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 21장 강해-2) "패러다임쉽프트"

이요나 2001. 2. 28. 14:51

(요한복음 21장 강해-2) "패러다임쉽프트"

 

요한복음21:3-6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인줄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여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을 수가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 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오늘로서 요한복음의 대단원을 마치게 됩니다. 늘 성경강해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부족함입니다. 기도의 부족, 공부의 부족, 준비의 부족입니다. 또한 성경은 인간의 한계로는 완벽하게 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면적인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함축된 총체적인 것을 섭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접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온전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기도 속에서 주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때마다 주시는 은혜를 따라 말씀을 얼마나 충실하게 살펴보고 연구하며 이해하였는가에 달렸습니다.

 

이제 다음 주부터는 마가복음을 공부한 후 사도행전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 강의는 목요예배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며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성경말씀은 요한복음 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이 호수에서 만나자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 가서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속히 오시지 않았습니다.

 

크리스챤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단됩니다. 어떠한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 드리지 않고 아전인수격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크리스챤의 믿음의 주권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에 걸쳐서 공부할 요한복음 21장에는 성경기자가 의도한 한가지 커다란 흐름이 있습니다. 그 흐름을 찾지 못하는 것은 성경을 볼 때 자기의 생각과 목적을 설정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분적인 말씀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때 성경기자가 의도한 기록의 핵심 노치고 맙니다. 늘 여러분과 함께 공부할 요한복음의 주제는 "나를 따르라 입니다"


   나도갈래!
    베드로와 함께 있던 제자들은 야고보 형제 그리고 가나 사람 나다나엘, 디도모라 하는 도마, 그리고 또 다른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두 일곱이지요. 나머지 4명은 기다리다가 지쳐서 어디를 갔는지 아니면 먹고 살 일을 생각해서 딴 곳에 가 있던지 그도 아니면 집에서 마누라하고 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 나타나지 않자 무료해진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하고 바다로 나섰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따라 나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군중심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군중심리는 대단한 위력이 있습니다. 더우기 지도자의 군중심리는 모든 생각을 접어버리게 하고 그에 동조하게 하는 파워가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잘못된 리더쉽을 통하여 어떤 일을 도모할 때 그는 적그리스도의 여에 휘말릴수도 있게 됩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내던지고 주님을 따라나선 지 오랜만에 잡아 보는 그물이었습니다. 어쩌면 감회가 무량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의 마음 속에는 다시 고기잡이로 돌아 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기자는 그들은 그날 밤 한 마리도 못잡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고기들이 모두 도망을 간 것인지 아니면 고기잡는 손이 무디어졌는지 아니면 고기잡는 일보다 다른 마음으로 가득찼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허탕을 치고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호숫가에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성경기자는 제자들은 그가 예수인지를 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안보이나?
    우리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던 예수님도 다른 모양으로 보이셨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도 처음에 동산지기인줄 알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영체는 꼭 현실 속의 우리와 모습이 동일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식탁에 나타나신 주님께서 네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라 하셨습니다. 하긴 부활의 영체가 천사들과 같다고할 때 그 모습은 우리의 살아 생전의 모습일수도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물으셨습니다. 고기를 잡았느냐가 아니라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다음에 나오는 문맥을 보아 제자들과의 아침 식탁을 준비하시기 위한 것인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없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 제자들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자 고기가 많이 그물을 들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성경기자는 153마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153이라는 숫자에 많은 매력을 갖고 있는가 봅니다. 153에 대한 숫자를 제가 처음 발견한 것은 모나미 볼펜의 153모델명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을 그래서 모나미 볼펜이 힛트를 쳤다고 말합니다.

 

또 요즘 전병욱 목사의 153이라는 책이 화제가 되면서 한종호 목사의 "전병욱 <153>비판적 읽기"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늘 비판은 비판을 낳게 마련입니다. 그 글을 읽고 한마디 거들었더니 제게 많은 화살이 쏟아져 들어 왔습니다. 그들의 고기잡이에 내가 방해가 되었나 봅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153>에 관련된 쌍방을 의미합니다.


   <153>이 무어이길래!
    어쨌든 저는 성경에 나오는 숫자에 어떠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경 기록의 진실성 중 하나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기자가 그 숫자를 기록함에 있어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도 무엇이 부족한 사람들처럼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계획해서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만들어 놓으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 같은 것도 모두 무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지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이며 전능이라는 것은 무엇인든지 다 하실 수 있으나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섭리질서가 있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보다 이해하기 위하여 기록된 성경의 숫자에 대하여 상징적인 의미를 살펴보는 것을 좋은 일이나 그것에 어떠한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의 목적에 활용하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더니 153마리의 커다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사실 그들은 호숫가 가까이에 와 있었고 그곳은 물고기가 잡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큰고기가 물가에 나올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른편에 던져라!
    또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과 관련하여 많은 설교자들이 제자들이 그 때까지 왼쪽을 향하여 그물을 던졌을 것이라든가 하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물가에서 90미터 정도에서는 오른쪽인든지 왼쪽이든지 153마리의 커다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의 의식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인간은 무엇을 하던지 자기의 생각과 의식 속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그 방법에 틀이 잡혀 버렸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세계의 실체를 생각하지 못하고 영적 세계도 우리의 생각 속으로 이끌어 오려고 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같은 방법으로 이끌어 오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실 때 모든 주권을 자신이 가지고 잇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맞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주의 통치 즉, Lordship이라고 합니다. 그 순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의 눈이 환하게 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요한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도 눈이 뜨이기 시작하여서 벗고 있던 옷자락을 여미고 달려 나갔습니다. 호숫가까지는 90미터의 거리였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영체는 우리가 어떠한 의식 속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실체를 알아 볼 수도 있고 알아 볼 수도 없다는 것이 됩니다. 사실 부활의 영체란 영적인 존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 속의 영적세계!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실제적인 하나님의 영적 공간에 들어 있을 때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근거가 됩니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에 나섰을 때였습니다. 그는 아시아로 행하고자 하였으나 주의 영이 허락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또 베드로는 지붕 위에 기도하러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영안을 열어서 하늘로 내려오는 짐승들이 담긴 보자기를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영적인 체험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그러한 공간과 의식 속에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뭍으로 올라오자 예수께서는 이미 숯불을 피워 놓고 생선과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 오라 하셨습니다. 주께서는 숯불에 올리신 고기와 떡은 어디서 준비하셨는지 모르겠으나 여기서 우리는 주님은 무엇인든지 가능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졸지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를 만난 베드로와 제자들은 넋이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이 순간은 영적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하나로서 둘로 나타나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신비의 공간이 틀림없습니다만 현실이었습니다.


   몽유병환자인가?!
    주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끌어올리니 153마리의 큰 물고기가 가득하였습니다. 주께서는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으나 당신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부활의 영체가 현실 속에 나타날 때는 좀 그 모습에서 달리 보이는가 봅니다.

 

몽유병 환자처럼 어떤 공간에 이끌려 간 것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의식이 있었음을 성경기자는 기록하였습니다. 13절에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셨다는 말씀을 보아 주께서는 호숫가에 식탁을 차리셨나 봅니다.

 

요한은 이것이 주께서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라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나타나신 장면들을 종합해 살펴보면서 그 속에 내포된 의미 속에서 현실 속에 나타나는 영적세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내일은 그 유명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신 말씀을 가지고 공부하겠습니다. 임마누엘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