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이사야강해

(이사야23-24장 강해) “그날의 프로세스”

이요나 2009. 1. 27. 19:00

 

 

 

(이사야23-24장 강해) “그날의 프로세스

 

(24:21) “그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오늘 우리가 공부할 이사야서 23장과 24장은 매우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이는 지나간 역사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의 나라들을 비유로 우리에게 다가 올 또 다른 나라들에 대한 비전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사야는 23장에서 두로의 멸망과 또 후일 새롭게 전개될 두로의 비전을 전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세기의 주목을 받던 두로는 무참하게 패망할 것이며 그들은 교만한 자들과 함께 멸시를 받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들이 한 왕의 연한과 같이 70년이 필한 후에 기생의 노래 뜻과 같이 될 것이라고 또 다른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이사야서 24장에서 그 날에 만군의 왕이신 시온의 왕이 임하여 죄인들과 함께 이 땅을 멸하시고 예루살렘의 왕이 되어 그 영광을 나타내실 것을 예언하였다. 이는 곧 아직 도래하지 않은 열망의 메시아의 날을 기록한 것이다.

 

I. 세기의 변천과 통치의 주권(이사야23)

만군이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모든 영광의 교만을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존귀한 자로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9)

 

A.   두로의 역사(1-7)

두로는 페니키아인의 베니게의 도시국가로서 특출한 상업적인 수단으로 세계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두로 사람들의 상업적 수완은 가히 사단적 조직을 방불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하였으며 허영과 자만으로 가득차 있었다(28:12-15).

 

성경에서 두로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최고 전성기 다윗 왕 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시돈 왕 히람 은 다윗과 절친한 친분을 갖고 도시국가인 두로왕국을 세웠으며 솔로몬 성전을 건축할 백향목을 욥바 항으로 들여 왔으며 성전 건축을 위해 뛰어난 건축가들을 파송하였다. 그로인하여 두로는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해상 무역을 주도하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후 시돈 왕 바알은 딸 이세벨을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주어 혼인동맹을 가졌으며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바알신앙을 뿌리내려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이때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등장하여 바알의 제사장 400명을 참수한 것이다. 또한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유다 왕 요람과 결혼하여 정적들을 물리치고 유다 왕족의 씨를 말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비참한 인생을 마쳤다(왕상16:29).

 

이사야 선지자는 4절에서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보장이 말하기를 나는 구로하지 못하였으며 생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 남자들을 양육하지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음이니라기록하였다. 이는 화려하게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득세하던 두로왕국의 성과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에 참여한 바 되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하신 영광의 자녀들이 세상의 영광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만약 오늘날 어느 사람이 세상 중에서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를 입어 세상 가운데서 그 영화로움이 드러나다가 하나님의 뜻하신 바 복음의 자녀를 양육치 못하고 오직 화려한 세상의 영화에 빠져 버렸다면 그는 일시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사랑과 찬사를 받을 것이나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받지 못하여 그는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가 되어 불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

 

오늘날 세상의 부귀와 영화에 빠진 사역자들과 그 교회들의 위상을 보라. 세상은 온통 그들의 날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제 그날에 이르면 그들을 시돈과 같이 부끄러워 할 것이다. 예수께서도 사랑하시던 고을을 향하여 화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0:13) 고 역설적으로 책망하셨다.

 

B.   두로의 멸망

두로는 근동을 장악하고 있던 앗수르의 계속적인 침략과 약탈로 인해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다가 B.C.612년 앗수르 멸망으로 잠시 독립한 것 같았지만 바벨론의 득세로 인해 또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두로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12년 동안 성읍이 포위하여 성을 함락하였으나 두로왕이 도시 전체를 천혜의 요세인 섬으로 옮겨 도시국가를 세우는 바람에 바벨론의 13년의 전과는 허울뿐이 성읍을 취할 뿐이었다. 그후 바벨론은 멸망하자 두로는 숨을 돌리는듯하였으나 강력한 페르시아 왕국의 출현으로 두로는 약화되어 시돈의 권리를 포기한 채 두로항을 통해 무역을 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그후 B.C.333년 헬라제국을 일으킨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하여 바벨론의 후예 페르샤 제국을 제압하자 기력이 쇠약해진 두로는 위기를 모면하려 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세기의 제왕 알렉산더 대왕은 두로의 선언을 무시한 채, 7개월 동안 성읍을 둘러싸고 바닷길을 내기 위해 고대 두로의 성읍의 집들과 기념비를 헐어 제방을 쌓아 두로를 멸망시켰다.

