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이사야강해

(이사야15-17장) “사필귀정이냐? 토사구팽이냐?”

이요나 2008. 12. 31. 11:22

 

 

 

(이사야15-17) “사필귀정 VS 토사구팽

 

(16:4) 나의 쫓겨난 자들로 너와 함께 있게 하되 너 모압은 멸절하는 자 앞에서 그 피할 곳이 되라 대저 토색하는 자가 망하였고 멸절하는 자가 그쳤고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멸절하였으며

 

우리말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또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이 있는데 토끼가 죽으면 토끼를 잡던 사냥개도 필요 없게 되어 주인에게 삶아 먹히게 된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 없게 되면 내어버린다는 말이다.

 

오늘날과 같이 인심이 흉흉하고 사람 속이는 일이 빈번한 시대에는 토사구팽이란 말이 별로 흥미롭지 않게 들리지 않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물고 물리고 서로를 이용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를 믿어 의인된 성도들에게는 토사구팽이라는 말은 두렵기만 하다. 우리에게는 오히려 사필귀정이란 말이 맞는다.

 

흥미롭게도 성경은 우리 믿는 자들 가운데서 사필귀정과 토사구팽의 원리를 함께 적용되고 있다. 물론 성경의 기본 원리는 사필귀정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만약 그 누구라도 그의 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이끌려 가면 결국 그는 토사구팽이 될지도 모른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33:14-17) 하였다.

 

이 뿐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나님안에 계획된 이상을 많은 비유로 말씀하셨다. 바울은 이미 우리에게 복음이 땅끝까지 이르렀다 하였고 내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다 가르쳤음으로 모든 사람들의 피에 대하여 무관하다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두 번째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 버리거니와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가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1:22-24) 하였다.

 

그러함에도 누가 이 말씀을 업신여기고 말씀을 잊어버린듯 자신을 더러움에 내어버리면 그는 결국 토사구팽 될 것이다. 성경이 이미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4:19) 하였고 다시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이 여기라“(1:23)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I. 모압의 멸망(이사야15)

(15:9) “디몬 물에는 피가 가득함이라 그럴지라도 내가 디몬에 재앙을 더 내리되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에 남은 자에게 사자를 보내리라

 

A.   이스라엘과 모압의 내홍

이스라엘과 모압의 성경적 대적관계는 출애굽기에서 발견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속함을 입어 모세의 인도를 받아 애굽의 400년간의 종살이로부터 출애굽하게 되어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들의 목적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불가불 모압의 땅을 통과하여야만 하였다. 이에 모세가 모압 왕 발락에게 사자를 보내어 우리가 우리 떡을 먹고 우리 물을 먹을 것이니 우리가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고 청하였으나 이스라엘의 영광을 질투한 모압왕 발락이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이방인 선지자 발람을 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재물과 명예욕으로 가득한 예언자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고자 할 때 말 못하는 나귀의 가로막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입으로는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이 지나는 행로 앞에 이방신당의 일곱 제단을 쌓아 그들의 종교행위를 본 이스라엘 남자들로 하여 무녀들의 미혹을 받아 음행에 빠지게 하였다. 이 사건은 신약에서 계속 경계 되는 교훈으로 이와 같이 아직도 세상에는 성도들을 진리로부터 눈을 가리고 종교활동으로 또 다른 영적 간음에 빠지게 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다.

 

그후 모압은 후일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 사울 때에 이스라엘에게 예속되었고(삼상14:47) 다윗 왕 때에는 완전히 정복되어(삼하8:2) 아합 왕 때까지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쳐왔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아합왕 이후 이스라엘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모압왕 메사(measha)가 조공 거부(왕하1:1, 34) 하므로 이스라엘의 대적관계가 시작되어 모압은 주변국가들과 동맹군을 맺어 유다를 침공(왕하3:1-17)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모압의 죄를 물어 그들이 하루 밤에 멸망을 받게 될 것이라 예고한 것이다.

