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9-30장 강해) “누가 기다릴 것인가?”
(사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나는 죠이라 부르는 슈나우져 수컷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이 놈은 정말 고집이 세서 매를 맞으면서도 자기 고집대로 하려 든다. 나는 밖에 나갈 때 목에 줄을 매여 데리고 나간다. 어쩌다 끈이 풀어지면 죽을 힘을 다하여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려 가는데 내가 아무리 큰 소리로 불러도 콧방귀도 뀌지 않고 저 가고 싶은 데로 달려나가 결국 시야의 사정거리를 벗어나고 만다.
나는 한동안 찾아 보지만 지쳐버려 집으로 돌아 오게 된다. 죠이는 저 좋은 곳을 다니며 세상을 즐기다가 어떤 위험을 느껴야만 그때서야 자신의 보호자가 옆에 없음을 깨닫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아 헤매다가 군데군데 영역표시를 해둔 냄새를 맡으며 집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많이 놀라고 여기저기 헤매다가 꼴이 많이 망가진 후이다. 이는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생긴 결과다. 주인을 떠나 고생을 해 봐야 주인의 품이 얼마나 따뜻하고 안전한가를 깨닫게 된다. 돌아 온 탕자처럼 말이다.
나는 걱정이 되어 창 밖을 기웃거리다가 다시 밖으로 찾아 나서게 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사정거리는 내가 죠이와 함께 건넜던 건널목까지 가서 기다리는 것이다. 다행이 죠이는 냄새를 따라 이곳까지 오게 되는데 나는 파랑 신호등이 켜질 때까지 죠이를 부르지 못하고 한 쪽에 서 있을 뿐이다. 신호등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이놈이 빨강불이든 노란불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건너려다 결국 질주하는 자동차에 칠 것이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넘은 신호를 아랑곳하지 않고 제 집을 찾아 달리게 되는데 결국 질주하는 차들의 클렉션 소리에 혼비백산 되고 만다. 놀래기는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때서야 나는 자동차 사이로 끼어들어가서 죽음의 공포에서 떨고 있는 죠이를 안고 나오게 된다. 그러나 죠이는 사정없이 회초리를 맞게 된다. 이는 매번 당하는 일인데도 그 놈은 또 그때뿐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은 유다에게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 그것은 잘못된 길이며, 결국은 실패할 것이다. 그들은 거듭 경고의 말을 듣지 않지만 하나님은 단지 기다리실 뿐이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I. 묵시를 봉하심(이사야29장)
(사29: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니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나를 존경하는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A. 아리엘의 고통(1-8) ‘아리엘-하나님의 사자’
이사야 선지자는 서두에서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의 진 친 성읍이여 연부년 절기가 돌아 오려니와 내가 필경은 너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네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1) 기록하였다.
아리엘이란 하나님 성전의 제단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이사야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연상하며 비탄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연부년’이란 매년 주기적으로 돌아 오는 절기를 뜻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매년 거르지 않고 제단에 제사를 드리지만 그와 관계 없이 주께서 너희를 고통 가운데로 내어 던질 것이란 뜻이다.
그동안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경고를 하여 왔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여 주께 돌아 오지 않고 계속 종교활동 속에 빠져 있으면서도 삶은 그 뜻하신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이에 하나님은 앗수르를 일으켜 예루살렘을 포위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사야는 이런 소행을 가리켜 이사야는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히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거리리라”(4) 기록하였다.
사실 이 일은 히스기야 왕이 죽은 후에 나타난 일이다. 그들은 히스기야 왕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이적들을 보고도 다시 하나님을 외면하고 인간의 지혜를 따르려 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일을 경고하는 유다가 두 가지 악을 행하였는데 그 하나는 생수의 근원 버린 것이며 또 하나는 스스로 터진 웅덩이를 판 것이라 책망하였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 세상의 방법을 도입하고 있다. 교회는 오직 지상명령을 따르기 위한 전도만을 하는 곳으로 생각을 하고 성도들 가운데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들은 모두 전문가에게 보내 해결하려고 있다. 그들은 말하여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는 영적인 일만 하면 된다 말하고 세상을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또 통치하시니 세상의 방법도 곧 하나님의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문제들은 모두 사람들의 죄성에 속한 문제들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주의 뜻대로 살지 못하여 발생된 죄의 문제들이다. 다시 말하여 알코올, 마약, 성, 동성애 등을 다룰 때 그들은 이 문제를 전문가나 시절에 의존하려 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하는 것일까 싶다. 그런 것에 비하여 어떤 무지한 목사들은 죽을 병이 든 사람에게 병원으로 가라고 하지 않고 안찰 기도와 같은 것으로 다스리려는 무지몽매한 짓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육체의 질병에 관한 것을 다룰 때에는 의학적 도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신적인 문제 곧 마음의 죄로 인하여 발생된 도덕과 윤리적 문제들은 어떤 심리적 프로그램이나 정신과 의사들이 다룰 문제가 아니라 죄성의 자각을 통하여 회개하고 육체의 속성을 벗어 옛사람에서 벗어나 의의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날이 갈수록 교회는 국가와 사회단체들과 결탁하여 죄와 타협하고 자신들은 교회부흥을 위한 전도에만 치중하려 한다. 이와 같이 오늘날 교회들고 이스라엘과 동일한 전철을 밟고 있다.
