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6-37장) ‘믿음의 시련과 믿음의 징조’
(사37:30)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이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이사야 36장부터 29장까지는 열왕기하 18장과 역대하 32장에 기록된 남 유다왕국의 역사 중의 일부이다. 이미 역사서에 두번이나 기록되었는데도 이사야가 이 내용을 거듭하여 예언서 중에 포함 시킨 것은 또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이는 앗수르 제국과 또 떠오르는 별 바벨론 제국은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과정 속에 통과하여야 할 히스기야 곧 이스라엘이 넘어야 할 산이요, 우리 교회의 숙제이기 때문이다.
l. (이사야36장) “믿음의 시련”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하여 대답지 말하였음이었더라”(21)
A. 앗수르왕의 미혹 – ‘사단의 미혹’
36장 서두에는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취하니라” 기록되었다. 여기서 히스기야 14년이란 히스기야가 25세에 왕으로 즉위하던 B.C.715 년으로부터 14년째 되는 해로 B.C. 701년이다. 역사서를 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은 5년 간격으로 두번에 걸쳐 남유다를 침공하였는데 그 내용이 36장과 37장으로 구분되어 기록되었다.
그 당시 앗수르는 세력을 떨쳐 막강한 군사력으로 팔레스틴 일대를 공격하여 가사를 비롯한 사방의 견고한 성들을 제압하고 또 히스기야왕 4년에는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 성을 에워싸고 6년 째 되는 해에 북이스라엘 도성 사마리아 성을 함락 시켰다. 이는 모두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그의 언약을 배반한 결과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왕 히스기야는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고 주와 연합하여 계명을 지키므로 주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열하18:5-10).
그러나 히스기야 왕 14년 때에 이르러 앗수르 왕 산헤립이 막강한 군사를 이끌고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쳐 점령하자 믿음의 왕 히시기야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앗수르 왕 앞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에 산헤립은 유다왕에게 패전 배상금으로 삼백달런트와 금 삼십달란트를 요구하였다. 이에 히스기야는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은 다 내어 주고도 모자라 성전 문과 왕궁 기둥에 입힌 금을 베껴 앗수르 왕에게 주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쯤되면 아무리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도 그 믿음의 실행에 착오가 생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히스기야 왕에게 있어 첫번째 시험이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앗수르 왕 산헤립은 군대장관 랍사게를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요구한 것이다(열하18:17). 이미 랍세게는 유다의 변방 팔레스틴의 변방 라기스 성읍을 장악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세탁업자의 터 윗못 수도구에 까지 이르렀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오랜세월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예루살렘 도성의 급수원인 수원지를 확보하기 위해 힘을 써 온 히스기야로서는 속수무책이 되고 말았다. 유다는 이스라엘처럼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는 풍전등화가 되고 말았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의 예언자 이사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공교롭게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앞으로 가자니 호랑이가 있고 뒤로 가자니 사자가 버티고 있는 격이다. 그대로 앉아서 죽을 수도 없고 인간은 절대절명의 순간에도 살아남아야 하는 투쟁을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또한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이러한 일들을 여러 번 겪고 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은 앗수르의 세력 앞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또 다른 세력 애굽과 동맹을 맺어 앗수르를 대항하던가 아니면 앗수르왕 산헤립과 타협을 이끌어 내던가 둘 중에 하나 밖에 길이 없다. 이에 히스기야는 힐기야의 아들 궁내대신 엘리아김,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요아를 랍사게에게 보내어 피할 길을 얻고자 하였다. 물론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좋겠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또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도우신다 해도 시간이 없다. 대적이 코 앞을 밟고 있는 상황이다.
B. 앗수르왕 세력 – ‘사단의 권세’
그러나 앗수르 왕 산헤립은 모든 것을 환히 내다보고 있었다. 랍사게는 세명의 신하들에게 너희가 애굽을 의뢰하려 하지만 애굽은 상한 갈대 지팡이다. 이는 이미 그들은 애굽의 모든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애굽은 구스 왕 디르하가에게 멸망을 당하여 그가 애굽의 제25왕조로 군림한 상태이다(사37:9).