 

B.   모압의 곡성

이사야 선지자는 모압의 멸망을 경고하며 흥미롭게도 그들의 멸망이 하루밤에 모압의 수도 알(Ar, ; 랍바)과 대도시 길(Kir)이 멸망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오늘날과 같이 무기가 발달한 시대 같으면 이 이야기는 어렵지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전력이란 결국 마병과 인해전술과 같은 전략일 뿐인데 하루 밤에 장구한 역사를 가진 모압이 멸망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이 디본 신당에 올라가 의 무용 드보(헤스본 남동쪽 5km)와 메드바(헤스본 남쪽 10km, ; 마데바)를 위하여 슬피 울 것이라 예고하였다. 이는 모압백성들이 생존을 기원하며 도망할 곳을 찾고 있는 모습을 서술한 것이다.

 

그들은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머리털과 수염을 밀고 굵은 베 옷을 동이며 지붕에 올라거 애통할 것이라 하였으며 그들의 통곡 소리가 변방 지역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야하스 성읍까지 들리므로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의 혼이 두려움에 떨었다고 기록하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모압의 멸망을 예고하면서 그들의 처절한 모습을 바라보며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애통하며 모압의 귀인들조차 피할 곳을 얻지 못하고 조상 롯이 도망하던 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로 도망하여 울며 루힛 비탈길로 올라가며 패망을 부르짖었다고 증거하였다. 그들이 얻은 재물을 갖고 시내를 건느려했으나 디몬 강물에 피가 가득함과 같이 더 이상 어디로 피할 곳이 없다 하였고 그럴지라도 주께서 디몬에 재앙을 더내리실 것으라 하셨다. 그야말로 다윗이 말한 바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139:7,8)와 같다.

 

또한 이스야 선지자는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에 남은 자들에게 사자를 보내리라 예언하였다.여기서 모압에 도피한 자들과 그 땅에 남은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쩌면 이들은 유다의 멸망에서 피한 유대인들일 수도 있고 또 예로부터 그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일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하나님은 멸망 중에서도 자기 백성을 위해 피할 길을 준비하심을 알 수 있다. 이 예언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모압은 B.C.645년 앗수르 왕의 침공을 받았었고 후일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정복되었다(4:7). 그러나 우리는 예언의 이중성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II. 모압의 토사구팽(16)

(16:5) “다윗의 장막에 왕위는 인자함으로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공평을 구하며 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A.   은혜의 역사

여기서 먼저 우리는 오늘 멸망을 당하는 모압에 대하여 성경적 역사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모압의 기원은 창세기 19장에서 비롯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모압민족의 시작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애지중지 여기던 그의 조카 롯의 후손이다.

 

롯은 원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함께 데리고 나온 조카 아들이다. 어쩌면 롯의 부친이 일찍 죽었기 때문일지 아니면 아브라함의 처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을 안 아브라함이 자신의 후계자를 잇기 위해 데리고 나왔는지도 모른다.

 

롯이 소돔으로 들어간 내용은 이미 우리가 창세기에서 공부한 바 있다. 아브라함이 롯을 데리고 벧엘에 이르러 그곳에 장막을 치고 거주하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어 아브라함과 롯이 모두 그 소유가 많아 한 곳에 함께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그의 하속들이 서로 다투기 때문이다(13:6-8).

 

이에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 우리가 한 골육이나 다투지 말고 네 앞에 온 땅이 있으니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 하니 롯이 바라보니 소돔과 고모라 땅이 기름지고 마치 에덴동산과 같으므로 그곳을 택하였다. 이미 성경은 거기서 소돔 사람은 악하여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기록하였다(13:13).

 

그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나무 수풀이 있는 곳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호와께 단을 쌓았고 롯은 소돔으로 들어가 그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또한 창세기 14장에는 당시 시날왕과 그 지역 다섯왕들이 동맹을 맺고 소돔과 고모라 왕 연합군과 의 전쟁이 소개 되었다.

 

소돔왕이 시날왕을 십삼년간 섬기다가 .배반을 하니 시날왕 연합군이 소돔을 처 소돔사람들과 모든 재물을 탈취하고 또 그 곳에 살던 롯과 그의 재물도 노략을 당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380인의 가신들을 이끌고 밤에 기습하여 조카 롯과 빼앗겼던 재물들을 찾았다. 여기서 그는 살렘 왕 멜기세덱을 통하여 주의 현현을 보게 되고 그로부터 천지의 주재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축복의 빎을 받게 된다.

