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27-28장 강해) “영화로운 면류관”
(사28:5)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I. 그날의 큰 나팔 소리(이사야27장)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로다”(6)
27장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모처럼 기분 좋은 소식이다. 아마 이사야 선지자가 이러한 메시지만 전하였다면 모진 핍박으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28장과 29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파멸의 책임을 엄하게 묻는다. 오늘 우리는 이 메시지를 상고하면서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순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A. 하나님의 계획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언급하면서 먼저 오랜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미혹하고 조롱했던 사단의 역사를 처단할 것을 예언하여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증거 하였다.
히브리어 리워야단은 ‘맞붙이다’, ‘연합하다’는 뜻을 가진 아라비아에서 유래된 말로 휘감기는 동물로서 머리가 일곱이며 꼬불꼬불한 뱀과 같은 바다에 사는 신화적 괴물이다. 성경에 이와 동일한 단어가 ‘악어’(욥3:8, 41:1, 시74:14, 104:26)로 번역 되기도 하였으며 또 ‘라합’으로 번역(시51:9, 욥26:12)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중의 하나일 뿐이다(시104:26,27).
여기서 리워야단을 뱀, 용을 같이 지칭한 것은 이것이 오랜 인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한 사단의 존재임을 증거하고 있다. 계시록 12장에는 이들을 모두 지칭하여 ‘용, 옛 뱀, 마귀, 사단, 천하는 꾀는 자’라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긴 역사 속에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한 애굽, 앗수르, 바벨론을 뜻하기도 한다.
이사야는 2절에서 “그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 지어다”기록하였다. 여기서 그날이란 말할 것도 없이 주의 날이다. 그날에 이르러 주께서 이스라엘의 대적 리워야단을 멸하시고 그날에 여호와께서 친히 포도원지기가 되어 때때로 물을 주고 밤낮으로 지키시며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하나님의 포도원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사5:1) 하였고 다시 “대저 만군의 여호와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여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사5:7) 기록하였다.
또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나는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요 너희는 포도가지라 하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새로 세우신 포도원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사야는 뿌리채 뽑혀 멸망한 하나님의 포도원 이스라엘에 대하여 다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포도원이 하늘로 들려 올려진 후 주께서 말씀하신 그날에 다시 이스라엘의 돌아 보실 때에 있을 일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포도원을 향하여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질려와 형극이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그리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여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4,5) 말씀하셨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 곧 그의 백성을 대하신 성품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마치 패역한 자녀에 대하여도 미워하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과도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기서 그의 포도원 된 이스라엘의 죄의 청산을 묻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저주하실 의향이 없으시므로 그들을 해치는 질려와 형극들을 벗고 주께 나와 화친을 하라 하신 것이다. 이 방법은 오로지 그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하는 것 뿐이다.
이사야는 6절에서 위대한 선포를 하고 있다. “후일에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을 채우리로다” 증거하였다. 이는 실로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광경을 보는 것과 같다.
이사야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단계별로 이야기 하고 있다. 먼저 후일에 야곱의 뿌리가 박힐 것을 말하였다. 야곱의 뿌리란 명백한 이스라엘 열두 부족의 나라 곧 이스라엘의 회복을 뜻한다.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있었다. 그러나 수천년 역사 속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민족의 시조가 세운 나라의 이름을 쓰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 땅에서 멸망을 받아 2500여년 동안 유리하는 백성으로 열방을 떠돌다가 다시 옛 땅에 옛 이름으로 국가를 재건한 나라는 오직 이스라엘 뿐이다.
이스라엘은 예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말씀하신 것처럼 1948년 5월14일 독립하였고 전 세계 가운데 흩어진 유대인들이 귀환하여 1967년에 이르러는 이방인이 점령했던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그 척박해진 땅에 수로를 내어 기름진 땅으로 개간하고 감귤과 수많은 과일 그리고 꽃을 재배하여 유럽시장을 석권하였다. 지금 이스라엘은 유럽시장의 4대 수출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스라엘을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그 땅에 살고 있던 팔레스틴 민족들과 계속 영토분쟁을 하고 있다.
