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14) 로고스의 발견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A. 로고스에 대한 생각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1)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쓸 때 마음속에 한 목적을 가졌다고 한다. 요한은 그의 책 끝에 기록하지 못한 많은 일들을 예수께서 하셨으며 주께서 행하신 모든 것을 기록한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도서관을 다해도 장소가 충분하지 않으리라고 증언했다.
또한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의 행적들을 기록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기를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고 증거했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의 목적은 당신이 예수께서 참으로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자가 되어 주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먼저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기록되었다. 이는 매우 흥미롭고 놀라운 증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는 말은 참으로 고차원적인 표현이다.
그 시대에 이러한 표현을 한 요한은 정말 헬라철학과 당대 문학의 석학이었음을 증명한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다른 복음서와 또 다른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사도요한이 다른 제자들이 다루지 못했던 이상적인 부분 곧 신비에 속한 영적세계를 현실에 도입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을 읽는 사람들은 먼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쌓은 후에 읽는 것이 그 순서라고 하겠다.
1. 헬라 철학자들의 생각
요한은 서두에세 먼저 ‘말씀’ 곧 ‘로고스’에 관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하고 있다. 먼저 그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고 기록하였다. 이는 그의 상상과 추상으로만 말할 수 없는 계시에 속한 부분이다. 한계 속의 인간이 아무도 알 수 없는 태초의 일을 말하고자 하면 그것은 곳 신화가 되던가 추상적인 소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요한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대 현실 정치와 종교적 역사에 최고의 이슈를 제시한 자신의 스승이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목격자로서 그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라는 표현은 그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 곧 영적 세계를 초달한 증인으로서의 계시적 증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 곧 ‘로고스’라는 단어는 헬라 개념 속에서 흥미로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주전 560년 에베소의 헤라클레터스(Heracletus)라는 철학자가 살았는데 그는 온 우주는 계속적으로 변화되고 있는 상태로서 아무것도 똑 같은 상태로 머무르거나 정지된 상태로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것을 묘사하여 말하기를 만일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넣었다가 빼내었다가 또다시 발을 넣을 때, 사실은 조금 전에 발을 넣은 시냇물과 똑 같은 물에 발을 넣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물이기 때문에 똑 같은 시냇물에 발을 넣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것은 움직이며, 모든 것은 변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그 아무것도 정지되어 있거나 똑 같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계속적으로 변화 상태에 있고, 순간 순간이 똑 같은 것은 그 어느 것도 없다면 누가 어떻게 이 거대한 세계를 혼돈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가 라고 그에게 질문했을 때 그는 그것이 바로 ‘로고스’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하여 사물은 계속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만 만물에는 질서가 있으며 그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로고스’인데 이처럼 ‘로고스’가 만물의 질서를 확립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우리의 삶에서도 우연히 생기는 일은 하나도 없으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하여 우리 삶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계획과 목적이 있으며, 계획을 짜고 목적을 조절하는 분이 있는데 그가 바로 ‘로고스’라고 했다.
또한 그는 각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선천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당신이 잘못했을 때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옳은 일을 했을 때에도 그것을 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는 옳고 그른 것을 깨닫는 힘이 있는데 그것을 알게 하는 그것이 바로 ‘로고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로고스’라는 단어는 헬라철학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 후에 스토아철학파가 나타났으며 그들은 우주의 질서를 생각하는 중에 별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수많은 별들이 각각 정해진 궤도를 따라 돌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천체와 모든 만물들과 우주의 질서를 보고 우주의 배후에 만물의 질서를 잡는 강력한 힘이 있는데 그것이 ‘로고스’ 곧 ‘전능자의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헬라철학에서는 만물이 형태로 존재하기 전에 모든 물체는 그 물체의 근원을 이루는 생각 속에 존재했다고 말한다. 이 말은 곧 모든 형체의 배후에는 그 물체에 대한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만약 자동차가 있다면 먼저 그 배후에 생각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생각이 있고 부품들을 뜯어 맞추는 작업이 있고 그 후에 완성된 형체를 보게 되는데, 그 형체의 배후를 이루고 있는 생각이 ‘로고스’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그들은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의 형체의 배후에는 ‘로고스’, 곧 ‘생각’이 있다고 믿었다.
