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2서 1:8) 온전한 상
(요이1: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이제 요한이서를 살펴 볼 차례입니다. 성경이 점점 얇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깊은 강으로 들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은 나와 함께 성경공부에 참여 하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라 믿습니다. 요한이서는 아주 짧은 편지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 보면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축소판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요한일서를 공부하신 분이면 요한이서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1절에서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이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하였습니다. 여기서 장로란 사도 자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교회 안에서 존경을 받을 만한 자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는 초대교회 당시 지방교회의 사역자를 뜻합니다. 바울은 제자들과 함께 각 지역을 선교하면서 각 지역마다 합당한 자들을 장로로 세웠습니다(행14:21-23). 그러므로 장로들은 각 교회의 책임자들로서 성경말씀을 가르치며 회중들을 돌보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이 편지의 특별한 것은 수신자가 부인과 그의 자녀라는 데 있습니다.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여기서 '부녀'라고 기록된 헬라어 '큐리아'는 존경받는 여주인을 뜻합니다. 큐리부인이란 소설이 있듯이 중세 이후부터 존경받는 여인에게 ‘큐리아’라는 호칭이 붙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큐리아가 라틴어로는 '마르타'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가족에게 보내지는 서신이라고도 합니다. .
그러나 오늘날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는 이 서신이 누구에게 보내진 것이냐의 사실성을 가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서신이 가정 교회에게 보내진 것이라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욱이 오늘날 대형교회 중심의 우리 교회의 현실을 볼 때 가정채플의 근간이 된 이 서신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바울 서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대교회에서의 문제는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는 성경적 지식에 대한 균형이며 두번째는 교회 안에서의 질서이며 세번째는 이단에 대한 경계였습니다. 그로하여 바울은 로마서와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서에서 교리적 지식을 가르쳤고 또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고린도후서 그리고 디모데서에서는 교회 안에서의 성도의 질서를 언급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질서라 함은 먼저 그리스도인 가정의 안녕과 질서가 최우선이라 하겠습니다. 그 당시는 아직 중세 제도권 속에 있어서 여자들의 인권이 무시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인격의 평등을 주장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여인들의 활동이 커졌으며 또 어느 지역에서는 여인들에게 나타난 은사로 하여 교회에서의 남성들의 활동이 오히려 위축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를 살펴 보더라도 여성들이 그 주도권을 갖고 있다시피 합니다. 최근에는 각 교단마다 앞을 다투어 여목사 제도를 도입하여 교세를 확장에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무지한 여목사들이 오늘과 같은 평등사회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가부장적이고 비평등적인 성경기록은 삭제하여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성경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기록하여 하나님 교회의 절대 권위와 질서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요한이서의 편지는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내면적인 암시가 게시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진리와 사랑의 변증
우리가 사도 요한의 서신들을 살펴볼 때 그 특징은 진리와 사랑에 대한 변증이라 하겠습니다. 요한은 본 서신에서도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진리와 사랑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진리가 사랑 앞에 언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는 진리의 상실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의 실천에 관하여는 말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하여는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누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가 행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진리라 함은 그리스도의 인격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17절에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증거하였으며,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말씀 하였으며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 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하였습니다. 따라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우리 믿는 자들의 영혼을 밝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란 그리스도의 인격이며 성도의 인격이며 교회의 인격인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그의 진리의 영 곧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그가 우리 안에 거하여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의 삶 속에서는 진리로 충만해야 하며 그 진리로 말미암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아버지께 간구하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17:17) 기도하셨고, 빌라도를 향하여는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요18:37) 증거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진리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진리 가운데 살아 갈 수 있을까요?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펠로우십)이 있게 하려 함이라’(요일1:3) 증거 하였으며 오늘 서두에서도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2) 기록하였습니다.
*사랑의 이유
흥미롭게도 사도 요한은 서두에서 자기가 이 편지를 쓰는 이유를 말하여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 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쁜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러한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1,2)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사도들과 함께 진리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그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진리의 전파자 곧 사도와 함께 거하여 영원히 함께 할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 서신의 구조와 문맥을 유심히 살펴 볼 때 무엇인가 또 다른 각도에서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3절에서 요한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도서신을 살펴 볼 때 사도들의 대부분의 편지들은 은혜와 평강에 대한 기원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은혜란 헬라어 ‘카리스’가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마르지 않는 샘이라 한다면 히브리어 살롬에 해당하는 ‘평강’을 뜻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하나님의 샘으로 인하여 받은 축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은혜’는 그 시대의 이방인들이 추구하는 매력있는 삶의 이념이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 곧 재물과 건강과 영혼의 평안을 삶의 근간으로 삼았습니다.
헬라어 은혜라는 말에서 은사라는 말이 파생된 것을 생각할 때 그 당시 헬라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신적 은혜를 추구하였으며 유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나타난 삶의 축복과 영혼의 복을 추구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요한은 이방에서 교회의 근간이 될 가정채플을 이끌어 가는 부녀에게 은혜와 평강에 긍휼 곧 하나님의 지극하신 자비를 기원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들을 디모데서와 디도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하여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 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딤전1:2) 기원하였고 디도에게도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딛1:4) 기원했습니다(한글성경은 긍휼이 빠짐).
