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장-15장 리뷰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
우리는 지난주 요한복음 10장부터 12장까지 공부하였다. 먼저 우리는 10장에서 양의 문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보았다. 이는 인생의 멸망시키는 악한 영들로부터 주의 성도들을 지키시는 교회와 그의 사역자들의 본분을 간접적으로 비유한 말씀이다.
또 주님은 11장에서 자신을 가리켜 부활이요 생명이라 말씀하셨다. 이는 인간의 정체성이 그 육신이 있지 않음을 설명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단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공짜로 영생하는 복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12장에서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들에게 주님은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하셨다(요12:36). 여기서 우리는 과연 우리가 빛 가운데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직 세상 사람들과 같은 물질만능의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은 아직 어두움에 있는 것이고 그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빛의 아들이 될 수 있을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이 해답을 듣게 된다
오늘 우리는 13장부터 15장까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말씀들의 대상이 열두 제자들이다. 앞에서 하신 말씀이 유대인들과 주를 믿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 할 때 오늘의 말씀은 제자된 우리 교회에게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말씀이다.
자 우리가 요한복음 13장 13절을 함께 읽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한복음 13장에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 하나는 세족식이며 또 하나는 새 계명이다. 그러나 핵심은 지금 우리가 읽은 13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에 있다. 이는 ‘선생과 주’가 해야 할 마땅한 본분을 설명하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주님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4-15)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선생과 주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선생은 누구를 말하는가? 성경에서 선생이란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교훈과 교리를 가르치는 종교적 스승(다다스칼로스)을 뜻하며 또 하나는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노무다다스칼로스)들을 뜻한다. 여기서 사용된 선생은 영적 교리나 교훈을 가르치는 ‘디다스칼로스’가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여 올바른 교리와 교훈을 가르치는 스승을 뜻한다.
그러면 ‘주’란 어떤 역활인가? 이 단어는 권능을 가진 주인을 뜻하는 ‘퀴리오스’라는 헬라어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현신 세 천사를 만났을 때 사용한 단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여 ‘주’란 내 인생의 주인 곧 삶의 주관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의 주와 스승으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너희의 제자들에게 이같이 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꼭 발을 씻기라는 말이 아니라 잘못된 교리와 교훈에 발을 적신 제자들을 바로 잡아 주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발 씻기를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8) 하셨다. 만약 당신의 아들이 잘못을 하고 있는데도 그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면 당신은 아비로서의 직무유기이다. 이와 같이 스승은 그 제자들의 더러운 부분을 씻어 그 부족한 부분을 온전케 해야할 책임이 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종이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이 발이 더러워졌다면 그 발을 누가 씻기겠는가?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자기들과 다른 견해를 갖는 목사들을 내어 쫒고 또 이단으로 정죄하기 일 수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과 같이 수많은 교파로 갈라진 것이다. 오직 한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갈기갈기 찢어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10절에서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온몸이 깨끗하니라” 말씀하셨다. 더러워진 것만 닦으면 된다는 말씀이다. 온몸을 깨끗게 하신 것은 주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34절에서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하셨다. 이는 주께서도 그 제자들이 온전치 못하였으나 그들을 끝까지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부족한 제자들을 용납하고 사랑하라 하신 것이다. 주님은 세번이나 스승을 부인한 베드로도 용납하셨다.
전세계 교회들이 갈보리채플이 교단을 이루지도 않고 또 서로 분열되고 갈라지지 않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단 한가지다. 스승이 제자들을 잘 가르치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갈보리채플 목사가 되어 여러가지 잘못된 일을 했을 때 어떤 한국인 목사는 나를 고발하여 갈보리채플에서 내어 쫓아내자고 말했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님은 그가 갈보리채플로 부름을 받았으니 주께서 그를 가르치실 것이다 말씀하시며 오히려 그들을 책망하셨다 한다.
II. 요한복음 14:6 ‘길, 진리, 생명되신 예수’
이제 요한복음 14장 6절을 함께 읽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 예수를 떠나 보내야 하는 근심에 쌓인 제자들을 위로하며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신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가는 길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시며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인격이시며 생명의 핵심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 각별히 유의할 사항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우왕좌왕하지 말라 하신 것이다.
주님은 10절에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들을 하는 것이라”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롭게도 주께서 하신 “말씀들’이 ‘일들’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진리의 능력을 언급하신 것으로 누가 주의 말씀대로 실행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나타날 것을 시사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를 성취하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 곧 진리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그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고 우리 속에 거하실 것이라 말씀하셨다. 여기서 보혜사란 선생, 변호사, 의사와 같은 보호자의 역할을 뜻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길로 진리로 생명으로 삼은 사람은 평안할 것이며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
III. 요한복음 15:1 “참 포도나무와 가지”
이제 요한복음 15장 1절을 함께 읽읍시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여기서 자신을 가리켜 “내가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과 제자들과의 사역적 관계를 언급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포도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하여 그 용도가 전혀 없다. 집 짓는 재료나 가구의 재로도, 조각을 새기지도 못한다. 오직 포도나무는 다만 그 열매를 맺는 것뿐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불에 태워질 뿐이다.
또한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은 그 가지이다. 그러나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가지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 뿐이며 열매를 맺지 못할 가지는 농부인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지를 제하여 버린다. 농부가 포도나무의 가지를 치는 것은 열매맺는 가지로 더 좋은 열매를 충실히 맺게 하기 위해 불필요한 가지를 쳐 버리는 것이다. 이는 포도나무의 영양이 다른 가지로 소모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하시며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 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목사가 된지 17년이나 된 지금에서야 알 것 같다. 사실 나는 내 스스로 열매를 맺기 위하여 전전긍긍한 것이다. 그러니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무에서 가지를 처 내지 않은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도 뭔가 생각해둘 싹 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겠다 하셨다. 이 말씀은 13절과 이어진 맥락이다. 다시 말하여 스승과 제자가 분열되지 않고 그 사랑을 지키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곧 교회가 분열되지 않을 방법이다.
여기서 주님은 교회 사역의 관계가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하신 것이다. 종과 하인의 관계를 갖게 되면 종은 언제까지라도 주인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가 되면 비밀이 없게 되고 이로서 친구를 위해 죽을 수 있다. 이에 주님은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다’(15b) 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며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 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20) 하셨다. 이 말은 친구된 제자만이 변심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제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우리가 그 안에 있어 우리 안에 계신 주로 하여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 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 말씀을 행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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