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8-39장) ‘믿음의 모순과 하나님의 말씀’
(사39: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의 이른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또 가로되 나의 생전에는 평안함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38장과 39장은 매우 흥미로운 일들이 기록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의 생명을 친히 주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하나님의 능력은 우주와 이 땅에 설정된 질서의 틀까지도 무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39장에서 한 순간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히스시야 왕의 믿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우리에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믿음의 모순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뛰어야 벼룩이고 날아야 팔짝 일 수 밖에 없는 새대가리 같은 인생! 인간의 한계는 너무 좁다.
I. 히스기야 왕의 믿음 (이사야 38장)
(사38:5,6)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A. 히스기야의 운명(1-8)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37)
이사야는 서두에서 히스기야 왕에게 죽음을 예고하며 유언을 쓰라고 전한다. 히스기야가 어떤 병에 들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역대하 32장 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을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하시자 여러 나라에서 히스기야에게 나와 예물을 드리며 그 공적을 치하하므로 히스기야가 열국의 눈에 존대하게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히스기야 왕이 교만한 마음에 빠졌지 않았을까 싶다. 이처럼 인간은 한치 앞을 내다 보지 못하는 모순 덩어리 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의 어떤 징계가 우리 삶에 미쳤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이냐는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미 죄성 속에 자기 인생을 주관하지 못하는 인생을 긍휼히 생각하시고 주 앞에 회개하여 겸손해진 그의 백성을 간과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사야로부터 사망통보를 받은 히스기야는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여기서 얼굴을 벽에 향했다는 것은 모든 인생사와 사물에 관심을 끊고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께 향했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도 생활 속에서 많은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삶의 환경으로 인해 방해를 받게 된다. 사람들의 방문, 전화소리 해야할 일들.. 그러나 히스기야는 왕으로서의 모든 직무를 내려 놓고 오직 여호와를 향하여 몸과 마음을 올인하였다. 그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있고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합당하게 받으시는 산제사로 드려라 하였다.
히스기야는 기도하여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여 주의 목적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3)하고 심히 통곡하였다. 나는 이 글을 보며 정말 히스기야 왕은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였구나 생각되었다. 누가 하나님의 징계 속에서 감히 자신의 온전한 마음과 믿음의 행실을 논할 수 있는가 말이다. 정말 누구라도 히스기야 왕처럼 당당하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다면 그는 정말 의인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다.
하나님은 이 짧은 히스기야의 말을 들으시고 바로 이사야에게 말하여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년을 더하고 노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 내겠고 내가 또 이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하신 말씀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이미 하나님은 다윗과 마음을 합한자라 하셨고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신의 길을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같이 내 율법대로 행하기만 하면 네게로 좇아 나서 이스라엘 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대하6:16) 약속하셨다.
이는 우리의 믿음의 주권이 하나님과 그 위임자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시사하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며 우리의 스승이 되시어 믿음의 본이 되심과 같다.
이사야는 계속하여 “나 여호와가 말한 것을 네게 이를 증거로 이 징조를 네게 주리라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8) 전하였다. 이는 해 그림자까지도 뒤로 물릴 수 있는 여호와의 권세와 권능을 뜻한다. 과거 여호수아의 때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서한 여호수와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기브온 족속을 침략한 가나안 족속을 여호수아를 위하여 그들이 멸하기까지 태양이 멈추게 하신 일이 있었다. 이러한 성경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권세가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이 믿음의 증거는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이라 믿는다.
B. 히스기야의 회심과 기도(9-16)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사오니 내가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내 영혼의 고통을 인하여 내가 종신토록 각근히 행하리이다”(15)
이사야 선지자는 여기서 시간을 할애하여 히스기야 왕이 병에서 나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소개하여 “내가 말하기를 내가 중년에 음부의 문에 들어가고 여년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다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생존 세계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뵙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10,1) 기록하였다.
