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성령은사

(믿음의 은사7) 믿음은사와 구원의 관계

이요나 2000. 7. 18. 20:34

(믿음의 은사7) 믿음은사와 구원의 관계

*서론*

우리는 앞에서 환난 속의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당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시돈 땅의 사렙다 과부만이 구원을 받았고 이스라엘에도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으나 아람의 나아만 장군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인간의 행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크리스챤 중에 질병으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질병을 치유하는 기적들은 이단 종파의 특권처럼 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내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지요.

성경적 올바른 가르침을 하지 않는 이단종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로 시행하는 그의 증인들은 얼마나 더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습니까? 우리가 그러한 종파를 시기하고 비방할 일이 아니라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온전한 주의 증인으로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때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귀신을 쫓아 내었습니다. 이들을 제재하고 싶어하는 제자들에게 주께서는 "가만 두어라 내 이름으로 행하는 자들이 나를 비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나를 해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여야 하지만 이것도 하지말고 저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그의 기름 부으심 속에서 주의 말씀을 헤아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그 말씀을 실행하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구경거리가 되어서는..
우리는 앞에서 거지 소경 바디메오가 주를 만나 눈을 뜨고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눈을 뜨게 하는 신유의 믿음을 갖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8장에서는 또 다른 소경을 하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께 나아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에게 손을 대어서 고쳐 주기를 바랐습니다. 주께서는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며 무엇이 보이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는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다시 안수하셨고 그때서야 만물을 밝히 보았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왜 주께서는 왜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을까요? 또 왜 단번에 고치시지 않으셨을까요? 무엇인가 기술적인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에게 눈을 뜨고자 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데리고 나온 것은 동네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 사람들도 믿음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안수하여 고치는 이적을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를 동네 밖으로 이끌고 가셨던 것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의 손에 이끌리어 동네 밖으로 나아가며 주님과의 대화 속에서 눈을 뜨고자 하는 소망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자신의 눈에 침을 발라주심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랑을 베풀고 있음을 인식한 것입니다. 또한 주께서는 그의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하여 단계적으로 보이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마가복음 7장 뒷 절에서도 나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데리고 나와서 안수하여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 때도 주께서는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났습니다.

군중심리에서 생긴 믿음이 아니라 그 사람 마음 속에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하여 입니다. 그는 주를 볼 수 있었으나 말을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주께서는 그의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어 에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흑암의 권세에 눌려서 살면서도 그것을 숙명적으로만 받아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람에게도 인격적인 교제를 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만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자하심을 발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믿음으로 병을 고친 것이 아닙니다. 주의 긍휼하신 사랑을 따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사람들에게 들어가지 말라고 경계 하신 것입니다. 이들의 간증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경계 하셨던 것입니다.(막1:45 참조)

*죄사함과 병고침
오늘은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나온 사람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들을 대조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신 후 전도의 길이 막혀서 가버나움의 숙소에 들어가 계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움직이지 않자 수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몰려들어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들것에 메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를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지붕을 뜯어내고 줄을 띠워서 예수님 앞에 그 환자를 내려놓았습니다. 이 광경을 머리 속으로 상상해 보십시오. 어쩌면 이것은 대중집회를 망치는 일입니다.

우선 집이 부서지고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무모한 짓이기도 합니다. 집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든가 할 일이지 남의 집 지붕을 뚫고 환자를 지붕으로 올려서 줄을 타고 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두 아십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기분을 만족 시켜 주지는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 보기를 원하여서 늘 예수님에게 여러 가지 기적을 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은 네가 고침을 받았으니 일어나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중풍병자의 경우는 이 질병이 죄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적용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특히 중풍병은 미국의 어느 의학자의 임상실험 세미나에서 젊어서 간음을 많이 한 사람이나 짐승의 피를 먹은 사람들 속에서 많이 발병한다는 발표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중풍병은 나이가 들어서 나타나는 병인 것 같습니다. 중풍병은 의식은 있으나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38년을 눕고도 정신 못차려!
여기서 흥미로운 발견은 아직 그는 들것에 누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일어난 것은 주께서 "네가 일어나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실 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사함과 병 고침은 또 다른 역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질병을 통하여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병에서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주로부터 죄사함을 받았다면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의 영혼은 이미 구원받아 하나님의 영생에 들어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사함 받은 사람이라도 병고침의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주님을 만나 병고침을 받고도 영혼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성경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입니다.

그는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 병을 낫겠다는 신념으로 38년이나 누워 있었습니다. 주깨서는 그를 보시고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천사가 내려와 그 못의 물을 움직일 때 자기를 그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38년 동안 병에 시달리면서도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오직 천사를 기다리며 그 못에 들어가서 고침을 받을 소망을 가지고 38년을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상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를 고쳐준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예수는 성전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너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병에서 고침을 받았으나 죄를 범하면 더 심한 것이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전에서 만났다는 것은 참으로 흐미롭습니다. 그는 왜 성전에 있었을까요?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인가요?

*당신은 어느 부류인가?
여기서 여러분은 어떤 것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병고침이 먼저인가 죄사함이 먼저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그 병을 고침받을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주께서 일어나라고 하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의 병고침은 주의 영광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를 만나 그의 긍휼하심으로 병을 고침 받은 사람은 아직 죄사함의 문제가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무엇에 촛점을 두고 있느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느냐는 이야기지요. 믿음으로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주께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벙어리와 소경들은 믿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었습니다. 즉 믿음의 매개체를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8년 된 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도 예수를 알려고 하지 않고 성전에 가서 종교활동에 빠졌습니다. 아마 그는 오늘날 그 누구들처럼 교회를 돌며 38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증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병고침에는 세 가지 사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환난을 당하는 사람 또는 그의 친속들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들과 또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도 없이 자기의 처지를 팔자소관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만남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후 고쳐 주신 경우와 그리고 38년된 병자와 같이 오직 병 고침만을 받고자 힘쓰는 사람에게 병을 고쳐 주신 경우입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만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주께서 눈을 뜨게 하신 자와 벙어리는 그들 심령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믿음의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고도 주를 알고자 하지 않고 종교활동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그는 성전에 나가 있지만 또 더 심한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때에서야 그는 다시 주를 만나고자 애를 쓸 것입니다. 당신은 어느 부류에 속한 사람입니까? 주님께 나아가 죄사함을 받은 믿음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아직 주를 더 알아가야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알기보다는 종교적인 활동을 하기를 원하는 미혹된 심령입니까? 오늘의 말씀에 당신의 심령이 사로잡히기를 기도합니다. 기회가 계속 있는 것만이 아닌 것을 기억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