또한 그는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예루살렘의 여호와를 의뢰한다 말하지만 그 신은 원래 산당에 있던 신을 예루살렘에서만 섬기라고 하던 신이 아니더냐고 조롱하였다. 이는 그들은 과거의 유다 왕들의 전력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너의 선왕들이 산당에서 이방신들을 예배를 드릴 때에도 별로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던 신이 아니냐고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에 주 앞에 온전치 못하면 거룩한 하나님이 이방에게 조소를 당하는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그들의 군사적 현실을 조롱하여 너희는 말 2000필을 주어도 탈 자가 없을 것이며, 우리의 작은 장관 하나도 물리칠 힘조차 없지 않느냐고 허세를 부렸다. 사실 그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전쟁을 위해 말을 두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방패로 국가를 지키던 민족이다.
그러나 랍사게의 가장 큰 모욕적인 말은 ‘너희 여호와께서 나를 불러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다’는 괴변이다. 더구나 그는 아람어를 사용하는 앗수르의 군대장관인데도 그는 유다 사람의 말로 외치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히스기야의 신하들은 놀라서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알고 있으니 아람어로 말하고 제발 성 위에 있는 백성들이 들을 수 있는 유다 말로는 하지 마십시요’라고 애걸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앗수르 산헤립 왕에게 가서 내 백성을 멸망시키라고 명령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 어디에도 그런 명령을 내리신 일이 없다. 오히려 애굽, 블르셋, 다메섹, 구스 그리고 앗수르와 바벨론도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애굽의 도움을 청하러 내려가는 자는 화를 당할 것이라 말씀하셨다(사17장-19장) 그러나 일이 다급하자 히스기야 왕은 애굽과 동맹을 맺었고 산헤립 왕은 이 모든 예언자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이처럼 논리적이고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가끔 텔레비전을 통하여 시국 토론회를 보곤한다. 토론회에는 어떤 주제에 대한 찬반 패널들이 나오게 마련인데 이는 항상 우파 세력인 한나라당 사람들과 좌파세력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그들의 토론을 지켜 보고 있자면 좌파 세력의 패널들의 입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정보력이 강한 지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은 현실에 강한 정보력과 강한 조직력을 갖고 있다.
아람방언으로 말해달라고 간청하는 히스기야의 신하들의 말에 랍사게는 코웃음을 치며 ‘내 주께서 이 일을 네 주와 네게만 말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기의 소변을 마실 성 위에 있는 백성들에게도 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냐’(12) 조소하였다. 이는 앗수르 군대의 포로로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 도성 사람들의 식량난과 식수문제를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전쟁에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는 랍세게는 유다를 향하여 거침없이 하이킥을 던진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우리 앗수르 왕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히스가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듯이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붙임이 되지 아니하리라 할지라도 히스기야를 청종치 말라”(15,16a) 회유하였다.
C. 믿음의 최후의 보루 – ‘하나님의 전신갑주’
계속하여 그는 너희가 우리 왕에게 항복하면 자기 포도주와 무화과를 먹으며 자기 우물을 마실 것이며 너희를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앗수르의 땅으로 옮겨 너희 본토와 같이 지내게 하리라 하였다. 오랜 전쟁의 시달림 속에서는 달콤한 유혹의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말은 항상 현실적이고 논리적이다.
어디 그 뿐인가? 랍사게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어떤 신도 앗수르의 손에서 건져내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하맛(다메섹 북쪽 시리아 성읍)과 아르밧(시리아 북부 중심도시) 이 어떻게 되었으며 스발와임(점령국 포로 수용지역)과 사마리아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건지겠느냐?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이 나라들은 모두 각자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지 않았느냐? 하고 영적인 부분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많이 들어 본 말들이 아닌가? 세상은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를 향하여 너희가 하나님을 믿어 얻은 것이 무엇이냐? 매 주일 성전에 나가 드리는 예배가 너희에게 밥을 주었느냐 물을 주었느냐 너희가 먹는 모든 밥과 떡과 물은 모두 세상이 준 것이 아니냐 공연히 십일조를 빼앗는 목사들의 말에 미혹되지 말고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자 그러면 너희 생활이 더욱 행복할 것이다 하고 있다.
이 때 믿음의 사람 당신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 유혹의 세상을 사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당신은 무어라고 가르칠 것인가? 오늘 이에 대한 답변에 대하여 성경은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하여 대답지 말하였음이었더라”(21) 기록하였다.