 

이 일에 대하여 100년 후의 선지자 에스겔은 그들이 두로의 성벽을 훼파하며 그 망대를 헐 것이요 나도 티끌을 그 위에 쓸어 버려서 말간 박석이 되게하며, (26:4) 라고 기록하였으며, 다시  네 재물을 빼앗을 것이며 네 무역한 것을 노략할 것이며 네 성을 헐 것이며 네 기뻐하는 집을 무너뜨릴 것이며 또 네 돌들과 네 제목과 네 흙을 다 물 가운데로 던질 것이라” (26:12) 예언하였다. 이를 볼 때 에스겔 선지자 보다 1세기 앞서 있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놀랍기만 하다.

 

이사야 선지자는 두로의 멸망에 대하여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을 인하여통도하리라”(5) 하였다. 이는 이미 애굽도 주 여호와의 말씀대로 이미 세상의 권세에서 꼬리를 내린 후였기 때문에 그들은 두로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들에게 너희는 다시스로 건너갈지어다 해변 거민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6) 하였다.

 

원래 다시스는 야벳의 아들 야완이 이룩한 땅으로 한 때 두로의 식민지가 되어 두로와 유럽을 잇는 무역항로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1절에서 다시스의 선척들아 슬퍼하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여기서 다시스란 스페인을 지칭하기도 하며 어원을 따라 생각하면 그 당시 놋주석의 산지로 명성을 날리던 영국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느 특정 나라를 지칭한다고 보기 보다는 세기를 이끌어 가던 중동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유럽의 시대가 열릴 것을 언급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C.    다시스 프로젝트 유럽 시대의 개막

계속하여 이사야는 딸 다시스여 나일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10) 하였다. 이는 주객이 전도되어 세계의 주역 판도가 바뀌어 화려한 두로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세계 무대가 등장 할 것을 예고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처럼 세계 정세의 판도를 바꾸어 가는 절대적 계기가 되고 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사실 바벨론 왕국의 멸망 이후 중동지역은 그 세력권에서 밀려나 세기의 통치 주권은 마게도냐를 기점으로 헬라시대로 개막되었으며 로마시대에 와서 오늘의 유럽의 기틀을 만들어졌다.

 

이처럼 이사야 선지자는 사람들의 지혜로 알 수 없는 주께서 이끌어 가시는 세기의 비전을 바라보고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모든 세기의 흥망성쇠의 주권이 주께 있음에 대하여 만군이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모든 영광의 교만을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존귀한 자로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9) 기록하였다.

 

계속하여 이사야는 두로왕국을 바라보며 너 학대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12) 예고하였다. 시돈을 처녀 딸이라 부른 것은 하나님이 시돈을 시집 보내지 않은 딸처럼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처럼 그들을 아끼셨던 것이다.

 

또한 깃딤은 구부로 섬으로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의 고향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두로의 영광을 낳은 시돈이 재기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할 것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저문 해는 다시 뜨기까지 정해진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우치기 까지 그들의 태양은 다시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사역 하실 때 두로와 시돈에 머무신 일이 있었음을 볼 수 있으며(15:21-29), 또한 주께서 기거하시던 마을 가버나움 사람들이 변하지 않음을 보시고 너희가 시돈과 두로보다 먼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책망하셨다(11:21,22). 이처럼 시돈과 두로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때가 이르기까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또한 사도행전에는 두로 상인들이 헤롯 아그립바 1세에게 환관을 통해 소금거래를 트기를 청탁한 사건이 기록되었다. 이 때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환관의 말을 들어 두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왕복을 걸치고 망루에 서서 설교를 할 새, 사람들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이는 신이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칭송하였다. 이에 헤롯은 더욱 교만해져서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음으로 주의 사자가 그를 쳐 벌레가 먹어 죽었다(12:20). 이처럼 두로와 시돈은 더 이상 그 땅 어디에서도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였고 평안을 얻지 못하였다.

 

우리는 13절에서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이사야는 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그 백성이 없어졌나니 곧 앗수르 사람이 들짐승의 거하는 곳이 되게 하였으되 그들이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헐어 황무케 하였느니라”(13) 기록하였다.