우리가 이러한 서간문의 공통점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사도들이 은혜와 평강을 기원한 것은 교회를 향한 메시지였으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함께 기원한 것은 그의 제자들을 향한 편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복음의 아들 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기원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그 당시 복음사역에 헌신한 사역자들이 얼마나 외적인 핍박과 내적인 고통을 감수해야 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편지는 이방 지역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핍박을 무릅쓰고 교회를 개척하는 가정채플의 주역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갖고 쓴 편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4절에서 "너희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하였습니다. ‘너희 자녀 중에’라는 말씀을 통해 그의 자녀들이 모두 진리의 계명대로 행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문제는 교회 지도자들을 심히 걱정케 하는 일입니다. 성도들 모두가 하나되어 진리에 입각한 믿음 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도 요한은 여기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명이라 하지 않고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이라 언급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들은 믿음의 진보를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구약적인 가르침에 충실하고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5절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요한은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과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이미 요한1서 2장 7절에서 언급한 것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요한은 그 당시 교회와 성도들에게 새 계명에 대한 논리를 변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 계명에 대한 바른 정의를 갖고자 한다면 이 말씀이 처음 언급된 요한복음 13장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13:34)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계명에서 성취할 사랑의 기준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입니다. 사실 이 주제가 요한복음 13장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는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 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끝까지 사랑하였다’ 는 말씀에 대하여 깊은 사고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끝까지’란 완성의 의미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손수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본으로 행하신 세족식에 대하여 그 의미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13:10)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다는 아니라는 것은 갸룟 유다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을 씻긴다는 것은 영적 성결을 뜻하며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은 교리적으로 다시 더러워질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은 그들의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도토리 키재기 하지 말고 더러워진 서로의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사도요한은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나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6) 기록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교회가 서로 반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서로 발을 씻겨 온전한 영적 성결을 이뤄가야 할 주의 형제들이 교만하여져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반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복음적 상황입니다. 이미 요한 1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그노시스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 왔고 많은 교회들은 외세의 핍박을 받으며 진리의 분변에 대한 혼란으로 내환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때는 아직 성경이 계속 써 내려가던 때이므로 사도나 전도자들을 통해서 말씀이 전달되었기 때문에 교회들은 구약의 말씀을 분변하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야 했습니다만 마음이 교만하여 말씀 밖을 넘어서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가끔 미국을 방문하여 그곳에 있는 한인 갈보리채플 형제 사역자들과 만나곤 합니다. 사실 나의 마음은 그들과 어울려 진리의 지식을 함께 분변하고 또 위로의 교제를 위해 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과 만날 때마다 상당히 큰 상처를 받고 돌아 옵니다. 그들은 권위적 위치에서 나를 내려다 보려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함께 된 그리스도의 종이며 갈보리채플의 사역자입니다. 우리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베푸신 사랑을 서로 베풀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님을 비롯한 마이크 멕킨토시 목사님은 내게 진실한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몇 년에 한번씩 만날 뿐인데도 그들은 얼싸안고 나를 환대하며 위로하고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그들 눈에는 아직 내가 온전한 그리스도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였을 터인데도 그들은 나를 자기의 형제로 대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넉넉한 사랑으로 나의 더럽혀진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 은혜로 하여 나는 아직 갈보리채플에 남아 나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는 말은 주께서 새 계명을 주실 때 주님의 뜻하신 바를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새 계명을 주실 때 먼저 세족식을 베푸시며 내가 주인과 스승으로 너희의 발을 씻긴 것은 본을 보인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역 중 서로 잘못된 것을 권고하며 책망하여 바로잡아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영혼들이 잘못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적그리스도
이제 요한은 7절에서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욱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이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요한일서 4장에서 언급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잘못된 지식들이 만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세계 가운데 만연된 헬라의 그노시스 사상이 유대교에 유입되어 그리스도교로 전향한 유대 지도자들 중에서도 이 교리를 따르는 사람이 생겨 누룩처럼 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교리
사도요한은 9절에서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지내쳐'(프로아곤)라는 말은 미리 앞서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여 기독교를 개발하려는 진보적 사상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한 '교훈'은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신학사상을 말하는 것이지요. 오늘날도 얼마나 잘못된 교리들이 우리 교회들 속에 범람하고 있습니까? 더욱이 최근과 같이 신학교가 난무하는 가운데 잘못된 교리들이 사람들의 영혼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자들을 경계하여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도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이니라"(10) 하였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교리들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나는 작년에 중국과 일본과 미국을 돌아 왔습니다. 우연치 않게 한국교회들을 돌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이들이 어떻게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들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초등학문도 깨우치지 못한 체 축복만을 외치며 열변을 토하는데도 아멘 아멘하는 성도들을 바라보면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의 실정입니다.
사도요한도 쓸 것이 많지만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않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한다 하였습니다. 그 당시 조건으로 보아 글로 편지를 써서 설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친히 얼굴을 맞대고 진리와 사랑을 나눌 때 임하는 기쁨의 충만을 서로 체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후일 내가 제자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이런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의 얼굴을 면대하고 진리를 분변하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진리의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 땅에 충만해질 것을 확신합니다. 부디 그리스도의 사랑을 끝까지 성취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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