그렇다. 세상은 세상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힘과 정보와 재물을 가지고 있다. 언어도 다 그들의 것이다. 인간 된 우리가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없다. 세상을 사는 지혜는 항상 그들이 앞서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그들과 대항할 필요가 없다. 이미 성경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있는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히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들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마귀를 대적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주께서도 우리에게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셨다. 이것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지혜이다. 바울도 종말을 사는 우리에게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히10:38) 증거하였다. 아멘아멘 오직 우리의 힘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능력의 하나님을 찬양하나이다.
이제 우리는 진퇴양난의 궁지에 몰린 유다 왕 히스기야가 어떻게 믿음의 승리를 이끌어 냈는지 알아 보도록 하자. 이는 세상의 많은 문제 속에서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삶의 모델이 될 것이다.
A. 히스기야의 믿음(1-7) ‘성령과 연합한 기도’
앗수르 군대장관 랍사게와 화해를 위한 회담에 나갔던 세 명의 신하들의 보고를 받은 히스기야 왕은 이제 자신의 힘으로는 그 어떤 방법도 없음을 깨닫고 옷을 찢고 굵은 배를 입고 하나님의 전으로 나아 가며 굵은 베를 입고 뒤를 따르는 궁내대신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에게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내며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갔도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었을 것이라 그가 그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에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데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3,4) 당부하였다.
여기서 히스기야가 말한 ‘남아 있는 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이는 최후의 순간까지 주 하나님 여호와의 구원을 신뢰하고 기다리고 있는 온전한 성도들을 뜻한다. 또한 히스기야 왕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부복하고 있으면서 왜 이사야 선지자에게 기도를 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을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는 히스가야 자신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를 그의 종으로 기름부으셨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질서를 알고 있었고 스스로 그 질서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울 왕이 교만하여 사무엘 선지자를 제치고 스스로 제사를 집도하려했던 일과 또 이사야 선지자 초기 때에 웃시야 왕이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를 행하다 문둥병이 든 사실들을 알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거스려 제사권에 불만을 갖고 반역한 고라와 그의 무리들을 땅으로 입을 벌려 삼키게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 땅에 교회의 틀을 세우실 때에 12지파 중 레위지파를 부르시고 특별히 아론의 자손을 거룩히 성별하여 제사장의 직무를 맡기셨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너희 중에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5:13-15)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믿는 우리가 어떤 문제에 당면할 때 기도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며, 또 교회를 위해 기름부어 세우신 목사를 청하여 중보케 하므로 주 여호와께서 교회와 함께 하심을 알게 된다. 이는 오늘날 말세지말을 살아가는 우리 교회에게 커다란 교감이 되는 말씀이다. 교회 안에는 이미 기름부음의 교권이 상실되고 세상적인 방법을 통하여 학위를 취득한 목사들이 더 힘을 얻고 있으니 말이다.
히스기야가 이처럼 주도 면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가 간구하자 하나님께서는 곧 바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답변하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풍성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 고토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다”(6,7) 전하였다. 결국 이 말씀은 37,38절에서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의로운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조금도 늦지 않게 그에 맞는 해결 방법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여 조금도 늦거나 부족함이 없다.
B. 앗수르 왕 산헤립의 편지(8-29)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공격’
8절에는 랍사게가 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떠났다는 말을 듣고 돌아가다가 립나에서 접전을 하고 있는 산헤립을 만났다고 기록되었다. 유다를 정벌하러 왔던 랍사게가 갑자기 회군을 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9절의 내용으로 보아 립나는 가나안의 한 성읍으로 애굽으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산헤립은 애굽을 치기 위해 먼저 립나를 정복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풍문에 구스 왕 디르하가가 나와서 싸울 것이라는 말을 듣고 유다 공격은 뒤로 미루고 유다보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는 애굽을 쳐야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구스 왕 디르하가는 구스의 3대 왕이자 마지막 왕으로 애굽의 25왕조를 일으킨 자이다. 그는 앗수르의 세력을 막기 위해 유다와 동맹을 맺고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결국 앗수르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전쟁으로 하여 막대한 전력을 상실한 앗수르는 결국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지 못하고 회군을 했어야 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애굽과 전쟁을 벌이기 앞서 편지를 써 사자를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보냈다. 그는 사자들에게 너희는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고하여 이르기를 “너는 너의 의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의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앗수르 와들이 모든 나라에 어떤 일을 행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멸절시켰는지 네가 들었으니 네가 건짐을 얻겠느냐 나의 열조가 멸하신 열방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및 들라살에 거하는 에던 자손을 그 나라 신들이 건졌더냐 아맛 왕 이르밧 왕과 스발와임 성의 왕과 헤나 왕과 이와 왕이 어디 있느냐”(10-13) 전하였다.