이사야는 그들이 그 어떤 생각과 말을 하드러도 그들의 말은 티끌 가운데 나는 신접한 자의 목소리일 뿐이며 너희에게 경각간에 화가 이르러 만군의 여호와로부터 오는 벽력과 지진과 회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징벌하실 것이라 증거하였다.(5,6)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을 치는 이방군대의 모습을 증거하여 아리엘 곧 하나님의 보장 된 성읍 예루살렘을 치는 자는 꿈같아서 마치 밤의 환상을 보는 것 같아서 저희가 꿈에 먹을 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허기지고 목마른 것처럼, 목마른 자가 꿈에 물을 마셨을지라도 깨면 갈급하여 갈증을 느끼듯이 시온을 치는 무리들이 이처럼 허기진 군대가 되어 쳐 들어 올 것이라 하였다.
B. 아리엘의 멸망의 원인 (9-14)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신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10)
그러면 주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처럼 허망하게 멸망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이사야 선지자는 이에 대하여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이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대저 만군의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9,10) 증거하였다.
지금 이사야 선지는 백성의 타락한 상황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멸망의 원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포도주에 취하고 독주에 취하여 있다. 그러나 그들의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이 주 여호와 통치를 받지 아니하고 그들 스스로의 지혜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주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그의 택한 종들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여 그 백성들의 눈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가르침을 받기 보다는 자기들의 지혜와 지식으로 살고자 하였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는 선견자의 가르침을 받기를 거절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깨달을 수 없는 봉해진 묵시가 되어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나 모두 봉해진 책이라 읽지 못하며 무식하여 읽지 못한다 답하였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의 사도들을 통해서 장래일을 모두 기록하게 하셨고 또 그의 성령을 부어 세운 복음의 사역자들로 하여 그 예언의 말씀들을 깨달아 그 백성들에게 전달하게 하셨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들을 스승으로 받아드리지 않았고 지도자가 되기를 싫어하였고 도리혀 귀에 듣기 좋은 부드럽고 기름진 말을 좋아하고 있다.
이에 이사야 선지자는 “주께서 말씀하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으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13) 증거하였다하였고 다시 하나님께서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14) 하셨다.
나는 전세계적으로 특별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심히 우려를 갖게 된다. 지금까지 고대 역사를 통해서 그 나름대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한 통치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는 최고의 학문과 전통을 자랑하면서도 국민들이 통감할 유능한 지도자가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로하여 세계 정치는 혼란스러워지고 경제 또한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이 되어 가고 있다.
이는 모두가 교회의 역할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교계 지도자들이 모두 성경의 온전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인기 영합주의적 종교활동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세계는 인류를 구원할 한 지도자를 찾게 될 것인데 주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너희가 자기 이름으로 오는 그 사람을 열광할 것이다. 그는 적그리스도로서 이적과 기사로 사람들을 미혹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C. 야곱의 세대교체(15-24)
“그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18)
이제 이사야 선지자는 이들의 죄악을 폭로하여 “화있을진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 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15) 할 것이라 하였다.
이 얼마나 명확한 증거인가? 양의 탈을 쓰고 백성들 가운데서 스스로 양상군자 노릇을 하는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의 죄를 숨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스스로도 알고 또 사람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노출되어 있다. 그날에 이르면 그의 죄는 주 앞에서 모두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이사야는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으신 자에게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16)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숨기며 도리혀 자기를 창조하신 자를 향하여 교만한 마음을 잦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 한가지 기이한 일을 하실 것인데 그것은 명철자의 지혜를 가리우고 어리석은 자들에게 지혜를 부어 주시는 것이다.
이를 말하여 이사야는 “미구에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않겠으며 기름진 밭이 산림으로 여김이 되지 않겠느냐” 하였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입장이라고 하겠다. 지금 세상은 이미 이 원리가 시작되고 있다.