이 기도 속에서 우리는 사람의 사후에 대한 일들을 알 수 있는데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은 믿음의 사람임에도 죽어 음부에 내려 갈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음부란 신약에서는 지옥을 뜻하며 이곳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가 심판 때까지 대기하여야 할 하데스에 해당한다.
여기서 과연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왕이 음부로 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이 답은 우리가 누가복음 16장에서 얻게 된다. 주님은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하며 부자는 죽어 음부로 내려가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음을 언급하셨다. 그 곳의 사람들은 서로의 위치를 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나 큰 구렁이 있어 건너 다닐 수 없다 하셨고, 부자가 자기 부모 형제들을 그곳에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사로를 보내 달라고 청하였으나 산 사람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구약에 있어서는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해도 여호와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여호와 앞에 득죄 하였다면 그 영혼은 음부로 내려 갈 것이고 선한 일을 하였다면 열조를 따라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 주의 날까지 쉬게 될 것이다. 따라서 히스기야는 지금 자신이 열조를 따라 들어 가지 못할만한 죄를 지었던 것이 확실하다. 또한 우리는 세계에서는 여호와를 뵙지 못하고 세상 거민 중 한 사람도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이 사람이 죽어 저승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 영혼이 중천을 떠돌며 그 자손들의 앞길을 막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처한 죽음에 대하여 증거하여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같이 나를 떠나 옮겼고 내가 내 생명을 말기를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같이 하였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나의 명이 조석간에 미치리이다”(12) 하였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는 내가 내 생명을 말기를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과 같다 하였다. 이는 사람이 자기 생명이 거두어짐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큰 공포인가? 졸지에 잠드는 것 같아도 그 숨이 멎어지는 순간들을 감지할 수 있다니 이는 더 말할 수 없는 공포일 것이다.
또한 그는 “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으나 주께서 사자같이 나의 모든 뼈를 꺾으시오니 나의 명이 조석간에 마치리이다”(13) 하였다. 이는 인간이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없음과 우리의 생명이 주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뜻한다. 더욱이 사자같이 모든 뼈를 꺾으신다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가? 이는 죽어가는 육체의 고통을 말한 것이다.
계속하여 그는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14) 울부짖었다. 생명이 거두어지는 그 고통이 얼마나 컸기에 사람의 울음소리를 내지 못하고 제비같이 학같이 비둘기같이 울었을까? 아직은 나는 그 통증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최근 과거 오랜 세월 동안 동성애자 생활을 하며 일생을 여장을 하며 유흥하던 한 사람을 보고 있다. 그는 나와 함께 한 세월을 함께 이태원을 풍미하던 사람으로 나이 70에 가까운 노인이 되었다. 그는 칠팔년 전 육십의 나이에도 일본의 게이바에 돈을벌러 가기 위해 고질병이던 디스크 수술을 하였지만 잘못되어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나는 몇 년전 그 소식을 접하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재수술을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더 악화되어 오랜 세월 약물 치료로 인한 거부증세가 나타나 지금은 음식은 물론 약조차 넘기지 못하고 24시간 잠을 자지도 못한 체 그 통증을 겪고 있다. 그것은 차라리 죽음보다도 못한 투병이다. 그는 주께서 그의 목숨을 걷어가 달라고 애원을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주님은 그 목숨을 부지시킨 채 그는 뼈를 꺾는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다. 아마 그는 사자가 뼈를 꺾는다는 히스기야의 고통을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새처럼 가는 울음을 토하고 있다.
이러한 고통에 이른 히스기야는 여호와께 중보를 요청한다. 그는 그때서야 생명의 압제자를 발견한 것이다. 그 압제자는 인간의 죄를 먹고 사는 생명의 도말자 사단인 것이다. 히스기야는 주께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아오니 내가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내 영혼의 고통을 인하여 내가 종신토록 각근히 행하리이다”(15) 하였다. 이 말씀은 인생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이미 주께서 다 말씀하셨고 또 그 말씀을 친히 이루어 가시므로 사망 앞에 겪는 고통을 면키 위해 남은 인생을 조심하며 살겠다는 맹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여 사람이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 있사오니 원컨데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16) 하였다. 여기서 히스기야는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 죄인의 고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죄에서 놓임을 받아 주 앞에 온전히 살 때만이 그의 영혼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처럼 히스기야는 죄의 고통 중에서 주 여호와의 말씀을 깨닫고 그의 병이 죄로말미암은 것을 토로한 것이다.
