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성령은사

(믿음의 은사6) 믿음의 최고의 목적

이요나 2000. 7. 20. 14:01
(믿음의 은사6) 믿음의 최고의 목적

*서론*

지금 우리는 믿음의 은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믿음의 종류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믿음의 종류에는 구원의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믿는 믿음 그리고 병고침의 믿음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복음서에는 믿음의 은사 중 병고침의 은사가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인간사 속에서는 질병이라는 복병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질병이라는 것은 죽음의 과정으로 인간의 생체리듬이 파괴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의 육체 속에 자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병균으로부터 이길 수 있는 항체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몸을 향락의 도구로 사용하든가 우리 몸에 필요 없는 것을 먹고 마시든가 과식 또는 과로를 하여 우리의 육체에게 설정된 생체리듬을 벗어나게 되면 우리의 항체는 균형을 잃게 되어 질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영과 혼과 육의 혼합체이기 때문에 그 어느 부분에 문제가 생기면 질병이 발병되는 것인데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게 영적인 보호막이 없으므로 그가 어떠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바로 영적인 문제가 발병하게 되는 것이지요. 쾌락에 사로잡혀 술에 중독된다든가 마약에 중독되면 그 중독현상은 그의 영혼은 판단력을 잃고 이성을 잃게 되어 결국은 육체의 질병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질병은 세상을 지배하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욥기를 보면 사단이 의인 욥을 시험하기 위하여 사용한 첫 번째 도구가 재물의 실패요 두 번째가 자녀의 생명이요 세 번째가 자신의 육체의 질병이었습니다.

결국 사단은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하십니다. 그가 이미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자라고 할 때 그의 영혼은 극한 육체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귀영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에 치우친 삶을 살고 있다면 그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한 자가 되어 영원한 흑암 속에 처해질 것입니다.

*최고 높은 곳과 낮은 곳*
앞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극히 칭찬한 믿음의 사람 두 사람을 살펴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로마장교 백부장이었고 또 한 여인은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지식과 견문을 갖춘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아는 믿음으로 출발하였고 가나안 여인은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소문을 듣고 출발하였습니다. 따라서 백부장은 권세자의 권위에 대하여 알고 있었고 가나안 여인은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자손 메시야라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는 그와의 관계성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 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개들도 자녀들의 상 밑에서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비록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지만 당신의 자녀들의 애완 동물로서라도 한집에 살기를 원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찾은 한 소경을 통하여 그는 어떠한 믿음을 갖고 있었는가 살펴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바디메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일은 여리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여리고는 '종려나무 성읍'이라는 뜻으로 예루살렘 북동쪽 23km지점에 있는 팔레스틴의 옛 도시중의 하나입니다. 여리고는 지중해보다 250m 낮은 지역이었고 예루살렘은 해발 760m였음으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이르는 길은 오르막길이었습니다.

*인생의 높낮이 *
지금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유대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이십니다. 점점 십자가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사역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하였고 제자들은 아직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여 천국자리 다툼 같은 것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의 권세에 대하여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의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신 후 도착한 곳이 여리고였습니다. 앞에서 잠깐 설명하였지만 이곳은 가장 낮은 지형으로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지역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지요. 머리 속에 이 장면을 그려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은 변화산상에 올라가서 천국을 경험한 후의 사건입니다. 이 지상의 인간으로는 아무도 현실 속에서 이르지 못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가 본 것입니다. 그 후 산을 내려오신 후에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막10:35) 그리고 어린 아이를 안으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들과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부자청년과 바디메오 *
그 때 예수님 앞에 엎드린 사람이 젊은 부자이지요.(막10:17) 그는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하였습니다. 그는 영생에 갈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랍비라고 불렀듯이 그도 예수를 다른 랍비(선생)보다는 선한 선생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생에 관한 것을 가르침 받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많은 물질로 사람을 구제하며 의로운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메시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만 영생의 문제를 가르침을 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예수 자신이 영생의 주권을 갖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물질은 사람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그 물질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나가는 제자들에게 지팡이 외에는 두벌 옷이나 돈주머니를 차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부자 청년이 돌아간 후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심히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다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이란 좀처럼 바뀌지 않는 속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예수님 일행은 그 지역에서 가장 낮은 지역 여리고에 도달하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자 예수님 일행은 많은 무리들에게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 때 돌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외침이 들렸습니다. 디메오의 아들 소경 거지 바디메오의 외침이었습니다.

'디메오'란 '명예'라는 말입니다. 아마 디메오의 가문은 명예를 중시하던 집안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도 '바디메오' 즉 '명예의 아들'이라고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명예를 중시하는 집안에서 소경이 태어났다면 그것은 참으로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에 소경 둘이 앉았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어쩌면 디메오의 부자일지도 아니면 바디메오의 부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만 그는 그의 이름과는 전혀 걸맞지 않은 거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장님이 제자가 되겠다?! *
어느 날 그의 귀에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사정없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차라리 벙어리였다면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앞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 달려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를 다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는 주를 만나 딸의 귀신을 쫓은 수로보니게 가나안 여인과는 다른 위치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장님이었으나 메시야와 같은 유대민족인 것입니다. 즉 '다윗의 아들'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는 언약의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소경 바디메오는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인 것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누구라도 예수를 메시야라고 부를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를 메시야라고 부르면 유대교 공동체에서 출교했기 때문에 그나마 출교를 당하면 얻어먹는 거지 생활도 끝장나고 맙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사람들의 만류도 마다 않고 계속하여 소리쳤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가시던 발길을 멈추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자기를 부르신다는 소리를 들은 바디메오는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갔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바디메오에게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질문 아닙니까? 장님에게 무엇을 해 주길 원하다니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디메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을 부른 가나안 여인은 "주여"부르며 메시야이신 주께서 자기의 주인이 되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을 만난 바디메오는 예수에게 '선생님'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은 듣기에 따라서 건방진 표현이든가 조롱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라는 표현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부를 수 있는 관계성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 "가라"& "좇았다" *
장님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꿈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태어남으로부터 소경이 된 바디메오는 자신의 인생의 비밀과 관련하여 하늘나라를 알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소경인 관계로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향하여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의미와는 전혀 다른 감각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그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바디메오가 예수를 보기를 원한 것은 그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자 청년도 예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그는 현실 속에서 메시야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이대로 영생을 누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메시야인 것을 발견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릴 것이 없는 바디메오는 잃어버린 자기의 인생을 찾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했습니다. 그의 소원은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께서는 그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과 바디메오의 문답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바디메오는 예수를 길에서 좇았습니다. "가라"와 "좇았다"는 아이러니한 대조 아닙니까? 여기서 "가라"는 '너의 뜻대로 가라'는 말씀이고 "길에서 좇았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바디메오는 더이상 거지가 아닙니다. 그는 위대한 이스라엘의 왕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또 흥미로운 것은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은고로 고민하며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버릴 것이라곤 헌 누더기 옷밖에 없는 바디메오는 헌 누더기 인생을 기분 좋게 집어 던졌다는 것 아닙니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지금 어떠하십니까? 아직도 그 누더기를 껴 안고 살고 싶으시다구요? 헉? 그렇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는 당신에게 올 여름은 더욱 뜨거운 지옥이 되실 것입니다 그려. 아니라구요? 주의 제자가 되시겠다구요? 하하하! 그러는 당신에게는 누더기는 이제 필요 없으실 것입니다. 월요일에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