 

여기서 갈대아 사람이란 말할 것도 없이 바벨론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사야 선지자 때에는 아직 바벨론이 득세하지 못하였고 갈대아 지역의 작은 세력이었다. 그 당시 바벨론 왕국은 앗수르의 사르곤 왕에게 패하여(B.C.710) 산헤립 때에 완전 정복되었다(B.C.704). 그러나 앗수르가 쇠약해 지자 바벨론이 득세하여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세계를 제패하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바벨론 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아직 자기 눈 앞에 오지 않은 세상을 바라보며 바벨론 제국 곧 갈대아 사람들의 멸망을 예견하고 있다. 특별히 그가 바벨론을 가리켜 갈대아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갈대아 땅을 중심으로 패권을 이루던 해변광야의 시대 곧 앗수르 제국, 바벨론 제국, 메대와 바사의 시대가 저물어 갈 것을 예고한 것이라 하겠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예견이 아닐 수 없다.

 

계속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다시스 선척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으라 너희 견고한 성이 파괴되었느니라”(14) 고하였다. 이 또한 6절과는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는 1절에서 이미 예고한 것처럼 두로의 멸망으로 더 이상 해변광야에서 다시스 곧 세계의 상고들이 영화를 누리지 못할 것을 예고한 것이다.

 

불과 1년 전만해도 중동은 세계의 경제를 주도하였다. 중동의 산유국들은 서방의 부호들과 손을 잡고 세계경제를 쥐었다 폈다 하였다. 그들이 작은 기침 소리에도 세계의 증시는 곤두박질쳤다. 이로 인하여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는 냉전시대를 구축하고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중동의 화려함은 두바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세계의 부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모래사막에 오아시스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 일들은 불과 1년여 전의 화려한 추억이 되고 말았다. 미국 경제의 몰락을 시작으로 세계의 모든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바람에 실물경제가 땅끝까지 곤두발질쳐 이제 더 이상 회생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제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 하던 중동의 보물시장은 더 이상 그 영광을 발하지 못할 것이다. 두로의 영광은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서방국가를 위협하던 이슬람의 득세도 더 이상 힘을 발하지 못할 것이다.

 

D.   한 왕의 70년 연한(15-18)

잊어버린 바 되었던 기생 너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행하여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케 하라 하였느니라”(16)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15절에서 놀라운 예언을 선언하고 있다. 이 부분은 그 해석이 매우 난해한 말씀 중의 하나이다. 그는 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같이 칩십년을 잊어버림이 되었다가 칩십년이 필한 후에 두로는 기생 노래의 뜻같이 될 것이라기록하였다. 우리는 애써 이 부분의 해석을 하려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다만 앞 뒤 문맥과 장차 올 그 날에 대한 말씀들을 음미하며 이 메시지의 적용점을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 날부터라는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이날은 중동의 찬란한 역사가 멈추던 로마시대의 개막의 때일지도 모른다. 그때에 바벨론 땅의 멸망과 함께 두로의 찬란한 영광은 막을 내렸고 세계의 패권은 로마제국으로 넘어갔다. 그로하여 두로는 깃딤 곧 구부로의 작은 섬에서도 평안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모든 예언은 이중적 장치가 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서의 그날이란 오직 주께서 정하신 그날을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그 날부터란 지나간 역사를 포함하여 오직 한 날 곧 그 날에 속한 것이다. 

 

어쩌면 그날은 세계경제를 주관하던 중동의 시대를 마감하고 또 다른 시대를 열어가는 시점을 뜻하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이 그 때이기도 하다. 옛 두로가 막을 내리듯 오늘날 시돈 땅이 저물어 가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세계의 기업들을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선지자가 바라보던 그 날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온 것이다.

 

이제 세계는 혼란 중에서 한 왕을 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잃었던 예루살렘의 영광을 다시 찾기 위해 약속의 땅을 찾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 나는 그들의 무지함이 두려워진다. 그들의 무지함이 스스로의 힘으로 성경을 성취하는 만행을 저지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사야가 말한 바 한 왕의 연한 같은 칠십년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 왕의 연한이란 창조자에 의해 변할 수 없는 정해진 왕의 권세를 뜻한다. 이스라엘의 왕들의 역사가 그러했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연한이 그랬고 세기의 황제 알렉산더 대제가 그러했다. 그러므로 이는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옴을 뜻한다(13:1).