2. 사도요한의 생각
이러한 철학사상이 팽대했던 때에 사도 요한은 그들의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형체의 배후에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려면 그 모든 생각들의 배후에는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헬라철학자들은 요한이 말한 생각을 주관하는 사람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다만 모든 것이 배후에 있는 생각으로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요한은 그 생각의 배후에는 생각하는 분이 있어야 하며 따라서 그 생각 곧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로고스는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했다. 그래서 요한 헬라 철학자들이 정립한 로고스(말씀)를 통하여 ‘태초에 로고스’ 곧 말씀이 계셨다고 말하였으며 이러한 시대적 발상이 요한복음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3. 창세기의 생각
흥미롭게도 이러한 사상은 성경의 첫 부분 창세기에서 동일한 발상을 제공하고 있다. 창세기 1장1절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하나님은 엘로힘(Elohim)라는 단어로 복수형이다. 히브리어에서 "엘(El)"은 단수 하나님이며 '엘로힘'은 히브리어 복수 어미 ‘im’이 붙어 하나님의 복수형을 이룬다.
유대인 선생(랍비)들은 왜 하나님의 이름이 복수형으로 쓰여졌는지를 설명하려고 애를 쓴다. ‘태초에 엘로힘, 신들(Gods)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처럼 그들은 복수형이 강조형으로 쓰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어떤 단어가 복수로 되어있을 때 강조형으로 쓰인 경우는 있지만 복수로 되어 있는 단어를 복수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해석이다. 또한 사람들은 이 땅의 많은 신들이라고 말할 때 엘로힘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믿는 신들을 자기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을 복수형 엘로힘을 사용한 것은 태초에 계신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세 인격 곧 아버지, 아들과 성령의 세분으로 존재하신다. 흥미로운 것은 창세기의 창조 기록에 복수 대명사가 사용된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여기서 우리란 누구인가? 바로 삼위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는 인간의 제한된 생각으로는 충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다만 우리가 믿을 때 주께서 그 믿음을 주시는 것이다.
B. 로고스 되신 예수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2)
사도 요한은 전세계가 헬라철학의 이끄는 지식과 학문 속에 지배되고 있으며 세상 사람들은 그 지배의 영역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생활하며 모든 문명과 문화가 그 영역안에서 어어져 가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 사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복음이 세상 속으로 다가 갈 수 없음을 직감하고 요한은 헬라사람들을 생각하며 헬라사람들의 마음을 가지고 생각하며 글을 썼다. 그 또한 헬라 사상과 학문과 문화 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요한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글 속에서 히브리 단어를 헬라말로 번역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장 38절에서 사도 요한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물었고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는 주석을 달았다.
또한 41절에는 안드레가 그 형제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증거하였는데 거기서도 요한은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Christos)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사도 요한이 히브리말을 헬라어로 해석하여 읽는 사람들로 하여 자신이 무엇에 대해 쓰고 있는지 그들이 이해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므로 요한은 헬라인들이 ‘생각’ 곧 ‘로고스’는 우주의 배후에 있는 질서이며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알게하는 능력이라 말했는데 사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로고스’ 곧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문자 그대로는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증거한 것이다.
1. 하나님이신 예수
오늘날 여호와의 왕국을 이끄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 천사와 같은 계급으로 창조되었으며 그는 아마 천사장 미가엘 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요한은 분명히 증거하여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이 부분의 기록을 변경하여 하나님 앞에 'a'를 삽입하여 "말씀은 (한) 하나님이시라"고 자기들만의 성경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헬라어에는 관사 'a'가 전혀 없다. 그들은 그들의 이론에 일치시키려고 그것을 삽입한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자신들에게 전혀 어떤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은 삼위하신 분이 아니라 단지 한 분 뿐이라는 교리를 유지하려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의 해석에 따라 만일 예수가 참되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또 다른 신이라면, 그들은 결국 두 하나님을 갖게 되는 것인데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지게 된다. 그들의 주장을 수학적으로 논할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말할 때 그들은 1+1+1=3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1x1x1=1이 되는 수리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이와 같이 세 분의 인격이 한 하나님으로 복합되신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2. 우주를 붙들고 계신 분
요한은 3절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기록하였다. 이는 성경적 근거를 바탕으로 증거한 것으로 창세기 1장 1절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기록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성경을 바탕으로 증거하는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아무리 헬라 철학자들이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였다 해도 그들의 지혜로는 하늘의 신비에 속한 태초의 일들을 증거할 수도 없고 또한 하늘의 신비 속에 감추인 계시는 그가 알게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열어 그 신비에 속한 것을 알게 하셨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선언하셨고 요한은 하나님 속에는 그 중 한 분이신 예수님 곧 로고스이심을 선언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예수께서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확증하였다. 그는 예수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만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혹은 문자 그대로 함께 붙들려 있느니라"(골1:15-17)라고 증거하므로써 예수님은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창조의 목적이시며 모든 만물들이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께서 만물을 함께 붙들고 계신 분이심을 말한 것이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광활한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이 거대한 우주를 운행하며 창조로부터 신비의 질서를 지켜 온 분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생각하게 된다. 성경은 그는 로고스이며, 그가 그를 위하여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가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신다고 증거하였지만 아직 한계 속에 머물고 있는 나의 이성은 그것을 받아 드릴 만한 지혜가 부족하다. 이처럼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받아 드릴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먼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한 것이다. 오직 주를 믿고 또 그의 말씀을 믿음으로 우리는 이 불가사이한 모든 진리들을 믿게 되고 또 깨닫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있는가? 다니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벨론의 통치자에게 "벨사살왕이여, 당신은 금과 은과 나무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고 있으나 당신이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손에 당신은 호흡이 달려 있소" 외쳤다. 이처럼 사람들은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현실들에 취해 있다. 그러나 천지간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그 모든 것을 지으시고 또 붙들고 계신 분이 바로 말씀 곧 로고스이시며 태초부터 계신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는 하나님이며 만물을 지으신 창조자이다.