이사야는 계속하여 “그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경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18-20) 증거하였다.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때에 성취되었는데 하나님은 주의 뜻을 거역한 경만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폐하시고 겸손히 주의 음성을 듣는 그의 사람들을 세워 그의 나라의 통치자를 삼으셨다. 그러므로 바울도 증거하여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셨으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기록하였다.
흥미롭게도 이사야는 22절에서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야곱이 이제부터는 부끄러워 아니하겠고 그 얼굴이 이제부터는 실색하지 아니 할 것이라” 증거하였다. 이는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회복을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영적 세대교체를 뜻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여기서 육신을 따라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날에 이르러 새롭게 태어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그날이 이르면 “그 자손은 나의 손으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자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리라”(23,24) 증거하였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며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나온 것이다.
비록 그들이 지금은 자기의 죄를 숨기고 경만하여 주 앞에 패역하고 있지만 이는 모두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 가운데 있는 것이다. 주께서 그들의 귀를 먹게하고 눈을 뜨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또 그 백성과 맺으신 언약의 말씀은 영영하여 주께서 예정하신 그 날이 이르면 그들의 눈이 밝아지고 그들의 귀가 열려 그들은 모두 주의 거룩하신 자를 찬송할 것이며 야곱의 거룩한 자를 칭송할 것이다.
II. 기다림의 고통(이사야30장)
(사30:26)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 배가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
A. 앗수르인이 북이스라엘을 정복했고 지금은 예루살렘을 겨냥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수 차례 주께서 앗수르의 손에서 구할 것이라 전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애굽과의 동맹을 통해 구원을 받으려 했다. 그들은 그의 성령을 통해서 구원을 얻기 보다는 애굽에서 안식처를 찾으려 했으며 그들은 대적을 방어하기 위해 여호와 대신 애굽을 의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사야는 애굽은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것임을 경고하였다(7).
이사야의 이 메시지는 오늘도 변함없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며 “기록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롬4:17-19) 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주라 또 만군의 왕이라 부르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란 우리의 주관자이시며 우리의 인격이라는 말과 같다. 또 왕이란 통치자를 뜻하며 만군의 왕이란 이 세상 그 모든 것의 통치자를 뜻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주라 왕이라 부르면서도 우리의 모든 일을 의뢰하지 못하고 다른 힘을 빌려 살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어느 시대이고 어느 곳에 있더라도 그의 백성이 주께 돌아 와 구원을 청하면 그는 우리의 주시라 그가 우리를 구하고 우리를 평안의 땅으로 인도하여 그 믿음의 대가를 보답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보내신 종들의 메시지를 거역하며 도리혀 이사야를 향하여 “선견자를 향하여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10) 소리쳤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종들 향하여 앞날에 대하여 말하지 말고 바른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선지자의 말이 그들의 양심을 때리므로 듣기를 거부하고 귀에 부르러운 말 듣기 좋은 말을 하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우리 교회를 다녀간 사람들로부터 목사님의 설교는 까칠해서 듣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큰 교회 목사님들처럼 은혜롭고 믿음을 불어 넣는 설교를 하라고 말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는데 까칠하다 하고 부드러운 설교를 하라니 이들은 내게 거짓을 말하고 입에 발린 말을 하라는 것과 같다.
이에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영히 있게하라”(8) 하시며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9) 하셨다. 주께서 이처럼 이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발생할 원리임을 언급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이와 동일한 일이 우리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지자의 입을 막는 패역한 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에 의뢰하니 이 죄악이 너희로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경각간에 홀연히 무너짐 같게 하리라”(13) 하셨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평안한 중에 자고 있을 때 높게 쌓은 담이 불숙나와 무너진다면 누가 미리 그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을 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라”(15,16) 하셨다. 이는 그들의 말하고 바란대로 될 것이란 말씀이며 그러나 그들을 쫓는 침략자는 그들보다 더 빠를 것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쫓은 즉 천 사람이 도망할 것이며 남은 자는 산꼭대기; 깃대 같을 것이라 하셨다. 이처럼 사람들은 어리석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의 생각대로 행하고자 한다.
B.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20)
이사야는 18절에서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요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18) 기록하였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부족한 부분을 주실 때가 많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부족한 것을 채우려고 스스로의 생각과 힘으로 최선을 다해 보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나는 그 일에 대한 지혜를 주께 구하기 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서보지만 그 노력과 관계없이 일은 더욱 악화되어 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기서 주께 자복하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 그들이 과거에 성공한 사례를 따라 행하여 본다. 그러나 갈수록 일은 더 복잡해지고 이제 더 이상 나갈 기력도 재물로 상실한 고로 그때서야 주 앞에 무릎을 꿇고 매달린다. 이는 주께서 이미 베드로의 실패의 경험을 들어 우리에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내 힘과 지혜를 의지해서 허공의 뜬구름을 잡아 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우리가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뜬 구름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버리고 만다.
