나셔서 똑 같은 질문을 하신다면 나 또한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려됩니다.



   너 날 사랑하니?
    베드로가 베에서 내려 주님 앞으로 나왔을 때 그 앞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생선과 떡을 굽고 있었고 베드로가 잡은 고기를 불에 더 얹었습니다. 숯불 앞에 주님과 마주 앉은 베드로는 숯불을 보면서 만감에 서렸을 것입니다. 주께서 잡혀가셨을 때 그는 대제사장의 후원에서 하인들과 숯불을 쪼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었기 때문입니다.

 

달라진 상황이지만 참으로 염치없고 면목없는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사실 그 때까지 자신은 다른 제자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제게 직접 나타나셔서 묻기 전까지 나는 다른 사람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 앞에 나타나서 물으신 주님의 사랑은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갖지도 못하였습니다. 살아생전에 주께서 사랑하라는 말을 여러 번 하셨지만 그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은 사랑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물으신 것은 희생적이고 근본적인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인간에게 네가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매번 그에 대한 대답을 "필레오"로 답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그래도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너 무엇을 하고 싶니?
    먼저 우리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하여야할 일들입니다. 주께서는 "어린양을 먹이라"하였습니다. 양은 자생 능력이 없음을 15장에서 배웠습니다. 양은 목자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동물입니다. 주께서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양들이 주님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자기 양들을 제자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양은 어린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두 번째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치는 것은 양을 기르는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말합니다. 길을 잘못 가려고 하는 양들은 지팡이로 다스릴 것입니다. 서로 싸우고 물고 뜯는 양들이 있다면 목자는 지팡이로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양의 단계가 아닙니다. 어쩌면 사춘기를 벗어난 아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 먹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애들은 자기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달려가고 싶어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는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목자의 인도가 필요할 때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세 번째 다시 "내 양을 먹이라"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장된 양에게도 계속 그 생명을 위하여 먹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젊어서는 성경공부에 열심을 내다가도 직분자나 교회의 어른이 되면 다스리려고나 하지 성경공부를 등한시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양들을 먹이는 일입니다. 푸른 초장을 양들을 이끌어가서 좋은 꼴을 먹이는 일이지요,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양을 먹이는 일보다는 양을 때리고 양의 털을 깎아내고 피를 짜내는 일에 힘을 쓰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주께서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깨우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 양들에게 말씀을 그대로 가르치기보다는 자신들의 교리나 주장을 가르치기에 급급합니다.


   쿼바디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더 구체적인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으로 베드로가 어떻게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그 유명한 쿼바디스입니다. 베드로는 여론과 두려움에 이끌려 자신 앞에 놓인 사역에서 떠나려 하자 주께서 베드로 앞을 지나서 베드로가 떠나 온 곳을 향하여 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어디를 가시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께서는 네가 피한 그 일을 하기 위하여 간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때 다시 한번 깨어져서 그 길로 돌아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요한 사도는 앞으로 있을 이 사건을 추정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주께서는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우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나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 띠를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이끌어 가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깊이 상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전체의 문맥을 살피며 이 말씀의 진의(眞意)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전하신 대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갈릴리로 왔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하여 7명이었습니다. 나머지 4명은 어디에 있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일찍이 "시몬아 사단이 밀 까부르듯이 너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켜 네 형제들을 굳건히 하라" 하신 바 있었습니다.


   군중심리와 사역자!
    이미 베드로는 가야바 뜰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고 주께서 이르신 대로 닭 우는 수리에 깨어져 통곡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부활하신 후 첫 번째 받은 명령은 갈리리 바다에서 나를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일곱 제자들과 함께 주를 기다리다가 고기를 잡으러 나가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을 규합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막달라에게 천사를 통해 전하신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는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막16:7) 이것은 살아 생전 고난받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기전 제자들에게 친히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막14:28)

 

예수께서는 사실 먼저 가 계셨던 것입니다. 다만 제자들이 만나지 못했던 것이지요. 주께서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일깨어 갈릴리에 와서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여 줄 것을 바라셨단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이나 본 후인데도 제자들과 마음을 합하여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지 않고 오히려 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제자들은 수장격인 베드로를 따라 나갔습니다. 이것은 이 땅의 있는 사역자들의 연약한 속성을 단면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양이 목자의 인도하듯이 목자인 사역자들도 양무리 속에 있는 같은 양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절대로 인간을 인도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보다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무엇을 하게 되면 모두 그것을 따라가게 됩니다.

 

제가 순복음에 있을 때 순복음교회 사역자들은 모두 조용기 목사의 설교법을 따랐습니다. 목소리 제스츄어까지 배우기를 힘쓰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를 보면 아들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사람이라도 우리는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인데..뭘!
    이러한 장면이 또 여실하게 나타납니다. 주께서 나를 따르라 하시면 앞으로 가시자 뒤돌아보니 주께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은 우스운 존재입니다. 자기 일이나 잘하지 뭐 그리 남의 일에 신경을 쓰기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주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후일 이 말은 "그 제자들은 죽지 아니하리라"고 왜곡되어 나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왜 요한이 기록하였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을 따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제자 일곱 명이 함께 있을 때 베드로에게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믿는 자들 속에 "요한은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왜곡되었습니다. 누가 왜곡 시켰는지 기가 막힐 일입니다.

 

동쪽으로 가라고 계속 사람들에게 전달하였더니 나중에는 그 사람들이 모두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저는 여기서 만약 우리에게 성경이 없었다면 어떻게 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비록 우리가 보는 성경이 서로 다른 사본을 해석한 관계로 어느 단어나 어휘가 조금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을 맞추어 살펴볼 때 그 어느 성경도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 또 통일교에서는 이 성경을 뜯어고쳐서 다른 성경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경전임에 틀림없습니다.


   LORDSHIP 이냐 Leadership이냐!
    그 사실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도 증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누구라할지라도 사람을 따르면 안됩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을 따를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 LORDSHIP)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의 사역자들에게 주신 것은 Leadership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말씀의 본체이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의 재림 앞에 선 교회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니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다"(살후2:1-2) 경계하였고

 

 젊은 제자 목사 베드로에게 "내가 이를 때까지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4:15-16)하였다. 따라서 요한은 21장에서 사역자가 무엇을 따를 것인가를 역설한 것이다. 주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성경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베드로를 따르던 다른 제자들처럼 사람을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속성을 역설한 것이다. 이제 우리도 이 말씀을 기억하고 오직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우립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