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이사야강해

(이사야21-22장) ‘단단히 박힌 못같이’

이요나 2009. 1. 22. 15:36

 

 

 

(이사야21-22) ‘단단히 박힌 못같이

 

(22:23)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다윗의 집의 열쇠를 둘 자를 향하여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22:23) 라고 하였다. 흥미롭게도 못이 벽에 단단히 박힌 것과 같은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온유하다 말한다.

 

이는 완벽하게 잘 준비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여 잘 익은 기름 항아리 또는 금방 쓸 수 있는 포도주 항아리와 같은 상태를 뜻한다. 성경은 이러한 자, 곧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하셨다.

 

이와 반대로 성경은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허망하고 사악한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삼상15:23) 하였다. 여기서 거역이란 성경의 말씀에 거역하는 것을 뜻하며 완고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나 그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완고함이란 그가 믿고 있는 다른 지식에 갇혀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일에 대하여 자신의 깨달은바 굳은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와 반하는 새로운 지식을 그대로 받아 드리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사상과 이념적 대립이 생기며 학문과 지식의 갈등이 오는 것이다.

 

물론 의견의 대립이 없을 수는 없다. 서로의 대립을 통하여 가장 좋은 것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도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11:19) 증거하였다. 그러나 이는 마음이 완고하여 말씀을 거역하는 것과는 다르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두려움에 떨며 문들을 걸어 잠그고 식탁에 앉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주의 살아나심을 전하는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는 제자들의 완고함을 책망하셨다. 물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장사한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께서 그들의 완고함을 책망하신 것은 주께서 이 일에 대하여 미리하신 말씀보다 자신들의 생각에 집착하고 있음을 책망하신 것이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22:13) 책망하였다. 이는 한마디로 내일은 죽을 것이니 오늘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하는 말로서 지옥철학이다. 이러한 지옥철학이 이미 세상에 만연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날로 더 타락하고 있다.

 

이들을 향해 성경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대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하셨다(22:14) 기록하였다. 누구라도 이런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나는 우리 중에 이처럼 어리석은 자가 있을까 심히 두렵다. 그러므로 우리가 돌이켜 말씀에 힘써 단단한 못처럼 되자!

 

I. ”주 여호와의 말씀”(이사야21)

(21:10)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로 들은 대로 너희에게 고하였노라

A.   남방 회오리바람(1-4)

이사야 선지자는 서두에서 해변광야에 대한 경고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해변 광야란 팔레스틴의 중심지 바벨론을 뜻한다. 그는 계속하여 적병이, 두려운 땅에서 남방 회리바람같이 몰려 왔도다증거하였다. 이는 곧 바벨론을 멸망시킨 메대와 바사의 질풍 같은 공격을 뜻한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바벨론 제국의 멸망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2절에서 혹독한 묵시가 내게 보였도다 주께서 이르시대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대여 에워싸라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노라 하시도다증거하였다. 여기서 엘람은 바사제국의 전조를 뜻한다. 그 당시 바사국(페르샤)은 메대와 동맹 관계를 맺고 바벨론을 침략하였지만 메대에 비하여 아직 국가적 세력을 가추지 못한 때였다.

 

흥미롭게도 엘람의 조상은 셈의 큰 아들 엘람으로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의 형제이다. 그들은 티그리스 강 동쪽의 이란 고원의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확장되었으며  B.C.742년까지 독립국가였으나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했다.

 

또한 메대는 카스피 연안 사막지역으로 남쪽의 바사와 서쪽 앗수르 사이에 있는 나라다. 후일 메대 다리오 왕은 바사와 연합하여 바벨론 멸망시켰다(5:28,31). 그후 메대가 쇠약해지고 바사국이 강성해졌는데 흥미롭게도 바사의 고레스 왕(1:1) , 아하스에로 왕(4:6), 아닥사스다 왕(4:7)이 이스라엘 귀환과 중흥의 역사에 참여하였다. 

 

B.   이사야가 받은 명령(5-9)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 보는 것을 가하게 하되”(6)

이사야 선지자가 주로부터 받은 명령은 먼저 나태한 국가 지도자들을 일깨우는 일과(5) 함께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가 보는 것을 고하게 하라 하시며 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과 나귀 떼와 약대 떼를 보거든 자세히 유심히 들으러 하셨다.

