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이사야강해

(이사야 43장-44장) “야곱을 향한 메시지”

이요나 2009. 4. 11. 12:48

(이사야 43-44) “야곱의 책무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43장과 44장은 고난 중의 이스라엘에게 큰 위로가 되는 메시지이다. 이는 이사야를 통하여 미리하신 말씀이지만 후일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 이 메시지는 그들에게 커다란 위로의  말씀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택하신 제자들에게 후일에 있을 여러가지 일들을 말씀하시며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4:29) 하셨다.

 

I. 영광의 이름 여호와 (이사야 43)

너는 나로 기억이 나게 하고 서로 변론하자 너는 네 일을 말하여 의를 나타내라”(26)

 

A.   택한 백성에 대한 격려의 말씀

하나님은 서두에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1) 말씀하셨다. 여기서 이제 말씀하시니라는 매우 흥미롭다. 듣는 이에 따라서는 그 말씀을 읽을 때가 이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이라 칭하시고 뒤에서 이스라엘이라 칭한 것을 볼 수 있다. 야곱은 이스라엘을 뜻하지만 그 어원을 살필 때 이삭의 아들 에서의 쌍둥이 동생이다. 또한 이스라엘이란 이름도 그의 이름으로 그가 바란에서 아비의 집으로 귀환하려 할 때 얍복강을 건너기 전 형 에서의 군대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천사를 만나 씨름을 하고 승리한 후 얻은 이름이다. 따라서 야곱과 이스라엘의 이름은 동일한 한 사람의 이름이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매우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야곱은 사기꾼이며 이스라엘은 승리자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의 아들 야곱을 말하여 창조하셨다 하신 것은 그가 태어남으로부터 죄의 속성을 가진 전형적인 죄의 사람이었음을 뜻하신 것이며 또 이스라엘을 조성하셨다 하신 것은 그를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 앞에서 주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셨을 뜻한다. 나는 이 말씀을 들으며 과거 희진으로 불리던 옛 사람을 기억하며 참으로 아픈 세월을 살았음을 회상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제 요나의 이름으로 살고 있으니 정말 감사할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하나님은 그 백성을 향하여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하셨다. 여기서 구속이란 히브리어 가알은 어떤 대상을 대신 희생시킨 것 곧 대속을 뜻한 것이로 하나님은 3절에서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속량물로 삼으셨다 하셨다. 또한 지명하여 불렀다는 말씀은 사명적 선택을 말씀하신 것이며, ‘너는 내 것이라하신 것은 소유권을 명시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세상 가운데서 보호하신 방법을 말씀하여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함께 하시고 불 가운데 행할 때에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할 것이라’(3) 하셨다. 사실 이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그들을 건져 내실 때에 홍해에서 함께 하셨고 또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불 속에 던져졌을 때 그들과 함께 하셨다.

 

주께서 그들을 이처럼 존귀하고 보배롭게 여기신 것은 그 택하신 백성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일 바울은 자신이 괴수 중에 괴수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도로 세우신 것은 오직 그의 사랑에 근거하신 것이라 증거하였다(1:15).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 또한 우리가 과거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 왔던지 간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구속된 우리는 그의 보배이며, 존귀하여 그의 사랑하는 자들인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세상 가운데 흩어진 그의 백성을 향하여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으실 것이며 내가 북방에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 이르기를 구로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끝에서 오게 하라’(6,7) 하셨다. 사실 이 일들은 이스라엘의 독립(1948. 5. 24) 으로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7절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을 향하여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하셨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사역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데 여기서 창조라는 히브리어 ‘bara’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이며 만들다는 말은 ‘asha’로서 나무로 책상을 만드는 것과 같이 구체적인 용도를 언급한 것이며 지었다라는 ‘yastar’ 영광을 성취하기 위한 특별한 과정 성화를 뜻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없다 하신 것이다.

 

B.   영적 미혹(8-13)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는 신이 없느니라”(11)

흥미롭게도 8절에는 위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되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향하여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하셨다. 이는 7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영광된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이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의 무지함과 같은 상태이다.

