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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은사9) 겨자씨만한 믿음의 정의

이요나 2000. 7. 15. 10:20

(믿음의 은사9) 겨자씨만한 믿음의 정의

*서론*
누가복음 17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우리는 믿음의 여러 가지 종류를 알아보았고 주님을 만나 질병을 고친 사람들을 통하여 믿음의 생성과정과 성장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아들에게 들린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기 위하여 믿음이 있어야 함과 믿음은 자기 스스로 갖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도와 주셔야 되는 것과 그를 위하여 사역자들이 많은 기도를 하여야 함을 배웠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의지적 동의가 필요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우리의 삶의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질병이나 가족의 영적 문제를 가지고 주께 나아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믿음이 있는 사람도 있었고, 믿음이 없는 경우에는 주께서 믿음이 생성하도록 믿음의 매개체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질병과 환난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주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또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 앞에 나온다고 모든 사람이 영적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요5장 참조) 이제 오늘은 주께서 세우신 제자들이 주님께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간구하는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입을 뗄수 조차 없다! *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겨자씨라는 것은 그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무과에 속한 씨입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8)하셨습니다. 이 일은 베다니에서 성전으로 들어가시는 중에 열매 맺지 못한 채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 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1장을 보면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을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원칙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말을 하여야 한다"는 것과 "마음에 의심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말씀 때문에 많이 고민하였습니다. 어떤 귀신들린 자를 앞에 두고 그 귀신을 쫓아야 하는데 말이 안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 마음 속에서 외치려해도 그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원인은 내 마음 속에 혹시 내가 말을 했는데도 귀신이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불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에서는 그 말이 나와야 하고 마음에서는 그것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쉬운 것 같아도 절대로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나는 이러한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방해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내 지성과의 다툼입니다. 여러분도 겪으셨겠지만 우리가 방언을 할 때 우리의 지성은 우리가 하는 방언에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하고 있는 방언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방언을 중단해 버리고 말지요. 그래서 바울은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현실을 부인하고 그 영적인 믿음 속에서 실천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됩니다. 과거 일본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예언이 주어질 때는 나도 모르게 그 말씀이 과감히 내 입을 통하여 나왔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마음에서는 이 말을 하라고 재촉하는데 나는 입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시다발로 나타나는 은사 *
어느 날 주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무엇이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말했습니다. 이에 주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6,17)고 하셨습니다. 즉 이것은 베드로의 이성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베드로도 모르는 사이에 나온 대답입니다. 성령께서 하신 말씀이신 것입니다.

 

또 주께서는 너희가 공회에 붙잡힐 때에 그들에게 무엇을 말할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그 시에 대답할 말씀을 주시리라 하셨습니다. 그 후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베드로와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과감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도 믿음의 실천이 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은사는 예언의 은사와 신유의 은사와 기적의 은사와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기도합니다.

어떠한 기적과 병고침과 예언이 나타날 때 그 앞에 믿음의 은사가 동시에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그리되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산이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고 땅에 깊히 뿌리내린 뽕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즉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에서는 이 일을 위하여 기도와 연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먼저 말하여야 함을 말씀 하셨고 마음에 의심치 말아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막11:24)고 명령하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어떠한 기적을 일으킬 사람들 사역자에게 해당하는 말씀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역을 위하여는 성령의 세례를 받아서 성령충만 하여야 함을 배웠습니다. 또한 우리는 누가복음 11장에서 성령을 선물로 받기 위하여는 어떻게 기도하여야 함을 배웠습니다. 주께서는 구하라, 구할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눅11:13)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붙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연자맷돌을 지울께야! *
누가복음 17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주께서는 이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실족케 하는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 없음을 전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제한된 지식과 경험 속에 있기 때문에 지도자의 입장에 있다하더라도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주께서는 실족케 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실족케 하여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실족케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만 이것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너희가 육으로 살면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 살면 살리라"하였습니다. 따라서 부름받은 사역자들은 성령에 의하여 일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 주께서는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찐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작은 자라는 것은 주를 믿는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거짓 선자자들과 거짓교사들에게 미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환난 속에서 주를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자기의 밥그릇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으며 자기의 명예의 발판으로 삼는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거짓선지자와 거짓교사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가르치고 잘못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 대하여는 마태복음 7장에서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예언을 하며 능력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했던 사람입니다. 주께서는 "내가 결단코 너희를 모른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라"하셨습니다. 그가 과거에 얼마나 휼륭한 일을 하였던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3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하셨습니다. 이 문제는 자기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일순간의 잘못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너희가 서로 발을 씻겨라 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떨어져 나갈까봐서?. *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목욕을 한 자들이라 해도 세상 속에서 잘못된 길로 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청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들을 굳건히 하라"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기 때문에 늘 여러 방법으로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사역자들에게 둘씩 짝을 지어 내어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아무것에도 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또 하나의 문제는 성도들을 형제 자매로 삼지 않고 평신도와 지도자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서부터 교만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구하신 그의 형제들을 그의 사역자들이 구별한 것입니다. 주께서는 계시록에서 니골라당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나는 그들을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 니골라당은 교회 안에 성도를 구분한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로 하여 카톨릭에서 나온 개신교는 지금 다시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잘못은 잘못하는 형제를 경계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교회법에 의하여 임의로 어떠한 직제로 세워 놓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이 장로와 목사 사이에 갈등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주도권 싸움입니다. 따라서 작은 교회도 어느 집사나 장로가 잘못을 행하여도 그 잘못을 경계하지 못하는 입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날까 두려운 나머지 '주의 사랑'이라는 구실로 잘못을 묵인하고들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범하면 경계하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용서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종교 *
사실 기독교는 사랑과 용서의 종교입니다. 이 두 단어가 빠지면 기독교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단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회개하거든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네게 돌아 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용서라는 말의 의미를 너무 쉽게 알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하여 우리에게 판단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카톨릭에서는 성도들의 고해성사를 받고 있지요. 저는 한 번도 경험을 하지 못했지만 왜 인간에게 고해성사를 하여야 하는가 하고 의문을 갖습니다. 이것은 누가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말도 됩니다.

주께서 중풍병자에게 네가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참으로 참람하도다 저가 누구기에 사람의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단 말인가 라고 반문하였습니다. 사람의 죄는 모두 예수님께 맡겨진 것입니다. 아무도 사람의 죄를 사할 권세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숨을 코에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하시며 그들에게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하셨습니다. 주께서는 이들에게 죄사함의 권세를 허락하신 것이지만 성령에 의한 사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러한 것은 자신들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한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역은 주께서 그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역자들의 이러한 믿음 즉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더지우라 하면 그대로 이룰 수 있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사역자로서 행할 때 주깨서 주시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명령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나의 교만함을 발견합니다. 어떠한 조그마한 일을 하고 나면 영락없이 그 일에 대한 칭찬을 받고 싶어서 떠 벌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정말로 한심한 놈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