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이사야강해

(이사야40장) “복음의 시대”

이요나 2009. 4. 11. 12:54

(이사야40) “복음의 시대

 

(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리라 하라

 

지금까지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계획들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그러나 야곱의 속성을 벗어버리지 못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그 죄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깊은 수렁 가운데로 들어 갔다. 이는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굴욕의 세월이며 수천년 동안 세상을 지배해온 악한 영들의 승리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을 받은 아담이 단 한 순간에 그 권세를 뱀에게 내어 준 것 같이 아브라함의 믿음 가운데 부르신 야곱의 영광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제 그들은 주께서 정하신 때, 그 날이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호흡을 지키고 살아야 했다.

 

I. 선지를 위임하신 목적(1-11)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여 그것에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2)

 

A.   예루살렘에 외쳐라

그러나 이제 이사야 선지자는 세기를 뛰어 넘어 이 땅에 펼쳐질 새 시대를 선포하고 있다. 한계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이 몇 년도 아니고 세기를 뛰어 넘어 영원에 이르는 시간을 바라 본다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다. 앞 날을 안다는 것은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평안을 예비하는 지혜이며 지혜자의 마음을 깨닫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이사야 선지자는 서두에서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인가? 이들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없었던 새로운 존재들이다. 이들은 혈통과 사람의 뜻을 떠나 창조자의 지혜로 부르심을 받은 복음의 일꾼들이다. 그들에게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명하고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의 백성이었으며 그들은 내어 버릴 수 없는 초시의 짝이었던 것이다.

 

주님은 복음의 일군들에게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여 그것에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2) 고 명하셨다. 여기서 정다이’(히 카라 엘) 란 사랑을 호소하는 표현이다. 또한 복역의 때가 끝났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바벨론의 70년 포로생활을 뜻한 것으로 그것은 그들의 죄의 값이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 배나 받았다고 하셨다. 이는 그들의 죄의 막중함 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엄중함을 언급하신 것이다.

 

오늘날 크리스챤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죄에 대한 오해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믿는 자가 죄를 지으면 그 죄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 따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12:36,37)말씀하셨고, 바울도 말하여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5:10) 경계하였다.

 

B.   광야에 외치라

주님은 새 시대를 열고 보내실 종들을 향하여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하셨다. 이는 그들의 인격을 언급하신 것이다. 세례 요한도 이 말씀을 따라 나는 이사야가 말한 바와 같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 증거하였다. 이는 오늘날 복음의 일군된 우리에게 커다란 경계의 메시지이다. 만약 누가 주의 택하심을 받아 보내심을 받았다면 그는 자신의 인격이 아닌 오직 보내신 자의 대언자라야 한다. 그가 누구든지 오직 말씀의 선포자가 되어야 한다.

 

외치는 자의 사명지는 광야이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열어야 한다. 복음서 기자는 이를 인용하여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하라”(1:3) 기록하였다. 여기서 광야란 이스라엘의 땅과 다르다. 이스라엘의 땅은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주신 안식의 땅이다. 그러나 광야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세상을 뜻한다. 이 곳은 황막한 짐승들의 거처인 것이다.

 

주님은 광야에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하셨고 다시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하셨다. 이는 정말 쉽지 않은 길이다. 광야와 사막은 모두 사람이 살기에 합당치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은 모두 광야와 사막에서 고생의 떡을 먹으며 고생의 물을 마시고 살고 있다.

 

계속하여 주님은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4)라고 하셨다. 이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신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 택하신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지만 이제는 이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공평하신 사랑을 나타내실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광야와 사막에 살던 모든 사람들도 실상은 복역의 때가 끝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통의 세월 속에서 그의 판단을 배나 받은 것이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 중 두 종류의 사람들을 본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의 사람답지 않게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사랑은 공평하게 역사하고 계심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들이 죄악의 세상에서 갈급함을 견지지 못하고 주께 돌아 오는 것이며, 또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욕심대로 살던 사람들이 종국에는 허기지고 지친 몸을 이끌고 주 앞에 돌아 오는 것이다. 이는 모든 만물이 주의 뜻 가운데 지음을 받았고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5) 증거하였다. 이는 이 땅에 나타나실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한 것이다. 이에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증거하였다.