여기서 고산은 유브라데스 강 상류지역으로 이곳에 후일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 시킨 곳이며 하란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리를 떠날 때 잠간 머문 지역으로 메소포다미아의 한 도시로서 후일 앗수르의 수도가 되었다. 또한 레셉은 유브라데스와 하맛 사이의 상업적 요충지이며 들라살은 에덴족속의 성읍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류시켰던 도시 중의 하나이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역사적 사실과 현실적 상황을 그대로 적어 유다왕 히스기야를 설복하려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믿음의 사람들을 공격하는 수단과 방법이다. 우리 믿는 자들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실 것을 믿고 있지만 그 믿음의 세계는 눈으로 보이지 않고 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현실적 정보를 글로 보게 되면 이는 말로 듣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이 된다.
앞으로 히스기야 왕은 바벨론 왕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는데 결국 그는 그 글에 넋을 잃고 가슴을 열어 다 내어 주고 만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이 잘못된 이단사설로 하여 넘어지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 젊은이나 장년이나 시크릿이란 글을 읽은 사람은 부지기수이다. 믿는 자들도 그 책을 읽고 공감을 가지며 워커북까지 만들어 그 삶에 적용코자 하고 있다. 또 오늘날 젊은이들이 북한의 좌파적 사상에 넘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처음에는 말로 듣지만 그들의 불온문서를 탐독한 후에는 골수분자가 되고 만다.
어디 그뿐인가? 통일교의 원리강전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의 파수대, 신천지 이만희 교주의 무료 신학원 이 모든 곳에서 쏟아져 나온 불의한 원리들이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여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이 편지를 받아 들고 곧 여호와의 전에 펼쳐 놓고 하나님과 대화를 시도하였다. 이는 이 역사적 사실과 현실적 상황 앞에 있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먼저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라고 칭하였다. 이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주소인 것이다. 그룹 사이에 계시다는 것은 천사들을 호위하시는 하나님을 뜻하며 그 분은 이스라엘의 삼위 하나님으로서 모든 통치권세 중의 우두머리이시며 구속자라 한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하였다. 이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천하만국의 유일하신 성부 성자 성령의 신이며 그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조물주이심을 알고 있었다.
히스기야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아무리 앗수르 왕이 고대의 역사로부터 그 세력을 떨치고 또 현실적으로 커다란 세력과 권세를 갖고 세상을 제압한다고 해도 히스기야가 믿는 하나님은 천하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모든 세상을 창조하신 분임을 고백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때 우리는 그 어떤 환경, 그 어떤 문제라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자신을 갖게 된다. 이것이 사실 믿음인 것이다.
계속하여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향하여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자를 보내어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17) 하였다. 이는 현실에 당면한 사실을 그대로 상황 보고를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할 때 깨우쳐야 기도의 방법이다.
물론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잠들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신이시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인격을 무시하여 임으로 모든 것을 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귀와 눈과 지각을 통하여 현실을 직시하고 또 우리의 구속자 되신 주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우리의 정확한 상황을 고하게 하여 그러한 온전한 대화를 통하여 교제를 갖고 싶어하신다.
만약 당신의 아들이 어떤 문제가 있는대로 당신을 뒷전으로 하고 다른 사람들과 의논하고 또 자신의 지혜로 모든 것을 처리하려 한다면 당신은 소외감을 느낄 것이고 또 그 아들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지만 주를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의 인격을 가진 우리가 주께 모든 것을 상세리 고하기를 기다리시고 계신다.
히스기야 왕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과연 열국과 그 땅을 황폐케 하였고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이들은 참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19) 고하였다. 이는 앗수르 왕이 강한 세력을 가진 것을 인정하며 그들에게 멸망을 당한 나라들은 모두 하나님이 아닌 돌과 나무로 만든 우상을 믿었기 때문에 그 우상이 그들을 구할 수 없었던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주께 고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 알게 하소서”(20)기도하였다. 참으로 히스기야 왕의 믿음은 위대하기 그지없다. 풍전등화의 현실 앞에서도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여 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서 우리의 기도도 이제 그 방향을 바꿀 때가 되었다. 이는 믿는 자들의 모든 전쟁이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세력 곧 정사와 권세들과 어둠의 세력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들의 전쟁이므로 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징징거리며 제발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내가 어떻게 하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도 않고 더 이상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울부짖는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구원의 응답을 받은 일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된 일이 있었는가? 모두가 개인의 목적과 영광을 위한 기도뿐이다.
