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이사야강해

(이사야9:7) ‘여호와의 열심’

이요나 2008. 12. 15. 19:46

(이사야9:7) 여호와의 열심

 

(9:7) 그 정사와 평강이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전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장차 임마누엘을 주실 것에 대한 예언을 살펴 보았다. 이는 700년 후에 사실로 나타났고 오늘날 우리는 이 땅에 임마누엘이 탄생 된 2000년 후대에 살고 있다. 어쩌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일은 관심 없는 이스라엘의 역사 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임마누엘에 대한 은혜와 영광을 금치 못한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증언을 통하여 임마누엘의 정체에 대하여 살펴 보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임마누엘의 탄생을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그 정사와 평강이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전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9:7) 하였다. 여기서 정사란 통치의 주권을 뜻하며 평강은 영생에 속한 하나님의 복의 누림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가 끊어지지 않고 영혼의 평강이 영원할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면서 각 나라와 방언과 민족들을 망라하고 통치권 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마치 인생은 통치적 주권을 쟁취하기 위해 사는 것같이 권세를 향한 욕망에 목숨을 건다. 이 싸움은 국가간의 전쟁 뿐이 아니라 인생의 삶의 모든 범주에서 일어나며 그를 통해서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며 국가와 사회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 말하였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세계를 정복하고 인류의 평화를 도모한 영웅은 하나도 없었다. 세상의 영걸이라 하는 영웅들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살육과 탈취의 역사를 남겼을 뿐이다. 고대의 영걸이라 불리운 니므롯이나 바벨론 제국을 일으킨 누부갓넷살 왕이나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든, 로마의 제우스 황제든 그 누구도 이 세상을 온전한 통치로 이끌어 낸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한 시대를 사로잡던 시대의 영걸이었을 뿐이며 역사 속의 한 페이지일 뿐이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우리에게 그 통치와 평강이 더 없이 무궁한 분을 소개하고 있다. 그 분이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714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임마누엘을 가리켜 징조를 주실 것이라 하였다. 징조란 장래에 일어날 일을 알리기 위한 증표이다. 따라서 징표가 되기 위해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로서 우리 인간과 서로 교통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는 징조 곧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완전한 인격체라야 한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그를 소개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서 그것을 보전하실 것이라 증거하였다. 다윗의 위에 앉아서란 두가지 의미가 있다.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을 따라 성취될 것을 뜻하며 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열방을 통치할 것을 뜻한다. 그는 계속하여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하였다. 이는 온전한 임마누엘의 세상이 오기까지는 험난한 역사와 인내의 세월이 포함되어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지 2000년이 넘은 지금에도 아직 이 예언을 성취되지 못하고 있다. 아직 우리는 세상의 지배와 통치 속에서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고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날을 거듭하고 있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그 믿음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지만 오늘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영과 혼과 육체의 삶이 평안한 것은 아니다. 다만 믿음 안에 우리의 영혼의 평강이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인생의 모든 고통을 풀고 영과 혼과 육의 더없는 평강을 허락하실 통치자 되신 임마누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하여 살펴 보자.

 

I. 임마누엘의 약속(7:14, 8:8,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He nam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9:6)

 

A. 흑암 속의 땅(1-7)

이 언약은 장래를 향하여 준 메시지가 틀림없다. 이사야 선지자는 1절에서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이사야는 자신도 갈 수 없는 시간 곧 임마누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때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메시지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마태를 통하여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취었다 증거 되었다. 이로서 임마누엘 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나세렛 사람으로 오신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요한복음 1장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예수께서 부르신 안드레의 친구 빌립이 예수를 만난 후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1:45) 하였더니 나다나엘이 말하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답하였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칭송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7:52) 꾸짖었다. 이처럼 갈릴리 지역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사람들의 주거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는 하나님의 선한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에게 분배된 땅 중에서 특별히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갈릴리가 이방인 사각지대로 불린 것은 그 지역이 처음부터 지형적으로 척박한 땅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 지역들은 이방인접 지역으로 예로부터 정치적 영향을 받지 못하고 정복자들에 의해 침공을 당하는 진입로였다.  더욱이 스블론과 납달리 땅은 앗수르에 의해 제일먼저 정복되어 그 지역은 심하게 파괴되었고 정치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척박한 땅으로 전락되어 이스라엘 사람 중 빈곤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고 말았다.