 

C.   무엇을 외칠 것인가?

이제 주님은 그의 종들에게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6a)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며 과연 오늘날 복음의 종된 우리는 과연 말하는 자의 소리인가 생각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말하는 자의 소리였다면 우리의 외침은 우리의 말이 되어서는 않된다. 우리는 오직 말하는 자의 소리에 해당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내 인격이 아닌 오직 주 여호와 말씀의 인격이어야 한다.

 

이사야는 그의 말씀에 대하여 내가 무엇을 외치리이까?” 하고 되물었다. 이는 매우 기이한 일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그들의 죄와 그들의 심판과 그들의 장래를 예언하던 이사야가 갑자기 그가 외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대가 바뀌었고 그 대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율법의 시대는 율법을 근거로 그 백성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으나 이제 광야와 사막에 거한 자들은 율법을 모르는 짐승과 같은 죄 속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이사야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무엇을 외쳐야 할 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주님은 그에게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7-9) 말씀하셨다. 이는 세상 가운데 모든 인생의 허망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하던 어떻게 살던 그 인생이 마치 풀과 들의 꽃과 같아서 아무 의미없는 인생이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원래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그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죄 속에 사는 인생은 그 존재의 가치가 허망하고 무익하여 마르고 시들어 버리는 풀과 같이 되어 버렸다. 그들이 호흡을 하나 그 호흡은 수에 그칠 뿐이요 그들이 말을 하나 그들의 말은 모두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시들과 지는 그 운명이 모두 하나님의 장중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D. 복음 전도자의 비전

주님은 이제 복음을 전한 사명자들을 향하여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9) 명하셨다. 이 메시지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이 메시지가 예루살렘과 유다에 국한 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예루살렘에서 시작 될 대망의 교회시대를 언급한 것이다. 예수께서도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에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다.

 

주는 먼저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하셨다. 여기서 아름다운 소식이란 말할 것도 없이 기쁜 소식 곧 구원의 메시지 복음이다. 여기서 시온이란 주께서 임재하신 곳을 뜻하므로 이는 그의 뜻 가운데 있는 믿는 자들을 의미한다. 또한 높은 산에 오르라는 말씀은 그들의 이상과 비전을 언급하신 것이다. 높은 산에 올라야만 모든 것을 함께 볼 수 있고 큰 그림을 볼 수 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은 눈 앞에 있는 그림만을 보고 큰 그림을 놓치고 있다. 마치 큰 교회를 짓고 전도에 힘쓰는 것만이 주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목수이셨음에도 교회 건물을 한 채도 짓지 않으셨으며, 또한 하루에 삼천명씩 더하던 예루살렘 교회도 모두 가정 가운데 있었다. 그러므로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에 오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비전을 말씀하신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그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 높혀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9b)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전쟁이 그 종들 가운데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사도의 시대에도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교에 의해 많은 논쟁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를 힘썼고 사도들은 오직 아름다운 복음을 전하기에 힘썼다. 지금도 나는 이 메시지는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주 여호와의 백성들을 위하여 힘써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것이다.

 

E. 교회의 권능

계속하여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강한팔로 다스릴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10,11) 하셨다.

 

이미 우리는 주께서 임하셨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 메시지를 700여 년 전에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시대를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지금도 그를 믿는 자들의 목자가 되어 그의 양무리들을 먹이시고 강한 팔로 품고 계신다. 또한 그의 날이 이르기까지 그의 양을 젖먹일 암컷들을 진리로 온전케 하신다. 지금 우리는 이 능력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이 땅에 다시 오실 그의 약속이다. 그날에는 우리가 모두 눈으로 그를 보고 친히 그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II. 복음 전도자의 지식 (12-26)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17)

 

A.   창조자 하나님

이제 주님은 그의 부르신 종 곧 복음의 일꾼들에게 그들이 깨우쳐야 할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는 자기를 부르신 자가 누구이며 어떤 분이신 가에 자각을 위한 것이다. 만약 복음 전도자가 이 지식을 터득하지 못하면 그들의 사역은 무익하며 그들이 하는 말은 주의 음성이 아니다.