 

물론 마병대는 침략자의 군대를 뜻한다. 또한 나귀 떼와 약대 떼는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행렬로서 침략자의 결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파수꾼의 리포트를 자세히 유심히 들으라 한 것이다.

 

밤과 낮을 지키던 파수꾼이 사자같이 부르짖어 마병대가 쌍쌍이 온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이사야 선지자가 답하여 함락되었다, 함락되었다 바벨론이여, 신들의 조각한 형상이 다 부숴져 땅에 떨어졌다 하셨다고하였다. 이처럼 바벨론은 예고된 전쟁을 통하여 멸망을 당한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아직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벨론 왕국의 몰락은 포로된 이스라엘 민족으로서는 장래를 알 수 없는 지극히 불안한 때였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흥미롭게도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고하였노라증거하였다. 이는 분명 소망의 메시지인 것이다. 이사야는 불안해 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모든 장래의 역사는 이미 내가 다 너희에게 고하였다 말한 것이다.

 

이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도 음미해 보아야 할 말씀이다. 구약의 말씀은 종말을 사는 우리를 위한 거울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항상 장래의 소망 곧 그리스도의 한 날을 가르키고 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우리에게 있어 그 날에 대한 메시지는 더욱 명확하고 빠르다. 그런데도 만약 누가 주께서 미리하신 말씀을 외면하고 환난에 임하게 된다면 그의 피의 값은 그의 머리에 돌아 갈 것이다. 이미 바울이 고하여 나는 모든 말씀을 다 너희에게 가르쳤다 하였기 때문이다.

 

C.   두마(에돔)을 향한 예언

데마 땅의 거민들아 물을 가져다가 목마른 자에게 주고 떡을 가지고 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14)

두마는 침묵이란 뜻으로 에서의 후손 에돔족속이 세운 나라이다. 오늘의 아랍에 속한다. 친절하게도 이사야 선지자는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 사실 이 세상에서 에서족의 역사가 그 종적을 감춘 것은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헤롯왕가의 몰락 이후이다. 하나님께서 이삭과 리브가에게 약속하신 바와 같이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사야 선지자는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오 파수꾼이여 잠이 어떻게 되었오?”(11)하고 물었다. 이로서 우리는 주께서 세우라 하신 파수꾼은 바로 다름아닌 이사야 선지자 자신이었던 것이다. ‘밤이 어떻게 되었오?”라는 질문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세일 사람들의 관심을 아주 적절하게 증명하고 있다. 만약 누가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가 큰 환난이 일어 날 때에야 밤이 어떻게 되었오 라고 묻는다면 그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 될 것이다. 이미 예언자는 모든 글을 다 써 놓고 하늘에서 뒷짐을 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사야는 그들에게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답하였다. 이는 밤은 지났고 이제 아침이 올 것인데 다시 밤이 올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는 계속하여 너희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돌아 오라 오라”(12)하였다. 이 얼마나 커다란 은혜의 메시지인가? 흑암의 어둠 가운데서도 주의 새 소식을 듣고자 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그러나 너의 주께 아무 것도 묻지 않으려는 너 벽창호 같은 인간아 너는 멸망의 날에 재를 뿌리며 울게 될 것이다.

 

D.   아라비아를 향한 예언

13절에는 아라비아를 향한 엄중한 메시지가 기록되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 너희 드단(느디님)의 대상들아 너희는 아라비아에 있는 숲에 유숙하리라예언하였다. 드단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후손이다. 우리 성경은 느디딤의 대상드단의 대상이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느디딤은 드단의 복수형으로서 아라비아, 사우디 아리비아와 같이 아랍 연합을 뜻한다. 흥미롭게도 에스겔서 38장을 보면 드단이 소개되고 있는데 거기서는 단수로 소개 되어 있어 사우디아라비아 임을 알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이 메시지를 통해서 아라비아 사람에게 미칠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집트와 함께 이슬람권에서 벗어나  친서방정책을 쓰고 있다. 이사야는 그들에게 다시 데마 땅의 거민들아 물을 가져다가 목마른 자에게 주고 떡을 가지고 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 그들이 칼날을 피하여 뺀 칼과 당긴 활과 전쟁의 어려움에서 도망하였음이니라”(14,15) 권고하고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이방 중에 고난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도우라는 메시지이다. 사실 데마는 이스마엘의 아들로서 아라비아 조상이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라는 메시지를 이행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이 메시지와 함께 선지자는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안같이 일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게달 자손 중 활 가진 용사의 남은 수가 적으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6,17) 고하였다. 이와 같이 사실 이스마엘 족속과 에서 족은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갖고 있었다. 아마 초록은 동색이라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을 향하여 주 여호와의 빼신 백성들을 그 환난 중에서 섬기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아랍연합은 계속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있다. 나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곧 이를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주께서 권고의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다.