 

그러면 칠십년은 무엇을 뜻하는가? 성경에서 칠십이란 숫자는 불확실성의 수를 의미한다. 베드로가 형제의 용서함을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일곱번씩 칠십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다. 이는 수리적 계산으로는 490년이 될 것이지만 주님은 여기서 용서는 수리적인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이 말씀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바 주께서 정하신 이스라엘의 칠십년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수리적 계산이 다니엘 9장에서 다시 해석되었듯이 칠십년이란 인간의 수리계산 법이 아닌 지혜자의 정하신 연한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루어 생각할 것은 한 왕의 연한과 같이라는 말씀이다. 이는 곧 예정 된 통치권세를 지칭한 것으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작정된 이스라엘의 칠십년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스라엘에게 있어 70년은 휴식 시간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50번 째의 안식일 곧 희년이 오면 안식년의 모든 주기를 마치고 안식(Sabbath)에 들어 간다. 그러므로 마지막 안식년 49년 동안에 이스라엘의 모든 땅은 원소유주나 그 후손에게 돌려져야 하고 모든 노예들을 돌려 보내야 한다. 어쩌면 지금 이스라엘은 그 희년의 준비를 하기 위해 약속의 땅을 되찾으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두로에게도 70년은 긴 휴식의 기간이다. 그들의 영광이 이스라엘의 찬란한 영광과 함께 한 것이라면 이들의 중흥의 역사도 이스라엘의 칠십년과 같아야 할 것이다. 그 기간이 차기까지는 그들은 더 이상 세상 가운데서 두각을 나타낼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제국을 재창출한 로마제국의 연한이 마칠 때까지 그 모든 패권을 다시스 곧 서방에 넘겨주고 쉼을 얻어야 했었다. 그러나 이 일도 이미 역사 속의 이야기이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과 함께 두로의 영광은 다시 재연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두로는 기생의 노래 뜻같이 될 것이라는 말씀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기생과 같이 뭇 사내들을 감언이설로 유혹하는 정신적 주체를 뜻한다. 이사야는 계속하여 잊어버린 바 되었던 기생 너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을 두루 행하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케 하라 하였느니라”(16) 기록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로마제국이 망할 때까지 중동은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진 나라들이다. 이집트 왕자, 페르샤 왕자,시바 여왕은 동화 속의 그림이 되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어제에 이르기까지 중동의 나라들은 당대 최고의 상술의 두로의 후예답게 다시스 곧 서방을 등에 엎고 급부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석유만을 팔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가는 곳곳마다 이슬람사원을 짓고 세계 곳곳에서 그들의 기묘한 노래가 불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 나라의 종주국이던 미국에 911 테러가 발생되었고 부시는 미국에서 더 이상 이슬람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이락전쟁을 주도한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칠십년이 필한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권고하시리니 그가 다시 취리하여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두고 두로를 다시 중흥케 하실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두로는 기생과 같이 세계 모든 나라들을 유혹하여 관계를 맺고 많은 돈을 벌게 될 것이며 이 일들은 이미 우리가 두 눈으로 목도한 바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거하는 자의 배불리 먹을 자료 잘 입을 자료가 되리라”(18)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두로가 취리한 그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일 자료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에 필요한 자료가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두로는 옛 과오를 다시 범하지 않고 하나님 백성들 가운데로 교화될 것을 뜻한 것인가? 그러나 우리 눈 앞에서 이 일이 성취 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할 것 같다. 아직은 그들의 기세가 좀처럼 꺾일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미 이집트와 사우디 아라비아와 같은 중동의 거부들이 속속 친서방 정책을 쓰고 있다.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군대들 가운데 시리아와 이라크의 이름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참조 에스겔38).

 

나는 이 글을 보면 또 다른 환상을 바라본다. 어쩌면 이사야 선지자의 마음 속에는 육신의 영광을 위해 살던 사람들이 모두 주 앞에 돌아 올 것을 예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찌하였던 나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을 열망하면서도 오직 교회 부흥을 위해 기묘한 곡조와 많은 노래로 열방을 유혹하며 취리하는 교회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얻은 모든 것이 주 앞에 거하는 자들의 배불리 먹을 자료 잘 입을 자료가 되리라 소망한다.

 

II. 그 날(이사야24)

(24:23)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

 

24장은 매우 흥미로운 내용들이 기록되었다. 이는 마치 요한 계시록을 보는 듯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13장부터 23장까지에서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들에 대한 국가적 운명에 관한 예언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제 24장부터 27장은 장래에 일어날 일들로서 전 세계적이며 온 인류적 메시지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작은 묵시록이라 말하기도 한다.