 

먼저 주님은 누가 손으로 바다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담아 보았으며 명칭들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12) 물으셨다. 이는 천지만물의 주권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아직도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창조자 되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진화론을 신봉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과연 그들은 자기의 귀여운 딸들의 노는 모습을 보며 아 너의 조상은 고릴라였단다 말할 것인가? 자기의 지혜가 미물인 원숭이로부터 출발하였다는 그 발상부터가 매우 흥미롭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혜는 원숭이에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DNA는 원숭이과에 속했기 때문이다.

 

B.   여호와의 지혜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주권자 곧 친지만물의 칭조자이신 여호와는 육체에 거하신 사람이 아니며 모든 것을 초월하신 신이신 것을 믿는다. 이사야는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13)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는 알파요 오메가이며 시작과 끝이며 처음과 나중이라 하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그로부터 말미암고 그 가운데 있으며 그의 끝이 그에게 있는 것이다.

 

계속하여 그는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14)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의 지혜는 그의 교훈과 지식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신 종들에게 교훈을 주시고 그를 아는 지식들을 가르치셨다.

 

또한 주님은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다하셨고 다시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어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17) 하셨다.

 

C.   여호와의 통치권세

주께서 구태어 이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그의 종들이 눈에 보이 않는 하나님의 신을 가볍게 여겨 눈에 보이는 열방들로 미혹될 것을 우려하심 일 것이다. 이것은 또한 육체를 가진 모든 인간의 육체된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방과 그들이 믿는 신들은 모두 우상으로 사람이 나무와 철과 돌로 만든 것들이다. 그것들은 스스로 생각하지도 말도 하지 못하는 피조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하시며 그들은 메뚜기 같으며 주께서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바람에 불려가는 초개와 같다하셨다.

 

오늘 주께서 그의 종들을 보내시며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라 하시며 구태여 이러한 말씀을 다시 언급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그들도 세상에 미혹되어 먼저 부르신 귀인들과 사사들처럼 재물에 이끌리고 열방의 신을 두려워할 여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오늘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확정하지 못한다. 이미 우리 가운데 이처럼 어리석은 자들이 태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전하며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26) 기록하였다. 

 

III.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의 능력(27-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31)

 

A.   야곱의 어리석음

이제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겼으며 원통한 것은 네 하나님에게서 수리함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27) 물으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왜 주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가?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주께 합당한 기도를 들으신다 하셨고 사람이 자기의 욕정에 이끌려 기도한 것은 듣지 아니하신다 하셨다. 그러므로 아무리 택한 자라도 야곱과 같이 육신에 이끌림을 받는 카날 크리스찬(Carnal Christian)으로 살아 간다면 그의 고통은 주 앞에 가리워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그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B.   여호와의 신

사람이 주의 택하심 가운데서도 이처럼 육신적 사람으로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면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신다”(28,29) 증거하였다.

 

이는 하나님은 영존하신 분이며 땅끝까지 창조하신 여호와는 무소부재 하시며 그의 지혜는 무한하시며 사람과 같지 않아 아무 때에라도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 소개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만나면 이런 것은 주께서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사람의 생각과 세상의 지혜를 찾는다. 이는 스스로 하나님의 능력을 축소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계속하여 이사야는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30,31) 증거하였다. 그렇다. 이는 사람의 지혜는 수에 그칠 뿐이므로 한계에 부딛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무궁무진하여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새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일군은 세상을 의지하지 말아야 하며 또 자기의 힘에 의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 전능하신 신이시기 때문이다.