이 때에도 하나님은 처음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 것이다. 이미 주께서 우리에게 ‘나 여호와는 네가 나를 부를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네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너에게 그것을 하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너의 모든 일에 대하여 성경을 통해 모두 전달하였기 때문에 나는 네가 나를 찾아 오기까지 기다릴 뿐이다 하신다.
주님은 실패 투성이인 베드로에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 (눅22:31,32) 말씀하셨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가 스스로 고생문을 자처하는 것을 보시면서도 막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가 돌아 올 때를 기다릴 뿐이시다.
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음을 증명하려 애쓴다. 그때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당신이 하는 일거일동을 보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절대로 미리 막아 주지 않는다.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그들은 그 모든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언제라도 당신이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여러 가지를 통해 우리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위반한 만큼 하나님께 벌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회개하고 돌아 왔을 때 아무 대가 없이 나를 축복 하신다.
주께서 이와 같은 방법을 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사야는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요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이니 너희는 이리로 행할 것이라”(20-21) 증거하였다. 이는 사람이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어야만 깨닫는다는 말씀이다. 그야말로 사람이 짐승보다 나음이 무엇이랴!
계속하여 이사야는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들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19) 증거하였다. 우리 말에 울지 않는 아이 젖 주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회개하여 울부짖으며 주를 찾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이스라엘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독립적이고 자신들의 일과 법률로 공평을 구하고자 힘쓴다. 이사야의 때처럼 스스로의 군사력으로 국가를 방어를 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하는 일들이 더 나빠지기를 기다린다.
이미 주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라고 말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다. 그때에 이르러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들은 스승을 볼 것이다(20)
C. 동전의 양면 같은 하나님의 방법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님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나같았으면 벌써 그들을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참으신다. 절대로 하나님은 그들의 고집대로 행 하는 일을 막아 억지로 돌이키시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 스스로 자신이 택한 세상 사람들이나 세상의 방법이 자신들을 구원하지 못하였음을 깨닫고 더 이상 생명을 보전할 곳이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리실 뿐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지극하신 인내심을 말하여 “주의 약속이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증거하였으며 또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린다” (약5:7)고 권고하였다.
D. “여호와의 예정하신 몽둥이”(27-33) – ‘도벳’의 설립
내가가 단언하건데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다리기 보다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훤신 더 낫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기다리면 확실한 구원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기다리면, 확실한 고난이 따른다.
다윗은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에 대하여 쉬운 길을 통해서 배우기 보다는 어리석은 고통의 길을 통해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에게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하였고 다시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 할 것이다” (시편32:7,9) 경고하였다.
이와 같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은 그 죄의 속성을 벗지 못하고 쉬운 일을 어렵게 배운다. 그러나 죄인의 길에 밝은 앞날은 없다. 그들의 걸음이 모로가든 바로가든 넘어질 수 밖에 없다. 모두가 자기 생각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들 앞에는 죽음의 사자가 진을 치고 있고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돌아 올 것을 바라고 참고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더 이상 당신의 생각과 육신을 믿지 마라. 인간의 육신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을 거역한다. 사람은 항상 죄성에 젖어 계획을 개선하거나 변경하여 스스로 문제를 풀려고 한다. 이와 같이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당신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들은 예정하신 몽둥이를 맞게 될 것이다.
이사야는 26절에서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빛 배가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 증거하였다. 이 얼마나 통괘한 날인가? 우리가 자복하고 주 앞에 부르짖으면 여호와 앞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그의 구원의 날은 항상 준비 되어 있어 그 순간의 모든 악몽은 씻김을 입고 평강의 빛이 임하게 된다.
그리고 진노하시는 여호와의 칼이 그 대적에게 임할 것이다. 이를 말하여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예정하신 몽둥이를 앗수르 위에 더하실 때마다 소고를 치며 수금을 탈 것이며 그는 전쟁 때에 팔을 들어 그들을 치시리라”(32) 증거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예부터 설치 된 도벳 곧 깊고 넓은 불타는 유황지옥이 마치 여호와의 호흡 같아서 그들의 교만을 불살라 버릴 것이다. 이와 같이 여호와의 진노의 몽둥이는 그 백성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 대적을 위해 예비 된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도벳의 깊고 넓은 곳을 탐하는 너희 앞에는 영영한 유황천이 흐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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