C. 믿음의 본(17-22)
“오직 산자 곧 산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19)
이제 히스기야는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17) 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주신 고통이 자기 영혼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로하여 죄 중에 죽지 않아서 영영한 사망의 고통에서 구원하시고자 중보자를 보내셨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 있게 “음부가 주께 사례치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18,19) 하였다. 지금 히스기야는 꺼져가는 자신의 한줄기 목숨을 놓고 여호와 앞에 마지막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곧 이 말은 자기에게 주 여호와께 사례하고 주를 찬양할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그 자녀에게 알게 하겠다고 서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믿음을 지켜 온 히스기야 왕이라도 그의 삶이 그 백성들에게 모델이 되지 못하고 그의 행한 바 마지막 열매가 여호와께 영광이 되지 못하면 그것이 주 앞에 죄인 것을 안 것이다. 물론 그가 자신할 정도로 주 앞에서 신실하고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하였다 하여도 주께서 원하신 것은 그의 믿음의 인격이 그 백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느냐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사람이 평생 주 앞에서 사명과 열심을 다하여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였다고 하자 그러나 그의 사생활에서 주의 의를 나타내지 못하고 자기의 영광과 부귀를 누리는 삶을 살았다고 하자 그는 주께서 맡기신 일을 다 행하였다 해도 그의 공적은 결국 불에 타 버릴 것이다.
바울은 이를 말하여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5) 하였으며 또 기록되었으되 ‘저가 남은 구원하고 자신은 버림을 받았도다’ 하였다. 그러니 오늘 히스기야의 기도는 우리에게 주께서 세우신 믿음의 종들이 그 삶의 마지막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일깨우는 메시지이다.
이제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의 삶이 주 앞에 어떠해야 할 것임을 깨달아 그 삶이 주 여호와의 영광이 되기를 소망하며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하리라”(20) 고백하였다. 이를 통하여 주의 종된 우리는 주의 사명을 명분에 매달려 행위에는 충실하나 자신의 삶에서 온전한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여 주의 백성들에게 본이 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히스기야의 깨달음에 동참하여야 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사야는 마지막 절에서 “히스기야도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뇨 하였었더라”(22)고 기록하였다. 이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실 이 내용은 38장 6절 다음에 나와야 하는 말이다. 주께서 그가 삼일 안에 성전에 다시 올라가겠고 수명을 연장하리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역사서에는 이 내용이 본문 중에 기록되었고 그에 대해 주신 하나님의 징조가 서술 되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이 내용을 히스기야의 기도 뒤에 붙여 ‘히스기야도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냐 하였었더라’라고 과거형으로 언급해 놓았다. 같은 내용이지만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 징조로 히스기야는 15년 생명을 연장 받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미 그 대답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오늘 성경은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종교활동에 빠져 있는 당신에게 거룩한 삶의 모델을 요구하고 있다. (요나야 알겄냐?)
II. 믿음의 모순 (아사야39장)
(사38:19)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A. 바벨론 왕의 글과 예물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다. 성경은 믿음의 결국은 혼의 구원이라 하였다. 이 말은 믿음은 숨 넘어 갈 때 있다는 말과 같다. 한 세상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며 수많은 이적들을 체험하고 은혜 가운데서 큰 일들을 하였다면 그는 정말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그 믿음의 종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다.