B. 사랑의 채찍(7-11)
“주께서 그 백성을 치셨은즉 그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살육을 당하였은들 백성을 도륙한 자의 살육을 당함과 같았겠느냐”(7)
이사야 선지자는 7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섭리를 언급하여 “주께서 그 백성을 치셨은즉 그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갖겠으며 백성이 살육을 당하였은들 백성을 도륙한 자의 살육을 당함과 같았겠느냐” 기록하였다. 만약 당신은 당신의 자녀의 잘못을 다룰 때 어떤 마음을 가겠는가? 자녀의 잘못을 다루는 당신의 마음이 당신의 자녀를 괴롭게 하는 대적들을 대하는 마음과 갖겠는가? 잘못환 자녀를 다루는 노함은 그 잘못을 고치기 위함이지만 나를 대적하는 자에 대한 분노는 악에 대한 결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8) 증거하였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비유가 아닐 수 없다. 그의 백성을 치시되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하셨다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그들의 갈 곳을 정하신 후에 치신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폭풍으로 그들을 치시되 이미 그들이 갈 예정지를 모두 정하셨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형벌을 받는다고 하자 그러나 그 형벌 뒤에 우리가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면 그것은 주께서 우리를 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고치시는 수단과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 죄를 없이 함을 얻을 결과는 이로 인하나니 곧 그가 그 제단의 모든 돌로 부숴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 태양상으로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 기록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증거하였다.
여기서 아세라와 태양상이란 수천년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하던 이방신들이다. 아세라는 아모리 족속이 숭배하던 여신으로 이는 후일 아합왕이 베니게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함으로 아세라는 바알신과 함께 북왕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라야 선지자는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아세라 예언자들이 400명이라 말하였다. 또 태양상이란 애굽의 신을 뜻한다. 400여년 동안 애굽에 종살이한 이스라엘 민족은 오랜 동안 애굽의 종교와 풍습에 습관되어 있었다. 그 당시 찬란한 역사 속에 군림하던 애굽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대주의 사상에 빠진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우상들을 섬기던 나라들의 종말을 말하여 “대저 견고한 성읍은 적막하고 거처가 황무하며 버림이 되어 광야와 같았은즉 송아지가 거기서 먹고 거기서 누우며 그 나무가지를 먹어 없이 하리라 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이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자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자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10,11) 하셨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사랑과 율법 위에 그 믿음의 기틀을 놓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찌하여 이방신에게 넘어질 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깊은 사고가 필요하다. 이는 그들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를 버리고 급히 흐르는 나일을 탐한 것처럼 오늘날 많은 교회가 지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감정에 사로잡혀 그 마음에 탐하던 것을 쫓아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런 자들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견해는 동일하심을 알아야 할 것이다.
C. 이스라엘의 회복(12-13)
“그날에 큰 나팔을 울려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 땅에 쫒겨난 자가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13)
이사야 선지자는 12절에서 그의 백성을 다시 섭리하시는 과정을 설명하여 “너의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 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의 시내에까지 과실을 떠는 것 같이 너희를 일일이 모으시리라” 증거하였다. 이는 참으로 흥미로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과일을 떠는 것 같이 일일이 모으신다는 것은 이스라엘 모든 민족을 모두 그의 땅으로 모으시겠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창일하는 하수부터 애굽시내에 이르기까지라 하였으므로 이는 그들이 구속받고 있던 모든 땅에서 구원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다.
계속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제 어느 한 날을 지목하여 “그 날에 큰 나팔을 울려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가 돌아 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13) 증거하였다.
우리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 나팔소리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그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에 언약궤 앞에 선 제사장들의 양각나팔을 사용하셨다. 또 성회를 위해 나팔을 울렸고 전쟁이 발발하면 나팔을 불어 전쟁을 준비하였다.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은 그 흩어진 모든 나라에서 속속 귀환하고 있다. 러시아와 이집트와 그 모든 나라에서 그들은 자기의 땅으로 돌아 온다. 이를 위해 서방에 정착하여 성공한 유대인들이 그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공급하고 각국 정상들과 이 문제를 풀어 나가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곧 그의 날아 우리 앞에 가까웠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큰 나팔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쳐 불러 모으시는 하나님의 나팔이다. 이는 고린도전사나 데살로니가서에서 언급한 마지막 나팔과는 또 다른 견지를 갖고 있다. 큰 나팔에 대하여는 예수께서도 언급하신 바 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24:31) 말씀하셨다.