 

그후 우리는 창세기 19장에서 다시 롯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미 그는 소돔성의 관료가 되어 있었고 소돔 사람들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 심령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때가 다하여 하나님께서는 소돔을 멸하시려고 세 천사를 보내셨는데 그 일을 의인 아브라함에게 전하게 되었다. 천사들에게 소돔을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로 행하실 것이 아닙니까? 그곳에 의인 오십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의인 오십이 있으면 그들로 인하여 소돔을 멸하지 않겠다는 답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곳에 의인 오십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므로 다시 45인이 있으면, 40인이 있다면, 아니 삼십인, 이십인 마지막으로 더 간청하여 십인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간청을 하였다. 하나님은 만약 그곳에 의인 십인이 있다면 그들로 인하여 내가 소돔을 멸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아마 아브라함은 최소한도 롯이 그의 직계 가족들에게만은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돔성에 찾아 들어간 천사들은 의인은 커녕 사람으로 현현한 자신들과 성적관계를 갖고자 하는 소돔성 남자들에게 봉변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롯이 사람들 앞에 나서 내게 남자를 가끼이 하지 아니한 딸이 둘을 줄 터이니 내 집에 들어 온 이들에게는 악을 행하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퍠역한 소돔 사람들은 롯을 멸치고 집안으로 들어 올 기세였다. 이에 천사들이 그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롯을 집안으로 끌어 들이고 성 중에 네게 속한 자 네 자녀나 사위들을 성 밖으로 끌어내라고 하였다.

 

이에 롯이 밖으로 나가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떠날 것을 고하였지만 그들은 농담으로 여겼다. 천사들은 롯을 재촉하여 롯의 아내와 두딸을 이끌어 내어 뒤 돌아 보지 말고 산으로 도망을 가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롯은 내가 산까지 갈 수 없으니 작은 성 소알에 들어 가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결국 롯은 그 아내와 두딸과 함께 소돔을 나와 소알로 행하였으나 그의 처는 천사의 당부의 말을 믿지 못하고 뒤 돌아 본고로 저주를 받아 즉시로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롯은 두 딸과 함께 굴 속으로 피신을 하였다.

 

문제는 여기서 발단 되었다. 롯을 딸이 소돔이 멸한 것을 알고 아버지는 늙어 다시 장가들 수 없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릴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그에게 들어가 인종을 잇게 하자고 큰 딸이 먼저 아비에게 술을 마시운 후 롯에게 들어 가 잉태를 하여 아들을 낳아 모압이라 지었고 작은 딸도 아비에게 아들을 얻어 그 이름을 암몬이라고 지었다. 이들이 오늘 우리가 살펴 보고 있는 모압의 조상이요 또 이스라엘의 영광을 훼방하던 암몬족의 조상인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과 모압의 역사적 관계를 보았을 때 모압의 시초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동참한 최초의 민족이다. 아브라함이 아직 자식을 얻지 못했을 때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약속의 땅으로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이들은 부르심에 합당한 은혜에 부응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육신의 욕망을 따라 세상을 선택함으로서 결국 그들은 그 마음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세상의 지배를 받고 살게 되어 결국 그들은 소돔과 함께 멸망을 받았다. 

 

이는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큰 메시지이다. 아직도 우리 믿는 자들 중에는 온전한 믿음을 따라 의로운 생활을 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 속에 섞여 세상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세상사람처럼 말하고 세상사람처럼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육신적 크리스천 곧 카날 크리스천이라고 말한다.