 

아마 상태는 바벨론 포로로 사로잡힌 이스라엘을 언급하신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포로가 것은 그들의 눈이 소경이 되고 귀가 먹은 백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행하신 수많은 이적들과 표적들을 보고도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 의뢰하였으며 의로운 백성을 살아가도록 친히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하여 주셨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선지자들을 보냈으나 그들은 그들의 말을 외면하였다. 그러하여 택한 백성이라도 열방 세력에 사로잡힘이 것이다.

 

C.   통치자 여호와(14-21)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 ”(15)

 

이제 하나님은 소경되고 귀머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어 내어 열방의 모든 나라들 앞에 증인으로 세우셨다. 또한 어느 나라가 모든 역사를 증명할 증인이 있느냐고 물으시며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다’(10) 하셨다. 여기서 증인이란 사실 노예를 뜻한다.  노예 중에서도 가장 바닥에서 사슬에 묶여 노를 짓는 노예들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에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1:8) 하셨다.

 

그러면 그들이 무엇에 대한 증인인가? 먼저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 되신 여호와이심에 대한 증인이며 그는 신이시며 하나님이신 것의 증인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시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시며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신 것이다. 이는 애굽에서 강하신 팔로 이끌어내신 일과 애굽의 군사를 물에 장사케 하신 일로서 증거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날 것이라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라’(18,19) 하셨다. 그렇다 만약 하나님이 지난 과거의 행하신 일로만 그의 권능을 말씀하신다면 다른 신들과 다를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앞에 일어날 수백년 아니 수천년 후의 일들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을 보라 로마에 멸망받은 이스라엘은 2500여년 동안 국가와 나라 없는 민족이 되어 열방 속에 핍박을 받으며 살아 왔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처럼 마른 뼈에게 생기를 명하신 이래 열방에 사로잡힌 백성들을 불러 내어 약속을 땅으로 돌아 오게 하시고 1948 514 땅에 이름 이스라엘을 회복하였다. 이는 아무도 없었던 일이며 어느 민족 중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그리고 초토화 되었던 이스라엘 땅은 광야에 길을 내고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아름다운 농경국가로 만들었다.  주께서 이처럼 이적과 표적으로 열방 중에 증인이 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지으셨고 그들로 여호와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21).

 

D.   여호와의 변론(22-28)

  나는 나를 위하여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25)

 

그러나 이스라엘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이사야는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로워하였다”(22) 증거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가 예물로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않았고 유향으로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케 아니하고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23,24) 말씀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양의 제물과 향품을 가져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은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하셨고 너희 분향은 가증히 여기는 바이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이 무거운 짐이라’(1:11-14)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온전한 가운데서의 신령한 예배를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도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드리는 제물을 거절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는 나를 위하여 허물을 도말하는 자나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25) 하시며 다시 너는 나로 기억이 나게 하고 서로 변론하자 너는 일을 말하여 의를 나타내라”(26a) 하셨다. 여기서 변론이란 변증을 위한 토론을 말한다. 이사야는 1 18절에서도 말씀을 기록하였다.

 

만약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죄를 영속하실 없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는 세상으로부터 논쟁거리가 것이다. 그들의 죄를 사할 있는 것만이 그들로 육체적 속성에서 벗어나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창조요 주께서 친히 만드시고 지으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그리스도의 날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들의 의를 위하여는 그들의 죄를 도말하여야 했고 그를 위해서는 오직 의로운 자의 대속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야만 한다. 이유는 그들의  시조가 범죄하였고 그들의 교사들이 주를 배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섬기는 성소의 어른들로 욕을 보게 하며 야곱으로 저주를 입게 하며 이스라엘로 비방거리가 되게 하셨다”(27,28). 우리는 내용을 이미 복음서에서 보고 있다.  