 

오늘 이 메시지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임마누엘의 은혜가 암흑과 같이 어두운 삶 속에서 삶의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먼저 나타날 것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방국가와 같이 문명의 혜택에 풍부한 나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복이 있는 자들의 특혜처럼 보이기 십상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임마누엘의 영화로움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부로 인하여 임마누엘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임마누엘의 이름은 신적 호칭을 얻기 위한 종교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직도 이 말씀은 통치와 문명의 사각지대에 신음하는 백성 곧, 흑암에 앉은 백성들에게 큰 빛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취고 있다. 수년전 나는 중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눈부시게 발달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내가 방문한 중국 땅에는 내 어릴적 어미 품에서 굶주리고 있었던 전쟁의 잔재로 굶주리며 질병에 시달리던 그 시절을 다시 보는듯했다.

 

또한 우리는 메스콤을 통해서 이처럼 찬란한 문명을 누리고 있는 21세기 한 모퉁이에는 먹을 양식과 물이 없어 산에서 돌을 캐어 먹고 흙탕물을 구하기 위해 수십리 길을 달려가야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또 내가 얼마나 모순된 믿음의 사람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선을 보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셨다. 나는 이 날이 곧 올 것이라 생각한다.

 

B. 창성케 하실 주의 나라

 

  계속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3,4) 증거하였다.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추수하는 즐거움과 또하나는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이다. 추수 때란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오랜 인생의 여정이다. 복음의 씨앗도 이와 마찬가지다. 한 알의 씨앗이 그 알곡의 무리 가운데서 떨어져 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긴 여정이 필요하다. 또 탈취물이란 전쟁의 승리의 기쁨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악의 전리품을 탈취한 것이다.

 

후일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53:12a) 하였으며 또 미가는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지어다 내가 네 뿔을 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 내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대주재께 돌리리라 (4:13) 하였다. 이 말씀은 모두 이 땅의 모든 영혼들의 주권이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지금은 주를 대적하는 자들에 의해 압제를 받고 있음을 뜻한다.

 

  C. 임마누엘의 통치 주권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이 압제자의 고통을 받았던 민족이다. 그들은 430년 간의 애굽의 종살이 속에서 종의 멍에를 메고 채찍을 맞으며 시작도 끝도 없는 노예의 삶을 살았었다. 이 압제자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그들 속에 나게 하시고 그들의 고통을 보게 하시어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의 손으로 백성들을 속량해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내셨다.

 

그런데 그들 어깨에는 또 다른 압제자의 멍에와 막대기가 놓여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이는 모두 죄의 수레바퀴를 메고 살육하는 기계를 만들고 전쟁을 일삼는 세상 통치자들의 욕망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임마누엘의 날에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아지리라(5) 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에 역사하는 있는 통치의 전쟁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원래 이 세상의 모든 것과 하늘과 땅에 속한 것 우주와 또 영계에 속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다스림의 통치 권세의 영광을 자기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은 사람에게 주시고자(1:26)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1:28a) 하셨다.

 

여기서 정복하라는 군사 용어로서 어떤 존재들에 대한 경각심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못하고 자기에게 주신 통치의 영광을 사단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 이후로 이 땅에는 악의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고 하나님의 피조물 인간은 모두 그의 종이 되어 멍에와 째칚을 맞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주님을 경배하지 않는 모든 국가에서 볼 수 있다.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을 가리켜 귀신의 왕이라 칭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사단이 사단을 어찌 쫓아 내느냐 하시며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3:26)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악한 영들의 지배로 말미암아 그 영혼을 빼앗기고 죄의 종살이를 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를 위해 죄를 사하기 위해 영존하신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의 제물로 드리신 것이다.