이는 오늘의 우리에게 그 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나팔이 어떻게 울리고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당신은 천사장의 나팔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결코 문선명이 말하는 참 아버지라는 말이나 이만희가 말하는 자신이 성령이라는 말들은 나팔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광명한 천사로 둔갑한 사단의 추종자로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 적그리스도의 졸개들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이 약속한 나팔 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바울 사도가 우리를 향하여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15:51) 하였고 다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6,17)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천사장의 나팔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 나팔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당신은 결국 7년동안 대환난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다.
II. 여호와의 묘략과 지혜(이사야28장)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16)
A. 교만한 면류관
이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멸망을 받을 수 없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거론한다. 먼저 그는 분열된 북이스라엘의 교만을 언급하여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화 있을진저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가는 꽃같으니 화 있을진저”(1)라고 저주하였다.
여기서 언급한 에브라임은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둘째 아들로서 북이스라엘의 주도권을 가진 지파로서 솔로몬의 부하로서 하나님의 승인을 얻은 여로보암이 10지파의 동조를 얻어 세운 왕국이다. 이 예언은 에브라임 지파의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왕상11:29).
그러나 문제는 여로보암의 교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안식일과 절기 때마다 백성들이 남유다 왕국의 도성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을 시기하여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단을 쌓고 백성들로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게 하였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부처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꼴과 같다고 하겠다. 결국 하나님은 이와 같은 여로보암의 죄를 물어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 물의 창일함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에브라임의 취한 자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2,3) 경고하였다.
이사야는 5절에서 “그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여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증거하였다. 후일 우리는 계시록에서 24장로들이 주 앞에 자기의 면류관을 던지고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는 장면을 보게 된다(계4:10). 또한 우리는 이 땅의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의 신부 된 성도들에게 세마포를 입게 한 백말을 탄 자 곧 충신과 진실 된 주의 종이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을 쓰고 백마를 타고 등장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계19:9-13).
흥미롭게도 이사야는 여기서 에브라임의 교만을 가리켜 ‘교만한 면류관’이라 칭하였다. 여기서 면류관이란 최종의 승자에게 씌워 주는 왕관이다. 이는 여로보암과 그의 후손들은 자기들의 노력으로 스스로 면류관을 쓰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이를 경책하신 말씀이다. 이와 같이 면류관은 혈통이나 세상 권세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에 순종하여 의로움을 지킨 교회와 주의 성도들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만은 비단 북이스라엘에게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임의로 지도자 자리에 앉아 판결을 굽게 하는 유다를 가리켜 “이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 걸음 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를 인하여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를 하나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7,8) 책망하였다.
이는 북이스라엘이 종교적 타락을 책망하신 것이라면 남유다의 이성적 타락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풍속과 장로들의 유전과 혈통을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이와 같이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북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의 신이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 칭하며 예배하는 무리들과 또 교회 안에 세상의 철학과 문화를 끌어들여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무리들이다.
이들은 이미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두 자기 포도주와 독주에 취하여 비틀거릴 것이며 오직 그의 면류관은 오직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을 따라 의로운 삶을 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린 증거로 공의로 지키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러면 이들의 잘못은 무엇인가? 이들이 말하는 경계와 교훈이 모두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끌어들여 잘못된 지식으로 주의 백성들로 미혹된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실 것이라 하셨다.
여기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이란 지금까지는 택한 백성들에게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전달하였지만 이제부터는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입술로 다른 나라 말들로 그의 지식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이는 곧 택한 백성의 은혜를 거두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은혜의 시대를 열 것을 예고한 것이다. 이사야는 이미 6장에서 ‘여호와께서 이 백성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6:9)
또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천국비밀을 말씀하시며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막4:11) 말씀하셨다.
계속하여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짐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13)하였다. 이 말씀은 매우 흥미롭다. 유대인들이 말한 바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한다’는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주께서도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매우 조심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같이 들리지만 만약 우리가 어떤 경계의 말씀과 교훈을 들을 때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배운다면 그것은 경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도 갈수록 태산이 될 뿐이다. 사실 오늘날 많은 교회들도 이처럼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옆걸음 치며 비틀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에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이 백성을 치리 하는 너희 경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14) 하고 경고하셨다. 여기서 경만한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사악한 지도자들을 말한다.