 

II. 이상 골짜기를 향한 하나님의 예언 (이사야22)

(22:11)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 일을 하신 자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자를 존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11)

 

A.   용서받지 못할  유다의 죄(1-14)

여기서 이상 골짜기란 예루살렘을 뜻한다. 유대인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아직까지도 환상의 골짜기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쩜이냐?”라고 조롱하였다. 이는 하나님을 업으로 삼은 백성으로 세계 중에 그 이름을 떨치던 화려한 자존심을 버리고 이제는 지붕 위에 올라 통곡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왠 일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계속하여 이사야는 그들의 모습을 말하여 너의 죽음을 당한 자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며 너의 관원들은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2,3)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싸움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전쟁 한번 벌리지 못하고 예루살렘과 국가를 송두리째 내어 버린 일을 언급한 것이다.

 

이제 이사야는 멸망의 도성을 바라보며 그의 슬픔을 토로하여 내가 말하노니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느라 내 딸 백성이 패멸하였음을 인하여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기록하였다. 이는 그 처참한 처지를 목도하고 위로 받기를 거절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예언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눈으로 보고 예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고 100년이 지난 후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을 대적하다가 패하여 두 눈이 뽑힌 채로 바벨론에 끌려 간 일들을 미리 보고 있는 것이다(왕하25:1-7).

 

이사야는 예루살렘에 닥칠 혼란을 말하여 여호와께로서 이르는 분요와 밟힘의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치는 부르짖는 소리로다증거하였다. 이는 예루살렘에 불어 닥친 혼란을 여호와께서 묵인하셨음을 언급한 것이다.

 

이사야는 6절에서 엘람 사람은 전통을 졌고 병거 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들어 내었다하였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엘람이 앗수르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한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이 앗수르, 엘람, 그리고 바벨론에 의해 긴 역사 동안에 격어야 한 혼란의 시대를 서술한 것이다.

 

사실 엘람은 셈의 큰 아들로서 그 후손들이 세운 도시국가 중의 하나이다. 한 때 엘람은 용맹을 떨쳐 모소포타미야 일대를 장악하였으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집권으로 그 막을 내렸다. 그러나 바벨론이 쇠약해 지자 엘람은 메대와 동맹하여 바벨론을 멸망시켜 후일 페르시야(바사) 제국의 창건역사에 동참하였다. 이는 엘람이 징벌을 받지만 후일 회복될 것임을 말한 예례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 하겠다(49:34). 

 

이사야 선지자는 용맹스런 엘람의 병사들이 예루살렘 도성을 에워쌀 때에서야 유다가 전쟁을 방비하고 있는 모습을 상세히 기록하여 병거는 너의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 되었도다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이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 너희가 다윗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너희가 아래 못의 물도 모으며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케도 하였다”(7-9) 기록하였다.

 

유다에게 덮혔던 것을 벗기셨다’(5-11)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이는 그들이 태평세월을 누리고 있는 사이에 이미 앗수르 군대가 전차를 앞세워 진격해 오고 있었고 기드론과 게헤논 계곡이 전차로 가득 차고, 군대가 성문을 공격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아무런 대비책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혼란의 날에 도망할 곳도 도망할 수도 없다는 것은 해결책이 없는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

 

이사야는 계속하여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 일을 하신 자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자를 존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11)

 