C. 빛과 생명인 로고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
요한은 계속해서 로고스(말씀)에 대하여 우리에게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증거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전체를 통하여 생명과 빛에 대하여 많이 말하였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당신에게 풍성한 삶을 주려고 오셨다. 인간을 유혹한 사단의 거짓말 중 첫말은 하나님은 당신에게서 좋은 것을 주지 않으려 하고 그것은 당신의 인생이 재미있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신을 색욕에 빠지게 하려는 마귀들의 속삭임으로 오히려 주님은 당신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상상도 할 수도 없는 영원 속에 감추어진 비밀들을 체험할 때까지 고차원적 삶을 제공하여 주시기를 원하신다.
1. 영원한 생명
예수님은 자기를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지 아니하는 도다"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셨다. 당신은 어느 편에 있기를 원하는가?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아는 것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의 길로 들어가기를 원하는가? 이에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유대인 종교지도자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7-19) 고 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늘 당신을 향하고 있다. 빛으로 나아갈 것이냐 아니면 스스로 어둠의 심판을 자처할 것이냐는 당신의 선택에 있다.
2. 생명의 빛
요한은 빛이 세상에 왔으며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증거하면서 "그 생명이 바로 사람들의 빛" 이라고 말한다. 또 요한은 모든 사람들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고 말하며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였다. "깨닫지 못하더라"라는 헬라어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뜻과는 다르다. 헬라어에서 사용된 개념은 ‘어두움이 빛을 끄지 못했다’, ‘소멸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빛이 어두움에 비추었으나 어두움이 빛을 소멸할 수 없었다라는 뜻이다.
어두움이 빛을 물리치려 한 것은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세상을 밝히는 빛이라고 증거했을 때 어두움을 더 사랑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밝히는 그 빛으로 인해 화가 났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므로 자신들의 죄를 밝히는 그 빛을 소멸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은 겨우 이틀간뿐이였다. 그 빛은 삼일에 다시 나타났으며 그로부터 더욱 더 강렬하게 세상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두움은 결코 빛을 물리칠 수 없다.
오늘날도 빛을 물리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하려고 하고 그 빛을 흐리게 하려고 성경의 말씀을 여기저기 뜯어내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둠은 물리학적이나 이상적으로나 그 어떤 영적인 존재라고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로고스의 존재에 관해서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외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1:10)증거하였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아름다운 꽃으로 덮인 들판을 거닐며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이 못하였느니라"(마6:28-29) 하셨다.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설계하시고 지으셨으므로 그것들의 화학구조나 피고지는 질서를 모두 알고 계셨다. 또한 주님은 "공중의 새를 바라보라” 하셨다. 주님은 새들을 지으실 때 이미 기체역학의 법칙에 관해 알고 계셨고 그는 새를 설계하실 때 그 법칙들을 사용하셨다. 새들이 공중으로 올라갈 때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열관계의 원리들을 모두 알고 설계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아직도 ‘로고스’ 곧 ‘말씀’되신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그를 영접하려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가장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D. 독생자의 신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
1. 생명의 나타나심
창조주이신 그가 창조하신 만물 중에 거니셨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후에 그들은 깨달았고 알게 되었으며 인식하게 되었다. 후일 사도 요한은 그의 첫번째 편지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이라고 증거하였다. 생각해 보라 나를 지으시고 내 앞에 있는 그 모든 것, 곧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붙들고 있는 분이 바로 당신이 믿는 주이며 그가 로고스 곧 말씀이라 할 때 당신이 지금 로고스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라.