 

B.   쫓겨난 자를 위한 봉사 명령 - 페트라

하나님은 멸망을 눈 앞에 둔 모압에게 너희는 이 땅 치리자에게 어린 양을 드리되 셀라에서부터광야를 지나 딸 시온 산으로 보낼지니라”(1) 명하셨다. 어쩌면 이는 멸망 중에 있는 모압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은혜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모압을 향하여 너는 모략을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오정 때에 밤같이 그늘을 짓고 쫓겨난 자를 숨기며 도망한 자를 발각시키지 말며 나의 쫓겨 난 자들로 너와 함께 있게 하되 너 모압은 멸절하는 자 앞에서 그 피할 곳이 되라 대저 토색하는 자가 망하였고 멸절하는 자가 그쳤고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멸절하였으며 다윗의 장막에 왕위는 인자함으로 곧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공평을 구하며 의를 신속히 행하리라”(3-5) 명하셨다.

 

이 말씀은 장차 이 땅에서 대적하는 자 세상의 통치자를 멸하실 때의 일로서 이스라엘의 남은 한 이레 곧 칠년 대환난 때의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은 오직 자신들의 민족적 염원을 성취하기 위해 세상의 왕 적그리스도와 계약을 맺고 숙원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다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3년 반이 지나면 그는 마음을 변하여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드리는 제사를 폐하고 스스로 성전에 앉아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라 할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 144000명의 의인들이 일어나 그를 대적하고 순교를 당할 것이며, 그들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그리스도의 군대를 피하여 모압땅 곧 오늘날 요르단의 페트라의 암반도시로 피신을 하게 될 것인데, 바로 이때를 위해 하나님께서 모압을 들어 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압에게 있어 이 명령은 최후의 은혜의 날이 될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장차 일어 날 일에 대한 흥미로운 말씀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자들을 모두 멸망하신 후 모든 천사와 함께 오셔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때의 로서 오늘 말씀과 무관치 않다.

 

주님은 재림하여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할 것이라 하시며, “너희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그러므로 내 아버지께 복받은 자들이여 나와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하셨다.

 

만약 그 때에 우리 한국민족 중에 누가 이 땅에 남아 있었다면 부디 이 말씀에 주목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돌보아 줄 것을 당부하고 싶다. 그 길만이 다시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먼저 들어 간 우리와 재회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7년 대환난을 잘 피하고 이겨낸 후의 일로서 그때 살아남은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지만 말이다.

 

계시록에도 이 일이 기록하여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12:6) 하였다 그곳은 바로 암반도시로 페트라일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성경 말씀을 믿고 따르는 예비하신 사람들에 의해서 장차 적그리스도의 핍박을 피하여 페트라로 들어 와 숨어 지낼 사람들을 위해 생활에 필요한 식료품과 생활용품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교육할 모든 자료들을 감추어 둔 상태하고 한다. 

 

계시록 기자는 이 때의 일을 언급하여 그 여자가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통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2:14) 하였다. 이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그곳은 천연 요세로서 신과학무기도 접근할 수 없다니 정말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가 측량할 수 없다.

 

C.   여호와의 권고와 모압의 교만(13)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하신 지혜를 알지 못하는 모압 백성들은 교만에 빠져 그 교만함이 극에 도달하여 이사야는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의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 과정이 헛되도다”(6) 기록하였으며 그들의 가지가 야셀에 미처 광야에 이르고 그 싹이 자라서 바다를 건넜었다’(8) 증거하였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그들이 장차 이스라엘을 향하여 얼마나 교만한 언행을 할 것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건포도와 떡을 위하여 슬피 울며 근심할 것이라 하였고, 이제 열국의 주권자들이 그 좋은 가지를 꺾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 포도나무를 위해 울며, 그들 가운데서 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는 사람이 없으리라’(10) 경고하였다. 또한 이사야는 모압의 고통을 예언을 하며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한 애통함이 창자가 끊어지는 수금과 같다하였고 그러나 모압 사람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 기도할지라도 무효하리라하였다(12).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이처럼 가옥하게 치시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말씀하셨음에도 그들이 그 말을 받아 들이지 않고 더욱 많이 교만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사야가 말한 전에 모압을 들어 하신 말씀이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모압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회를 만들었음이라 내가 모압에 불을 보내리니 그리욧 궁궐들을 사르리라 모압이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 중에서 죽을 것이라 내가 그 중에 재판장을 멸하며 방백들을 저희와 함께 죽이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3) 하신 말씀을 언급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장래의 일을 내다보지 못한다. 사람이 그 장래의 일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모두가 주 앞에 회개하고 그날에 있을 심판을 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공의로 말씀하시며 이 땅에서 하실 일들을 그의 택한 종들에게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을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III. 교만한 수리아와 북왕국의 멸망(17)