오늘 우리는 39장에서 그러한 내용을 보게 되는데 이는 종말의 때를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메시지이기도 하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동안 쌓아 온 믿음의 선행으로써 긍휼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 15년의 생명을 연장 받았다. 사실 성경에서 이처럼 큰 은혜를 입은 사람도 없다. 이스라엘을 구원한 지도자 모세도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지 못한 것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는데 비록 15년이지만 생명을 연장받았다는 것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는 15년을 더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 영혼의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가 하나님의 자비로 병에서 나았을 때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 왕이 병 들었다 나았다 함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글과 예물을 보내 왔다. 여기서도 히스기야는 이방인으로부터 또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는데 이 편지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글과는 다르다. 이 글은 히스기야의 업적과 능력과 그의 온전한 믿음을 칭송하는 편지인 것이다.
B. 히스기야 왕의 교만
자기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그 기쁜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 사자에게 궁중의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궁중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모두 보여 주었다. 아마 비밀지도까지도 보여 주었을지 모른다
처음 앗수르 왕의 편지를 받았을 때에는 그 편지를 들고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펴 놓고 사시는 하나님께 그 사정을 고하였다. 또 여호와께서 목숨을 거두시겠다는 말을 듣고는 면벽하여 주 여호와의 자비를 구하였다. 그로서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듣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그런데 태평세월에 이르러 이방의 왕이 자기의 업적을 칭송하는 글과 함께 예물을 보내자 헤벌래하여 간과 쓸개를 모두 내 주고 만 것이다.
C.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책망
이때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에게 나아와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히스기야가 “그들은 원방 곧 바벨론에서 왔다” 답하니 이사야가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되물었다. 히스기야는 “그들이 내 궁중에 있는 것을 다 보았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다” 답하였다.
그러자 이사야 선지자는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5,6) 하였고 다시 “또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도리라”(7) 전하였다.
이 일은 그의 자손들에게서 그대로 성취된다. 물론 이 일들은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 미리 말씀하신 일들이다. 물론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70년간 포로가 될 것은 바꿀 수 없는 이스라엘의 예정된 운명이었다. 그러나 유다의 믿음의 왕 히스기야로 말미암아 이 역사가 성취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다.
C. 성경에 대한 히스기야의 깨우침
히스기야 왕이 바벨론 사자에게 왕궁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다고 그들에게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해가 않된다. 그러나 이는 히스기야 왕의 경솔함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자세를 물으신 것이다. 사실 히스기야의 병의 나음과 앗수르를 물리친 일에 대하여는 히스시야 왕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바벨론 왕의 편지와 예물을 받고 우쭐하여 그 모든 것이 자기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인 양 자랑을 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교만할 때가 있다. 죽을 고비를 만나면 코가 납작하여 주 앞에 콧물 눈물 흘리며 안달복달하다가도 그 문제가 해결되면 내가 언제 그랬었느냐는 듯이 주변에 자랑하고 으쓱대기 시작한다. 이처럼 인간은 교만투성이고 새대가리처럼 자기 처신을 잊어버린다.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히스기야는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또 가로되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였다. 이 답변 또한 참으로 흥미롭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답변이다.
여기서 히스기야가 답한 “여호와 의 말씀이 좋습니다”라고 한 것은 이사야가 전한 예언이 좋다는 말은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므로 그대로 성취 될 것이며 그의 뜻을 충분히 납득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말한 것은 이제 주의 말씀으로 책망을 받고 깨달았으니 내 생전 동안에는 말씀을 따라 후세에게 믿음의 본이 된 생활을 하겠습니다 라고 고백한 것이다.
우리가 한 평생 평안과 견고함을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이는 오직 주 여호와의 말씀 가운데 그 말씀을 지키며 그의 뜻을 깨달아 주께 영광을 돌리는 길일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에는 예수께서 돌아 가실 때가 가까우신 줄을 아시고 그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며 내가 너의 주인과 스승으로 본을 보였으니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하셨다. 이는 주께서 그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방법인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 세속에 물들지 않고 악에서 보전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기도하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요17:17)하셨다. 그렇다 우리의 삶 속에서 많은 믿음으로 많은 이적과 은혜를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말씀 안에서 진리를 깨달아 그 온전한 믿음의 본이 되는 것이다. 히스기야 왕은 이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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