 

II. 이스라엘의 재난(8-20)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그들이 알 것이어늘(8,9)

  A. 이스라엘의 복(8)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처럼 임마누엘의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스라엘 백성의 택하심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수천년 동안 하나님의 각별하신 섭리 가운데 축복을 받아 온 민족이다. 우선 하나님의 짝이란 지위를 얻었고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율법을 통하여 의로운 백성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은혜를 입었으며 조상 아브라함과 함께 영생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언약을 입은 민족이다. 바울도 그들의 축복을 말하여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양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로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 아멘(9:4,5)고 찬사하였다.

 

 

그러나 복에 겨운 그들은 자기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여 이방들과 짝하여 이방의 풍속을 좇고 또 그것도 부족하여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유브라데의 큰 하수를 즐기므로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책망하시고 권고하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세 임하시게 하셨은즉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하여 마음으로 말하기를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가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도다(8-10) 증거하였다.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셨다는 말씀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뜻하며 이미 야곱이 하나님의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떠나지 않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할 것이라는 계시를 전하였다. 그러함에도 북왕국의 지도지파인 에브라임과 그 도성이 그 형제된 유다와 예루살렘을 넘어뜨리기 위해 아람과 불르셋을 짝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또한 벽돌 무너지면 다듬은 돌로 대신하고, 뽕나무가 찍히면 백향목을 대신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언약과 택하심을 따라 백성의 지도자를 삼아 이스라엘을 다스리고자 하셨거늘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사람의 손으로 다듬고 이방의 조화를 받은 자들을 지도자로 삼고 있음을 언급하신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는 국가가 요구하는 대학 수준의 신학교가 아닌 각 교단의 목사들을 중심으로 제자 양성을 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군소신학은 더욱 그 의미가 쇠퇴하여지고 있고 신학교는 문교부의 지침에 따라 석사와 박사의 학위를 가진 자들을 채용하여야 하므로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젊은이들을 채용하며 한국교회는 날이 갈수록 자유주의 신학으로 물들고 있다.

 

미국 갈보리채플은 신학교 제도가 없다. 다만 성경대학이 있을 뿐이고 모든 교수진은 갈보리채플 사역자들로 구성하였다. 언젠가 이 점이 궁금하여 관계자에게 물었더니 대학교로 승격을 하지 않는 이유는 국가 요구에 맞춰 경영을 하지 않고 부르심과 택하심을 중심으로 세우신 성경교사에 의한 제자사역을 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그로하여 하나님은 아람과 팔레스틴을 일으켜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키로 하신 것이다.

 

B. 이스라엘의 머리와 꼬리를 자르심

그러나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마음을 돌려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고 더욱 교만해지고 악하여 망령된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는 곧 백성들을 지도자 곧 장로들과 거짓 선지자들로 인한 것으로 이제 하나님은 그 백성의 머리와 꼬리를 자르고 종려가지와 갈대를 끊으시겠다고 하셨다. 여기서 머리와 종려가지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세운 백성의 통지자들을 말하며 꼬리와 갈대란 거짓 선지자들로서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백성을 미혹함을 뜻한다. 결국 이러한 일들은 다시 적그리스도 때에 나타날 현상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를 거두시고 백성의 힘인 장정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고아와 과부들을 무론하고 그들의 악행을 불태워 질려와 형극이 불에 살라 섶나무처럼 소화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 결과 그들이 우편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좌편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하였다.

 

우리 말에 소경 제 닭 잡아 먹는다는 말이 있으며 동족상재이란 말이 있다. 형제가 서로 물고 문다는 뜻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의 형국이 이렇지 않은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교회들이 서로 교리를 빙자하여 서로 능멸하고 그도 모자라 이단 정죄하고 있지 않은가? 이사야 선지자는 이들의 형국을 말하여 그들이 형제를 서로 아끼지 아니하고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며 또 그들이 연합하여 유다를 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지 않을 것이라 기록하였다. 그들은 이제 음부에서 실로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