 

II. 종 야곱 택한 이스라엘(이사야 44)

(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

 

A.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백성 (1-8)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야곱 택한 이스라엘이라 부르셨다. 야곱이나 이스라엘이나 똑같은 유대민족을 말하지만 의미 면에서 크게 다르다. 야곱은 태성적 사람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거듭난 백성을 뜻한다. 어쩌면 말씀 속에는 사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원리가 적용되고 있는 같다.

 

계속하여 하나님은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나의 택한 여수륜아 두려워 말라’(2) 말씀하셨다. 이는 그의 택하신 자를 온전하게 만드는 과정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유는 그를 그의 영광을 위해 봉사할 종으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수룬이란 곧은 ’, ‘의로운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으로 택함을 받은 자는 그의 본성이 어떠하던지 간에 의롭고 정의로운 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일은 사람이 스스로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있는 일이다. 사람이 일은 오직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길뿐이다.

 

이제 하나님은 백성들의 필요를 충족시키실 것을 말씀하셨다. 먼저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자손에게 나의 복을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것이라’(3,4)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영혼에게 들에게 사랑을 부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는 것은 풍족하기 때문이다. 풍족함으로 육신을 만족하려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물질적 풍요로움에 취한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낯을 들지 못하느냐? 책망하셨다. 그러나 어두운 곳에 살며 평강을 얻지 못하는 영혼들은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서 기자는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며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의 발을 평간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1:79) 증거하였다.

 

하나님은 은혜가 오직 택하신 야곱 이스라엘을 통해 나타나실 것을 약속하여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5) 하였다. 오늘 우리는 택하신 야곱의 백성 이스라엘에 감사하여야 것이다. 그들에게 언약의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으나 그들은 영광의 여호와를 알지 못하여 저버렸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진리의 빛이 우리에게 임하였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빛을 보았다 하신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6)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들의 통치자이심을 증거하신 것이며 그의 통치의 권능은 신적 능력이 있음을 언급하신 것이다. 또한 이는 택하신 백성의 통치적 주권이 필요함을 뜻한다. 이를 말하여 성경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 나게 하시고 만물을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1:21,22) 기록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만군의 통치자 되신 주께서 친히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백성을 향하여  옛날 백성을 세운 이후로 일과 장차 일을 고할 자가 누구냐?” 물으셨다. 사실 이스라엘 외에 종적이 망하고 폐허가 이래 다시  이름으로 회복한 국가는 지구상에 없다. 그러나 모든 일들이 주께서 미리 하신 말씀을 따라 그의 때에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은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라 하시며 너희에게 이미 고하였으니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하셨다. 그렇다. 그의 백성들은 모두 그의 증인이다. 그가 하신 모든 말씀들이 성취된 것에 대한 증인인 것이다.

 

B.   우상의 어리석음(9-20)

이사야 선지자는 9 이후에게 우상을 만드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리얼하게 증거하였다. 먼저 그는 우상을 만드는 자들에 대하여 증거하여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9) 기록하였다. 사실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우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우상의 증인이 된다.

 

먼저 그들은 철공이나 장색이나 석공과 목수들이다. 이들은 철을 숯불에 부어 메로 치고 강한팔로 메를 쳐야 하므로 땀을 흘리고 기운이 지쳐 물을 마시고 피곤해 한다. 신을 만들기 위해 사람이 땀을 흘리고 기진맥진해 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우상들이 어떻게 능력이 있겠는가? 장인의 물건 속에는 장인의 기운과 능력이 있는 것인데 우상을 만드는 자들이 모두 인간의 생각과 지혜의 한계 속에 곤비한 자들이니 우상 또한 보잘 없는 물체일 뿐이다.

 

목공들은 우상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다가 일부로는 불을 방을 따습게 하고 일부로는 떡을 구워 먹기도 하고 일부로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고 앞에 기도하고 찬양도 한다. 중의 돌부처가 모두 그러하고 수천년 동안 절간을 지키는 부처가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에게 절을 하며 자기 소원을 발하고 그에게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원한다. 그런데 그것을 만든 일부는 고작 자기가 누울 방에 군불을 지필 뿐이요 일부로 밥을 지어 배를 불려야 한다.