사실 이 일은 앗수르의 침공이 있기 전 히스기야 왕이 다윗 성을 중수하고 예루살렘의 식수 공급을 위해 기혼샘의 물을 끌어 들이기 위해 바위 성벽을 뚫고 수로를 내어 실로암 저수지를 만든 것을 언급한 것이다. 이처럼 미리 전쟁을 준비하여도 대적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고 눈 앞에 당한 일에 대하여 급급하고 있는 모습을 책망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 처한 유다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에 의존하여 방어를 위한 성벽의 많은 포문들을 수리하기 위해 도성의 집 몇 채를 부수기까지 하였다. 이는 오늘날 예루살렘의 유적지에서 큰 성벽의 일부와 성벽을 쌓기 위해 허물었던 집들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 도성에 물을 공급하는 큰 수로 공사를 하였다. 이 수로는 오늘날까지 보전 된 히스기야의 수로로 알려진 터널은 바위를 뚫어 만든 것으로 길이가 1700피트나 된다. 그들은 전쟁 중에 도성의 식수를 위해 기혼 샘물을 실로암으로 흘러오게 하였다. 정말 기가막힌 아이디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도성을 지키기 위해 주도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면서도 샘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의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평안할 때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공격하는 마귀들을 대적하여 전신갑주를 취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 하루하루를 즐기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문제가 닥치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저기 물으러 다니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 다닌다.

 

그러나 누가 만약 장마가 시작할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예수님께서도 나의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이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으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7:27)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긴장을 놓아서는 안된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사로잡을 자를 찾아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은 장차 임할 크고 두려운 날에 대하여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하시며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다” (17:26,27) 증거하셨다. 이는 지난 일들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요 장차 정해진 두려운 날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또 주라고 부르며 만왕의 왕이라 부른다. 이는 우리의 삶의 주권이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 있으며 삶의 근원이 그에게 있음을 뜻한다. 그러함에도 생명의 근원이신 주의 말씀을 청종치 않고 자기의 궁리와 자기의 지혜로 살아 가고자 한다면 아버지의 의미와 주와 왕의 위치는 바로 스스로가 된 것과 같다. 만약 당신의 아들이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면서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면 아버지인 당신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을 향하여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 (12, 13) 하였다고 증거하였다. 오늘 날도 많은 사람들이 내일은 우리가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 소리친다. 이는 지옥철학이다. 이는 스스로 죽음을 향하여 배를 채우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해결책을 언급하여 먼저 통곡하라 하셨다. 이는 통곡으로 하나님께 회개를 기도를 하라는 말씀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신다. 계속하여 선지자는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였다. 이는 우리의 모든 죄된 상황이 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결과라는 것을 깨닫는 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으며 포도주를 마신다하였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포도주에 취하지 말라 하셨다. 이는 나실인 헌신의 서약으로 그들이 삶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바치기를 원하신 것이다. 이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이다. 바울은 우리를 향하여 술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삶을 살라고 권고하였다. 그렇다면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을 파멸시킬 도구들이 준비하셨다 해도 하나님은 그 계획을 돌이키실 마음을 갖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악하여 소돔을 멸하시고자 하실 때 의로운 롯을 구하고자 하여 아브라함에게 천사를 보내셨다. 또한 하나님은 니느웨를 파멸기전 40일의 여유를 주고 그들의 회개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전할 요나 선지자를 파송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였지만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들이 회개에 동참하여 굵은 베와 재를 뒤집어 쓰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여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니느웨는 앗수르 왕국의 수도였고 이제는 그들이 예루살렘을 파멸시키려고 침략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주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의 말을 외면하고 자기 고집대로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또 다른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셨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들려 가라사대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 증거하였다.

 

오늘날 당신은 어떤가? 이미 우리에게는 종말의 날 곧 두렵고 큰 환란의 날이 있을 것을 경고하였다. 그날은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에 도둑과 같이 임할 것이라 기록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그날은 우리의 육신의 죽음만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영혼이 멸망받은 최후의 날임을 선언하였다. 이제 구약의 사람들처럼 더 이상 망설일만한 시간이 없다. 우리 앞에는 영생이냐 영원한 멸망이냐 두 가지 선택이 놓여 있고 영생은 오직 회개하여 주 여호와께 돌아 오는 길 뿐이다. 이와 같이 파멸을 준비해 놓으신 중에도 주님은 우리가 주께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B.   여호와께서 세우심(15-25)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22)

15절 이후에는 앞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궁을 차지한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 내었도다하시며 다시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속박하고 장사같이 맹렬히 던지되 정녕히 너를 말아 싸서 공같이 광막한 지경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 있으리라”(16-18) 하셨다.