당신은 과연 삶 속에서 항상 그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의 말씀을 듣고 있으며 그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으며 당신의 모든 것에 대하여 그와 대화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당신이 믿는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당신의 믿음은 아직 혼란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 말씀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의 숨결과 그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면 그는 당신과 지금 교제를 하고 있는 것이며 당신은 곧 빛 가운데 있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요한은 세상은 그에 의해 지은 바 되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고 증거했다. 이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거절한 것이다.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거부한 것과 같은 일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임에도 처음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하였다. 성경은 이미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버린 바 되었으며"(사53:3)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나누어 주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 속에 들어간 것을 뜻한다. 그 생명은 주님 안에 있는 생명으로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며, 이 능력 있는 빛을 그를 영접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영접하는 자'라는 말은 이제 책임은 당신을 선택에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를 영접할 것인지 아니면 빛보다는 어두움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 있어 하나님과의 연결고리인 그를 거절하든지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선택에 당신의 미래가 달려있다. 그 선택으로 당신의 영혼의 여행의 목적지가 결정된다.
요한은 더 나아가 그의 서신에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가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요일3:1-2) 증거하였다. 이 말씀은 그가 다시 나타나실 장래의 일을 말한 것으로 요한은 그때에 당신의 형상이 그와 같이 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무궁하신 신비에 대하여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3:16)라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태초의 말씀되신 예수님은 우주에게 명령하시는 분이시며, 삶의 목적을 부여하시는 분이시며,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을 당신의 마음 속에 결정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셨던 분, 곧 로고스이신 그분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서 행하고 계신다.
2. 하나님의 예정 선택
우리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13)는 말씀 속에서 공평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으며 공의로 세상을 이끌어 가심을 알 수 있다. 만약 예수를 영접하는 일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일이라면 이는 그들만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될 것이다. 이는 택하심과 부르심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바울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1:4,5) 증거하였다. 이처럼 요묘한 하나님의 지혜를 인간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 교회에 들어 온 사람들만이 만세 전에 택한 자들이라고 뻥치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그럴 것이라면 처음부터 혈통이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다고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잃어버린 연결고리(missing link)를 찾으려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들을 하급 동물계 속에서 인류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찾으려 애쓴다. 그들은 수세기 동안 수억의 돈과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데 그들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사람의 연결고리는 하급단계의 동물 속에서 발견하는 일은 영원히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창조이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잃어버린 연결고리는 아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위로 올라가야 한다. 인간에게 잃어버린 연결이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이며,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죄가 사람을 낮은 수준으로 끓어 내린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접촉이 상실되었으며,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져서 사람들은 어두움과 혼란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잇기 위해 오셨으며 오직 그분만이 당신을 하나님과 다시 연결시켜주실 수 있는 살아계신 로고스이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1)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리고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의 가족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뜻으로나 육정으로 나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뜻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되었다.
3. 말씀과의 관계
사도 요한은 14절에서 "말씀이 육신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하였다. 이는 요한이 지금까지 말한 바를 결론짓는 종결구에 해당한다. 지금 요한은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과 죄 중에 멸망하는 인생에게 빛을 가져오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를 믿고 영접하는 자는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게 되는데 이들은 혈통이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나서 아름다운 새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나게 된다’ 증거하였다.
요한은 영광, 은혜, 진리와 같은 하나님께 속한 신비의 지혜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광이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으로 장차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 앞에 주어질 최종적인 결과이다. 주님은 이 영광을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영광을 달성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이 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이며 이 은혜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면 진리는 무엇인가? 이 진리는 세상과 사람의 마음을 밝히고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하나님의 빛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님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17:17) 하셨다.
4. 당신의 선택
결국 오늘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는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할 수 없고 그가 세상에 오셨으며 우리와 함께 영원한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신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인류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생각했던 무한의 능력 곧 생명의 빛되신 이가 사람의 몸으로 왔다는 것이다.
이 말씀 이제 당신의 생각이 옳든지 틀리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로고스 곳 말씀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체로 나타나셨으니 이제 당신이 믿을 것인가 배척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는 말이다. 이에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기록하였다. 나는 당신이 이 요한복음 속에서 로고스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제 우리는 다음에서 세례요한의 그리스도 증거를 살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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