 

A.   땅을 공허케 하심(1-13)

“(보라)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3)

 

이사야는 서두에서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무하게 하시며 뒤집어 엎으시고 그 거민을 흩으시리니라고 기록하였다. 사실 땅은 처음부터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1:2). 그리고 하나님은 빛을 있게 하여 낮과 어두움의 밤을 나누셨으며, 해와 달이 땅을 비추게 하시고 생물들을 창조하신 후 그의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을 세워 통치의 권세를 주셨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 지으신 땅을 허무하게 하시고 황무케 하시며 뒤집어 엎을 것이라 하셨다. 이는 이 땅이 다시 한번 멸망을 당할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는 3절에서 땅이 온전히 공허하고 황무케 될 것을 다시 언급하면서 그 앞에서 백성과 제사장이 일반일 것이며 종과 상전이 일반일 것이며 비자와 가모가 일반일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일반일 것이며 채급하는 자와 채용하는 자가 일반일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일반일 것이라”(2) 기록 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며 세상 백성 중에 높은 자가 쇠약하며”(4)라고 기록하였다. 땅이 쇠잔한다는 말은 땅이 그 효력을 상실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곧 세계의 산업자원이 쇠약해지고 쇠잔되어 갈 것을 뜻한다.

 

오늘날 세계 문명과 지식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 이 땅이 서서히 그 힘을 잃고 있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땅이 가뭄으로 사막화 되어 가고 있음을 보고 있으며 동남아시아에도 쓰나미로 인하여 수많은 농토가 쇠잔해버렸다. 그러므로 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며 온전히 황무하게 된다는 말씀은 매우 슬픈 일이며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인류의 생존권이 땅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높은 자가 쇠약해진다는 것은 날이 갈수록 지혜자가 쇠잔 될 것을 뜻한다. 매년 노벨상 수상자가 거론 되고 있음에도 이 세상에 주목받을 만한 통치자가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5절에서 이사야는 땅이 또한 그 거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음이라기록하였다. 여기서 언급한 땅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요 안식의 땅이다. 다시 말하여 처음 사람 아담에게 맡기신 에덴동산과도 같다.

 

여기서 땅이 그 거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다는 것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세속화 되어 버린 것을 뜻한다. 이사야는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먼저 율법을 범하였기 때문이라 했다. 여기서 율법은 율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라의 복수 토르토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는 모든 성경에 기록된 율법과 모든 계명을 뜻한다. 두번째로 그들이 율례를 어겼다 하였다. 율례는 히브리어 호크로서 계명을 뜻한다. 이는 십계명이 그 중심이 된다. 세번째로 그들은 언약을 파기 하였다. 언약을 뜻하는 히브리어 베리트는 오직 그의 백성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께서 맺으신 그의 백성들과의 계약을 뜻한다.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켜 그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정죄를 당하였고 땅이 불타서 남은 자가 희소하며 새 포도즙이 슬퍼하고 포도나무가 쇠잔하여 마음이 즐겁던 자가 다 탄식하며 소고 치며 수금 타는 기쁨이 멈추고 성읍은 약탈당한 자 같아서 문이 닫히었고 모든 즐거움과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다 증거하였다. 이 몇 구절 속에서 우리는 성경의 역사 속에서 명망 당한 이스라엘, 곧 이 땅 중에 홀로 영광을 받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의 몰락을 보는 듯 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세계 민족 중에 이러한 일이 있으리니 곧 감람나무를 흔듬 같고 포도를 거둔 후에 그 남은 것을 주움같을 것이니라”(13) 하신 말씀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몰락의 자초는 전 세계적 멸망의 시작이 될 것임을 언급한 것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을 열방의 빛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날 세상을 밝히는 교회는 어떠한가? 과연 세상을 밝히는 빛이요 세상을 깨끗게 하는 소금인가? 오히려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욕되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를 믿으면서 세상 사람처럼 생각하고 세상사람처럼 말하고 세상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이들이 과연 이 땅을 아름답게 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이 몰락함과 같이 또 세상 속에 처한 그들이 멸망을 당할 것이다. 이는 그들이 심은 데로 걷을 것이기 때문이다.