(17:10) “이는 네가 자기의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자기의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않은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식물을 삼으며 이방의 가지도 이종하고

 

A.   다메섹의 함락

이제 이방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는 다메섹을 향하셨다. 다메섹은 아람 곧 수리아의 수도이다. 이 지역은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인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 사이의 고원지대로 다메섹 성읍은 해발671km의 평지에 구축 되어있다. 아람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아람족의 조상은 아브라함의 아후 나홀이며 리브가의 아비 브두엘과 라반도 아람 족장이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위하여 그 종을 아람으로 보내어 사라의 친정 라반의 동생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아브라함이 이처럼 아람족의 후손을 이삭의 처로 삼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셈의 후예이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 속에서 아람 사람 중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는 엘리사에게 순종하여 고침을 받은 문둥병 들린 나아만 장군이다(왕하8:28-29). 그러나 아람은 주변의 이방국가와 합세하여 하나님의 인치신 이스라엘을 대항하였다. 더욱이 아람 왕 르신은 남 유다의 아하스 왕을 괴롭혔다. 아람은 한 때 그 세력이 커져 바벨론 제국과 연합하여 숙적인 앗수르를 대항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아람은 바벨론에 흡수되어 그 나라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를 말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다메섹을 향하여 다메섹이 장차 성읍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1)이라 경고하였다.

 

B.   에브라임의 멸망

흥미롭게도 이사야 선지자는 3절에서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의 나라와 아람의 남은 백성이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같이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 하였다. 사실 이 말씀은 후일 사르곤이 사마리아를 두번째 공격하여 폐허로 만들면서 성취되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에브라임과 아람을 함께 거론 하신 것은 아람 곧 수리아가 남유다와 전쟁을 하기 위하여 유다의 형제 된 나라 북이스라엘 곧 에브라임의 후예들을 끌어 들여 연합하였기 때문이다(왕하16:5).

 

특별히 이사야가 다메섹과 아람을 가리켜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같이 되리라한 것은 이스라엘이 잠시 흥왕하였으나 멸망을 당한 것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진 아람도 그렇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며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누구와 함께 마음을 같이 하며 누구와 함께 연합하느냐 하는 삶의 동반자의 선택이다.  과거 아람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였을 때에는 하나님의 기업을 함께 이어갈 반려자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가 하나님이 축복하신 민족을 대항하여 다른 이방과 연합하였을 때 그들은 결국 그들과 함께 멸망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들이 감람나무를 흔들 때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실과 이 삼 개가 남음 같다고 하였으며 그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자를 처다보겠으며 그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바라볼 것이며, 그때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택한 아세라 신과 태양신을 바라보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계속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유를 말하여 내가 자기의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자기의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않은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식물을 심으며 이방의 가지로 이종하고 내가 심는 날에 울타리로 두르고 아침에 너희 씨로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10,11) 경고하였다.

 

나는 이처럼 불행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세상과 짝지어 점점 교만해져서 결국 그날이 이르러서야 자신의 몰골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영광은 떠나고 슬픔과 흑암의 고통이 기다릴 뿐이다.

 

끝으로 선지자는 이 땅의 민족들의 허무함을 바라보며 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바다 파도의 뛰노는 소리같이 그들이 소동하였고 열방이 충돌하였으되 큰 물이 몰려옴같이 그들도 충돌하였도다”(12) 증거하였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아직도 많은 나라들이 바다의 파도 뛰노는 소리같이 소동하고 서로 충돌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이 과연 장차의 일들을 바라 볼 수 있었다면 이들이 머리를 숙이고 자기를 지으신 바라보겠고 또 그 능력에 의지하여 나라를 경영할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슬픈 종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우리의 믿음의 주를 바라보고 능력의 반석되신 주를 의지하자.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나는 오직 주를 바라나이다. 아멘아멘,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