 

이사야는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나무의 얼마로 불을 사르고 숯불 위에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나무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한다’(18,19) 증거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부인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의 인격의 허망됨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타고난 것이나 정신적 질병일 뿐이라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배내 병신이나 환자로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고백하기 싫어서 중한 죄를 걺어지고 다닌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들인가?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어찌 나무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며”, “미혹한 마음에 미혹되어서 스스로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한다”(20) 증거하였다.

 

C.   야곱아 기억하라(21-28)

그러나 말씀은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사람들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다. 모태에서부터 여호와께 구속을 받아 그의 택한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이다. 만약 당신의 아들 대학을 공부한 아들이 초등학교 아이들과 같은 잘못을 짓고 있다면 당신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이는 참으로 허망한 일이 아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야곱아 이스라엘아 일을 기억하라 너는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21) 하셨다. 이는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이 아닐 없다. 패역한 아들일지라도 부모는 아들을 행한 소망을 잊을 없듯이 하나님은 지으신 백성들을 잊지 않으신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을 온전케 하실 계획을 말씀하여 내가 허물을 빽빽한 구름이 사라짐 같이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 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22) 하셨다. 지금 하나님은 그들에게 장차 있을 죄사함 그리스도의 언약을 실행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미 6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는 왕이시며 만군의 신이시며 처음과 마지막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산림과 가운데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로 자기를 영화롭게 하실 것임이로다”(23) 증거하였다. 이는 아직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구속자되신 아들 예수께서 오셨지만 아직 모든 만물이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일은 그리스도의 날에 이루어질 마지막 때의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피조물도 그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증거한 것이다.

 

이제 그의 나타나심으로부터 하나님은 일을 하실 것이다. 먼저 거짓말하는 자의 징조를 폐하며 점치는 자를 미치게 하며 지혜로운 자들을 물리쳐 지식을 어리석게 하며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사자의 모략을 성취할 것이라 하셨다. 이미 일들은 우리 중에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문명은 날로 발달하고 있는 것같지만 인류의 평화와 평강을 위한 지혜는 날로 퇴보하고 있다.

 

계속하여 이사야는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증건될 것이라 내가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26) 증거 하였다. 물론 말씀은 70 바벨론 포로생활 다음에 이루어질 말씀이다. 아직 그들은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나 일을 당하면 여호와의 위로를 받게 것이다.

 

 이사야는 계속하여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고레스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28) 증거하였다.

 

이는 실로 놀라운 말씀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글을 때는 아직 예루살렘이 멸망 당하지도 않았다. 이는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모두 포로가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받았을 뿐이다. 더욱이 여기서 언급된 고레스 왕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조의 역사가 끝난 바벨론 70 포로생활 이후, 바벨론이 멸망을 당한 후에 에스라서에 기록된 이름이다. 그러므로 글이 B.C.710 경에 기록되었다고 바사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멸망 시킨 때는 B.C. 539년이므로 그때부터 계산해도 175 전의 일이고, 사실은 고레스가 태어나기 210 전에 주어진 명령이다. 

 

아마 이사야 선지자도 예언의 말씀을 기록하면서도 의미를 깨닫지 못하여 어리둥절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목자로 삼으신다 하셨으므로 자기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바벨론 포로시대의 유대인들은 글을 보았을 어떠했을까? 그들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고레스가 나타나기를 고대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시대를 따라 증거되며 증인들을 삼아 가시는 것이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휴거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지만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속에서 말씀이 성취될 자신이 말씀의 증인됨을 스스로 증거할 것이다. 이것이 모태로부터 택함을 받은 그의 종들이 해야 복음의 책임인 것이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귀한 복음의 시대에 살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그러나 이제도 아직 주께서 이루실 일들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주의 말씀이 있사오니 주여 부디 우리의 입을 열어 담대히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소서. 나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것을 내가 믿나이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