 

B.   여호와의 위엄(14-20)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침망같이 흔들리며 그 위에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지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20)

 

이제 이사야 선지자는 점점 더 가까운 곳으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는 먼저 무리가 소리 높혀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을 인하여 바다에서부터 외치리니”(14)라고 증거하였다. 이는 마지막 때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바다물처럼 넘칠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의 날이 가까울수록 주 여호와의 위엄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그는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섬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15) 하였다. 여기서 동방이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지칭한다. 그곳은 해 뜨는 곳이며 복음의 시초 시온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다 섬은 복음의 전세계로 전파되어 나감을 뜻한 것으로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복음의 시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보고 있는 것이다.

 

어떤 무지한 교회 지도자는 마치 동방이 한국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자신을 높혀 말하고 심지어 메시야의 왕국이라 칭하기도 한다. 만약 그가 스스로 메시아임을 증명하려면 그는 자신이 유다의 족보에 들어 있음과 다윗의 자손임을 중명하여야 하며, 양손의 못자국과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흉터를 우리에게 보여야 할 것이며 그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증언을 받아 내야 할 것이다.

 

이사야는 계속하여 땅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자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라나 나는 이르기를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궤휼한 자가 궤휼을 행하도다 궤휼한 자가 심히 궤휼을 행하도다 하였도다”(16) 증거하였다. 이는 기쁨과 고통이 서로 엇갈리는 시점이다. 다시 말하여 복음이 온 세상 가운데서 기쁨을 발하며 의로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은 어떠한가? 그들은 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그 보내신 자 아들을 이방인에게 내주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광은 쇠잔하였고 의의 피의 값은 그들의 머리로 돌아 갔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버림을 받고 이방은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는 이 빼앗긴 영광 가운데서 그들 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궤휼한 자곧 하나님 앞의 반역자를 보고 있다. 이는 곧 만민을 미혹하여 사망으로 이끌고 갈 적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땅의 거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임하였나니 두려운 소리를 인하여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17,18) 증거하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교회시대에 역사할 미혹의 영을 본 것이다.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나섰고 그 종들이 양의 탈을 쓰고 선지자와 목사의 자리에 앉아 광명한 얼굴로 주의 백성을 미혹하고 있음을 본 것이다.

 

또 그는 성큼 다가온 땅의 멸망을 보며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침망같이 흔들리며 그 위에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지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20) 하였다. 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우리는 이미 계시록에서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6:14)라는 말씀을 읽지 않았는가?

 

C.   예루살렘의 영광(21-23)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23)

 

어디 그뿐인가? 이사야 선지자는 하늘에서 있을 전쟁을 보며 그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21)라고 기록하였다. 1세기 후의 선지자 다니엘은 이상 중에 나타난 인자에게서 내가 어찌하여 네게 나 온 것을 네가 아느냐 이제 내가 돌아가서 바사군과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 후에는 헬라군이 이를 것이라”(10:13,14)는 메시지를 받는다. 

 

이 일은 세계사의 한 부분을 언급한 것으로 바사제국이 멸망한 후 헬라제국이 세워질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가리켜 바사군, 헬라군이라 칭한 것으로 보아 이는 바사국이나 헬라국을 이끄는 통치 지배 수단이 영적 지배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6:12) 말한 것이다. 천사는 계속하여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군 미가엘뿐이니라”(10:21) 전하였다. 이 말씀에 대하여는 우리가 좀더 시간을 갖고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사야는 22절에서 아주 놀라운 일을 증거한다.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같고 모음을 입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증거하였다. 여기서 깊은 옥이란 영혼들의 지하 지옥 곧 무저갱 구덩이를 말한다. 지금 이사야는 계시록이 말한 바 사단이 일천년 동안 무저갱에 던져질 그 시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20:1-3). 그들은 미혹하는 영들과 같이 천년의 옥살이를 행한 후에야 사망에서 풀려나 그 행위대로 판단을 받고 심판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이다(20:11-15).

 

그러나 한편, 그때는 천년왕국이 펼쳐지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사야는 그 영광의 날을 말하여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23) 증거하였다. 그는 열린 영안을 통하여 수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종말에 있을 일들을 모두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계시록 기자도 이를 말하여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21:23) 하였고 다시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24) 기록하였다. 그때는 더 이상 어둠이 없는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빛이 온 세상을 밝히고 사람들의 마음을 밝히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더 무엇을 바라랴! 무엇을 더 구하랴!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