 

셉나는 이방 출신 유대인으로 히스기야 왕 때의 국가 재무담당 지도자까지 오른 자이다. 그는 한 때 출중한 지략으로 왕의 눈에 들어 왕실의 살림살이를 주관하는 막중한 책무를 맡았지만 그 권세가 높아지자 그는 자신을 위해 호화롭고 지나치게 장식한 무덤을 만들었다. 이는 오직 이스라엘 왕족들만 들어 갈 수 있는 무덤과도 같은 수준이었다. 또 그는 영광의 수레로 예루살렘 여기저기를 순례하며 자신의 위엄을 나타내며 영광을 누렸다. 이사야는 그는 이방인에 의해 죽임을 당해 광야에서 버려질 것을 예언하였다.

 

오늘 이 메시지가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는 하나님의 집의 살림살이를 그의 종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집 보물창고를 맡은 셉나는 이방인으로 주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나라를 맡긴 교회라고 볼 수 있다. 만약 누가 그 위엄과 영광을 오직 주 여호와께 돌리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화려한 묘실을 준비한다면 그는 셉나에게 내려진 형벌의 메시지가 뒤따라 갈 것이다.

 

그러고 그의 영광스런 직무는 여호와의 충실한 종 엘리아김에게 맡기실 것이다. 이를 말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를 낮추고 그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야김을 불러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띄워 힘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집의 아비가 될 것이며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자가 없으리라”(20-22) 증거하였다.

 

 엘리야김의 이름은 “하나님이 임명한다” 뜻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전은 혈육에 의하지 않고 그의 충실한 종에게 맡기시겠다는 말씀이다. 물론 이 일은 유다 왕국의 역사 속에 나타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은 예언의 이중성을 갖고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C.   예언의 이중성 (21)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띄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집의 아비가 될 것이며”(21)

하나님은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고 예루살렘 백성들의 아비가 될 것이다”(21) 하셨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집의 종으로 섬김에 대하여는 이사야서 53장에 상세히 기록되었으며 또 하나님의 집의 모든 정사 곧 정권이 그 위에 있을 것에 대하여는 이사야가 말하여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리라”(9:6) 증거하였다. 또한 그가 다윗왕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록 그것을 보존하실 것임은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말씀이다.

 

또한 주께서 다윗 집의 열쇠는 그의 어깨에 두실 것이다’(22) 말씀하셨다. 물론 이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는 이 말씀을 다시 계시록의 빌라델피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에서 다시 보게 된다. 계시록 기자는 “거룩하사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3:7)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셉나의 메시지는 우리 교회에게 경고의 말씀으로 주신 것이라 굳게 믿는다.

 

주님은 그의 권세에 대하여 단단하게 박은 못처럼 견고케 하실 것을 약속’(23). 이 위대한  메시지는 매우 슬픈 이야기를 동반하고 있다. 못이 예수의 손과 발에 단단하게 그리고 견고하게 박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메시야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버릴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시편기자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기록하였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그는 사람들이 멸시받고 싫어하며 생명의 땅에서 버림받을 것이라고 증거하였다. 나는 이 단단하게 박힌 못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견고케 하실 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릴 것’(24)이라 증거하였다. 그는 하나님 면류관을 받으셨고 세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성경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 3:21) 하였고 또한 주님은 충실한 그의 종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17:24) 기도하셨다.  

 

D.   “나 여호와가 그것을 말했다” 이는 예언에 대한 확실성의 증거이다.

25절에는 매우 흥미로운 말씀이 기록되었다. 잘못 읽으면 이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고통스런 메시지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대 그 날에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러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파쇄되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25)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단한 곳에 밝혀있는 못이 삭아 부서지고 파쇄되리라는 메시지는 또 다른 예언으로서 그 동안 박혀 있었던 또 다른 못을 뜻한다. 아무도 당하지 못할 권세자 셉나를 무너뜨리듯이 못이 삭아 떨어지는 것은 그 권세로 인하여 오랫동안 못박혔던 멍에가 벗겨질 것을 뜻한다. 이는 유대인을 통해 세습관 정사와 권세의 못이 삭아 파쇄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단단하게 박힌 십자가의 못이 박힌 것처럼 하나님의 유업은 그의 종에게 주어질 것이다.

 

결국 수천년 동안 화려하게 장식해 온 유대인의 영광의 권세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난 후 유대는 로마의 티토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2000년간 나라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다. 그 영광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빌라델피아 교회에서 꽃을 피울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이 여호와의 말씀인 것을 믿는다. 아멘 아멘 주여 그리하시옵소서. 주의 말씀은 처음부터 계셨고 영원토록 영존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