최근 통일교 교주 문선명이 90세 잔치를 베풀며 하늘의 참아버지께서 이제 더 이상 세상을 참지 않고 그의 말로 세상을 접수할 것이라 선언하였다. 얼마나 참람한 말인가? 우리는 마치 멸망의 날에 멸망의 아들에게 허락된 짐승의 큰 말과 참람된 말을 듣는 것과 같이 두려워진다(계13:5).
이사야는 그들의 참람한 말을 거론하여 “너희 말이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을 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 피난처를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15) 증거하였다.
이 얼마나 참람한 말인가? 이는 지옥의 사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이는 내가 이미 사망 속에 있으니 염라대왕이 나를 어쩌지 못할 것이며 내가 지옥과 관계를 가진 사람이니 재앙이 넘치더라도 내게 미치지 못할 것이라 말하는 것과도 같다. 이처럼 그들의 교만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 넘어 스스로 거짓의 세상의 주인공이 되고자 한다. 나는 이들에게 그들이 말한바 그 모든 재앙의 재앙이 더할 것이라 믿는다.
B. 시온에 두신 기초석
“나는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추를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여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 너희 사망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음부로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 때에 너희가 그것에 밟힘을 당할 것이라”(18-19)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이상 악할 것이 없는 음부의 세상이 되었으며 거짓과 허위가 난무하는 세상이 되어 평안한 숨조차 쉴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이 세상에 더없는 의인이 탄생한다고 해도 더 이상 이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이처럼 세상을 참담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제 그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16) 말씀하셨다.
이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언급하신 것이다. 그 돌은 불순종한 자자들에게는 거치는 돌과 반석이며 흑암에서 빛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생명의 반석인 것이다(롬10:33). 또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되 사람으로 태어나 인간의 모든 질고와 고통을 겪으시고 스스로 사망의 올무에 들어 가셨다. 그러므로 히브리 기자는 그를 가리켜 ‘저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생축으로 자기 몸을 드린 대제사장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자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는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히4:15) 증거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사망과 더불어 세운 언약을 폐하실 것과 음부의 맹약이 서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공평을 줄로 의를 추로 삼아 심판하실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는 이제 유대인들의 자랑인 율법을 폐하시고 오직 공의로 판단하실 때를 언급하신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의 주제를 이해할 것 같다.
계속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사망의 언약들에 대하여 너희가 잡은 것이 아침마다 유행하고 주야로 유행할 것이라 하시며 너희가 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며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과 같을 것이라 하셨다. 이는 그들이 영광을 하나님께 두지 않음으로 율법이 세상 풍속을 이기지 못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며 또 율법이 본능적 유혹을 제어하지 못할 것을 비유하신 것이다.
이로서 그들에게 임할 여호와의 진노하심이 마치 브라심 산(바알브라심)에서 다윗이 물을 흩음같이 대적 팔레스틴을 흩으심과 같이 같고(삼하5:20), 이방이 시기하여 주 여호와께 귀의한 백성 기브온 족속을 칠 때에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맺은 그 언약을 귀하게 여겨 그 대적을 멸할 때 ‘태양아 머물러라’ 함과 같다 하였다.
C. 여호와의 권고(23-29)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23)
끝으로 이사야는 파종하는 자의 예지와 추수하는 자의 지혜를 비유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섭리하시는 은혜를 말하며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끊이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그 땅을 개간하여 고르게만 하겠느냐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않겠느냐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라”(24-26) 증거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농부는 씨를 뿌림에 있어 먼저 땅을 갈며 또 땅을 개간하여 고르게할 때 그 알고 있는 지식을 따라 예정된 일을 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또 그는 농부의 추수하는 방법을 비유하며 도리깨질과 수레바퀴와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그것은 곡식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떨기도 하고 저것도 하여 알곡을 거둔다 하였다.
농부들도 알곡을 거두기 위해 땅을 고르고 평평케 하고 각각 그 종자에 합당한 곳에 씨를 심고 물을 주고 새와 해충을 막으며 추수의 날에도 그 씨앗의 성질에 맞게 도리깨질과 작대기와 수레바퀴와 말굽으로 찧어 온전한 곡식을 거두는 것같이 주께서도 그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을 섭리하실 때에 때에 맞추어 이른비와 늦은 비를 내리심과 같이 이 모든 기묘한 모략과 광대한 지혜가 만군의 여호와께 있음을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께서 구원하실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이제도 있다 한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를 구원하심에도 동일하신 섭리이심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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