히스기야의 합리적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하시고 앗수르 왕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다.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해 머리를 흔들었다 네가 훼방하고 능욕한 것은 누구이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니라”(22,23) 하셨다.
여기서 처녀 딸 시온 딸 예루살렘이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된 신부를 뜻한다. 곧 하나님을 향하여 그 마음과 몸을 버린바 없는 처녀의 순결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주 앞에 온전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주는 우리를 그의 처녀 딸처럼 귀히 여겨 세상으로 인하여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그들에게 ‘어찌 너희가 이 모든 일들을 태초부터 행하고 상고부터 정한 것을 듣지 못하였겠느냐 이제 내가 너로 견고한 성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으므로 그 거민들이 들의 풀같이 푸른 나물같이 지붕의 풀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았었다”(25) 하였다. 이는 너희가 멸망시킨 모든 나라들도 만군의 여호와 되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인데 너희가 너희 힘으로 된 것인 것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 하신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네가 나를 거스려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자갈을 네 입에 먹여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 하셨다”(29) 이는 모두 히스기야 왕에게 답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가 하시려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의 종에게 숨기시지 않는다. 이제 그가 할 일은 오직 주께 감사하고 모든 일에 주를 신뢰하는 것뿐이다.
C. 여호와의 징조(30-32)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이와 함께 이사야는 특별한 말씀을 히스기야에게 전하여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이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30) 하였다.
나는 이 말씀만 읽게되면 힘이 솟게 된다. 사실 이 말씀은 내가 일본에서 갈보리채플 사역자가 되어 한국에 돌아 교회를 개척하고 있을 때 서울에 오셨던 척 스미스 목사님께서 내게 전하신 말씀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씀을 들으며 나도 삼년 동안 참고 잘 견디면 미국의 갈보리채플처럼 부흥할 수 있을 것이라 내심 기뻐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삼년이 3번이나 지나갔으며 아직도 나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고 있다.
이 말씀은 앞으로 전개된 히스기야 왕 곧 유다의 형편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앗수르는 주께서 말씀을 하신대로 멸망을 당할 것이지만 유다는 금년에도 아무것도 심지 못하고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것이고 이년에도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라 하셨으므로 다음해에도 형편은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나 다만 먹고 사는데는 지장을 없을 것이라 하신 것이다. 이는 곧 목숨은 붙어 있을 것을 뜻한 것이다. 그리고 삼년이 되면 심고 거두고 또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는다 하셨음으로 그때가 되어야 복음생활을 하게 될 것이란 뜻이다.
나는 여기서 금년과 이년과 삼년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햇수로 삼년을 말씀하신 것 같지는 않다. 26절에서 수천년 동안 앗수르의 세력 속에 멸망당한 나라의 일들이 태초부터 행하시고 상고부터 정한 것이라 하셨기 때문에 어쩌면 이 일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때를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은 아직 심고 거두고 포도나무를 먹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믿음의 열매를 먹지 못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먹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삼년이 되는해 곧 정해진 마지막 해에는 주의 말씀대로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등분 중 마지막이 축복된 것은 나중이 잘못된 것보다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계속하여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여 남는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히리니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31,32a) 전하였다. 여기서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는 자란 누구인가? 이는 메시야의 언약을 믿고 기다리는 자들을 뜻한다. 성경이 유다 지파에서 실로가 올 것을 예언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란 무슨 말인가? 이는 남는 자들은 교회를 통하여 나타날 것이며 교회의 환난 중에서도 피하여 자가 시온의 영광을 입을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사야는 끝으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실 것이라”(32b)전하였다. 만군의 여호와란 의미는 이 세상을 전체를 구속하실 주 하나님을 뜻한다. 그분이 세상의 모든 것을 운행하시고 통치하시며 그의 계획을 성취하실 것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계시록 기자는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4:11) 기록하였다.
그렇다 오늘 우리는 주께서 히스기야 왕에게 전하신 말씀을 통해서 무거운 역사를 짊어지고 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담대한 믿음으로 참고 이기는 자에게 거룩하신 자의 형상이 임할 것이라. 아멘 아멘 주여 내가 이제도 남아 주의 말씀을 듣겠나이다. 나로 더욱 거룩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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